불타는 학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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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dultsforadults.org/

 

 

“너 자신이 되어라”는 명령 아래 공적인 장소에서 타인의 행복을 보편적으로 다루는 역량을 잃은 주체들이 ‘너 아니면 나’ 구도에 갇혀 이른바 ‘피해자 배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상상의 주인이 된 주체는 ‘타인이 나의 쾌락(향유)을 도둑질해갔다’는 원한 감정에 빠지는데, 이는 민감한 자아들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조금도 상처받지 않도록 사회 전체를 엄숙한 ‘무균실’로 만들려는 정치적 올바름 기획으로 뒷받침된다고도 지적한다.

 

“우리의 무언가를 위해 싸워야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멍청한 정체성의 특수성이 아니라, 이 정체성을 비판적으로 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체성과 결별하는 자리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 보편성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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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문화책&생각

“정체성 정치, 공론장 무너뜨리는 사이비 정치”

등록 :2021-08-20 05:00수정 :2021-08-20 10:14

오스트리아 철학자의 저작
“신자유주의·포스트모던 기획
‘피해자 배틀’로 연대 무너뜨려
모더니즘적 평등의 정치 유효”
오스트리아 출신 철학자 로베르트 팔러. 그는 사이비 정치, 생명관리 정치, 시민들을 어린이 취급하는 정치 등에 반대하는 캠페인인 ‘성인을 위해서는 성인을’(adults for adults)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출처 로베르트 팔러 누리집
오스트리아 출신 철학자 로베르트 팔러. 그는 사이비 정치, 생명관리 정치, 시민들을 어린이 취급하는 정치 등에 반대하는 캠페인인 ‘성인을 위해서는 성인을’(adults for adults)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출처 로베르트 팔러 누리집

 

 

성인언어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 비판

로베르트 팔러 지음, 이은지 옮김 l 도서출판b l 2만원

 

주변화된 소수 집단에 집중하여 차이에 대한 존중과 다양성을 정치의 핵심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체성 정치’는 1990년대를 거치며 전세계로 확산됐다. 평등을 핵심에 놓았던 기존의 진보주의 운동이 협소한 분배의 문제에만 머물렀다는 인식이 그 배경에 있다고 지적된다. 정체성 정치는 개인 또는 집단이 그들이 속한 문화적, 인종적, 종교적, 성적 정체성에 따라 받게 되는 현실적인 차별과 불평등을 인식하고 이를 해소하는 데 집중한다.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기존의 말과 표현을 ‘순화’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핵심 동력으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 기획에 대해, 실질적인 불평등은 외면한 채 온갖 분열과 ‘피해자 배틀’만을 양산한다는 반발과 비판도 제기된다.

 

오스트리아 출신 철학자 로베르트 팔러(59)는 2017년 펴낸 저작 <성인언어>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앞세우는 정체성 정치를 “사이비(유사) 정치”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핵심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정체성 정치는 “정치적 사안보다는 성인이 온전히 자기 스스로 다룰 수 있는 것들을 취급”하며 평등의 실현에 꼭 필요한 공론장 자체를 허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이비 정치, 생명관리 정치, 시민들을 어린이로 취급하는 정치에 반대하는 유럽 지식인들의 ‘성인을 위해서는 성인을’(adults for adults) 캠페인을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책 제목을 아예 ‘성인언어’로 지은 데에서도 지은이의 비판 지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지은이는 철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이데올로기 비판 등을 폭넓게 활용해, 정체성 정치는 “신자유주의-포스트모더니즘 기획”이라고 주장한다. 서구 사회에서 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지향점은 평등에 대한 정치적 의무였고, 그 바탕에는 시민혁명의 결정적인 성과로 획득한 ‘시민성’의 원리가 있었다. 시민성이 발현되는 것은 “‘너 혹은 나’라는 원칙에 따라 구성되지는 않았으되 어떤 제3의, 문명화된 교환과 이러한 개인에 적합한 발전을 위한 일반적인 공간”, 곧 공론장이다. 간단히 말해 자아와 초자아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띄울 수 있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역할을 구분할 수 있는 역량이 공론장을 가능하게 하는 시민성의 핵심이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통찰을 빌리면, 공론장은 하나의 “연극적인 공간”이다. 공적 영역에서 우리는 마치 ‘가상의 관찰자’가 있는 것처럼 자신의 정체성과 심리상태를 잠시 억제한 채 말하고 행동한다. 여기서 교환되는 ‘성인언어’는 “비본질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타인에게 예의를 차리는 ‘하얀 거짓말’은 실제로 속이는 이는 아무도 없지만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참여하도록 열어둔 일종의 사회적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그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무례한 ‘검은 진실’은, 그 무례함으로부터 모두가 속해 있는 상부구조에 대한 인식을 이끌어낸다. 이처럼 상징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성인언어는 유머와 풍자, 비판 등 다양한 효과를 통해 실제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와 함께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이 같은 ‘주인 없는 상상’을 ‘주인 있는 상상’으로 대체했다. 신자유주의는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연대를 해체하는 대신 이를 개인의 도덕적인 태도를 통해 회복하도록 개인에게 의무로 부과하기 때문이다. 자아와 초자아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며,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에만 몰두하는 ‘나르시시즘적 자아’가 됐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너 자신이 되어라”는 명령 아래 공적인 장소에서 타인의 행복을 보편적으로 다루는 역량을 잃은 주체들이 ‘너 아니면 나’ 구도에 갇혀 이른바 ‘피해자 배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상상의 주인이 된 주체는 ‘타인이 나의 쾌락(향유)을 도둑질해갔다’는 원한 감정에 빠지는데, 이는 민감한 자아들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조금도 상처받지 않도록 사회 전체를 엄숙한 ‘무균실’로 만들려는 정치적 올바름 기획으로 뒷받침된다고도 지적한다.

 

동성애 커플이 등장하는 독일 뮌헨 시내의 보행자 신호등 모습. 팔러는 “대도시의 자유롭고 부유한 지역에서 보행자 신호등이 동성애자나 트랜스섹슈얼을 재현하느라 즐겁게 반짝일지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소수자 집단이 사회기금 축소, 실업 증가를 비롯해 높아진 사회적 긴장에 아주, 아주 강하게 직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진 니코 카이저, 출처 픽사베이
동성애 커플이 등장하는 독일 뮌헨 시내의 보행자 신호등 모습. 팔러는 “대도시의 자유롭고 부유한 지역에서 보행자 신호등이 동성애자나 트랜스섹슈얼을 재현하느라 즐겁게 반짝일지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소수자 집단이 사회기금 축소, 실업 증가를 비롯해 높아진 사회적 긴장에 아주, 아주 강하게 직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진 니코 카이저, 출처 픽사베이

 

지은이는 이것이 ‘대체’ 관계라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정체성 정치가 명확한 공모 관계에 있다고 지적한다. “포스트모던 정치는 헤게모니 집단이 평등의 모더니즘을 포기하였을 때 선언되었다. (…) 다양한 존재들의 상이한 권리에 대한 프로파간다가 발생한 시점은 소득 격차가 다시 극적으로 벌어지고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이 모두가 평등할 권리를 더이상 유토피아로 고수하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단적으로 말해, 정체성 정치는 결국 평등의 정치를 사장시키기 위한 기획이라는 주장이다. 지은이는 부유한 도시의 신호등에 동성애 커플이 상징으로 등장하고, 여성 교수를 일컫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학생들에게 불쾌감과 트라우마를 줄 수 있는 수업 내용에 대한 ‘사전 고지’를 요구하는 등 ‘부차 모순’ 해결이 부각되는 동안, 민주적 공동결정, 노동과 소득에의 접근, 교육 등 각종 사회 인프라 구축 등 ‘주요 모순’에 대한 요구는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정체성 정치는 단지 중산층과 상류층에게만 유효할 뿐 아니라, 다양성을 위한다는 투쟁이 다양성 그 자체를 확보할 수 없는 구조적인 모순을 품고 있다고도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정치에 근거한 분노와 절망이 기본적인 생활 수준을 박탈당하고 점점 더 가난해지는 인구집단을 표현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 그들에게 부여하려는 것과 다른 표현을 줄 수 있는가?” 지은이는 이 질문이야말로 서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질문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삶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는 ‘성숙’이라는 태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성숙을 회복해야만 끊임없는 분열 대신 보편적인 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무언가를 위해 싸워야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멍청한 정체성의 특수성이 아니라, 이 정체성을 비판적으로 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체성과 결별하는 자리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 보편성이어야 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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