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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 네 번째 회사 1000일째 아침

vol.027 조회 수 10327 추천 수 0 2014.04.30 09:47:56
0.

"어렸을 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고 너와 같이 있었던 게, 엄마가 너한테 젖병 물려주라고 해서 너가 너무 귀여워서 젖병 물려줬는데… 엄마도 기억하시더라. 너네는 그때가 가장 사이 좋았다고…. 우리가 연년생이라 많이 싸우기도 하고 어렸을 때는 정말 둘 다 서로 죽이고 싶다 하고…. 고등학생이나 돼서야 내가 기숙사에서 살고 오빠 노릇 좀 해보겠다고 5만 원 백화점 상품권을 사다줬는데 너가 어찌나 좋아했던지…. 정말 즐거웠다. 

올해 2월에 니가 나 생일이라고 옷 사다줬잖아. 맘에 안 든다고 했더니 니 생일 선물 없다면서… 화 나가지고는 7만 원짜리 뉴발 맨투맨을 사왔잖아…. 그게 너가 나한테 준 마지막 선물이 됐네… 그때 정말 놀랐는데… 내 동생이 이런 비싼 걸 사오다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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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정말로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건 너한테 이쁘다고 많이 못 해준 거, 집에서 애교 부리지 말고 노래도 하지 말라고 한 거, 편지 쓰는 거 정말 좋아하는데 너한테는 못 써준 거, 너랑 멋진 데이트 한 번 못 해본 거다. 착한 내 동생… 못된 선장 말 너무 잘 들어가지고 배안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겠지…. 오빠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글 써주는 거 밖에 없는 거 같아 너무 슬프다. 

보현아, 다음 생에 태어날 때는 나보다 더 멋지고 잘생긴 오빠나 이쁜 언니 아니면 나이 어린 귀여운 동생 가지길 바란다. 거의 20년 동안 너의 오빠여서 정말 행복했다. 

사랑해 내동생 구보현 _"


1.

오늘은 네 번째 회사 1000일째.

지하철 계단의 구두소리를 들으면서,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정리해 볼까 생각했었지만,

위의 편지를 읽고, 또 다시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이렇게 화창한 날씨 마저 미안하고 억울해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2.

“전원구조”라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거짓에, 절망과 분노의 한숨을 내쉰 지 어느새 2주가 지나고 있다.

까면 깔수록, 그림이 점점 구체화 될수록, 

우리가 짐작했던 그대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눈을 감고 아무 곳이나 찔러도 썩지 않은 곳이 없다.

온갖 탐욕과 무능과 무책임과 몰상식과 몰염치가 흘러 넘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듯이,

그들은 저 거대한 시스템과 끈끈한 커넥션으로,

그들의 부와 권력을 증식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3.

이 모든 것이 낯설지 않다.

이미 오래 전부터 반복된, 너무 익숙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전쟁 준비를 하기 위해 자신의 땅과 바다에서 쫓겨나고,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철거민들이 죄인이 되는 곳,

평생 일궈온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할머니들이 서로의 목에 쇠사슬을 묶어야 하는 곳,

지금 이 시간에도, 삼성전자, 쌍용자동차,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무수한 공장에서 매년 수천, 수만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곳,

비용 절감, 생산성 향상이라는 모순된 구호 아래, 모든 성과는 저들에게, 모든 책임은 노동자에게 떨어지는 곳,

온갖 비리와 불법에 대해 진상은 규명되지 않고, 책임자는 처벌되지 않는 곳,

아이들의 자살과, 노인들의 고독사가 점점 늘어나는 곳,

천박한 속물이 되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곳, 

모든 가치가 결과로, 숫자와 돈으로만 교환되는 곳,

바로 그런 곳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4.

이러한 조건을 바꾸지 않는 한, 이 끔찍한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다.

인류의 역사와 세계는 우리의 노동으로 생산한 것이다.

그들의 자본과 권력 역시, 우리가 만든 것이다.

이 비극을 끝내기 위해, 사적 소유 관계를 사회적 소유 관계로 전환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말하자면, 그나마 우리가 구상해 온 최선의 알고리즘인 것이다.

물론 그것을 구현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디버깅이 필요할 것이고, 실제 운영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안정적으로 운영이 되더라도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그 때마다 적절한 패치와 개선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의 경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5.

모든 미래는 무수한 지금들로 이루어진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들을 혼자서, 모두 함께, 묵묵히 계속 하는 수 밖에 없다.

스탭회의에 한 사람이라도 더 참석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가능하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다.

청소를 더욱 자주 하고, 분리수거를 더욱 철저히 하고, 노래 선곡과 이벤트 준비에 더욱 신경 쓸 것이다.

반갑고 새로운 인연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허세들과 재난들에 대해서는 더욱 거리를 둘 것이다.

음악을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 탁구가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탁구공이 떨어지는 일도 없게 할 것이다.

(얼마나 더 다닐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더욱 자주 대화를 나눌 것이다.

역사와 세계의 주인인 노동자의 이름으로, 회사의 차별적이고 불합리한 제도를 비판하고, 

자본의 착취와 축적이 아니라, 우리의 노동과 축적된 생산력을 사회화 하기 위해 함께 고민할 것이다.

마이너리티와 로컬의 정치, 변증법적 적대로서의 인디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할 것이며,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더 넓고 평등한 사랑을 모색할 것이다.

환경과 생태의 관점에서 과학/기술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며,

더욱 자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생명과 자연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존경할 것이다.

소소한 술자리를 즐기되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자제하고, 헐크로 변신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다.

핸드폰을 들여다 보기 보다 눈빛을 마주치는 시간을 늘리고,

소중한 관계들에 사랑한다는 말을 좀 더 자주 하고,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답할 것이다.


6.

고작 이 정도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위의 남매들에게 쓸 수 있는 답장인 것 같다.

(라고 쓰는 순간, 초등학교 친구 어머니의 부고 소식이……….. )

오늘은 

자본과 정권에 의한 세월호 참사로, 저 착하고 예쁜 아이들이 2주째 차가운 바다 속에 갇혀 있는 날이다.

기계를 멈춰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한, 전세계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전야이기도 하다.

오늘은 

아무도 없는 캠프에서 냉장고를 정리하고 “롱 시즌”과 “가자 노동해방”을 들으며, 혼자 맥주를 한잔 했던 날이다.

5년 남짓 개고생한 ㅇㄱㅈ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마지막으로 출근한 날이기도 하다.


오늘의 이 참담한 눈물과 다짐을 잊지 않을 것이다.



201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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