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끝


유추의 악마

조회 수 7653 추천 수 0 2003.02.17 12: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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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추의 악마
le demon de l'analogie

- 말라르메



알 수 없는 말이, 조리 없는 문장의 저주받은 조각이, 당신들의 입술 위에 노래하는 듯한 일이 있었는가?

내가 집을 나올 때, 날개가 무슨 악기의 현을 가벼우면서도 천천히 스쳐 지나가는 듯한 감각이 느껴지더니, 점차로 낮아지는 어조로 <라 페뉼티엠므는 죽었다 La Penultieme est morte>라고 말하는 목소리로 변했는데,

<라 페뉼티엠므La Penultieme>

가 첫째 시행을 끝막음 하고

<는 죽었다Est morte>

는 어떤 운명적인 휴지에 의하여 더욱 무용하게 떨어져나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다. 거리로 몇 발자국을 떼어 놓자 나는 <뉼nul>이라는 소리에서 악기의 팽팽하게 당겨진 현을 지각할 수 있었는데, 현 자체는 잊혀지고, 다만 분명하게 찬란한 <추억Souvenir>이 그의 날개와 야자수 가지와 함께 찾아드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이 가공의 신비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웃음지으면서 내 지능을 빌어 기원하되, 어떤 다른 생각이 나타나 주기를 빌었다. 그러자 저음의 문장이 잠재적인 상태로 다시 마음에 떠올랐는데, 날개 깃이나 야자수 가지들이 쏟아져 떨어지는 듯한 지난번의 감각은 싹 가신 채, 이번에는 내 귀로 들은 목소리를 통하여 지각되었고 드디어 독자적으로 식별이 가능한 문장이 되고 자체의 개성에 의하여 살아 있는 듯하였다. (지각을 통한 인식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된) 나는, 걸어가면서 이 문장을 시행의 끝에 놓고 읽어 보고, 또, 연습이라도 해보려는 듯이, 한번은 소리를 내어 내 어조에 맞추어 발음해 보고, 그리고는 곧 <페뉼티엠므Penultieme>라는 말 바로 다음에 얼마간의 휴지를 두어 보았는데 이 침묵 속에서 나는 어떤 고통스러운 쾌감을 느꼈다. 즉 <라 페뉼티엠므La Penultieme>, 다음에 악기의 현이 망각 속에서 <뉼nul> 음에 이르자 어찌나 팽팽하게 잡아당겼는지 아마도 끊어져 버린 것만 같아서 나는 기도문을 외우듯이 <는 죽었다Est morte>를 덧붙였다. 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하여 평소에 늘 하는 생각 쪽으로 마음을 돌리려고 끊임없이 애쓰면서, 물론, <페뉼티엠므Penultieme>란 말은 한 단어의 끝으로 두번째 음절을 뜻하는 술어이고 보면, 나의 시적 기능을 뚝 중지시키곤 해서 늘상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이 언어 천착의 노역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결과 그 여파로써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보았다. 그 말의 음악성 자체, 또 쉽게 서둘러 단정해 버리고 난 때면 느껴지게 마련인, 거짓말 같다는 부담감이 이와 같은 내적 고통을 자아내게 한 원인이었으리라고. 애가 탄 나는 이 처절한 성질의 말들이 내 입술 위에서 저들 혼자 방황하게 내버려 둘 양으로, 슬픔을 위안하는 데나 적합할 어조로 <나 페뉼티엠므는 죽었다. 그녀는 죽었다. 완전히 죽었다. 절망해 버린 페뉼티엠므는 La Penultieme est morte, elle est morte, bien morte, la desesperee Penultieme>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불안감을 달래고 또한 넋두리를 과장함으로써 이 불안감을 묻어 버리겠다는 남 모를 희망도 없지 않았는데, 놀라운 일! - 쉽게 추리해 볼 수도 있을 어떤 신경성의 요술처럼 - 문득, 그 무엇인가의 위로 더듬어 내려오는 애무의 동작을 지으면서 내 손이 어떤 상점의 유리창에 비치는 것을 보면서 나 자신의 목소리가 (그 첫번째의 목소리, 영락없이 단 하나뿐인) 그 목소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 부정할 수 없는 초자연적 힘이 개입한 것은 어디이며, 전에는 늘 스스로의 주인으로 자처하던 나의 정신이 받은 그 고통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그것은, 골동품 상점이 늘어선 거리를 본능적으로 따라가다가 내가 눈을 들었을 때, 벽에 낡은 악기들을 걸어 놓고 땅바닥에는 노랗게 마른 야자수 가지들과 그늘에 묻힌 옛날 새들의 날개를 놓아두고 팔고 있는 악기상 앞에 내가 서 있음을 본 때였다. 얄궂은 생각이 들어, 설명할 길 없는 <페뉼티엠므Penultieme>의 초상을 당하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도망쳤다.



- 시련을 이겨내고 시모임에 재기의 운을 띄우려는 로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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