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끝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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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리듬을 믿고(この胸のリズムを信じて)", "우리는 걷는다 단지 그뿐(ぼくらは步く ただそんだ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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