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당신은 피해자입니가, 가해자입니까
페미니즘이 이자혜 사건에서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양효실 외 지음


2017.7.30.

현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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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냐 가해자냐 하는 물음. 너는 누구의 편이냐는 물음이 감추고 잊히게 만든 질문들이 너무나 많다. 페미니즘은 다양하고 풍부한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며, 분쟁과 이견의 장소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것. 그것이 페미니즘일 것이다. (15)

- 현실문화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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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고통을 대면하는 우리, 불가능한 코뮌

- 양효실

나눌 수 없는 차이 때문에 모인 ‘우리’

문제 곁에 혹은 가까이 있는 너의 곁에 있되 생각을 멈추지 않을 것. 몰입하되 거리를 유지할 것. 지지하되 의심할 것. 우리를 욕망하되 차이를 배려할 것. 길을 잃되 길의 은유는 잊지 않을 것. (19)

모임의 경과

미지unknown의 고통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차이를 보존하고, 나르시시즘을 향한 욕망을 지우고, 거의 모든 것이 노출되며 거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곳에 머물러야 한다. 그것이 내가 주디스 버틀러로부터, 페미니즘으로부터, 그리고 좌파의 실패한 운동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28)

우리는 성장했고 그 성장을 이 책이 기록했기 때문이다. 성장이 무엇이냐고? 자기 안에서 살고 있는 얼굴없는 사람을 보는 것이다. 모두가 혐오하는 미지의 ‘얼굴’과 자혜가 겪고 있는, 우리는 모르는 미지의unknown 고통, 당신과 내가 계속 살기 위해 견뎌야 하는 모욕과 오해, 슬픔을 보는 것이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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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해시태그를 만났을 때

- 이진실

담론의 귀환인가, 실재의 귀환인가

루빈은 매춘과 포르노그래피로 인한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억압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들을 도덕적 십자군이라 부르며, 그들이 섹슈얼리티를 배척함으로써 페미니즘 영역 확장의 기회를 저버리고 보수와 영합해버렸다고 지적한다. (35)

‘가해자’라는 이름의 방역선

그러나 이처럼 성폭력 피해가 대거 가시화되면서 우리가 지닌 모든 문제의식들이 피해자 담론으로 함몰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피해자로서의 여성, 약자의 권능화empowerment를 중심에 두면서 숙고와 검토를 건너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는 없는가? (39)

그것은 단순히 시대적 다름, 공동체의 다름(운동 조직이냐 느슨한 공동체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론화의 방식, 속도, 파급력이 완전히 다른 인터넷 생태계,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의사소통구조의 조건 위에서 벌어진 폭로였다는 데 있다. 100인위 사건은 장시간의 내부적인 조사와 논의를 거쳤는데도 가해자의 사과와 징계가 거부되자 사안의 심각성 때문에 공개와 법정 투쟁이 전개된 것이었다. 반면 2016년 트위터를 휩쓴 성폭력 해시태그상의 폭로들은 어떤 조사나 검토 과정 없이 피해자 서사의 출현부터 여론의 판정까지 삽시간에 이뤄졌다. 그 때문에 나는 지난겨울 여기에 지지와 연대를 보낸 ‘우리’가 혹여 이 사안들에 대한 검토를 건너뛴 채 선동적이고 극단적인 여론 몰이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찜찜함을 떨칠 수 없었다. (41-42)

다시 말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혹은 진보적인 것)=페미니즘, 페미니즘=피해자/약자의 편이라는 도덕성 프레임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대두된 것이다. 이러한 도덕주의는 대개 피해자들에 대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지지와 연대로 이어졌다. 사건의 진위 여부를 묻는 것도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며, 가해자의 어떤 변명도, “나는 몰랐다” 혹은 “둔감했다”는 주변인의 변명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42)

... 그러한 올바름, 도덕성의 입지가 한편으로는 규제의 논리로 수렴되고, 또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시장의 메커니즘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43)

루빈이 경고한 신자유주의와 도덕적 다수파의 결합은 2016년 한국사회에서 더욱 고도화된 소비자본주의의 얼굴로 등장하는 듯했다. 소비자본주의는 이제 ‘유저’ 혹은 ‘독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비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도덕적인 행위는 이제 윤리적인 소비자가 문제시된 생산물, 혹은 생산자를 시장에서 축출함으로써 실현된다. (43-44)

... 실로 전염병에 대한 위생적 대처 방식에 가까워 보였다. 가해자라는 이름의 바이러스에 전염될까 싶어 재빨리 그 접촉면들을 차단해버리고 피해자 연대라는 무균지대로 신속하게 거처를 옮기기, 어떤 논쟁과 조사, 판단에 앞서 먼저 ‘깨끗한’ 도덕적 입지를 차지하기. (44-45)

피해자-우리 vs. 가해자-괴물

가해자를 괴물로 만들고, 그들을 신속히 삭제하는 캠페인은 그 캠페인의 주체들에게 피해자 혹은 약자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저항의 사유인 페미니즘을 동원해 또 다른 억압의 정치로 치환할 위험 또한 내포하고 있다. ... 페미니즘의 주체는 ‘여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단순히 피해자 혹은 생존자로만 규정될 수도 없다. 나는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에 갇혀 생물학적 여성만의 연대를 요구하고 피해자나 생존자의 자격만을 부각시키는 것, 다시 말해, 피해자-우리와 가해자-괴물을 구분 짓는 것이 과연 여러 패러다임이 얽혀 있는 페미니즘 정치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묻고 싶다. ... 이러한 일련의 쓰나미에서 구분해야 할 범주들을 서로 뒤섞어버린 채, 선정적이고 히스테릭한 여론에 따른 처벌을 교조적으로 적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47-48)

이자혜라는 극단

우리는 피해자 대 가해자라는 이분법 하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이름하에 한 작가가 우리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목도했다. (49)

해시태그에 담긴 욕망들

사안들을 이렇게 일렬로 나열하는 방식은 그 안에 개별적이고 단수적인 사건들을 ‘가해자 괴물’이라는 차이 없는 하나의 서사로 꿰어 낸다. 나는 다소 조심스럽지만, 이 차이와 개별성의 삭제가 성폭력 사태 해시태그의 폭발적인 영향력과 긍정성에 가려진 위험 요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55-56)

꿰기의 작동방식을 넘어

그렇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의 발화를 두고 법의 영역이 아니라 담론 혹은 문화라는 영역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은 그 내용에 대한 판단/판결 혹은 처벌을 넘어서 그 사건과 경험에 착종되어 있는 섹슈얼리티, 감정, 욕망, 권력이 아닐까.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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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들을 보라: 애드리언 리치의 『강간』과 비르지니 데팡트의 강간 이론

- 양효실

여성의 경험만으로 충분한가

성폭력의 바깥은 없다
: 애드리언 리치의 시 「강간」

남성의 공적 제도, 다시 말해서 남성의 경험을 위해 만들어진 관습이 여성의 경험을 처리하고 배려하고 인정할 수 있는가? (72)

애드리언 리치의 「강간」은 성폭력의 구조가 폭력을 고발한 여성과 경찰 사이에서 다시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탁월한 예다. ... 총 6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폭력의 바깥, 저질러진 폭력을 응징하는 법의 수호자로서의 경찰이 왜 여성 피해자를 재강간하는 가해자인지를, 그러므로 여성이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을 가시화한다. (72-73)

이렇듯 실제 일어난 끔찍한 외상의 경험을 심리적 환상이나 거짓말로 간주한 정신의학자들이 수용한 유혹이론은 가해자인 남성을 여성에게 당한 피해자로 재구성해 냈다. (80)

이것은 피해자들의 서사를, 외상 가까이에서 혹은 외상 안에 머물며 살아가는 약자들의 서사에 대한 면밀한 경청을, 침묵에 가까운 말하기를 듣는 윤리의 필요성을 요청한다. 우리는 법도 폭력이라는 깨달음 뒤에, 재현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역사적 외상을 겪은 이들이 재현을 시도할 때마다 겪는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읽고 배워야 한다. (84)

“강간 따위는 아무것도 아냐!”
: 비르지니 데팡트의 강간 이론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페미니즘이 ‘실패의 실천’인 것은 바로 이런 차이, 다양성, 불일치를 긍정하면서 연대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97)

애드리언 리치는 피해자가 범죄자나 정신병자가 될 위험을 내포한 강간에서 벗어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 비르지니 데팡트는 우리가 여성성을 포기한 괴물이 되길 요구한다. 그녀는 성적 쾌락을, 조신한 여자들은 돌아다니지 않는 바깥을 포기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녀는 강간이란 그런 위반적 여성이 감당해야 할 재해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98)

강간이 여타의 폭력과 다른 상처나 외상으로, 특별한 폭력으로, 중요한 폭력으로 정당화될 때 가부장제 역시 정당화된다. 강간을 씻을 수 있는 폭력으로, 나을 수 있는 고통으로 다시 쓸 수 있는 여성들이 있어야 한다. 비르지니의 강간 이론은 성에 대한 도덕과 엄숙함, 경건함으로부터 맞설 것을 요청한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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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제목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 이연숙

생존과 인정 사이에서

그들의 고통이 가짜인가? 피해는 조작된 것인가? 피해를 여러 번 말하다 보니 가짜가 진짜가 되어버린 것인가? 여러분은 모두 허언증 환자인가? 고통은 말해진 순간 나에게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고통은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화 속에 있다. (104)

무력감에 휩싸여 실어증에 빠지거나 피해자로서의 서사를 완벽하게 구상하는 것에 착수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로 구성될 수 없는 피해는 어떻게 해야 할까? (105)

범죄 행위로서의 <미지의 세계>

그럼에도 내가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창작자가 이런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창작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그러한 인간에게서 창작된 작품 자체가 어떤 이유로도 폐기되지 않을 권리다. ... 이자혜는 타인의 고통을 착취했고, 그런 방식으로 작품을 창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지의 세계>가 범죄 사실의 기록이나 범죄 행위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113)

<미지의 세계> 폐기 후 고려되지 않은 것들

저를 용서하지 마시고 이자혜는 더 용서하지 마세요. 우리의 모든 즐거웠던 시간은, 돌이켜 보니까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노출증적인 고해성사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죄인으로서 떳떳해진다. (116)

이자혜는 여자이기 때문에 수 시간 만에 밥줄이 끊겼다. ... 결과적으로 <미지의 세계>의 폐기와 이자혜의 밥줄을 끊는 방식의 연대와 지지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이 같은 사법적 절차를 대리한 수단이 어떻게 경제성의 논리에 함몰된 사적인 복수 외에 다른 의미를 가절 것인가? 우리는 이자혜에게 벌을 주는 데 성공했다.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그녀에게 벌을 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이자혜의 밥줄을 끊은 것은 그녀의 이름을 팔던 연재처이며, 잡지사이며, 문학지이며, 서점이며, 편집자들이다. 우리는 이 남성 권력에 이자혜의 처단을 대리시킨 것이라고, 나는 망설이면서 단언한다. (121)

불가능한 양자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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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의 편이냐고 물으신다면

- 박연아

욕하고 편들기 그리고 다시, 편들고 욕하기

제대로 된 공감은 가능할까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말’을 찾아서

잃어버린 명예는 되찾을 수 있을까

“법에 의지해 명예를 찾는 과정은 명예를 잃는 과정과 같다.”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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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선 꿈들을 팔아 불감을 마련했었다

- 박수연

대면, 사건, 교착

“차라리 그 이후로 내 마음에 불의 낙인이 찍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 낙인을 안고 살 것이라고 말할 것을.” (157)

그러나 나는 너와 마주 서는 것이 아니라 너를 내 서사 속의 등장인물로 흡수해서 내 서사를 매끄럽고 예쁘게 다듬으려고 했던 것 같다.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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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의 세계

- 이나라

추방당한 작가

<미지의 세계>는 이자혜에게 결코 속한 적이 없다. 블랑쇼처럼 작품의 존재론을 개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작가가 작품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169)

<미지의 세계>는 왜 정치적인 예술인가

미지의 소란, 의미의 해방

작가는 ‘건강한 분열증’을 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주하는 오해의 세계

우리가 방조한 것은 결국 <미지의 세계>를 간단하게 추방해버린 문화적 폭력 아닌가?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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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폭력, 그 상큼한 쾌락의 원천

- 허성원

사건의 개요

이자혜라는 상징물, 구덩이로 굴러 떨어지다

쾌락의 주춧돌 쌓기

나는 한 사건에 있어서 두 가시 상충되는 진실이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206)

과거 그 자체가 결정돼 있고 과거에 일어난 ‘사실’이 기억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지금 기억하고 경험하도록 만드는 ‘내러티브’는 확정돼 있지 않다. 심지어 우리가 과거의 경험을 채색하는 현재의 내러티브는 사건을 경험하던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207-208)

해킹의 논지를 염두에 두면서 이 글에서는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고자 한다. 즉 동일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내러티브에 따라 다른 경험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법이 아직 당사자들의 거취를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이자혜를 ‘범죄자’라고 부르면서 몇 시간 만에 직업을 잃게 하고 작업을 매장한 것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던 게 아닐까? (208)

윤리적 폭력의 동기, 쾌락

이자혜의 작업물이 하나씩 내려질 때마다 이를 승전보로 기념하여 축하했다. 이자혜와 B는 고통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09)

매장꾼들이 벌인 스피드 레이스의 기저에는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고 싶다는 강한 동기가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윤리적 주체를 인증하는 도장이 가능한 한 빨리 자신에게 찍히기를 바란다. 그 낙인이 이자혜를 소비하는 자신이 느꼈던 쾌락을, 죄인의 증거를 덮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214)

페미니즘의 유산: 피해와 고통에 자기 자신을 넘기지 않기

피해자 내러티브는 가장 익숙하게 접해 온 서사이며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 금지 등과 같은 개념으로 얼룩져 악의 판단, 처벌과 복수를 통해 피해자가 ‘피해자의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이미 닦아 놓는다. 피해자의 자리에 기대는 순간 그의 과거는 고통의 역사로, 피해받음의 역사로 재편성된다. 상대방은 가해자로, 처벌받아야 할 악으로 고정된다. 내가 그를 잔혹하게 심판하고 싶을수록 고통의 진위를 인정받을 것이다. 타인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217-218)

“훼손당한 타인에게 내가 말을 걸고 관계를 맺을 때, 어떤 방식이 윤리적인가?”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그를 피해자 내러티브로 몰아넣지 않으면서 그의 고통을 인정할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관계맺음에 필요한 전권을 피해자 내러티브에 위임하지 않으면서, 피해자를 절대적인 약자이자 선으로, 가해자를 절대적인 강자이자 악으로 고정시키지 않으면서.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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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여왕

- 이춘식

2016년 10월 19일 이후

부서진 구버들의 세계

단지 두 이야기의 진실이 무엇인지 밝힐 정도의 공방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편’을 들었다. (231)

최첨단 플랫폼에 상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대적인 방법으로 ‘못된 년’을 처리하는지 나는 보았다. 거기에는 어떠한 재고의 순간도, 형식적인 절차조차도 없었다. (232)

더 큰 토템의 일갈에 그들은 곧바로 이전의 토템을 버렸다. 예수의 그림을 밟고 지나가 결백을 증명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이자혜라는 사람을 뜯어 먹음으로써 뭔가 결백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려고 했다. 그것이 마치 페미니스트가 되는 의식이라도 된다는 듯이. (233)

메타는 없다

그들의 메타는 그냥 빻은 물건을 소비함에 있어 주의한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 소비 자체가 비윤리적인 것으로 판명되자 “빻은 물건을 소비했지만 나는 안 빻았어요”라고 시치미를 떼기 위해, <미지의 세계>는 ‘메타인 줄 알았는데 메타가 아닌’ 것이 되어야 했다. (235-236)

새로운 토템은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왜 사람들은 이자혜를 페미니즘의 이름 아래에서만 소비했는가? 어떻게 그들은 그녀의 모든 것을 페미니즘적이라고 부르며 소비하다가, 사실은 페미니즘이 아니라며 배신감을 느끼고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오로지 이자혜라는 ‘굿즈’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페미니스트’ 이자혜가 만든 것들에서는 페미니즘을 보았다. 그녀의 신분이 바뀌자, ‘가해자’ 이자혜가 만든 것들에서는 가해를 찾았을 뿐이다. (243)

그것은 납작한 가해자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던 토템에서 가장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 냈고, 갑자기 진절머리를 내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외쳤다. 신성한 형상이 악마의 형상으로 바뀌는 데는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247)

그들이 먹어 치웠던 악녀가 사실은 그들 자신이 직접 사냥한 피해자임을 깨달았을 때 이미 먹어 치운 살점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하다. ... 그때 그 살점들은 어떻게 될까, 소화되어 핏속을 돌아다니거나, 소화되지 않아 목에 걸려 있는 그 고깃덩이가 당신 몸에서 무슨 일을 일으킬까. 그것은 어떤 사태로서 당신의 몸에서 튀어나올까. 여러분은 이제 자신의 일부가 된 살점을 뜯어낼 수 있을까. 뜯어내든 뜯어내지 못하든, 살아남을 수 있을까. (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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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

- 이미래

인생이 곤두박질치고, 나의 형편없는 부분들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일. ... 조용히, 천천히 망하는 일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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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리듬을 믿고(この胸のリズムを信じて)", "우리는 걷는다 단지 그뿐(ぼくらは步く ただそんだ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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