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2018)

/ 권김현영 엮음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 권김현영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피해자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믿거나, 피해자를 무조건 지지하겠다는 태도야말로 피해자를 타자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에게 피해 상황을 독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거나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피해자를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피해자는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다. (26)

‘2차 가해’라는 용어는 진상 조사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남용되었고,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담론은 피해자의 주관적 감정에 지나치게 독점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오용되었다. 공론장에서 계속 합의되고 갱신되어야 하는 성폭력 판단 기준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판단 기준은 성별, 계급, 나이 등에 따른 권력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방식(‘피해자 중심주의’)이었다. 그러나 위치 자체가 곧 피해의 근거가 된다는 생각으로는 권력 관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나는 오히려 소수자나 약자라는 위치를 방패삼는다는 이유(‘피해자 코스프레’라는 악의적인 말이 잘 드러내듯)로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혐오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29)

사람들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다음과 같이 오해하고 있다. 첫째, 피해자에게 사건에 대한 판단 기준 전체를 위임하기, 둘째, 피해자에게 가해자에 대한 처벌의 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 셋째, 피해자에게 피해 경험을 독점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하기. 세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 자체가 종종 “피해자는 옳다”는 명제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44)

성폭력을 둘러싼 투쟁은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그런 행동은 하면 안 되지 않나.”라는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 가는 싸움이어야 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은 피해자의 주관적 느낌은 가해자 중심 사회에서 판단을 할 때 중요한 참조 사항이자 증거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피해자의 주관적인 느낌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는 당연히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있지만, 그 경험을 공론의 영역으로 가져올 때는 정당화의 의무를 지게 된다. 페미니즘은 그 정당화 과정에서 해석 투쟁에 연대하는 언어이지, 무조건 편을 들어주는 언어가 아니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손을 들고 피해자라고 얘기하는 것 말고는 어떤 말도 불가능해지고, 결국 아무도 얘기를 듣지 않게 된다. 또한 미숙한 대응 혹은 지연이 어떤 맥락에서 일어나는지 살피지 않고, 모든 것을 ‘편들기의 정치’로 만든다. 나는 이 편들기 방식이야말로 페미니즘 정치와 가장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50-51)

피해자 중심주의는 마치 피해자의 말이 곧 진리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오해라고 해도 이 말이 주는 효과는 그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의 말에 유일한 해석의 권위를 부여한 결과, 남은 것은 피해자 존중이 아니라 피해자 되기 경쟁이었다. 피해자 경쟁 문화에서는 더 정확하고 자세한 설명보다는 더 세고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말이 선호되었다. (51)

오히려 우리는 무엇이 성폭력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주장은 언제나 맥락 의존적이며 ‘상황적(situated)’이다. 이때 상황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허용하고, 그 해석이 얼마나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성찰적인지, 그러면서도 설명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했는지가 (사실이 아니라 정의로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 도나 해러웨이가 주장하는 상황적 지식으로서 페미니즘 지식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선의 부분성(partiality) 혹은 당파성을 전제하며, 둘째, 특정한 장소에 기반한 지식(located knowledge)을 추구하고, 셋째, 체화된 설명(embodied account)을 책임(accountability) 있게 제공하는 것이다. (52)

다른 하나는 거부 의사 표시가 없었고 동의가 분명했는데 나중에 신고를 하여 다른 이득을 보려고 한 경우이다. 후자는 사기나 협박, 혹은 무고죄가 성립하는 범죄일 것이다. (53)

피해자의 권리에서 모두의 의무로! ... 피해자의 말을 의무로 생각하자는 것은 말하지 않기로 한 이들에게 부담을 주자는 게 아니다. 말하는 것이 더는 무엇인가를 각오해야만 가능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피해자가 피해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가해자에겐 법정 피의자로서의 ‘권리’가 있다고 인식하는 사회. 나는 이런 사회가 피해자 비난이 없고 강간 문화가 사라진 ‘정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한다. (70)


<문단 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 -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

나는 내 무지와 오판으로 내내 부끄러울 일을 겪었으나 그 한 사람이 겪은 일, 그의 경험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짤막하게나마 내 계정에 사과의 말을 남겼지만 그에게는 개별적으로 연락하지 못했고 그게 적절한지도 알 수 없어 다만 이렇게 기억하고 복기한다. 우리로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것은 의심보다는 불신이라는 간편한 상태를 선택한 내 나태함이 벌인 일이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내 나약함이 벌인 일이었다. (92-93)

자격과 무결... 준비팀은 가해자로 프레임화되었다. 준비팀은 “가해자가 아니다.”라며 간단하게 항변하는 길을 선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규탄을 주도한 이가 문단 내 성폭력 피해 고발자였기 때문이다. 피해 고발자가 SNS에서 사실이 아닌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고 해서 그 시시비비를 SNS에서 가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두고 내부에서 첨예하게 논쟁을 했다. 준비팀은 최대한 논쟁하지 않는 것을 방침으로 정했다. 이는 SNS에서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비난을 키웠다. 이에 준비팀이 입장문을 발표하자 “입장문이라는 명분으로 피해자들을 비난하며 가해하는 일을 그만두시기를 요구합니다.”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96)

더 많은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의 말이 절대화되는 일, 가해와 피해와 가해와 피해와 가해와 피해 들의 영원한 연속, 회복할 수 없는 상처들의 무한한 연쇄를 만들어놓은 채 루머 생산자들은 모두 SNS를 떠났다. (98)

<참고문헌 없음> 프로젝트의 준비팀을 가해자로 프레임화했던 이들은, 대부분 나와 몇 년씩 알고 지낸 지인들이었다. 서로 안부도 묻고, 삼삼오오 모여 낭독회도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며 놀았던 나의 다정한 동료들이었다. 반면 내게 준비팀의 팀원들은 모르는 이들에 가까웠다. ... 그들의 말을 경청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그들도 잘 모른다는 것, 준비팀의 입장문이 발표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준비팀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준비팀의 발언을 듣기도 전에 이미 잘못으로 상정되어 있었다. ... 그리고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가슴을 후벼 파는 한마디가 있었다. “그 사람들은 미쳤어. 너라도 빠져나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명확히 정리되었다. / 그때 나는 ‘끝나는 것을 끝까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우선 해야 할 것은 ‘준비팀의 완전 무결한 자격’을 판단하는 일이 아니었다.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논란의 당사자가 된 사람들을 빠르게 삭제하고 프로젝트를 중단시켜버리는 일이 아닌, 논란을 회피하지 않으며 끌어안은 채 피해자들과 연대자들의 목소리를 모으는 일이어야 했다. (102-104)

* “제 이름도 같이 적어주세요.” ... 당시 준비팀은 폭력을 묵인하고 위계적 권력을 휘두르며 오만과 무능과 비윤리성에도 불구하고 돈을 위해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않는 집단으로 매도되어 규탄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 “괜찮아요. 적어주세요.” (104-105)

‘고발자 5’가 밝힌 바와 같이, 연대와 책임은 유보의 방식으로 선을 긋는 것이 아니다. 계속할 수 있다는 발전 가능성을 서로에게 열어 두는 것이다. 그래야만 더 나은 연대로의 환원 가능성도 열릴 수 있다. (107)

문단의 구조적 대안에 대한 모색은 시작도 못한 채, 지금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개인 싸움만 남아 있다. ... 가해자 프레임 속에서 준비팀의 모든 조치와 행위와 입장은 반성 없는 폭력 행위이거나 자기 합리화, 혹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행위로 취급되었다. 연대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었다. 우리는 ‘누가 가해자인가’보다는, ‘무엇이 폭력인가’를 질문했어야 했다. ...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장치들이 반(反)성폭력 운동을 하는 연대체를 공격하는 프레임으로 고스란히 악용되었다. ... “우리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방관자도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참상을 이해한다.” (107-110)

폭력, 무책임, 은폐, 권력, 위계 같은 폭력적인 명사들을 선점하여 공격했을 뿐, 공격의 근거는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114)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 정희진

‘우선/나중에’ 정치를 주장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이 ‘선후’의 기준이 된다. 자신의 시간이 당대성(contemporary)이라고 주장하면서, 시대의 유일한 주인공이고자 한다. ... 모든 권력의 작동 원리는 배제하는 주체가 누구이며 배제되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206)

‘여성 우선’을 지지하는 이들이 페미니즘 언설을 오용하면서 전유(專有)하고 있기 때문에, 이글은 ... ‘피해’,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 ‘신자유주의’에 대한 나의 입장이다. (206)

이 ‘지나친 사명감’과 열정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아 개념과 만나, 온라인 문화를 향유할 때 어떤 페미니즘이 등장할까. (207)

더 약자, 더 큰 피해, 완벽한 피해, 그 집단의 정통적인 피해가 중요시된다. ... 정체성의 정치는 정치화된 정체성(politicalized identity)이다. 피해자성을 본질화하는 정체성 정치는 인간의 실존을 억압당한 경험으로 구성한다. 주변화, 배제, 종속의 상처가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다(서구 역사에서 유대인 박해가 오늘날 시오니즘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 정체성은 담론적 실천의 산물이지 본질이 아니며, 여성 운동이 반드시 정체성의 정치에 기반할 필요는 없다.(《젠더 트러블》의 부제가 바로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이다). ... 피해는 여성의 본질이며 여성은 피해자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여성은 또다시 보편성(uni-versal)으로 묶이게 된다. ... 팔레스타인 여성과 이스라엘 여성의 관계를 고찰한 니라 유발-데이비스는 여성들 간의 차이를 횡단의 정치(trans-versal politics)로 사유하자고 제안한다. (217-218)

피해자 정체성은 사실이 아니라 관념이다. 페미니즘이 ‘피해자로 하나 되기’라면, 그것도 같은 여성의 몸을 가졌기 때문이라면, 이것은 남성 사회의 법칙을 그대로 따르는 논리다. ... ‘피해’와 ‘피해자’ 사이에 놓인 거대한 바다를 건너면, 그 다음에는 ‘피해자’와 ‘피해자화’의 적대가 기다리고 있다. (222-223)

이러한 상황에서 온라인은 각자도생과 자기도취가 결합하는 장이라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 현실에 휘둘리던 힘없는 개인은, 이제 내가 만든 현실이 바로 그 자리에서 현현하는 상황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32)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삶은 일종의 ‘나’들끼리의 밀치는 삶으로 변화했다. ... 나만을 위한 페미니즘, ‘사회 정의로서 페미니즘’이라기보다 각자의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여부, 즉 ‘이익 집단으로서 페미니즘’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기 때문이다. (233-235)

젠더의 역사는 횡단의 정치였으며, 처음부터 젠더는 그 자체로 복합적이었다. 가부장제 사회라고 해서 모든 여성이 같은 방식으로 억압받지도 않고, 같은 방식으로 피해자가 되지도 않는다. 가부장제나 페미니즘이나 모두 완벽하게 작동하는 법은 없다. / 나는 ‘신자유주의 시대 페미니즘의 나아갈 길’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한 사람이 답을 제시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다만, 나는 현재 상황을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희망은 절망적 상황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끝까지 가는, 바닥을 치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지점에서 시작하기. 이것이 절망만이 가진 가능성이다. 근거 없는 희망보다 생산적인 절망이 필요하다.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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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we were, we are, we shall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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