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자신의 입장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입장을 '정죄'하고,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자 할 때, 페미니즘은 파괴적 '무기'로 돌변한다. 종교든 어떤 사회변혁 이론이든 '인간의 얼굴을 상실'하는 것--이것이 가장 위험한 덫이다.

종교든 이론이든 맹목적 열광자가 될 때, 그것이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창의적 도구(constructive/creative tool)'가 아니라, 관점의 다름을 용납하지 않고 정죄하고 악마화해 버리는 '파괴적 무기(destructive weapon)'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피해'와 '가해'인가에 대한 포괄적이고 엄밀한 검증과정이 축소화된 채, 교사에게 '가해자' 표지를 붙이고 기계적으로 매뉴얼 적용을 했다는 것이다. ... 그것이 바로 그 교사를 즉각적으로 '가해자'로 몰아가며 시교육청이 '스쿨미투 대응 매뉴얼'대로 했다면서 '직위해제'까지 시키는 결정은 설득력도, 정당성도 없다.

그러한 <스쿨미투 대응 매뉴얼>이 '피해자-가해자' 구도를 단순하게 고정시켜서, 구체적인 정황의 복합성과 다양한 요소들의 교차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한 '정죄의 무기'로 사용되는 것은 '피해자 보호'의 이름으로 다른 종류의 더 혹심한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기에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이 개념을 공적으로 차용할 때에는, 이 개념 자체가 언제나 오용(misuse)되고 남용(abuse)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예민성과 신중성이 동반되어야 한다.

 '인식의 사각지대'에 대한 지속적 성찰이 결여할 때, 페미니즘은 '설득과 변혁의 도구'가 아닌 '파괴와 정죄의 무기' 로 전이될 수 있다. ... 장기적으로 평등과 정의를 확산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맹목적 페미니즘'이 아닌, 지속적인 학습과 개방성을 가지고 자신은 물론 타자를 '설득'하여 함께 연대할 수 있도록 '동지'를 확장하는 '비판적 페미니즘들'의 확산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인간됨(humanity)을 끝까지 상실하지 않고 지켜내는 것--평등과 정의로운 세계를 원하는 이들의 최후의 보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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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파괴적 무기'가 아닌 '변혁적 도구'가 되어야>
== 어느 도덕 교사의 직위해제 사건을 접하고==

1. 나는 내가 일하는 대학교에서 소위 현대 담론들이라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알리즘, 자크 데리다 사상, 코즈모폴리터니즘, 그리고 페미니즘 관련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가르친다. 이 모든 이론들은 권력(power)구조에 대한 예민성을 배워야 하는 것들이다. 첫번 수업 시간은 나의 교수 철학(teaching philosophy), 또 학생들이 한 학기동안 기억해야 할 것 등의 내용을 담은 개강강의 (opening lecture) 같은 것을 하는데, 여기서 내가 늘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내용이 있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이론/담론들은 '도구(tool)'라는 것이다.이 "이론은 도구 상자(theory is a box of tools)"라는 말은 푸코와 들뢰즈의 대담에서 나온 말이다.

2. 나는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한참 풀어서 새로운 '이론들'을 배우는 대학원 학생들이 언제나 기억하도록 강조한다. 첫째, 연장 박스에 들어가 있는 연장들은 정황에 맞는 적절한 연장을 써야 그 연장의 특정한 목적이 달성된다. 모든 곳에 다 들어맞는 '절대적 연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어떤 연장이라도 그 연장을 '어떻게, 왜 사용하는가' 라는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서 그 연장의 의미성은 달라진다. 즉, 연장 자체가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정당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망치와 같은 연장은 집을 완성하는 데에 필요한 기능을 할 수 도 있고,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연장 '자체'가 그 연장을 사용하는 행위자의 모든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3. 이론과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여성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평등과 정의가 구현되는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를 지닌다. 그런데 무엇이 불평등이며, 무엇이 불의인가에 대한 분석과 입장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이 단수가 아닌 복수로서 '페미니즘들(feminisms)'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다. 한 사건을 보면서도 그 사건에 대한 접근방식이나 입장이 다른 것--그것은 끈기 있는 대화와 설득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가 지닐 수 있는 인식의 사각지대를 일깨우는 과정을 거쳐서 그 정황과 연계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이 생략된 채, 자신의 입장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입장을 '정죄'하고,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자 할 때, 페미니즘은 파괴적 '무기'로 돌변한다. 종교든 어떤 사회변혁 이론이든 '인간의 얼굴을 상실'하는 것--이것이 가장 위험한 덫이다.

4. 나는 이런 이유로 종교든 이론들이든 그것에 대한 '맹목적 열광자'들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나의 학생들을 가르친다. 종교를 포함해서 그 어떤 이론이든 결국 "자신의 인간됨을 실천하기 위함 (practicing one's own humanity)"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열광자는 내일의 압제자'가 될 위험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프랑스혁명의 휴머니즘이 '모든 인간의 자유, 평등'이라는 원리를 혁명과정에서 스스로 배반한 것 처럼, 종교든 이론이든 맹목적 열광자가 될 때, 그것이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창의적 도구(constructive/creative tool)'가 아니라, 관점의 다름을 용납하지 않고 정죄하고 악마화해 버리는 '파괴적 무기(destructive weapon)'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광기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특정한 종교나 이론이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해도, 언제나 그것과의 '비판적 거리 두기'가 필요한 이유이다.

5. 나는 요즈음 올 해 '한길사'에서 나오게 될 <혐오시대, 페미니즘에 관한 일곱 가지 질문>이라는 책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작업을 하면서 페미니즘과 관련되어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보던 중, 우연히 최근 광주시의 한 중학교에서 "성윤리 단원 수업"을 가르치는 한 교사가 직위해제 되었다는 뉴스, 그리고 그 지역 여성단체들이 그 교사와 교사를 지지하는 교사 모임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접하게 되었다. 몇몇 학생들이 그 교사가 가르치는 수업에서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시교육청에 신고를 했다고 한다. 교육청은 7월 4일 이 신고를 "학교 내 성 희롱 및 성폭력 고발"로 접수하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시켜야 한다는 '스쿨미투 매뉴얼'에 따라서 7월 24일 그 교사를 직위해제했다고 한다. 문제는 어떤 '피해'와 '가해'인가에 대한 포괄적이고 엄밀한 검증과정이 축소화된 채, 교사에게 '가해자' 표지를 붙이고 기계적으로 매뉴얼 적용을 했다는 것이다. '직위해제'란 무엇인가. '가해자' 표지가 붙여진 '직위해제'라는 것은 한 개인의 생존권 박탈의 문제만이 아니다. 육체적 생존권만이 아니라, 교사는 물론 가족의 사회적 생존권까지 박탈시키는 엄중한 조치이다. "성윤리 단원 수업"을 가르치던 교사가 도대체 어떠한 잘못을 했기에 이러한 엄중한 조치를 당한 것인가.

6. 나는 관련된 여러가지 뉴스들, 그리고 성명서들을 찾아서 읽어보았다. 또한 이 사건에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 11분짜리 단편영화 <억압당하는 다수(the Oppressed Majority)>, 그리고 이 단편영화의 감독인 엘레노오 프리아트 (Eleonore Pourriat)가 넷플릭스의 요청에 의하여 만들어서 2019년 4월 13일에 처음 공개된 98분짜리 <나는 쉬운 남자가 아니다 (I Am Not an Easy Man)> 까지 찾아서 모두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들은 소위 '미러링' 장치를 차용하면서, 여성에 대한 성차별의 심각성을 인지시키는 영화이다. 이론으로 아무리 강조해도 선뜻 이해안되는 여성차별의 현실을, 거꾸로 '남성차별의 현실'로 만든 영화이다. 내가 이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내린 결론은, 이론적 접근이 가져다주지 못하는 성차별적 현실세계의 불평등성과 그 폭력성을 구체적으로 인지하게 하는 '매우 효과적인 교재'라는 것이다.

7. 여성들이 차별당할 때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장면들이, 바로 그 자리에 남성으로 대체하니 '부자연스럽게' 보이고, 지독한 불편함과 수치심까지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웃통벗고서 조깅하는 여자, 지나가는 남자에게 야지하고 성희롱하는 여자 등). 그 불편함은 남성들만이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찾아온다. 당연하게 받아드리던 현실세계가 뒤집어져서 거꾸로 재현될 때, 보통 사람들의 우선적 반응은 불편함이기 때문이다. 11분짜지 단편영화를 수업시간에 보고 불편함과 '수치심'까지 느꼈다는 몇 학생들의 경험, 그리고 교사가 수업중에 한 말들이 정황과 상관없이 '탈정황화'되어 그 교사는 교육청에서 직위해제되었다.

8. 설사 그 교사가 수업시간에 어떤 학생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부적절한 말'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바로 그 교사를 즉각적으로 '가해자'로 몰아가며 시교육청이 '스쿨미투 대응 매뉴얼'대로 했다면서 '직위해제'까지 시키는 결정은 설득력도, 정당성도 없다. '매뉴얼'이란 구체적인 정황에 대한 면밀한 조명과 심층대화가 병행되어야 그 의미를 발현하는 것이다. 매뉴얼에 기계가 아닌 사람이 개입되었을 경우, 어느 상황에나 기계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스쿨미투 운동의 확산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러한 <스쿨미투 대응 매뉴얼>이 '피해자-가해자' 구도를 단순하게 고정시켜서, 구체적인 정황의 복합성과 다양한 요소들의 교차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한 '정죄의 무기'로 사용되는 것은 '피해자 보호'의 이름으로 다른 종류의 더 혹심한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기에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이 개념을 공적으로 차용할 때에는, 이 개념 자체가 언제나 오용(misuse)되고 남용(abuse)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예민성과 신중성이 동반되어야 한다.

9.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층적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변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것들을 함께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에서이다. 우리 스스로 속에 있는 '인식의 사각지대'에 대한 지속적 성찰이 결여할 때, 페미니즘은 '설득과 변혁의 도구'가 아닌 '파괴와 정죄의 무기' 로 전이될 수 있다. 나는 이 지속적인 비판적 성찰을 '건강한 회의주의(healthy skepticism)'라고 부른다. 이 건강한 회의주의를 작동시킬 때, 불필요한 싸움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불필요한 적을 양산하는 오류를 극소화할 수 있게 된다. 장기적으로 평등과 정의를 확산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맹목적 페미니즘'이 아닌, 지속적인 학습과 개방성을 가지고 자신은 물론 타자를 '설득'하여 함께 연대할 수 있도록 '동지'를 확장하는 '비판적 페미니즘들'의 확산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인간됨(humanity)을 끝까지 상실하지 않고 지켜내는 것--평등과 정의로운 세계를 원하는 이들의 최후의 보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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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건에 대한 기사들은 다음의 링크에서 참조:

1) 한겨레 신문 (2019/7/30): 
http://www.hani.co.kr/arti/area/honam/903813.html

2) 오마이뉴스 (2019/8/6):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

2) 연합뉴스 (2019/7/26): 
https://www.yna.co.kr/view/AKR20190726067751054

3) 프레시안 (2019/8/13) <억압당하는 다수>감독이 한국에 보낸 편지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53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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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facebook.com/kangnamsoon/posts/3033283700033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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