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닫힌 방

/ 장 폴 사르트르


이미지: 실내


에스텔: 저요? 어제였죠. 아직 장례식도 안 끝났어요.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마치 말로 묘사하는 내용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하다.)* 바람이 내 도생의 베일을 흩날려요. 울어 보려고 안간힘을 쓰네요. (*각주: 등장인물들이 모두 공동으로 보고 있는 무대 위의 공간과 단 한 명의 인물에 의해서만 환기되고 보이는 담화 속 공간을 나눈 이러한 이중적인 공간의 놀이는 「닫힌 방」의 뛰어난 독창성 중 하나로 평가된다. 경험과 의식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분리로 해석되는 이러한 방식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효과를 불러온다. 각각이 등장인물이 차례로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의 관객이 되고(연극적 관계의 중첩), 닫힌 방이 외부로 열리지만 그것은 지상과의 이 관계가 끊어질 때 더욱 극적으로 닫히기 위해서이며(유폐의 극적 진전), 이 모든 장치가 극의 환상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한다. (26-27)

이네스: 얼마나 단순한지 보세요. 간단해요! 육체적인 고통은 없어요. 맞죠? 그런데도 우리는 지옥에 있는 거고. 그리고 더 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우리는 끝까지 우리끼리만 있을 거예요. 그렇죠? 결국 여기에 한 사람이 비게 되죠. 바로 사형집행인 말예요.
가르생: (낮은 목소리로) 나도 잘 알고 있소.
이네스: 그렇다면 그들은 인력을 아낀 겁니다. 딴 거 없어요. 협동조합 식당에서처럼 손님이 셀프 서비스를 하는 거죠.
에스텔: 그게 무슨 말이죠?
이네스: 바로 우리들 각자가 다른 두 사람에 대한 사형집행인인 거죠.

(사이. 그들은 새로 알게 된 사실을 곱씹어 본다.)

가르생: (다정한 어조로) 난 당신들의 사형집행인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들한테 어떤 해도 끼치고 싶지 않고 당신들한테 아무 볼일도 없어요. 아무것도.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자, 이렇게 합시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가만히 있자고요, 열병식을 하는 거죠. 당신은 여기, 당신은 여기, 나는 저기에. 그러고는 침묵하는 겁니다. 한 마디도 안 하기, 어렵지 않잖아요? 우리들 모두는 혼자서도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니까요. 난 일만 년이라도 말 안 하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6)

이네스: 아! 잊어버린다. 참 유치하네요. 난 당신을 내 뼛속에서까지 느끼는데, 당신의 침묵은 내 귓속에서 울려 대고. 당신은 입에 단단히 못질을 하고 당신 혀를 잘라낼 수는 있겠지만, 당신이 존재하고 있는 걸 막을 수 있겠어요? 당신 생각을 멈추기라도 하겠어요? 난 그 생각이 들려요, 마치 자명종 시계처럼 똑딱거리죠. 그리고 당신한테도 내 생각이 들린다는 걸 알아요. 그렇게 의자 위에 웅크리고 있어 봐야 소용없어요. 당신은 도처에 있고, 주변 소리들도 나한테 도달하는 도중에 다 오염돼 버려요. 당신이 들었기 때문에. 당신은 내 얼굴까지도 훔쳐 갔어요. 당신은 내 얼굴을 알지만 난 내 얼굴을 모르니까. 그리고 저 여자는? 저 여자는요? 당신이 그녀를 나한테서 훔쳐 간 거야. 우리끼리만 있었다면 그녀가 지금 날 대하듯 감히 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안 돼요. 얼굴에서 손을 떼세요, 당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어요, 그건 너무 편한 방법이에요. 당신은 그렇게 무심하게, 마치 부처처럼 자기 자신 속에 파묻혀 거기 머물러 있을 거고, 난 두 눈을 감은 채, 그녀가 당신에게 자기 삶의 모든 소리들, 하다못해 옷 바스락대는 소리까지 전부 당신에게 바치고 당신이 보지도 않는 미소를 보내는 것을 느끼고 있겠지요...... 그건 안 되겠어요! 난 낸 지옥을 선택하고 싶어요. 난 두 눈 똑바로 뜨고 당신을 쳐다보면서 맨 얼굴로 싸우겠어요. (45)

가르생: 당신은 아무것도 못 잡을 거요. 우리는 놀이공원의 목마들처럼 서로의 뒤를 쫓을 뿐 결코 못 만납니다. 그들이 빈틈없이 짜 놨다고 믿어도 좋아요. 포기해요, 이네스. (57)

에스텔: 아니 두 사람 중 누가 나를 자기 샘물이라고 부르겠어요? 당신들은 속지 않아요, 당신들, 당신들은 내가 쓰레기라는 걸 알잖아요. 나를 생각해 줘, 피에르, 나만 생각해, 나 좀 지켜 줘. 네가 ‘나의 샘물, 나의 소중한 샘물’이라고 생각하는 한, 나는 여기에 반만 와 있는 거야, 난 반만 죄가 있는 거고 난 네 곁에 거기 샘물로 있는 거야. 그녀가 토마토처럼 벌겋네. 참 어처구니없군, 우린 백번도 더 저 애를 같이 비웃었잖아. 이 음악은 뭐지, 내가 정말로 좋아했던 건데? 아! 세인트루이스 블루스구나...... (60)

이네스: 당신들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당신들이 이겼으니까. 하지만 잊지 마요, 내가 여기서 당신들을 보고 있다는 걸. 당신들한테서 눈을 떼지 않을 거예요, 가르생. 당신은 내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안아야 할 거야. 둘 다 얼마나 증오스러운지 모르겠어! 어디 사랑해 봐, 사랑해 보라고! 우린 지옥에 떨어져 있으니 내 차례도 오게 될 걸. (66)

에스텔: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비겁하건 아니건 안아 주기만 한다면야.
가르생: 그들이 시가를 피우면서 머리를 끄덕거리고 있군, 지겨운 거지. 그들은 가르생이 비겁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말랑하게, 어렴풋이. 그래도 어쨌든 뭔가를 생각하려는 거야. 가르생은 비겁한 놈이다! 이게 바로 그들이 내린 결정이야. 그들, 내 친구들이 말이야. 반년이 지난 후엔 이런 말도 하겠지, “가르생같이 비겁한”이라고. 당신 둘은 운이 좋아, 땅 위에서는 아무도 당신들 생각을 더 안 하잖아. 난, 내 삶은 그보다 훨씬 질기지. (70)

에스텔: 내 사랑, 내 사랑! 나 좀 봐요, 내 사랑! 나를 만져요, 나를 만져. ... 그들도 하나씩 죽을 거예요, 그러니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잖아요. 그들을 잊어버려요. 이젠 나밖에 없는 거야.
가르생: (손을 빼며) 그들은 나를 잊어버리지 않아, 그들은. 그들은 죽겠지, 하지만 다른 이들이 또 와서, 지령을 받게 될 거야. 난 그들 손에 내 인생 전체를 남겨 놓은 꼴이지.
에스텔: 아!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아!
가르생: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어? 전에 난 행동했었지...... 아! 단 하루만이라도 그들 사이로 돌아간다면...... 멋지게 반박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게임은 끝났어. 그들은 나를 빼놓고 결산을 해 버렸지. 그들이 옳아, 난 죽었으니까. 덫에 걸린 쥐새끼 꼴이지. (그가 웃는다.) 나는 일종의 공공재산이 되어 버린 거야. (71-72)

가르생: 내가 비겁한 놈이라고 떠드는 자들이 수천이야. 하지만 수천이 대수야? 하나의 영혼이, 다 하나의 영혼이라도, 내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고, 나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고, 나는 용감하고 결백하다고 온 힘을 다해서 자신 있게 말해 줄 수 있다면, 나는......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 나 좀 믿어 주겠어? 그럼 넌 내게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될 거야. (72)

이네스: (에스텔에게 다가서며) 이런, 내 종달새, 뭐가 만족스럽지 못한가? 넌 저 남자 마음에 들려고 내 얼굴에 침을 뱉었고 우리는 저 남자 때문에 서로 싸웠잖아. 한데 그 골칫거리가 떠나 버리고 우리 여자들끼리만 남겨놓을 거래.
에스텔: 그래 봐야 당신은 아무것도 못 얻을 걸? 이 문만 열리면, 나도 도망칠 거예요.
이네스: 어디로?
에스텔: 어디로든지. 당신한테서 최대한 먼 곳으로.

(가르생은 문을 계속 두드리고 있다.)

가르생: 열어! 열라고! 다 받아들이겠소, 족쇄며, 집게며, 납물이나 족집게, 주리를 틀어도 좋고, 태워도 좋고 찢어도 좋고, 난 아예 진짜 고통을 원한다고. 차라리 백 번 뜯기고 채찍질에 황산 세례가 더 낫겠어, 이 머릿속 고통, 스쳐 지나고 쓰다듬으면서 결코 속 시원히 아프지도 않은 이 유령 같은 고통보다는 말이야. (그가 문고리를 붙들고 흔들어 댄다.) 좀 열어 봐! (문이 갑자기 열린다. 그가 넘어질 뻔한다.) 헉!

(긴 침묵)

이네스: 자, 가르생? 나가야지요.
가르생: (천천히) 이 문이 왜 열렸는지 생각하고 있소.
이네스: 뭘 기다려요? 가요, 빨라 가라니까!
가르생: 안 갈 거요.
이네스: 너는, 에스텔? (에스텔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네스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면? 누구죠? 셋 중에 누구예요? 길은 뚫렸는데,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게 누구지? 어 참! 웃겨 죽겠군! 우린 헤어질 수 없는 처지군.

(에스텔이 그녀를 뒤에서 덮친다.)

에스텔: 헤어질 수 없다고? 가르생! 날 좀 도와줘요, 빨리요. 이 여자를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닫아 버리는 거예요. 맛 좀 보여 주게.
이네스: (발버둥 치며) 에스텔! 에스텔! 제발, 날 데리고 있어줘. 복도는 안 돼. 날 복도에 던지지 마.
가르생: 그녀를 놔줘.
에스텔: 미쳤어, 이 여자는 당신을 증오해요.
가르생: 그녀 때문에 내가 남는 거야.

(에스텔은 이네스를 놔주고 기가 막혀서 가르생을 쳐다본다.)

이네스: 나 때문에? (사이) 좋아, 그럼, 문을 닫자고. 문이 열리니까 열 배는 더 더워. (가르생이 가서 문을 닫는다.) 나 때문이라고?
가르생: 그렇소. 비겁자가 뭔지를 알지, 당신은.
이네스: 그래요, 알아요.
......
가르생: ... 이네스, 이제는 우리뿐이오, 나에 대해 생각할 사람은 당신 둘뿐이지. 저 애는 안 쳐요. 하지만 당신, 나를 증오하는 당신은, 당신이 날 믿어 준다면 날 구원하는 거지.
......
가르생: 난 너무 일찍 죽었소. 사람들이 내 행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안 줬단 말이오.
이네스: 우리는 언제나 너무 일찍 죽죠. 혹은 너무 늦게 죽거나. 하지만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거예요. 줄은 그어졌고, 이제 결산을 해야 해요. 당신은 당신 인생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르생: 독사 같은 것! 못하는 대답이 없네.
이네스: 어서! 어서! 용기를 잃지 말고. 날 설득하는 일쯤은 당신한테 쉬울 거 아녜요. 반박을 해 봐요. 노력을 해 봐. ... 그런데 봐, 내가 얼마나 약한지, 하나의 숨결일 뿐이지. 당신을 쳐다보는 시선일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을 생각하는 이 무색의 사유일 뿐이지. ......
에스텔: 가르생!
가르생: 뭐?
에스텔: 복수해요.
가르생: 어떻게?
에스텔: 날 안아 줘요, 그러면 저 여자가 지껄이는 걸 듣게 될 거예요.
......
이네스: 하! 비겁한 놈! 비겁한 놈! 그래! 여자들한테나 찾아가서 위안받으셔!
에스텔: 지껄여, 이네스, 지껄이라고!
......
이네스: ... 비겁자 가르생이 유아 살해자 에스텔을 품에 안고 있다. ... 내가 당신들을 보고 있어, 내가 당신들을 본다고. 혼자서도 나는 군중이야, 군중, 가르생, 군중이라고, 알아들어? (중얼거리며) 비겁한 놈! 비겁한 놈! 비겁한 놈! 비겁한 놈! 도망가야 소용없어, 내가 널 놔주지 않을 테니까. 그 애 입술에서 뭘 찾겠다는 거야? 망각? 하지만 내가 널 안 잊어버릴 거야, 내가. ...
가르생: ... 나를 잡아먹는 이 모든 시선들을...... (그가 갑자기 뒤돌아선다.) 이런! 당신들 둘밖에 안 돼? 난 당신들이 훨씬 많은 줄 알았지 뭐야. (그가 웃는다.)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
이네스: 죽었다고! 죽었어! 죽었어! 칼도, 독약도, 밧줄도 안 돼. 이미 끝난 일이야, 알아들어? 그리고 우린 언제까지나 함께 있는 거야.
......
가르생: 좋아, 계속하지. (7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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