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할 곳 없는 천사(free board)


[끄적] 안녕들의 반격

조회 수 1171 추천 수 0 2013.12.14 16:17:20

안녕들의 반격



1.

94년 6월 23일 새벽 4시. 철도노조 파업. 5분 대기조였던 나는 하숙집으로 걸려온 선배의 전화를 받고 K(고대)로 갔다. 그리고 학생회관에서 처음 파이를 잡았다. 

다음 택은 SKK(로 쓰고 에스꽝꽝으로 읽는다. 성균관대)이었다. (중간에 잠깐 학교에 들러 기말과제를 제출하고-_-) 여기서 같이 죽자며 물량을 준비했다. 각목을 든채 치약을 바르고 랩을 붙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백골들도 감히 학교 안으로 기어 들어오지 못했다.

마지막 택은 종묘공원 앞 가투였다. 빨간 신호등에 맞춰 동을 뜨고, 사수대가 도로를 점거했다. 그런데, 아뿔싸. 택이 오픈되었다. 본대 보다 먼저 백골들이 달려들었다. 축구반의 명예를 걸고 종묘공원을 도망다니다 결국 뒤에서 날라온 날라차기에 무릎이 꿇렸다. 어깨동무를 한 백골들이 '피의 불벼락'을 부르며 한참을 드리블 했다.

바람빠진 축구공의 신세가 되어, '내가 왜 지금 얘네들한테 밟히고 있는지' 궁금했다. 다음날 동대문서에서 형사들과, 같이 딸려온 학생-노동자들과 육개장에 월드컵을 보면서도,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2.

1994년 4월 30일, 메이데이 전야제 때문이었다. 대자보를 보고 겁대가리 없이 혼자 집회에 나간 것이다. 과방이 어딘지도 모르고 집-강의실-도서관을 왕복하던 소위 '일반학우'(운동권 언어 중 최악의 단어가 아닐까)가 '꿘'이 되는 데는 그리 대단한 계기나 결심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학과전공학회 2학년생이 스승의 날 선물을 사러 그레이스 백화점(현 현대 백화점)에 갔을 뿐이다. 

백화점 정문 앞에서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선전전을 하고 있던 과 동기를 만났다. "아, ㅇㅂ아, 내가 다른 일이 좀 있어서, 이것 좀 사람들한테 나눠줄래?" 얼떨결에 팜플렛을 넘겨 받았다. "어...어..." 어떻게 나눠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뭔가 좀 뻘쭘하고 거시기 해서, 그냥 어디에 올려 두고 갈까 싶었지만, 왠지 미안했다. 학교에 와서야 고개를 숙인채 "저, 저기...... 이거...좀..." 

그 후에 대자보의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철거 투쟁, 노동자 해고, 경찰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된 학우... 그때까지 알던 세계와는 너무 다른,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적혀 있었다. 선배도, 학생회도, 동지도, 조직도 없었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수 밖에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좌우 물불가리지 않고, 어제는 쌀투쟁, 오늘은 전해투, 내일은 메이데이 전야제에 간 것이다. 

1차는 경희대 노천, 2차는 고대 노천이었다. 노동자문예창작단의 바리케이트를 보며, 울컥했던 기억도 난다. 문제는 그 전야제라는 것이 밤을 새는 것인 줄 몰랐다는 것. 단위 별로 숙소를 정해주겠다는데, 나는 단위가 없었다. 막차도 끊기고 춥고 배고팠다. (당시는 PC방도 없었고, 가게들은 12시에 모두 문을 닫았다.) 그 때, 저 멀리 'ㅅㄱㄷ 진보시대 개척단'의 깃발이 보였다. 그리고 그 깃발이 운명을 갈랐다-_- 


3.

주절주절 길어졌지만, 그로부터 어언 20여년이 지났다. 비판할 점도 반성할 점도 많이 있겠지만, 저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 왔다고/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 자보를 읽게 된 것, 집회에 나가게 된 것, M선생을 알게 된 것, 자그마한 상처들은 있었지만, 크게 후회한 적은 없다. (후회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물론 앞으로도 그 때의 질문들/고민들에 부딪혀 가며 계속 답을 찾을 것이다. 백골도 대공분실도 사라졌지만,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콜텍, 재능, 쌍차, 강정, 전교조, 삼성, 밀양, 철도노조, 그리고 삶과 노동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투쟁들에 권력과 자본이 지랄 발광을 떨고 있다. 그 지랄들을 다 받아 주다보니 몸과 마음이 지친 것도 사실이고, 먹고 살기 바빠 모른척 무시하자니 마음 편치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최근의 일베 어른이들의 개드립과 기관원들의 댓글 놀이와 저 안하무인 정부와 정치인과 언론과 군경의 코메디는 가만히 두고 보고 있기가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에 대해 숨 죽이고 있었지만 묵묵히 자기 삶을 살고 있던 수많은 안녕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고 있다. 삐뚤빼뚤 정성껏 눌러 쓴 작은 고민들과 독백들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글터진다며 외면받았을 "안녕들 하십니까"의 한문장 한문장이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며, 서로의 마음을 이어 주고 있다. 철도노조가 "시민들이 이렇게 지지해주는 파업은 20년만에 처음"이라고 하듯이, 이렇게 집회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가슴 속에, 투쟁의 현장에 그리고 삶의 터전 곳곳에, 안녕하지 못한 이유와 조금 더 안녕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공간과 거리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내 마음의 리듬을 믿고', 안녕하지 못한 조건들을 조금씩 혹은 한번에 바꿔 나가고 싶다. 우리가 바라는 세계가 이미 곁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만들어 온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금 더 행복하고 안녕히 살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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