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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 다시 보다

/ 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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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편을 읽은 것은 세 번째인 것 같다. 한 번은 중학교 때, 한 번은 고등학교 때, 그리고 지금.

"변신"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모호한 기호와 상징들 에 휩싸여 있다는 기분이 든다. 지난 시절에 읽었을 때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문맥들이 섬뜩하게 살아온다. 카프카의 고향인 체코의 프라하에서는 다른 나라의 음악가들이 가서 쇼팽을 연주하기를 꺼린다고 한다(쇼팽도 그 곳 사람이다). 왜냐면 그 동네 사람들은 쇼팽의 곡이라면 어느 구절 어느 부분이지 워낙 빠삭하게 알고, 음감이 워낙 뛰어나 실수를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에 손이 떨려 연주가 어눌해진다고 한다. 내가 카프카에 대해 말하는 것도 그런 격이리라. 특히, "변신"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이어서 더욱 그러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다.

"변신"은 카프카다운 소설이 아니다. 그의 "성"이나 "심판" 혹은 "선고" 등의 장/단편들과는 달리, 가장 소설적으로 출발하고 있다. 그의 다른 소설들은 처음에는 쉬워보였던 어떤 시도가 혹은 단순해보였던 어떤 혐의가 나아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미로를 뺑뺑 돌면서 한 개인을 파멸시키거나 절망시키는 구조를 지닌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성" 등은 미완성이라 그렇지만 어떤 완결되지 않은 답답함이 꽉 차 있다. 무기력감과 절망이 배어 온다. 물론 "변신"도 카프카의 그런 기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아까 내가 쓴 소설적이라는 표현은 어느 날 흉측한 꿈을 꾼 뒤에 일어나보니 한 마리의 거대한 벌레가 되어 있더라는 섬뜩한 안사츠(ansatz)를 겨냥하고 있다. 이건 리얼리티로 설명되기는 어렵다. 자고 일어나면 그런 벌레가 되어 있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 그래서 여긴 어떤 알레고리가 개입한다.

이 소설을 번역했으며 카프카에 대해 오랜 연구를 한 듯이 보이는 박환덕 교수는 이 같은 변신(의 저주)을 당하게 된 이유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형식적이고 기능적인 자기의 역할을 포기하고 실존으로서의 자기를 찾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변한 것이라고 한다. 잠자는 어느 회사의 영업 판매사원이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부양하는 미혼의 가장이다. 그런데 그는 충실히 그의 역할을 다하고 있긴 하지만 그런 삶에 염증을 느껴 5‾6년 뒤에는 사표를 던지겠다고 결심한다. 그런 삶의 전환태도가 그의 변신을 불렀다는 것이 박교수의 이야기다.

물론 그렇게 볼 수 도 있으리라. 그것이 카프카의 생각일 수도 있으리라. 삶의 전환을 꿈꾸는 자가, 흉측한 몸의 변신을 입게 되는 것은 비교적 자연스런 상징적 이행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의 느닷없는 변신에 어떤 이유를 들이대려고 하는 기도가, 사실은 우스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보니 벌레로 바뀌어있다는 사실은 어떤 이유를 붙여도 산뜻하게 설득되지는 않는다. 삶의 전환욕구(자아 찾기 욕구)와 변신을 같은 맥락에 놓고 보기 시작하면, 이 작품은 거대한 이중 알레고리를 담는다. 자아를 드러낸 인간이 겪어야하는 수많은 고난을 암시하는 알레고리군이 다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문맥들에는, 일정하게 자아 찾기에 대한 무모성과 가당치않음에 대한 비난을 깔게 되는 점도 있다. 그래서 그렇게 소설을 복잡하게 풀어갈 바에야 그냥 그가 변신했다는 사실을, 기본 전제로 출발하는 것이 나을 것도 같다. 어쨌든 그는 벌레로 변했다.

그 뒤의 이야기는, 그가 벌레로 변한 뒤에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고통스런 사건들이다. 우선 스스로가 자신이 벌레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벌레는 아직도 게오르그 잠자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마음이 아직 벌레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는 가족도 알아보고 싫고 좋음도 표현할 줄 알며, 음악도 좋아한다. 그의 마음이 "잠자"라는 옛 인격 그대로 이기에, 그가 당하는 모든 것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충격들이다. 그는 심각한 자기소외를 경험한다.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벌레로 변신한 몸과, 아직 변신하지 않은 마음과 인격 사이의 심각한 갭을 처음엔 어리둥절해한다.

"너무 일찍 일어나서 이렇게 바보가 되어버린 거야. 사람은 잠을 충분히 자지 않으면 안 되는데."라고 엉뚱한 이유로 현재의 충격을 설명해본다든가, "자아, 지금은 일어나야만 돼. 기차는 5시에 출발하니까."하는 식으로 아직도 자기 몸에 일어난 심각한 사태에 대한 자각이 없다. 그저 외판원으로서의 어제까지 해왔던 생활의 관성만을 되뇔 뿐이다.

독자인 나는, 벌레로 변한 그와, 아직도 벌레가 되지 못한, 외판원 잠자의 틈새에서 그 충격과 놀라움을 읽는다. 그는 기를 쓰고 출근하려고 한다. 카프카의 문맥들이 그렇듯이, 부분부분적으로 문맥들은 항상 정연하고 논리가 서있는 것 같다. 빈틈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보면, 도무지 세상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황당함이 느껴진다. 이성적 선택과 사회적 역할이란 측면에서 카프카의 등장인물들은 결코 흐트러짐이 없어 보이지만, 그 등장인물들이 엮어가는 사건의 전체줄기는 우스꽝스러움이다. 우스꽝스러움이 진지함 속에 배어 올라오고 있어, 그것을 읽는 독자는 착잡해진다. 그래서 사르트르니 까뮈니 하는 사람들이 실존주의와 부조리 문학의 원조라고 카프카를 떠받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레고르 잠자는 격심한 자기소외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직장의 지배인이 와서 경악하고 돌아가고, 가족들이 대하는 태도를 보게 된 뒤, 차츰 그가 벌레의 몸뚱이를 입고 있는 흉측한 생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결코,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격은 자존심을 놓지 않는다. 그가 누이동생의 바이올린 연주 때, 자신이 음악을 좋아하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왜냐면 그는 아직 인간이기 때문에) 무리한 행동을 해, 온 식구들과 하숙생들의 경악과 분노를 사게 되면서, 그의 이런 태도는 달라진다. 그는 누이동생의 말을 듣는다. "저건 인간도 아니에요.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듣고 난 뒤, 그는 죽는다. 그의 죽음은 "인간도 아닌" 벌레로의 완전한 일치이다. 따라서 그의 변신은, 이 최종 장면, 바로 그의 죽음에서 완성되는 듯하다. 몸도 마음도 모두 벌레로서 죽어가는 것이다.

다음은 그의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소외를 살펴보자.

그의 가족들은 그가 벌레로 변신한 사실을 금방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자아가 그것을 인정하는 것과는 달리, 가족들로서는 외피 혹은 외면적인 것이 그에 대한 인식에 가장 우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유형은 각인각색이다. 누이동생은 그 흉측한 외양을 보는 것은 끔찍이 두려워하면서도, 종전의 오빠였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어, 그 공포감을 견디면서 오빠의 방에 출입한다. 그에게 음식을 마련해주는 것도 그녀다. 하지만 누이동생이 그렇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다만, 견디는 것이었을 뿐, 자발적인 호의는 아니었다. 관계의 관성이 남아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잠자로 말미암아 집안이 더욱 어렵게 되자, 그녀는 "그를 죽이자."고 아버지에게 말할 정도다.

어머니는 그 현실을 바라보지 않으려한다. 그 방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쩌다 실수로 벌레인 자기 아들을 보았을 때 까무러친다. 그녀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잠자와 닮아있다. 그녀는 끝까지 상황이 호전되기만을 기다린다. 그래서 철저히 무기력한 모습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분개하는 스타일이다. 그의 아들이 벌레로 변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런 벌레가 가족의 안전을 위협할 가능성에 대해서 히스테리컬하다. 그는 아들인 벌레 에게 사과를 던져 치명상을 입힌다. 그는 그를 거의 아들로 대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벌레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상황을 재빨리 받아들이고, 생활전선에 다시 복귀하여 이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일에 착수한다. 아버지의 이런 변신은, 가장 냉정한 상황인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레고르를 찾아온 지배인의 대응방식 또한 아버지를 닮아있지만 더욱 단호하다. 그는 핏줄의 연이 없기 때문에, 현상 파악에 더욱 충실하다. 세 명의 하숙생이나, 청소부 아줌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단지 벌레로만 인식한다. 그들은 특히 인간으로서의 그레고르를 보지 못했기에 상황을 바라보는데 인식의 관성이 주는 장애를 경험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아줌마는 잔혹하기까지 하다. 의자를 들어 벌레를 죽이려 하며, 나중에 그레고르가 죽었을 때, "깨끗이 끝내는" 역할도 맡는다.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그레고르 잠자는 철저하게 소외당한다. 그의 죽음은 바로 사회적인 죽음이다. "변신"이라는 주제는, 사회 부품으로서 꼭 적합하던 나에서, 그렇지 않은 나로 변했을 때 겪게 되리라고 상상되는 소외를 드러내는 데 극적인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짚어볼 궁금증 하나.
잠자가 변한 동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가족들은 그저 벌레라고만 말한 점을 보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생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벽에 달라붙어 그림을 못 떼어가게 하는 장면에서 추정한다면 좀 길쭉하게 생긴 벌레였던 것 같다. 실 같은 다리가 부지런하게 하늘거리는 점을 본다면, 지네처럼 생긴 다족류였던 거 같다. 등짝에 약간 각질이 있고, 옆구리와 등짝의 이음매부분은 연질이었던 것 같다. 사과에 맞아, 사과가 총알처럼 몸에 푹 박힌 점을 보면 그렇다.

카프카의 "변신"은 탁월한 알레고리이자 일종의 풍자일 수도 있다. 현대의 기능사회로 넘어오면서, 한 개인이 분담한 자기기능을 수행해야하는 역할에서 부적당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때,그가 어떻게 소외되어 가는가에 대한, 매우 리얼한 보고서이다.

아빠 회사의 모 간부는,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계단을 오르다가 쓰러졌다.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가다가 의식을 잃은 것이다. 그의 증세는 중풍이었다. 그는 50대 가장으로 중학교 3학년인 딸이 있고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있다. 아직 퇴직하기에는 여건이 어려운 사정이지만, 지난 번 명퇴 바람 때 회사로부터 퇴직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말이 없었다는 그는 남들만큼 두드러지진 않았어도 별 과오 없이 살아간 지라 자기에게 그런 날벼락이 떨어질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는 권유를 거부했다. 그가 사직하면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딸은 누가 공부시키며, 또 아직 기력도 팔팔한데 왜 퇴직을 하라는거냐? 이렇게 항변했으리 라. 그래서 그의 퇴직은 취소되었고, 그는 그 뒤로 거의 일요일도 없이 매일 미친 듯이 출근해서 일을 했다고 한다. 살아 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의 머리를 짓눌렀으리라. 윗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의욕적인지 보이려고 했으리라. 그가 가벼운 풍 증세를 보인 건 이미 한 달 전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숨겼다. 혼자 한 쪽 뺨에 땀이 흐르는 것을 숨기고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일들을 처리했다. 그러다가 쓰러진 것이다.

그는 한방병원에서 두 달 간 치료를 받았다. 중풍이라는 병은 원래 완전 치유가 어려운 병이다. 재발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으며 특히 일 년 내에 재발할 경우 치사율이 매우 높다고 한다. 그가 다시 스트레스와 일에 내몰릴 때 재발하지 않으리라고 누구도 장담 못한다. 요즘 그는 출근하여 다시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주위의 안쓰러운 눈길을 느끼리라. 회사는 그에게 "아주 쉬운 일"을 하도록 배려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회사에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 있겠으며, 그렇게 하도록 그를 내버려두겠는가?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 그는 물론 옛날의 그로 다시 복귀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그를 이제 현업에서 뛸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혹시 일하다가 쓰러질까봐 두려운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의 비참한 "변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소외. 그것들은 카프카의 주제에 대한 변주를 이루는 것만 같다.

또 다른 예화 하나.

얼마 전 "인간극장"이라는 TV 프로에서 교통사고로 전신에 화상을 입은 한 여자의 이야기가 소개된 적이 있다. 그녀는 아름다운 처녀였으나, 그 화상으로 가슴도 사라졌으며 코도 입술도 귀도 뺨도 다 사라졌다. 달걀귀신처럼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그렇게 변신했고, 사람들은 그녀가 재수 없다고 피하고 무섭다고 피하고 동정하며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차라리 죽었으면 행복했을 걸."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과정은 얼마나 더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형극이었을까. 꿈 많던 아름다운 젊은이에서, 어느 날 느닷없이 괴물로 변한 그녀 스스로에 대한 자기 인식. 그것은 차라리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그 변신의 저주를 이기고 살아남아 공부도 하고 거리도 걸으며 즐겁게 살고 있다는 후문이 TV를 통해 전해졌다.




[출처] 『캠프사이드』 1호, pp.25-27, 200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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