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끝


박인환을 아시나요

조회 수 4470 추천 수 0 2002.12.07 19:04:46
시인 박인환(기인열전 내 멋에 산다:64)


◎ 통속적인 것을 거부한 "댄디보이"/여름에도 정장 즐긴 멋쟁이… 폭음 으로 30세에 요절/명동 단골술집서 취기오르면 즉석 詩 줄줄이…/낙원 동서 서점경영… 한국모더니즘 시운동 본거지로/중학교때 영화문학에 심 취… 시집열독에 밤 지새우기도

1956년 이른 봄.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어느 정도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는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경상도집」에 몇 명의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 다.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羅愛心(나애심)도 함께 있었는데,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다. 그러 나 나애심은 노래를 하지 않았다. 朴寅換(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 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다. 그것을 넘겨다보고 있던 李眞燮 (이진섭)이 그 시를 받아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 그 악보를 들고 나애심이 노래를 불렀는데,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지 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바 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수가/가을의 공원/그 벤취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 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한 시간쯤 지나 宋志英(송지영)과 나애심이 자리를 뜨고,테너 林萬燮(임만섭)과 명동 백작이라는 별명의 소설가 李鳳九(이봉구)가 새로 합석했다. 임만섭은 악보를 받아들고 정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소리를 듣고 명동거리 를 지나던 행인들이 술집 문앞으로 몰려들었다.

해방 후 평양의학전문 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부친과 이모로부터 차입한 돈 5만원으로 시인 吳章煥(오장환)이 낙원동에서 경영하던 20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받아 초현실주의 화가 朴一英(박일영)의 도움을 받아 간판을 새로 달고 재개업한다.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했던 서점 「茉莉書舍(마리서사)」이다. 서점 명칭은 일본시인 安西冬 衛(안서동위)의 시집 「軍艦茉莉(군함마리)」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땄다는 설도 있지만 확 인은 불가능하다. 「마리서사」의 서가에 진열된 책들 대부분은 박인환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이었는데,문학인들과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서점 이었다. 앙드레 브르통,폴 엘뤼아르,마리 로랑생,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시인들의 시집,「오르페온」「판테온」「신영토」「황지」와 같은 일본 의 유명한 시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리서사」에는 하루도 시인이 나 소설가 화가들이 모여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 金光均(김광균) 이봉 구 金起林(김기림) 오장환 張萬榮(장만영) 鄭之溶(정지용) 金光州(김 광주) 등 시인소설가들,「新詩論(신시론)」동인 金洙暎(김수영) 梁秉 植(양병식) 金秉旭(김병욱) 金璟麟(김경린) 등,조향 이봉래 등의 「 후반기」 동인들,화가 최재덕 길영주들이 「마리서사」의 단골손님들이었다 . 특히 김수영은 박인환 동년배로 동인활동을 함께 하며 「새로운 都市 (도시)와 市民(시민)들의 合唱(합창)」이라는 앤솔로지를 내기도 하는 등 두터운 교분을 가졌다. 그러나 나중에 둘 사이는 소원해졌다. 김 수영은 진보주의자이며 서구적인 새로운 것에 경도되었던 박인환의 취향을 경박하며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고 몰아붙이며 경멸하고,박인환은 김수영 이 세속적인 눈치만 보는 속물이라고 비난했다.

박인환은 1926년 8월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부친 朴光善(박 광선)은 중등교육을 마친 사람으로 면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는데,토지도 어느 정도 소유한 시골 살림으로는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인제공립보 통학교에 입학한 박인환은 머리가 좋고 똑똑하여,부친은 아들 교육을 위 해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서울로 생활터전을 옮기며 산판업을 시작한다. 가족들이 인제에서 서울 종로구 원서동 언덕빼기로 이사를 하고,그는 덕 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1939년 박인환은 경기공립중학교로 진학하는데,이 무렵 영화와 문학의 세계로 빠져들어 공부 대신에 일어 로 번역된 세계문학전집과 일본 상징파시인들의 시집을 열독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결국 교칙을 어기며 영화관을 출입한 것이 문제가 되 어 경기중학을 중퇴한 그는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의 명신 중학교에 편입하여 그곳을 졸업한다. 졸업 뒤 부친의 강요로 3년제 관 립학교인 평양의전에 진학하지만,해방이 되자마자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내려온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얼굴을 한 미남자 박인환은 당대 문 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댄디보이」였다. 여름에도 정장을 하곤 했던 그는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고 말했 다. 어느날 그는 친구들 앞에 땅끝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나타 나 『이게 바로 에세닌이 입었던 외투란 말이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 다. 에세닌이 자살하기 직전 입었던 외투 사진을 본떠 미군용 담요로 지어 입은 것이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시인 金次榮(김차영)은 말한다 .

『그가 입고 다닌 양복은 외국 고급천에 일류 양복점의 라벨이 붙 어 있었다. 거기에 흐린 날은 손잡이가 묘한 박쥐우산,봄가을엔 우유빛 레인코트,또 겨울엔 러시아 사람들처럼 깃이 넓고 기장이 긴 진회색도 검정도 아닌 중간색의 헐렁한 외투를 입고 다녔다』

박인환은 통속적 인 것을 혐오하고,원고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고,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 잔 함께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드러 내 보이곤 했다. 수주 변영로가 금주를 선언하자 그를 찾아가 술을 마 시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자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문인 선후배들이 함께 모여 있던 한 영화의 시사회장 에서 느닷없이 일어나 선배 평론가 백철을 향해 『어이,백철씨 저걸 알 아야 돼. 저걸 모르고 무슨 평론을 한단 말이오!』라고 일갈했다는 일 화도 남아 있다.

그가 생애 동안 가장 사랑했던 것 중의 하나가 책 이었다. 『그는 보기드문 愛書家(애서가)였다. 양으로는 대단치 않았으 나 책을 다루는 폼이 이만저만한 애서가가 아니었다. 이 회고담이 실릴 「현대문학」만 하더라도 손때가 묻지 않도록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 가지고 다녔다』라는 장만영의 회고대로 그는 보기드문 애서가였다. 당 시 한국일보에 다니던 시인 金奎東(김규동)의 사무실에 가끔 나타나 『 吳昔泉(오석천) 선생을 만나야 한다』고 우물쭈물 앉아 있다가 김규동이 자리를 비우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경제나 정치서적까지 슬쩍 집어들고가 수집하곤 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 프의 생애와/木馬(목마)를 타고 떠난 淑女(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 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傷心(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고 노 래했던 박인환은 1956년 3월20일 오후 9시에 세상을 떠났다. 李 箱(이상)을 좋아했던 그는 이상의 기일인 3월17일 오후부터 주변 사 람들과 함께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을 했다(그러나,이상이 실제로 죽은 것은 1937년 4월17일 새벽 4시경이었다). 그날 박인환은 옆자리 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간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 야지」라고 메모한 것을 주었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

메모지를 건네며,무슨 예감이라도 했던 사람처럼 박인환은 씩 웃었다. 20일 밤 만취상태로 세종로에 있던 집에 돌아온 그는 『생 명수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유언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우리 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靑春(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雜誌(잡지)의 표지처럼 通俗(통속) 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그는 「잡 지 표지처럼 통속」적인 인생의 무엇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의 갑작스런 부음에 놀라 21일 새벽 그의 집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차디찬 방에 꼿꼿이 누워 천장을 향해 눈을 치뜨고 있는 그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치뜬 눈을 송지영이 감겨주었고,또다른 친구가 그의 시신에게 조니워커를 따라주었다. 그의 시신이 시인장으로 망우리 에 묻힐 때 그의 지인들은 그가 좋아했던 조니워커와 카멜담배도 함께 묻어 주었다.<장석주 작가> ( 1998/11/24 00:00 )

시린

2004.11.09 14: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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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명동백작] 보기 전에는 이 글이 재밌게 읽히지 않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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