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끝


유년시절의 결혼계획

조회 수 4209 추천 수 0 2002.12.08 12:37:55
나에게는 한 동네에서 초등학교때부터 같이 지내온 동갑내기 친구들이 몇 있다.
보상이, 종진이, 요한이, 기혁이, 경훈이.
그러고보니 대강 잡아도 15년은 된 사이로 이제 제법 옛날 이야기를 해도 멋이 난다.
어렸을 땐 키도 비슷하고 얼굴도 비슷했는데 몇 번의 신호등을 지나고 우리는 갈 길이 모두 달랐다.
소심하고 여성스럽지만 조금은 냉소적인 보상이는 내년에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간다.
약간 거칠고 그렇지만 진지한 종진이는 재수에 실패하고 편입시험을 준비중이다.
항상 유머가 넘치고 정을 주었던 요한이는 작은 밴드에서 드럼을 치며 매일 연애에 실패하는 중이다.
3대 독자인 기혁이는 팔방미인의 재주를 바탕으로 '독실한' 사교계를 누빈다.
경훈이는 대학에 와서 여호와증인이 되었는데 집총거부로 수감되었다가 최근에 나와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나는 매일 엉뚱한 짓하는 게 여전하지.

그런데 평소 연락이 뜸하던 경훈이가 어제 메신저를 통해 결혼소식을 알려왔다.
날짜는 내년 3월 1일, 장소는 안양이다.
신혼집은 인적이 드문 수안보 조용한 곳에 차릴 것이라 했다.
결혼할 사람은 상은이다, 우리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상은이와 경훈이는 초등학교때부터 서로 좋아했다.
자세한 속사정이야 알 길이 없지만 둘은 한번도 멀리 떨어진 적이 없던 것 같다.
상은이는 집안이 그런지 몰라도 일찍부터 여호와증인이었던 것 같다.
상은이를 좋아하는 경훈이가 혼자서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여호와증인은 같은 여호와증인끼리만 결혼한다고 하더라,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연애에 대한 관념도 매우 엄격해서 비신도와 사귀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경훈이는 결국 여호와증인이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보상이는 매우 흥분하며 비난하는 입장이지만, 난 꼭 그렇지도 않다.
계기야 어떻게 되었든 실제 경훈이의 신앙심은 돈독한 듯 하였고, 상은이와 경훈이는 정말로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
군대영장에 적힌 날짜가 두 달 정도 남았던 때에 그는 자신의 신앙심에 따라 군대를 거부했다.
그리고 취직이 힘들 것이니 사업을 준비할거라고 했다.
경훈이가 감옥에 간 후 면회일정을 상의하기 위해 경훈이 어머님께 전화를 드리면 매우 반가워하셨다.
이제 머 어쩌겠니.. 그래도 자식인데.
그리고 그렇게 흐트러지는 목소리를 난 들어본 적이 없다.
머 어쩌겠어, 그래도 친구고 신앙이고 자식이고 서로 좋아한다는데.
술자리에선 내가 술기운을 빌려 그 흐트러짐을 흉내내보지만 역시 잘 안된다.

그리고 어제밤에 우리는 정말 신이 났다.
가까운 사람의 결혼발표에 숙제고 뭐고 제쳐두고 당사자는 아무 말없는 가운데 우리가 결혼식을 다 계획하고 있었다.
내년에 한국에 없는 보상이는 서운함에 계속 화만 냈다.
요한이는 함 팔아서 술값 얻어낼 생각만 한다.
나는 사회보다는 주례를 시켜달라고 졸랐다.
이제는 양복도 맞춰야지, 라는 점에서만 우리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정말 재미있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덧 여호와증인이라는 것도 없고, 군대라는 것도 없고, 사업이라는 것도 없고, 결혼이라는 것도 없었던 유년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 중 아무도 먼 미래의 일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과거는 까마득하게 잊혀져 미래로 전송된다.
들어와서 밥 먹어라- 고 외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우리는 나른하였다.



-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기혁이는 경훈이의 종교를 인정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결혼식에는 와주었으면 좋겠다.

    

2002.12.09 22:21:50
*.50.35.231

으응 그런일들이 있던 거엿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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