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끝


고정희 -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조회 수 272 추천 수 0 2020.04.24 19:16:31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profile

"내 마음의 리듬을 믿고(この胸のリズムを信じて)", "우리는 걷는다 단지 그뿐(ぼくらは步く ただそんだけ)"

엮인글 :
http://kuchu-camp.net/xe/83296/251/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김중식 - 불더위에 달궈지고 달구어진 모래 속에 코를 처박은 낙타, 바로 그 낙타의 장딴지에서 불현듯 회오리바람 같은 힘이 솟구친 건

[패터슨] Love Poem file

정끝별 - 투신천국

이산하 - 나무 [1]

Louise Glück - "Snowdrops"

김수영 - 사랑의 변주곡

고정희 -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이광웅 - 목숨을 걸고

김해자 - 이웃들

신동엽 - 좋은 언어, 봄의 소식(消息)

이백 - 행로난

박노해 - 살아서 돌아온 자

피천득 - 너는 이제

고정희 - 상한 영혼을 위하여

사상의 거처 - 김남주 [2]

시인은 모름지기 - 김남주

브레히트 시 몇편

지울 수 없는 낙서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김중식 - 떼

  • go
  • 2010-06-0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