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끝


<끝>이 생기다

조회 수 4305 추천 수 0 2002.12.06 13:04:05
로켓(=돌발) *.229.246.236
시린님과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얘기했었다. 과거 우리과의 독서음미모임의 이름이었던 <낭만의 벗들>을 제안했다. 시린님은 요즘 <낭만>이라는 말의 범람이 거슬린다고 했다. 하지만 더 좋은 게 없어서 <낭만의 벗들>로 정하고 글을 올리기 위해 이곳에 왔었다. 막상 <낭만의 벗들>을 써넣고 보니 왠지 보기가 싫었다. 왜 그랬을까? 요즘 몸이 안좋았던 탓도 있겠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니까. 다시 한번 읽어도 너무 무료했다. 그리고 <벗들>이라는 말은 <낭만>이라는 말의 그저 <늘어짐>같다. 보충하지도 않고 긴장하지도 않는 두 말의 이어짐은 그저 지루하게 서로를 지탱한다. 쓸데없는 연장. 관계에 대한 집착. 또 <낭만의 벗들>할때 <벗들>은 왠지 <낭만>의 <누수물>에 불과한 듯 느껴진다. 나는 낭만의 누수물인가? (아니잖아) 게다가 낭만이 꿈에 나타나 <나는 니 친구 아닌데?>할 것 같은 불안감도 있다. 그러면 열받겠지. <낭만> 뒤에 놓인 <벗>은 누수물의 비참과 짝사랑의 슬픔을 담고 있는 가면같다. (아 어쩌다 여기까지?) 나는 차라리 <끝>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의 <친구>다.
나는 너의 <끝>이다.

두 문장의 대비가 얼마나 새롭게 느껴지는지! 이제 나에게는 <끝>이라는 말이 <벗>이라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그물처럼 보인다. 즉 <친구>는 <끝>이 되지만, <끝>이 <친구>는 되지 않는다. <끝>이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모든 부정적인 뉘앙스는 그것이 <친구> 밑에 놓임으로써 상쇄된다. 오히려 거기에 덧붙여지는 것, 그 풍부함을 다 말해보자 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읽을 시가 그 내용일테니까. 그보다 나에게는 이제 내가 막 <벗>을 <끝>으로 바꾸어놓음이 이 자리를 만들어내는 <최초의 은유>로 떠오른 것이 아닐까. (하지만 누구 마음대로? <라>도 아니고 <깡>도 아니고 니 맘대로냐!) 내 마음<대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새로운 공간의 <이름>을 붙이면서 생겨난 이곳에서의 나의 <자아>의 자리를 마련한 셈이겠다. (별 말 아니라는 얘기지..) 그 자리는 <낭만>의 <벗>이 아닌, 그 <끝>에 있다. <끝>이 되어보자!

결론: 시린님의 위대한 통찰
뒤돌아서 생각해보면 역시 시린님의 통찰력이 대단한 것을 알 수 있다. 시린님은 <낭만의 벗들>을 듣고, 곧 <낭만>의 <범람>을 걱정했다. <범람>은 <누수>와 <황폐함>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그 결과로서의 <벗>이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시린님은 바로 이 점을 통찰하시고 나에게 <시>를 흘려주신 것이었다. 조잡하고 맹랑한 길을 거쳐 이제서야 알게 된 시린님의 선견지명에 나는 부끄러웠지만, 한편 이제 시린님만 잘 믿고 따르면 이 모임의 행복은 보장된 것이리라 라는 생각이 드니 편안해졌다. 시린님은 위대하다.

실컷 자란 시린 잎사귀같은 시구를 높은 나무에서부터 베어주시는 시린님의 말씀은 기린의 시여라...

melody

2002.12.06 13:24:37
*.50.35.85

스스로는 무엇도 할 수 없는 무지한 인간을 부디 시의 양수 속에 빠트려 주세요.

시린

2002.12.06 22:37:49
*.117.51.55

로켓군. < >의 행렬이 끝이 없네요. 낄낄; 그런데에에!! 결론이 어쩜 이렇게 될 수가 있죠? 안그래도 요즘 드라마 장희빈에서 볼만한 상궁이 하나도 없어서 화나 죽겠는데. 흑-

멜로디양, 엄마와 성당에 나가지 않겠다면 떠밀어 줄 수도 있지. 흣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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