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옮김] 가면의 고백과 자기부정의 논리

조회 수 1263 추천 수 0 2015.06.07 19:29:43

가면의 고백과 자기부정의 논리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옮긴이의 서문

 

 

전쟁은 끝났다. 특공대의 용사는 이미 암상인이 되었고, 미망인은 어느새 새로운 그이로 인해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으로 되돌아온 것뿐이다. 인간은 타락한다. 의인도 성녀도 타락한다. 그것은 막을 수 없을뿐더러, 막는다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살고, 인간은 떨어진다. 그것 외에 인간을 구하는 편리한 길은 없다”(타락론, 1946)


기브 미 초코레토, 암시장, 패잔병들, 전쟁고아, 몸밖에는 팔 것이 없는 미망인…… 패전 직후의 도쿄를 보면서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에서 유래하든 서구 근대에서 유래하든, 사람의 존엄성을 가능케 해온 인간이라는 개념, 혹은 자가당착은 길거리에 버려진 휴지조각보다도 가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지금보다 더 떨어질 곳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떨어지는일은 인간이 쓸모없어진 세계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역설적인 희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역설적 희망은 실현되기는커녕 실천의 문턱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패전 후 5개월이 지나자 스스로를 신이라 강변해온 자가 인간선언을 해버렸고, 신민(臣民)이었던 자들은 주권자인 국민으로 화려하게 재탄생했다. 인간에 대해 회의하고 부정하여 떨어지는 대신에 신과 신민들은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이전의 폭주와 만행은 인간아닌 이들의 소행이었다고, 떨어지는 일 없이 쉽사리 인간을 구원해버린 것이다.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신의 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인간적인 문화국가로 변모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이후 이 섬나라는 인간이 거주하는, 평화로운 제작자와 장사꾼의 나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왔다. 그리하여 전후 민주주의고도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패전이 남긴 폐허는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게 복구되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활동은 이 복구의 여정 속에서 전개되었다. 1949가면의 고백으로 그는 일약 일본 문단의 스타가 되었다. 평론가 하나다 기요테루(花田清輝)는 이 소설을 전후의 대표소설로 꼽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가 철두철미하게 아이러니를 통해, 또한 독으로 독을 제압하고 허구로 허구를 죽여 가면을 역이용함으로써, 얼마나 집요하게 스스로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려 했는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하지만 이런 비극은 미시마 유키오와 인연이 없다. 내 생각에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얼굴이라 하더라도 가면 뒤에 진짜 얼굴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의식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기까지 하다. 다자이의 세대에 비하면 미시마의 세대는 한층 비극적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진짜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며, 가끔 얼굴 그 자체의 존재조차도 의혹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그저 가면에만 기대어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의 얼굴에 육박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lost generation’은 스스로의 얼굴까지 잃어버린 세대이며, 얼굴 대신에 그들이 소유한 것이라고는 차갑고 딱딱한 가면뿐이다”(성 세바스찬의 얼굴, 1956)


다자이 오사무는 전쟁 직후 사카구치 안고 등과 함께 무뢰파(無賴派)’로 불리면서 문단을 주름 잡았다. 이들은 타락이나 가면을 역설적 방법으로 삼아 인간진짜 얼굴을 제시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이 역설적 방법으로 구원하려 했던 인간의 진짜 얼굴은 천황과 국민이라 이름 붙여진 가면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왜냐하면 타락하고 가면을 씀으로써 가까스로 구원될 인간이 아니라, 문화와 민주주의란 깨끗한 의상으로 치장된 인간은 인간의 진짜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자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안고는 히로뽕 중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미시마는 달랐다. 그는 인간의 진짜 얼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전후란 이미 죽었어야 할 자의 삶에 다름 아니었기에. “나중에 문득 든 생각이지만 전쟁이란 에로틱한 시대였다. 지금 항간에 범람하고 있는 지저분한 에로티시즘의 단편들이 하나의 거대한 에로스로 빨려 들어가 정화되던 시대였다. 그래서 전쟁 중에 죽었더라면 나는 무의식적이고 자족적인 에로스 속에서 죽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 그런데 전후는 나에게 삼등석에서 보는 연극이었다고나 할까. 모든 것에 진실이 없고 겉보기뿐이었으며, 공감이 갈만한 희망도 절망도 없었다. 이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나의 전쟁과 전쟁체험20년 후의 815, 1965). 삼등석에서 보는 따분한 연극에 희망이나 절망이 있을 리 없다. 희망이 없기에 좌절도 없고, 절망이 없기에 성취도 없다. 이것이 미시마의 모든 예술적 영위와 정치적 행동의 진실이었다. 거기에는 인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970년 자위대 본부에서 할복한 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어떤 인간이 가면을 쓰고 연기한 것이 아니라, 어떤 가면이 육체를 얻어 스스로를 파괴했던 것이다.


30년대 파리에서 20세기를 주름잡게 될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대상으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강의하던 이는 코제브였다. 그는 눈앞에서 펼쳐졌고, 펼쳐지고 있던 전쟁 속에 인간, 투쟁, 역사가 고스란히 전개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윽고 전쟁이 끝나자 코제브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게 된다. 전후의 아메리카와 일본을 보고 말이다. 욕망으로 똘똘 뭉친 동물이든 알맹이 없는 형식을 지키는 스노브(snob)이든, 이 포스트 히스토리의 공간에서 역사는 이미 끝났다. 그래서 인간도 없었다. 자연과 세계와 타자와 투쟁함으로써 스스로 회귀하는(reflex) 동물인 인간, 그리고 그 회귀의 궤적에 다름 아니던 역사는, 밥을 밝히는 동물과 의미 없는 형식으로 살아가는 스노브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해서 문제는 인간역사였다. 패전 후 일본에서 망각된 것은 침략전쟁이나 식민지지배의 책임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근원에서는 인간역사에 대한 사고정지라는 치명적인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미시마의 예술과 정치는 이 사고정지에 대한 문제 제기라기보다는 이 사고정지 이후에는 어떠한 예술과 정치도 불가능하다는 선언이었다. 따라서 아무것도 위험한 것은 없다. 예술과 정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위험을 느낄 인간이며 문명이며 역사란 이미 단순한 형식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1969년 동경대학 고마바 캠퍼스에서 열린 공방의 한쪽 당사자, 미시마의 상황 인식은 이러했다.

 


전공투란 잘 알려진 대로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일본의 새로운 학생운동 세력이었다. 일본 학생운동 정파들의 복잡한 이합집산의 과정을 좇는 일은 필요 없으리라. 다만 전공투라는 집단이 학생운동의 정파들의 이합집산으로 태어났더라도, 그 운동의 전개와 의미가 학생운동이라는 틀로 국한될 수 없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 중요성은 이들이 내세운 자기부정의 논리에 집약되어 있다.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들의 행동강령은 이 논리가 육화되는 방식이었고 말이다.


획기적인 정신현상학번역으로 유명하며, 스스로가 전공투의 일원이었던 하세가와 히로시(長谷川宏)는 전공투 운동을 총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부정의 논리가 투쟁주체를 사로잡은 것은 그러한 분위기(도쿄대가 지성의 중심이며, 이를 지켜야 한다는 학교 측과 반 학생운동 진영의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는 분위기 - 옮긴이) 속에서였다. 투쟁의 적대자들이 모두 특권적인 자기 위치에 집착했고, 그 집착이야말로 대학 내부에서 지배체제를 유지시킨 것이라고 할 때, 그 안에 있으면서 지배체제의 변혁을 지향하는 자들이 자기부정의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동경대학을 어떻게 부정하고 해제하는가 하는 물음은 도쿄대생으로서의 자기를 어떻게 부정하는가 하는 물음과 겹쳐지면서 우리 앞에 제기되었다. 지식의 특권성이라는 엄연한 사회적 사실에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인가 하는 물음을, 우리는 윤리의 문제로 떠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자기부정의 논리의 패배, 1977)


전공투에게 동경대학은 근대 일본, 나아가 아메리카를 위시한 제국주의 그 자체였다. 그들에게 투쟁의 대상인 동경대학은 근대 일본을 틀 지어온 참모본부였고, 베트남과 제삼 세계를 침략하는 제국주의의 하위 관료 양성소였다. 그런 참모본부이자 양성소에 그들이 속해 있다는 사회적 사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사회적 적대를 자아의 윤리적 문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공했다. 따라서 그들의 자기부정은 그대로 근대와 제국주의에 대한 부정이었고, 그 부정에 기초한 연대의 구축은 고립된 개개인의 윤리 속에서 결정되어야 했다. 자기부정의 논리와 고립에 기초한 연대는 이렇게 전공투 운동을 특징 지웠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고유의 위험성이 따라붙었다. 다시 하세가와의 말을 들어보자.


현실의 문제를 윤리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일에는 큰 위험이 뒤따른다. 현실 체제의 존재방식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모순되는 것이 계급사회의 필연이기 때문에, 모순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전사회적인 변혁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투쟁을 개인의 윤리 문제로 바라보는 눈은 종종 계급사회의 모순의 해결을 개별적인 자아에 떠맡기게 된다. 투쟁의 와중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 극한 형태 중 하나가 연합적군의 집단 린치였다. 린치를 한 쪽도 당한 쪽도, 이 폭력을 개인의 공산주의화를 위한 총괄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체제와 정치체제의 문제이어야 할 공산주의가 극단적으로 개인의 윤리문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존재하는 개인을 윤리의 주체라는 극한의 지점에서 파악하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혁명가들의 이런 발상에는 투쟁 속에서 윤리의 비대화를 낳고만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연합적군의 린치 사건이란 1972년에 일어난 것으로, 깊은 산 속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던 도중, 혁명 완수를 위한 인간형에 다다르지 못한 동지를 집단 린치를 통해 살해한 사건이었다. 매일 밤 총괄을 통한 자기반성, 그리고 훈련 지휘자의 감시와 처벌에 의해 린치의 대상이 결정되었고, 그 대상은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스스로를 지양하지 못했음을 시인한 뒤 잔인한 폭력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물론 전공투 운동이 내세웠던 자기부정의 논리라는 윤리가 이런 사태로까지 이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으로 결정된 문제를 개인의 윤리라는 관념론으로 몰아갈 때, 즉 유물론의 원리를 져버렸을 때, 그 운동은 극한의 폭력으로 파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했던 것이다. 전공투 운동은 이 유물론과 관념론이 맞닿은 지점에서, 혹은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전공투는 인간역사의 운동이 유물론과 관념론의 극한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세계와 역사의 문제를 한없이 개인의 윤리 문제로 환원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극한의 관념론이었으며, 개인의 삶이 대학, 사회, 한 나라를 넘어서 세계 전체와 역사에 의해 규정된다는 첨예한 의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극한의 유물론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인간역사는 서로가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는, 결코 어느 한 편으로 귀결될 수 없는, 끝없이 펼쳐지는 투쟁의 주체와 공간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는 연속되는 시간으로서의 역사라든가, 영원한 공간 속에서 활동하는 인간은 쓸모없어진다. 문제는 연속하는 시간이나 영원한 공간이 아니다. ‘인간역사는 종말을 고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인간이 자연과 세계와 타자와의 투쟁을 통해 그려내는 역사란 없다. 따라서 관념론도 유물론도 없다. 이 극한의 상황을 그들은 해방구=바리케이드라고 불렀다. 갇혀 있음이 가장 열려 있다는 역설, 이것이야말로 모더니티가 다다른 종말일지도 모른다. 이 모더니티의 극한에 사는 주민들이 1969년 동경대학 고마바 캠퍼스에서 미시마와 만났던 이들이다.


, ‘인간역사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미시마와 인간역사따위는 애초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전공투. 이들의 공방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이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공방이 일본이라는 좁은 맥락이 아니라, ‘인간역사라는 모더니티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펼쳐졌다는 점이다. 이 쟁점은 1969년의 공방뿐만 아니라 1999년에 재개된 공방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물론 세세한 논쟁의 쟁점은 사상, 역사, 예술, 정세 등 다방면에 걸쳐 난삽하게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작은 가지들이 거대한 물음, 인간역사라는 모더니티로 수렴되어 간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나 있으리라.

 


(중략) 이 책에서 전개된 상세하고 흥미로운 쟁점들을 실마리 삼아, 보다 큰 쟁점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옮긴이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이라. 아니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유가 문제 삼아야 할 대상이 따로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란 문제 삼아야 할 대상을 만들어나가는 실천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이 책을 통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사유가 인간의 실천이라면, 거기에는 국적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즉 사유란 어쩔 수 없이 보편으로 향하는 운동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하략)

 


20063월 도쿄 고마바에서 김항

 


공중캠프

2017.07.07 18:44:46
*.1.197.192

https://libcom.org/history/zengakuren-japans-revolutionary-students

http://www.zengakuren.jp/wp/

https://youtu.be/eXjd7GkHK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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