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밑줄] 종말론 사무소의 일상 업무

조회 수 1455 추천 수 0 2015.06.16 17:43:36

[오늘의 논문]

 

종말론 사무소의 일상 업무

The Routine task of Eschatological Bureau

 

- 조르조 아감벤의 메시아니즘 -

 

김항

 

2014.02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초록

 

이 논문은 조르조 아감벤의 메시아니즘을 푸코의 계몽 프로젝트와의 연관 속에서 분석하고 계보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를 위해 우선 1970년대 후반의 푸코의 계몽 프로젝트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았는데, 푸코의 계몽 프로젝트란 칸트적 규범화의 패러다임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 철학사에 은폐된 채로 남겨진 현재에 대한 비판적 실험으로서의 철학이라는 계보를 적극적으로 재생시키려는 시도였다. 푸코는 이를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한 계몽시대의 결정적 전회의 시도에서 찾아내는데, 아감벤의 바울-벤야민 독해를 통한 메시아니즘은 이런 푸코의 계몽 프로젝트를 정치신학의 관점에서 풀어낸 것이라 이해될 수 있다. 왕국과 영광은 메시아니즘이 비판의 표적으로 삼는 서양 통치 전통이 초기 기독교의 교리 속에서 이미 마련되었음을 논증하는 저작인데, 벤야민은 오이코노미아의 패러다임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전통에 대한 비판 기획으로써 메시아니즘을 정식화했다는 것이 아감벤의 해석이다. 아감벤은 이런 메시아니즘의 내용을 인간의 근원적 언어 경험을 통해 제시하는데, 언어의 근본적 위약함, 즉 발화와 지시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맹세와 신뢰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언어의 위약함이 인간의 존재조건이라 말하면서, 법과 종교는 이 위약함을 발판으로 인간에 대한 전면적 지배를 구축한 서양 통치의 장치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감벤의 정치적 메시아니즘이란 법과 종교의 인간 지배를 넘어서, 인간의 근원적 위약함을 수평적인 인간 사이의 공생으로 탈환함으로써 인간이 되려는 존재로서의 궁극적 인간의 자기이해를 정치의 지렛대로 삼자는 전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This article aims to make the political meanings of Agamben’s messianism clear through relating it to Foucault’s reading of Kant’s enlightenment essay. Fouacult’s Kant reading is not going back to the project of Kantians which have sought to establish universal norms for human beings rational community, but to shed a light to a hidden tradition of western thought which could be named as ‘a critical experiment to meet with ’present-now’ as to make oneself as ‘human being.’ Agambens messianism could be interpreted as a trial to relate Foucault’s project to Benjamin’s political theology. Kingdom and Glory, one of the recent Agamben’s masterpiece, was written to prove ‘govermentality,’ which Foucault thought of as the paradigm of bio-politics of modern age, should be regarded as starting early Christian community in 2-3 century when ‘oikonomia theology’ had emerged. By this work, Agamben presents concrete image of the oikonomia governmentality which have made human being ‘homo sacer,’ and suggest messianism as a strong political thought and practice to oppose to this kind of governmentality. Then what does Agamben think of the concrete image of messianism? His studies about primordial experience of human language gives a answer to this question, that the weakness of human language, that language must need oath and reliance to others, is the only ground of political messianism.

 

키워드: 푸코, 계몽, 오이코노미아 신학, 메시아니즘, 종말론, 언어 경험

abortion, bioethics, biopolitics, feminism, suffering

 

 

자신의 종말과 직접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교회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제도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종말도 중지도 모르는 단 한 가지 합법적 조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이다.

- 조르조 아감벤, 교회와 왕국

 

1. 문제의 소재 : 푸코를 위로하는 하버마스를 넘어서


푸코, 「계몽이란 무엇인가」(1982)

 

이제까지 푸코는 이 지식에의 의지를 현대적 권력구성체 속에서 추적하여 그것을 고발하려 하였던 반면, 이제는 그것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즉 자기 자신의 사유를 현대의 시초와 연결하는, 보존할 가치가 있으며 개선할 필요가 있는 비판적 자극으로 보여준다. (...) 푸코가 자신의 마지막 텍스트에서 폭파시키려 했던 그 현대의 철학적 담론의 영향권 속으로 다시 스스로를 끌어들였던 것은, 바로 이 모순의 힘이었을지도 모른다(하버마스, 현재의 심장부를 겨누는 화살, 151).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라는 규범 정초적 물음, 하버마스의 푸코 평가 = 아감벤에 대한 비판 (정치적 니힐리즘, 정치적 사명 없는 사상가, 역설이나 과장을 다용하는 도발적인 전략가, 묵시록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비전 제시 등)


 

2. 푸코의 계몽, 메시아니즘의 흔적

 

월간 베를린에 두 개의 텍스트[칸트와 멘델스존의 텍스트]가 게재되면서 비로소 독일의 계몽(Aufklaerung)과 유대의 하스칼라(Haskala)가 같은 역사에 속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리하여 이 두 운동 모두 그들이 어떤 과정에 공통적으로 속해 있는가를 검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어떤 공통의 운명을 수용하겠다는 것을 공표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 우리는 그것이 어떤 드라마로 이어졌는지를 잘 알고 있다(계몽,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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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유대교의 시간관 안에서 현재란 종말과 구원을 예지하는 징후로 파악이 되거나, 아니면 덧없는 육체적 향락의 지옥으로 표상될 뿐이다. 즉 눈앞의 현재 그 자체의 의미를 탐구하는 일은 이 양대 일신교의 전통에 없는 태도였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푸코는 칸트의 계몽을 기독교와 유대교가 경험한 사상적 전회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이 맥락 속에서 계몽이 개시한 현대성 modernity’역사상의 한 시대가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 고려하자고 푸코는 제안한다(계몽, 186). 이는 계몽과 현대성을 연대기적 시간의 의식으로부터 떼어내려는 시도인데, 여기서 소환되는 것이 놀랍게도 보들레르이다(93).

 

[보들레르의] 현대적 태도에 따르면, 현재가 높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상상하려는 필사적인 열망, 이 순간의 그것과는 다른 것을 한 번 상상해 보려는 필사적인 열망, 그것을 파괴해 버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포착함으로써 그것을 변형시키려는 필사적인 열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보들레르적 현대성은 일종의 훈련이다. 그것은 현실에 극단적으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 현실성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뒤흔들어 버리는 자유의 실천이다(계몽, 189~190).

 

(...)

 

우리는 경계선에 위치해야 한다. 사실 비판이란 한계를 분석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적 질문이 앎이 넘어서지 말아야 할 한계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의 비판적 질문은 좀 더 긍정적인 질문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요컨대 필연적 한계라는 형태로 수행된 비판을 가능한 위반의 형태를 취하는 실천적 비판으로 변형하는 것이 문제이다(계몽, 194~195)

 

이것이 푸코가 말하는 계몽의 실천적 함의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이 전체주의적인 모든 기획 또는 근본주의적인 모든 기획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20세기 내내 최악의 정치 체제가 반복해서 주장했던 새로운 인류 창출이라는 약속을 물리치는 것을 뜻한다(계몽, 196). 이를 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에 적합한 철학적 에토스라 칭하면서 푸코는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한계들을 역사적-실천적으로 시험하고 그를 통해 우리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실현하는 것이라 부연하여 설명한다(계몽, 196).

 

따라서 푸코의 계몽이랑 하버마스와 같은 규범의 정초를 지향하는, 잘 짜인 논리와 체계를 가진 철학적 건축의 설계도가 아니다. 오히려 푸코는 칸트의 계몽을 인식론과 진보적 역사철학으로 보편화하여 체계화한 근대적 비판철학의 전통을 비껴가면서, 그 속에 침전되어 남겨진 어떤 철학적 태도를 추출하려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파레시아’ 개념)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것” (...) 왜냐하면 푸코의 칸트 읽기는 규범의 정초와 파괴 사이의 모순 속에서 스스로의 철학적 처지를 토로한 텍스트 따위가 아니라, 현재의 규범과 자아 혹은 타자 사이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되물음으로써 그 관계의 변용 속에서 실험 가능한 자유를 철학적 에토스로 제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은 이론이나 교리, 또는 축적되고 있는 앎의 영원한 총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 모습에 대한 비판이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는 한계들을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동시에 그러한 한계들을 넘어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는 태도, 에토스, 철학적 삶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계몽, 200)

 

 

3. 종말론 사무소의 재개

 

벤야민은 스스로를 기독교와 유대교의 특이한(singular) 교차점에 자리한 사상가로 자리 매김 했는데, 그런 그가 종말론 사무소(eschatological bureau)를 주저 없이 재개하려 했을 때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이나 찰스 도드(Charles H. Dodd)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 그러나 종말론보다는 메시아니즘에 관해 말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KG, 8).

 

(1) 왕국과 영광: 오이코노미아 신학과 서구 통치의 본원적 패러다임

 

오히려 신학 자체가 이미 언제나 오이코노미아에 관련된 교리라는 것이 아감벤의 독창적 해석이기 때문이다(98~99).

 

기독교 신학이 이미 시작부터 지상의 통치를 위한 앎의 체계를 마련했고, 이는 구체적 종말론 concrete eschatology’을 회피하는 가운데 시작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99). ... 아감벤은 지상의 통치로서 오이코노미아 신학기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삼위일체론(신의 지상 통치를 이론화하고 정당화하는 장치, 지상의 삶(현세)은 구원을 기다리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신의 계획이 실행되고 있는 유의미한 시간으로 탈바꿈), 제국-교회론, 섭리론, 천사론 등을 통해 분석한다.

 

(...) 그렇게 하여 아감벤은 교회와 제국이 주도한 지상의 통치가 결국 인간을 관리하고 질서정연하게 배치하는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을 출발부터 핵심으로 삼은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주장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테제는 서구의 인간은 고유한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인간과 사물의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질서/관리를 집행하는 통치만을 반복해왔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희구하는 영원한 삶은 결국 정치 polis”라는 패러다임 하에서가 아니라 가정 oikos”라는 패러다임 하에 있다. 야콥 타우베스의 조롱과 같은 경구에 따르면 삶의 신학 theologia vitae”는 언제나 신학동물학 theo-zoologie”로 변질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KG, 3).


왜 신은 영광을 필요로 하는가, 주권은 왜 갈채를 필요로 하는가? 지상의 촘촘한 통치 실천, 제도, 조직이 신의 의지를 대변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결코 가시화될 t ndjqtsms 신의 자리를 영광-갈채의 빛-열광을 통해 현시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아들(집행자)의 오이코노미아적 행위가 아니라, 아버지의 신성한 존재를 영광이라는 성화 聖花를 통해 가시화하기 위한 필연적 의례가 교회의 신에 대한 찬양이다. (...) 신의 존재가 잠재태(potentiality)이며 신의 행위가 실현태(actuality)라면, ‘영광-찬양이란 오이코노미아적 통치가 신의 존재라는 잠재태의 실현태임을 보여주는 의례인 셈이다. 그리고 주권이 존재로서의 신이 세속화된 관념이라면, 통치를 주권의 의미의 발현으로 표상함과 동시에 텅 빈 주권의 자리를 성화(sacramento 聖化)하는 것이 바로 인민의 갈채에 다름 아니다. 아감벤은 이러한 서구의 통치 패러다임에 맞서 존재로서의 신과 주권의 텅 빈 자리를 영광이나 갈채로 은폐하면서 통치를 정당화하는 세속의 질서에 맞서, 신과 주권의 본래적 무위=잠재태를 그 자체로 남겨두는 것을 정치의 고유한 임무라 주장한다(102).

 

(2) 역사철학, 종말론, 그리고 메시아니즘

 

카테콘(Katechon)이란 신의 왕국의 도래까지 지상을 지키는 존재로, 진정한 구원이 아닌 가짜 구원을 설파하는 적그리스도 anti-christ’를 억제하는 자이다.

 

오이코노미아 신학이 지상의 통치를 뜻한다는 한에서, 영광이 텅 빈 신의 자리를 은폐하면서 현시함으로써 지상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실천인 한에서, 카테콘이란 오이코노미아와 영광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형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종말과 구원을 통해 끝이 나야할 오이코노미아와 영광은 카테콘에 의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과 역사철학에서 오이코노미아를 은폐하고 망각했다는 것은 오이코노미아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아감벤 주장의 핵심은 오이코노미아의 은폐와 망각이 지상 질서의 끝을 상상하는 일을 사유와 실천으로부터 추방했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의 인민의 갈채와 교회에서의 신도와 사제에 의한 영광은 결국 구체적 종말론을 기독교 신학과 역사철학에서 배제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셈이다.


그래서 오이코노미아의 전면적 통치를 용인하고 영원화하는 기독교의 종말론은 영광에 기반한 현존하는 통치 권력의 옹호에 다름 아니다. 그 종말이 구체적 모습으로 상상되지 않고 억제되고 지연되는 것으로 사념되는 한에서 말이다. 벤야민이 재개하려 했던 종말론 사무소란 이 상태에 대한 개입이다. 그것은 인간을 관리되고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야 하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간주하는 이 거대한 오이코노미아 통치 장치로부터의 탈피를 구상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의 메시아니즘은, 따라서, ‘구체적 종말론을 전개하는 메시아니즘이라 할 수 있다. 아감벤이 벤야민의 메시아니즘을 서구 통치 패러다임에 대한 극한의 대립점으로 삼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 메시아니즘의 시간관과 언어에 대한 근원적 사유를 통해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다(105~106).

 

4. 메시아적 종말과 언어 경험

 

메시아적인 것은 시간의 종말이 아니라 종말의 시간입니다. 메시아적인 것은 시간의 종말이 아니라 매 순간, 즉 하나하나의 카이로스(kairos)가 시간의 종말 및 영원성과 맺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관심은 시간이 끝나는 순간, 즉 마지막 날이 아니라 종말과 관계 맺고 그것을 개시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메시아적인 것은 시간과 그 종말 사이의 남겨진 시간(time that remains)이라고 말입니다(CK, 8).

 

매일, 매 순간은 메시아가 도래하는 작은 문이다(CK, 5).”

 

오히려 이 메시아적 시간 경험은 인간의 언어활동을 구성하는 본래적 어긋남 혹은 위약함(weakness)에서 비롯된다(107).

 

이는 마치 메시아적 종말이 현재와 종말 사이에 펼쳐진 남겨진 시간이라(...), ‘근원(arche)’에 대한 물음은 현재와 시작 사이에 남겨진 시간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109).

 

내 이름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라면, ‘또는 거짓이 의미하는 바를 나는 어떻게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 말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맹세한다는 것,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다(언어의 성사, 115~116).

 

아감벤은 이 위약함을 외재적으로 보충하여 의미를 확정지으려는 시도가 바로 종교와 법이라 간주한다. 여기서 종교는 언어활동에 내재한 근원적 믿음(혹은 위약함)을 특정 존재자에 대한 믿음으로 환원하여 그 의미를 위계화하는 언어의 성사 sacramento’이며, 법이란 언어활동의 수행적 경험을 무수한 일반 법칙(문법)으로 환원하여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고정시키는 권력의 성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을 제도화하는 종교와 삶을 법칙화 하는 법은 모두 인간의 유적 본질, 즉 언어활동의 위약함을 은폐하고 말소하려는 장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 위약함은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믿음과 타자에 대한 맹세를 수반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타자를 믿고 타자에게 맹세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공생하는 존재 communal being’라는 것이 이 위약함이 뜻하는 바인 것이다. 종교와 법은 이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위한 믿음과 맹세를 보편화한다. 즉 진심과 진실을 가늠하는 수직적 잣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111-112).

 

(...) 법과 종교는 언어활동의 위약함의 다른 이름인 믿음-맹세를 보다 상위의 권력/규범에 위탁함으로써 삶의 안정을 얻는다. 하지만 이 때 인간의 삶은 타자에 대한 믿음-맹세를 권력적 잣대에 기대어 가늠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포기해버린다. 즉 공생하는 이웃에 대한 수평적 믿음-맹세가 아니라, 신이나 규범에 대한 수직적 믿음-맹세를 통해 스스로를 관리당하고 규율당하고 처벌받는 벌거벗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아감벤의 오이코노미아 신학에 대한 분석은 삼위일체의 교리와 세속화된 정치신학을 통해 인간 삶의 위약한 공생(이웃에 대한 믿음-맹세)이 어떻게 텅 빈 신-주권에 대한 영광과 갈채 속에서 형해화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작업이었던 셈이다(113-114).

 

(...) 그렇기에 아감벤이 말하는 벤야민의 종말론 사무소란 저 남겨진위약함을 수평적인 공생의 지평 속에서 붙잡는 것을 일상적 업무로 삼는다. 그것은 주인공의 성장 없이 삭막한 산문적 세계만이 남은 근대의 끝자락(역사의 종말)에서, 말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유일한 행위, 정치인 것이다.

 

5. 정치적 메시아니즘을 위하여

 

역사에서 살아남은 국가, 또 자신의 역사적인 텔로스를 성취한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국가 주권이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 오늘날 국가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을 동시에 사유하면서 전자를 후자에 맞세울 수 있는 사유만이 우리의 과제에 적합한 것이 될 것이다(호모 사케르, 140~141).

 

생정치-오이코노미아-통치의 패러다임은 서양 정치의 근원에 자리하면서 인간의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치환하여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오래된 장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종말과 국가의 종말을 동시에 사유하는 정치적 사유란, 이 생정치-오이코노미아의 통치 패러다임에 맞서기 위해서는 근대 정치의 이념이나 국가 장치의 민주화 따위에 기댈 수 없음을 전제로 삼을 때 가능한 전망이라 할 수 있다. 즉 어떤 이념의 실현을 위한 전략/전술로 인간 행위를 바라보거나(고전적 혁명론), 국가의 공공기능 강화를 통한 사회성의 회복(복지국가론)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전면화한 생정치-오이코노미아 통치 패러다임에 적합한 비판 프로젝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감벤이 수평적 언어 경험을 메시아니즘의 요체로 제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치적 행위가 전략/전술이나 국가제도의 변혁으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아니 애초에 그런 기획 자체가 생정치-오이코노미아 통치 패러다임에 종속된 것이라면(소비에트의 실패),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정치’(아리스토텔레스)는 전혀 다른 토대 위에서 구상되어야 하며, 그것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유일한 유적 행위인 언어에서 다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 이 정치적 메시아니즘은 결국 혁명적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 예외를 거주하는 장소로 삼을 수밖에 없다. 혁명적 예외공간이 결국 국가제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면, 언어의 위약함을 법칙화 하여 안정화하는 법과 종교 대신에 언어가 근원적으로 내장하는 의미와 무의미의 문턱, 즉 규범/규칙화될 수 없는 예외의 공간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되고 생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재개하려 했던 종말론 사무소가 특수한 임무가 아니라 일상적 업무를 업으로 삼아야 하는 까닭이다(118).


공중캠프

2016.10.18 11:29:26
*.70.27.183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것” (...) 왜냐하면 푸코의 칸트 읽기는 규범의 정초와 파괴 사이의 모순 속에서 스스로의 철학적 처지를 토로한 텍스트 따위가 아니라, 현재의 규범과 자아 혹은 타자 사이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되물음으로써 그 관계의 변용 속에서 실험 가능한 자유를 철학적 에토스로 제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은 이론이나 교리, 또는 축적되고 있는 앎의 영원한 총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 모습에 대한 비판이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는 한계들을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동시에 그러한 한계들을 넘어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는 태도, 에토스, 철학적 삶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계몽,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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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인간을 관리되고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야 하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간주하는 이 거대한 오이코노미아 통치 장치로부터의 탈피를 구상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매일, 매 순간은 메시아가 도래하는 작은 문이다(CK, 5).”

여기서 종교는 언어활동에 내재한 근원적 믿음(혹은 위약함)을 특정 존재자에 대한 믿음으로 환원하여 그 의미를 위계화하는 ‘언어의 성사 sacramento’이며, 법이란 언어활동의 수행적 경험을 무수한 일반 법칙(문법)으로 환원하여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고정시키는 ‘권력의 성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을 제도화하는 종교와 삶을 법칙화 하는 법은 모두 인간의 유적 본질, 즉 언어활동의 위약함을 은폐하고 말소하려는 장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법과 종교는 언어활동의 위약함의 다른 이름인 믿음-맹세를 보다 상위의 권력/규범에 위탁함으로써 삶의 안정을 얻는다. 하지만 이 때 인간의 삶은 타자에 대한 믿음-맹세를 권력적 잣대에 기대어 가늠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포기해버린다. 즉 공생하는 이웃에 대한 수평적 믿음-맹세가 아니라, 신이나 규범에 대한 수직적 믿음-맹세를 통해 스스로를 관리당하고 규율당하고 처벌받는 ‘벌거벗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아감벤의 오이코노미아 신학에 대한 분석은 삼위일체의 교리와 세속화된 정치신학을 통해 인간 삶의 위약한 공생(이웃에 대한 믿음-맹세)이 어떻게 텅 빈 신-주권에 대한 영광과 갈채 속에서 형해화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작업이었던 셈이다(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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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정치-오이코노미아-통치의 패러다임은 서양 정치의 근원에 자리하면서 인간의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치환하여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오래된 장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종말과 국가의 종말’을 동시에 사유하는 정치적 사유란, 이 생정치-오이코노미아의 통치 패러다임에 맞서기 위해서는 근대 정치의 이념이나 국가 장치의 민주화 따위에 기댈 수 없음을 전제로 삼을 때 가능한 전망이라 할 수 있다. 즉 어떤 이념의 실현을 위한 전략/전술로 인간 행위를 바라보거나(고전적 혁명론), 국가의 공공기능 강화를 통한 사회성의 회복(복지국가론)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전면화한 생정치-오이코노미아 통치 패러다임에 적합한 비판 프로젝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감벤이 수평적 언어 경험을 메시아니즘의 요체로 제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치적 행위가 전략/전술이나 국가제도의 변혁으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아니 애초에 그런 기획 자체가 생정치-오이코노미아 통치 패러다임에 종속된 것이라면(소비에트의 실패),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정치’(아리스토텔레스)는 전혀 다른 토대 위에서 구상되어야 하며, 그것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유일한 유적 행위인 ‘언어’에서 다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 이 ‘정치적 메시아니즘’은 결국 혁명적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 예외’를 거주하는 장소로 삼을 수밖에 없다. 혁명적 예외공간이 결국 국가제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면, 언어의 위약함을 법칙화 하여 안정화하는 법과 종교 대신에 언어가 근원적으로 내장하는 의미와 무의미의 문턱, 즉 규범/규칙화될 수 없는 예외의 공간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되고 생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재개하려 했던 종말론 사무소가 특수한 임무가 아니라 ‘일상적 업무’를 업으로 삼아야 하는 까닭이다(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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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중캠프 [노트]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서의 데이터 유물론, AI fetishism, Digital Ecology-Marxism [3] 2018-05-05
공지 공중캠프 (미정) 카레토 사카나 번역세미나 #020 [10] 2012-10-02
231 공중캠프 [밑줄]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 2020-04-13
230 공중캠프 The architecture of SARS-CoV-2 transcriptome 20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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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공중캠프 ☆ (3/26)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28 : 사르트르, <닫힌 방> file [11] 2020-03-16
226 공중캠프 [밑줄]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한 7가지 질문 file 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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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공중캠프 [옮김] 숙대 등록 포기에 부쳐 [1] 2020-02-08
223 공중캠프 [옮김] Kent M. Keith - The Paradoxical Commandments 2020-02-01
222 공중캠프 ☆ (3/7)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27 : <실록 연합적군> file [3] 20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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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공중캠프 ☆ (1/9~6/9)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26 :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강독 세미나 file [31] 2019-12-07
219 공중캠프 [news] Quantum supremacy using a programmable superconducting processor [1] 2019-10-24
218 공중캠프 (Book of Job)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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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공중캠프 [밑줄]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悪の力, 2015) 2019-09-28
215 공중캠프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시장의 파리 떼에 대하여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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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공중캠프 [옮김] 페미니즘은 '파괴적 무기'가 아닌 '변혁적 도구'가 되어야 [2] 2019-08-15
212 공중캠프 [옮김] 바이마르 공화국 백년의 교훈 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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