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적군파: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死へのイデオロギー ー日本赤軍派ー / Patricia Steinhoff, Deadly ideology : the Lod airport massacre and the Rengo Sekigun purge(미출간))』, 임정은 역, 교양인, 2013 (2003).
 
 
적군파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jpg

 

프롤로그. 이스라엘 감옥의 일본인 테러리스트
 
 
그러나 사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에 걸쳐 일본과 미국의 학생 운동이 거쳐 간 길은 꼭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양쪽 다 학내 문제와 나라 안팎의 사회 문제를 연결 지어서 싸웠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투쟁은 베트남 전쟁을 겨냥했다. 투쟁 수단은 달랐지만 크고 힘센 국가 권력에 맞서 전술이 빠르게 급진화했다. 급진화는 운동의 분열을 불러왔고 일부 단체는 급속하게 과격화, 무장화로 비약했다. 일본의 분트(Bund, 공산주의자동맹)와 미국의 SDS(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 적군파와 웨더맨(Weatherman)의 유사점을 들기란 어렵지 않다. (25)
 
* 이를테면 분트와 SDS는 둘 다 1950년대 후반에 신좌파의 기수로서 등장하여 1960년대 학생 운동의 주류로 떠올랐다. 1960년대 후반에 분트의 분파로 적군파가, SDS의 분파로 웨더맨이 등장했다. 적군파와 웨더맨은 둘 다 급진적인 무장 투쟁을 벌였다.
 
1971년경에 적군파가 놓인 상황은 약 반세기 전에 일본공산당이 처했던 상황과 닮은 점이 많았다. 적군파의 활동을 조사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1930년에 다나카 세이겐(田中清玄)을 비롯한 일본공산당 간부들이 경찰에 저항하며 총격전을 벌인 와카노우라 사건(和歌浦事件), 1932년의 오모리 은행 강도 사건, 그리고 1933년의 일본공산당 린치 사건 등이 속속 떠올랐다. (26)
 
* 와카노우라 사건(和歌浦事件) : 1930년 2월 26일 일본공산당 중앙위원장 다나카 세이겐을 비롯한 공산당 간부들이 일본 남부 휴양지 와카노우라에서 경찰의 습격에 저항하여 총격전을 벌인 사건. 당시 비합법 조직이었던 일본공산당은 지도부를 포함한 다수의 당원들이 치안유지법 위한 혐의로 투옥되어 존속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당을 이끌던 25세의 다나카 세이겐은 와카노우라의 별장에 숨어 무장 투쟁을 조직하고 있었다.
 
* 오모리 은행 강도 사건(大森銀行ギャング事件) : 1932년 10월 6일 일본공산당 당원 3명이 도쿄 오모리 구에 위치한 가와사키다이햐쿠 은행 오모리 지점에 총을 들고 침입해 약 3만 엔을 강탈한 사건. 일본 역사상 최초의 은행 강도 사건이며 ‘붉은색 강도 사건’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 일본공산당 린치 사건(日本共産党リンチ事件) : 1933년 12월부터 1934년 1월까지 일본공산당 중상상임위원이었던 미야모토 겐지(宮本顕治) 등이 중앙위원 2명을 특별고등경찰의 스파이로 지목하고 감금하여 폭행한 사건. 당의 규칙에 따라 단죄한다는 명목으로 송곳과 황산을 동원하여 고문한 끝에 1명이 사망했고, 나머지 1명은 자살을 강요당하다 경찰에 발견되어 살아남았다. ‘붉은색 린치 사건’이라는 별칭으로 당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charles Wright Mills)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학은 전기와 역사 사이의 접점이다.” 인간은 혼자서 사회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사회의 흐름은 개개인의 행동에 의해 빚어진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바로 사회와 인간 사이의 접점이었다. (38)
 
 
1장. 오카모토 고조 - 적군파 병사의 꿈
 
 
오카모토 고조와의 인터뷰
 
우리 적군파 병사 셋은 죽어서 오리온자리가 되기를 빌었습니다. 우리가 죽인 모든 사람들 역시 같은 하늘의 별이 되어 반짝일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혁명이 계속되면 별의 수가 얼마나 더 늘어날까요! - 오카모토 고조,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을 재판하는 법정에서 (43)
 
“팔레스타인 난민 구제나 평화 행진 운동 따위에 참여하는 패거리는 실제로 아무것도 안 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 “일본의 학생 투쟁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10년이나 되는 세월을 헛되이 흘려보냈습니다. 미국의 반전 운동도 잘못을 따지면 매한가집니다.”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이라는 영어 단어를 쓰며 그는 업신여기는 감정을 드러냈다. / “혁명은 역사적 필연입니다.” ... “혁명에서 폭력은 불가피합니다.” (47-48)
 
“진정한 목표는 혁명 그 자체입니다. 기성 권력을 세계적 규모로 파괴하는 겁니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51)
 
왕양명의 지행합일설 ... 일본에서는 실제로 취하는 정치적 입장이 매우 신속하게 바뀔 수 있다. ... 본질적인 요소는, 썩을 대로 썩은 정치 상황을 사심 없이 한결같은 개인의 행동을 통해 순수하게 도덕적인 비전으로 변화시키는 ‘타오르는 정열’인 것이다. (57)
 
아사마 산장 사건이나 연합적군 숙청 사건에 대해 질문하자, ... “그들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는 역사만이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혁명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어요. 실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 “어떤 행위가 틀렸다는 말은 시간이 지나보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역사가 그 행위를 판결한 뒤에야 할 수 있는 말입니다.” /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카스트로) (60)
 
 
일본인의 책임 의식
 
‘옥쇄(玉碎)’ 전쟁터에서 신념에 몸 바쳐 아름답게 산화한다 (75)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의 많은 ‘전향자’와 마찬가지로 오카모토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비교적 짧은 시간밖에 체험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짙었다. 따라서 영향을 준 사람들과 단절되었을 때 자신을 힘겨운 상황에 빠뜨린 이데올로기와 맺은 관계를 지속하기란 너무나 어려웠다. / 정신적인 전향, 즉 회심(回心)에 다다르는 과정에는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전형적인 예를 들면, 먼저 죽음에 직면했을 때 죽음의 이유를 찾는 데도, 감옥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이유를 찾는 데도 마르크스주의가 부족하기 짝이 없음을 깨닫는 체험을 한다. 그 결과 정신적 전향자는 자신이 살아갈 목적을 더 잘 설명해줄 다른 이데올로기를 애타게 찾게 된다. / 오카모토는 장렬히 전사하려고, ‘옥쇄’하려고 발버둥 쳤다. 신념에 몸 바쳐 영웅답게 죽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이국에서 감옥 생활에 짓눌려 살던 그에게는 적군파 이데올로기도, 죽은 자의 기억을 간직한다는 생존자로서의 새로운 사명도 불충분했다. 이때 기독교가 그처럼 특수한 상황에서도 삶을 이어갈 의미를 찾을 실마리를 제공해준 것이다. (79-80)
 
 
2장. 적군파 - 혁명군 병사라는 이미지
 
 
적군파 결성의 이데올로기
 
학생들은 또한 심각해지는 공해 문제나 산리즈카 신공항 건설 문제와 같은 국내 문제, 북한과의 관계나 오키나와 반환 같은 국제 문제에도 뛰어들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일안전보장조약(안보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이 베트남에서 미국의 군사 행동을 원조하는 역할을 짊어지게 되리라는 불길한 전조였다. ... 신좌파 학생 단체는 일본 정부에 아무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베평련의 활동에 갈수록 답답함을 느꼈다. 국내외 문제를 둘러싼 학생들의 가두 항의 행동은 평화적 행진에서 기동대와 벌이는 무력 충돌로 변모하며 과격해져 갔고, 학생들도 헬멧과 죽창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 일반 대중의 지지는 항의 활동이 사회 질서를 파괴함에 따라 점차 사라졌다. / 학생 활동가들에 대한 경찰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91-93)
 
1950년대에는 거의 모든 대학을 산하에 둔 학생 연합 조직 전학련(全學連,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이 있었다. 50년대 후반까지 전학련은 일본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며 활동했다. 50년대 후반 공산당의 정책에 중대한 노선 전환이 몇 가지 생기면서 전학련은 공산당 가입 문제를 놓고 분열했다. 이후 공산당 지도 아래 남은 이들은 더욱 온건화했다. / 다음 10년간 당파 분열이 계속 이어졌고 새로운 조직은 학생 운동 안에서 서로 경쟁하는 파벌, 즉 섹트로 급격하게 불어났다. ... 그러나 그 알맹이는 그들의 선배와 동료들이 지닌 이데올로기와 거의 다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섹트마다 특징적인 스타일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대부분 일본공산당의 틀을 계승하여 수입을 얻고 조직을 유지하는 확고한 원천인 지방 학생 조직을 지배하고자 경쟁했다. /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캠퍼스에서 일본의 섹트와 꼭 닮은 조직을 든다면 정치적인 학생 운동 조직이 아니라 보수적이고 비정치적인 프래터니티(fraternity, 남학생 사교 클럽)가 더 가깝다. / 미국의 프래터니티와 마찬가지로 섹트의 멤버 충원은 가입 권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 문제가 일어나면 각 섹트가 몰려와 그 문제의 사소한 부분까지 따지고 드는 이데올로기 논쟁, 권력 항쟁과 함께 끼어들었다. (94-96)
 
적군파의 모체가 된 조직 ‘분트(공산주의자동맹)’는 1957년 전학련의 내부 분열을 계기로 하여 1960년대 안보투쟁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 신좌파 단체로서 분트는 늘 실력 행사로 혁명의 길을 개척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 1968년 관서(關西) 분트는 시오미 다카야(鹽見孝也)의 지도 아래 분트 안에서 ‘적군(赤軍)’이라는 군대 결성을 꾀했다. ... 그러나 분트의 총 지도자는 경찰의 탄압을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올 거라며 적군 결성을 반대했다. ... 결국 1969년 여름 조직 내 당파 투쟁이 폭력 항쟁으로까지 발전함에 따라 소수파였던 적군파는 분트와 결별하여 독자적 길을 걷게 되었다. (97)
 
선택받은 일본 청년으로서 세계 혁명 전쟁에서 자신들이 전위라고 자각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 혁명이라는 낭만적 목표에 몸을 바치기를 열망하는 자에게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었다. (100-101)
 
적군파 결성에 앞서 10년간 학생 세 명이 직접 항의 행동을 하다 죽음을 맞았다. 모두 과격한 사위 한복판에서 밟혀 죽거나 치여 죽었다. 한편으로 그 열 배에 달하는 학생들이 섹트 간의 ‘우치게바(内ゲバ)’에 의해 살해당했다. 적군파에서 나온 첫 사망자도 우치게바로 죽은 사람이었다. 1969년 여름의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적군파는 분트와 최종적으로 결별했다. (103)
 
소년들이 벌이는 게임, 적군파는 온갖 수사를 동원해 이 과격한 게임을 소리 높여 선전했지만, 그 목소리에 죽음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마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104-105)
 
 
무장 투쟁이라는 돌파구
 
1969년 9월 ‘가을 봉기’, ‘오사카 전쟁 - 시카고 전쟁 - 도쿄 전쟁’ / 10월 21일 국제 반전의 날, ‘피스 통 폭탄’, 경찰서 습격 / 11월 4일, 다이보사쓰 고개에서 첫 군사 훈련, 5일 53명 전원 체포, 7일 사토 에이사쿠 총리 관저 습격 계획 무산 / <옥중통신> / 체포 14,748명, 학생 85%, 대학교 234곳, 고등학교 316곳 / 10월~12월 압수된 화염병 10,100개, 빈병 21,617개, 각목 12,345자루, 쇠파이프 4,313자루, 나무칼과 죽도 67자루, 죽창과 장대 871자루, 헬멧 4,418개, 돌멩이 47.8톤 / 1970년 1, 2월 봉기, 도쿄 800명, 관서 1,500명, 삿포로 500명, 전공투 출소 / 3월 ‘혁명전선’ 지원 활동가 조직 / 3월 15일 적군파 의장 시오미 다카야 체포 / 3월 31일 다미야 다카마로(田宮高麿) ‘요도호’ 납치 첫 국제적 활동 / 새 지도자 다카하라 히로유키 체포, 조직의 주도권은 ‘신세대’에게 (106-125)
 
 
제2세대
 
시오미가 체포되고 약 반 년 뒤 적군파의 지도권은 모리 쓰네오(森恒夫)가 쥐게 되었다. / 모리는 시오미 이론의 열렬한 신봉자를 자임했으나, 실제로 모리의 목표와 개인적 성격은 시오미와는 딴판이었다. 초기 적군파 지도부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조직이었다. / 모리는 국제 연대를 강화하기 보다도 국내 투쟁을 중심으로 삼아 군대를 재구축하려 했다. 적군파를 총체적으로 하나의 군대라고 보는 애초의 조직 개념을 버리고 지상 활동을 하는 지원 그룹과 지하에 숨어 활동하는 탄탄한 엘리트 군대 사이에 분명히 선을 그었다. / 모리는 새로운 세대를 모집하여 군대를 발전시켰는데, 그들은 분트에서 온 옛 멤버들에 비해 나이가 어리고 정치 경험도 적었다. (126-128)
 
모리 쓰네오가 지휘하는 지하 군대의 병사들은 평범한 일상생활과 완전히 단절되어 지극히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공동 생활을 꾸리며 적군파 이론을 공부하거나 폭발물을 제조하면서 지령을 기다렸다. 극비 은신처에서 이런 군대를 유지한다는 것은 식비를 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돈이 드는 계획이다. 1971년 초에 모리의 지하 군대는 활동을 유지하고자 은행이나 우체국을 털기 시작했다. / 자금 탈취 투쟁은 중앙에서 내린 지령을 따라 비교적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개별 부대가 수행했다. 이런 구조는 일본의 기업 관리 방법과 꼭 닮았다. 먼저 회의를 열어 개개인의 역할을 정한 뒤 행동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회의를 또 다시 연다. 이런 절차가 반복된다. 미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일은 개인에게 맡겨지는 일이 많고 회의는 시간 낭비로 여겨지는 게 보통이다. (129-130)
 
마피아의 머리글자를 따 ‘M작전’이라고 불린 자금 탈취 투쟁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경찰과 언론이 일반적인 강도와 정치적인 동기에 따른 적군파의 강도 사건을 분명히 구분했는데도 일반 시민의 반응은 싸늘했다. / 감옥에 있던 고참 멤버들은 그들의 후계자가 어디를 보나 비정치적으로 여겨지는 이 같은 행동을 저질렀다는 것을 몹시 충격적이고 불쾌한 일로 받아들였다. ... 모리와 그 휘하의 오합지졸들을 비판하며 그들이 적군파를 타락으로 이끌었다고 비난하는 식으로 반응했다. / 감옥 안의 멤버들은 이데올로기적인 지도권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거듭 주장했으나 상황은 그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조직을 대표한다고 굳게 믿었다. /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공산당과 적군파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이 당의 올바른 노선인지 판단을 내려줄 사람의 유무에 있다. (130-131)
 
내가 이 두 세대의 차이를 처음으로 뚜렷이 인식한 것은 1986년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날 우연히 각 세대에 속하는 옛 적군파 멤버 두 명을 동시에 인터뷰하게 된 것이다. ... “저분은 우리가 그때 어떤 느낌었는지 몰라요. 상황이 전혀 달랐어요.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132-133)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 오쿠다이라 쓰요시(奥平剛士)와 형식적 결혼, 외국 신혼 여행, 레바논에서 PFLP(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활동 / 1971년 ‘혁명좌파’에 의한 총포 가게 습격 (134-136)
 
1972년 2월 17일, ‘연합적군’ 적군파 지도자 모리 쓰네오와 혁명좌파 지도자 나가타 히로코(永田洋子) 체포 / 아사마 산장 농성, 국민적 영웅 / 오카모토 고조 일본 축국 / 연합적군 12구의 시신 발견 / 심각한 의견 분열, 학생 투쟁 전체에 커다란 충격 (137-143)
 
적군파 레바논 그룹은 조직으로서 망설임 없이 연합적군을 자신들에게서 떼어냈다. ... 그러나 멤버 개인은 희생자와도, 생존자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기에 연합적군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145)
 
집단 시설에 들어간 사람들의 사회적·심리적 체험을 두고 사회과학 방면에서 꽤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 1972년 3월 가고시마 대학을 떠났을 즈음의 오카모토 고조는 설령 장비와 기술이 있었더라도 붐비는 공항 터미널에서 총을 난사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두 달 동안 그는 장비와 장비를 다루는 기술뿐 아니라 과업을 해낼 수 있는 자기 정체성, 마음가짐이라 할 만한 것 또한 획득했다. 그는 자신이 꿈꾸던 인물이 되는 데 성공했다. (146-147)
 
시게노부는 공식적으로 연합적군을 지지하지 않으며 결별을 표명한다는 메시지를 일본에 보냈다. / 적군파 레바논 지부는 팔레스타인인의 눈에 영락없이 권위가 실추된 것 같았다. 피에 굶주린 경솔하고 무모한 집단으로 보인 것이다. / 경제 문제도, 팔레스타인인의 감정 문제도 해결책은 하나였다. 명예를 회복하려면 적군파의 전통에 따른 과감한 투쟁을 실행하여 적군파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 연합적군 사건을 보고 아랍인은 일본인이 인민을 하찮게 여긴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들의 동지를 그렇게 손쉽게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면 자살 행위가 될 수도 있는 임무를 맡겨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 오카모토는 이 문제를 두고 1975년에 기고한 잡지 기사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연합적군 사건이 없었다면, 텔아비브 공항 습격도 없었을 것이다.” (147-148)
 
 
3장. 연합적군 숙청 사건 - 폐쇄된 집단의 내부 폭력
 
 
연합적군이라는 조직
 
모두 전공투 운동이 즐거웠다고 한다. 세상을 바꾸는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그 운동은 이제 없다. 72년의 연합적군 사건 이후 모든 것이 끝났다. - 스즈키 구니오(정치 활동가)
 
이론 때문에 죽인 건지, 죽이고 나서 이론으로 정당화한 건지 그들도 구분이 안 가는 것 같다. ... 이제 신좌파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운동은 결국 그들이 이끌어 가고자 했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 마쓰모토 세이초(작가)
 
 
나는 운동을 연구하고 있었지 운동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고, 더구나 운동을 실천할 방법을 고민하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 그러나 ... 이 사건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극단적 사건이 아니라 빠져들기가 너무나 쉬웠던 심연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152)
 
이런 집단적이고 자기 유도적인 공포의 기록을 읽다 보면, 우리는 독자적이고 강력한 이론을 지닌 도착적인 세계로 빨려들어 간다. 수많은 일본인이 이 비극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저널리스트는 린치나 권력 투쟁이라는 말로 정리하고자 했다. 과학자는 이들이 먹은 식료품 목록을 분석하여 집단 행동의 원인을 식량 부족에서 찾았다. 판사는 나가타 히로코를 악의 화신으로 보았다. 운동 지도부는 이데올로기의 방향 설정을 잘못한 탓에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후회하며 책임을 느꼈다. / 나는 그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 속에서 체계적인 사회 구조를 읽어내는 훈련을 쌓아 온 외부인의 시점을 제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내게 이 사건이 주는 진정한 교훈, 진정한 공포는 지극히 일반적인 사회 상황이 뜻밖의 이변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154)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신좌파 사이에서 자주 일어나던 섹트 간의 항쟁, 이른바 우치게바와는 성격이 달랐다. ... 고립된 개인을 대상으로 한 덩어리가 된 단체가 집단적인 폭력 행위를 저지른 사건이다. 죽음에 이르는 숙청은 통일이라는 의식의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 이 단체가 광기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면 그 원인은 혁명적 이데올로기 말고는 달리 없을 것이다. ... 연합적군 사건을 이해하려면 ... 집단 행동과 조직의 내면 풍경을 찬찬히 연구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154-155)
 
연합적군의 탄생
 
일본공산당 혁명좌파 가나가와 현 위원회(통칭 혁명좌파)는 적군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분트 계열인 ML파와 일본공산당 중국파에서 갈라져 나온 이들이 결성한 조직이었다. 사상적으로는 적군파보다 마오쩌둥주의 색채가 짙었고 민족주의와 반미 성향이 있었다. ... 페미니즘 사상을 뚜렷하게 내세우며 여학생도 멤버로 모집했다. (156)
 
혁명좌파의 창설자 중 한 명인 가와키타 미쓰오(河北三男)는 조직이 무장 유격전 노선을 택하게 되자 가와시마 쓰요시(川島豪)에게 전권을 넘기고 탈퇴했다. 공사 현장에서 훔친 다이너마이트를 미국 군사 시설 주변에 설치, 아이치 외상의 방미 저지 투쟁을 위해 도쿄만 근처 공업 지대에서 바닷가의 공항 활주로까지 헤엄쳐 건너 화염병을 던지며 비행장을 달리다 체포, 경찰서 습격 사건으로 순교자 배출, 총포 가게 습격(소총 10자루, 공기총 1자루, 탄환 2,300발) (157-159)
 
혁명좌파는 총포 가게 습격에 성공하여 총과 탄약이 넉넉했으나 지하 멤버의 생활 자금이 바닥났다. 한편 적군파는 잇따른 은행 습격으로 상당액의 자금을 확보했으나 혁명적 행동이라는 목표를 위해 쓸 무기가 부족했다. 또한 적군파는 소형 폭파 장치의 제조법을 알았지만 혁명좌파는 그저 훔쳐 온 다이너마이트를 군사 기지 주변에 설치하는 수준이었다. (159-160)
 
1971년 가을 두 단체의 지도부는 각 군대를 통합하는 데 합의하고 뒤이어 새로운 명칭의 연합체 ‘연합적군’을 만들었다. 통합의 첫 단계로 12월 초순 적군파가 확보했던 일본 남알프스 아라쿠라(新倉) 근처의 산속 기지에서 공동 군사 훈련을 실시하기로 했다. / 공동 군사 훈련은 두 단체에서 아홉 명씩으로 제한했는데, 아홉 명은 모리가 그때까지 모을 수 있었던 최대한의 인원이었다. / 산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일본의 혁명적 변혁에 어떤 형태로든 개인적으로 공헌하고 싶어 했다. 혁명이 과연 실행 가능한지, 무장 투쟁이 정말 혁명으로 가는 길인지 같은 의문은 애초에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161)
 
연합적군의 조직 구성과 지도권
 
모리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것은 나가타 보다 이론 투쟁을 잘했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 이론을 구사하여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이데올로기적 의의를 새롭게 부여하는 것이 특기였다. ... 실제로 지도자의 주된 역할은 이데올로기적 상황 분석을 바탕으로 단체의 행동 방침을 결정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단체의 활동을 끊임없이 이데올로기로 정당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62-164)
 
1971년 여름 나가타와 모리가 대화를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은 모두 하부 멤버의 이탈 문제에 직면한 상태였다. / 모리는 스파이와 이탈자를 처형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 모리와 헤어진 뒤 나가타와 측근 몇 명은 이탈자 두 명의 처형을 단행했다. (164-165)
 
공동 군사 훈련
 
나가타는 도야마가 회합 때 경박하게도 머리를 빗질했다는 점, 총 사용법을 학습하는 데 불성실했다는 점, 산에 들어오면서 이름도, 머리 모양도 바꾸지 않았다는 점 등을 꼬집어 비판했다. 나가타가 보기에 도야마는 그저 감옥에 있는 적군파 지도자의 애인일 뿐 혁명에 관하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여자였다. / 그러나 적군파는 페미니즘 문제를 외면해 왔으며 도야마에게 지하 생활의 엄격함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 도야마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영문을 몰랐고 적군파의 다른 멤버도 마찬가지였다. / 모리는 도야마와 적군파를 변호하는 입장이었지만 비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동시에 그는 이 비판 방법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한동안 부엌에 틀어박혀 동료들과 의논한 뒤 자리에 돌아왔을 때 모리는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이 이론은 이후 연합적군을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된다. (167-169)
 
 
‘공산주의화’
 
나가타 히로코 “당신, 산에는 왜 온 거야?”
도야마 미에코 “왜냐니... 군사 훈련을 하러 왔지요.”
나가타 “그게 아니라,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왔느냐는 거야.”
도야마 “저는 혁명 전쟁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해 스스로 군인이 되어 혁명 전사가 될 필요성을 이해해서 왔습니다. 세계 혁명 전쟁의 지구적 대치 단계에서는 선진국에서 혁명 전쟁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나가타 “당신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산에 온 거냐고. 지금 자기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하고 있잖아. 왜 산에 온 건데?”
도야마 “무슨 말을 하라는 거죠?”
 
 
‘완전한’ 자기 비판
 
동지들과 부엌에서 의논한 뒤 모리는 자리로 돌아와 ‘공산주의화’라는 관념을 설명했다. / 공산주의화라는 개념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여하튼 더욱 훌륭하게 공산주의화한 혁명 전사가 되기 위해 각자 자신의 부르주아적인 행위를 자기 비판하여 일소하자는 이야기였다. 공산주의화를 달성하는 방법은 각 멤버의 약점을 집단적으로 검증하고 개개인이 지적받은 약점을 뛰어넘고자 노력하는 것이었다. (170-171)
 
연합적군이 결성되기 전부터 모리는 적군파 멤버에게 자기 비판을 시키기는 했으나, 비판 과정은 어디까지나 모리 혼자서 개인적으로 다루어 왔다. ... 자기 비판은 먼저 자신의 행동을 깊이 반성한 뒤 모리 앞에서 구두로 비판을 수해하고, 그 뒤 한 달 정도 금주나 금연 따위의 벌을 받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 모리의 경우 특징적이었던 점은 ‘자기 비판’과 ‘총괄’을 일체화한 부분이었다. ‘총괄’이란 일본의 운동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말인데, 조직이 당면한 문제를 다 함께 반성하며 검증하고 그 결과의 개략을 정리함으로써 다음 행동 방침을 세우는 일이다. / 따라서 ‘총괄’은 한 개인의 사적인 반성에서 나오더라도 결국에는 조직의 행동 방침을 언급하게 된다. (171-172)
 
이번 공동 군사 훈련에서 모리는 자기 나름대로 사용해 온 ‘총괄’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각 멤버는 조직 전체의 상호 비판을 통해 사고방식과 행동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이 첫 단계에서 다음 세 가지 요소가 공산주의화를 죽음에 이르는 이데올로기로 변모시켰다. 첫 번째, 집단적인 의식 고양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 방법은 상당히 숙련된 지도자가 아니라면 조절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집단의 힘을 제멋대로 날뛰도록 풀어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 번째, 공산주의화를 달성한 상태와 개인이 변혁을 성취한 상태의 정의가 모호했다는 점이다. 세 번째, 공산주의화를 완전히 달성할 때까지 아무도 산을 내려가면 안 된다고 정했다는 점이다.
 
브레이크 없음
 
의식 고양법은 미국에서는 집단 심리 치료법으로 곧잘 활용되며 ... 집단을 이끄는 것은 숙련된 지도자다. 그는 집중 비판이라는 것이 매우 잔혹해지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도를 넘지 않게끔 토론의 방향을 능숙하게 조정해야 한다. / 그러나 초보자가 의식 고양법을 사용하는 것은 어디서든 위험하며, 집단을 통제하지 못해 도를 넘어서는 일이 적지 않다. / 연합적군에는 과도한 공격으로 쏠리지 않도록 제동을 걸 수단이 전혀 없었다. ... 회의가 집단 비판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자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173)
 
기준 없음
 
실제로 공산주의화라는 개념은 참으로 모호해서 연합적군 생존자들도 입을 모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른바 자기 혁명을 획득하자는 정서적 호소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변혁을 획득한 상태라는 게 무엇인지, 획득해야 할 변혁이란 도대체 뭔지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174-175)
 
혁명 좌파의 페미니즘 이데올로기가 본의 아니게 성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억압하는 방향을 추구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성에 관한 금욕적 경향은 이념 단체에서 곧잘 관찰된다. ... 멤버는 사생활 일체를 버리고 마음 밑바닥에 숨겨 둔 욕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정을 다 드러내야 한다. / 따라서 ‘공산주의화’라는 방침 아래 멤버가 지극히 사소한 성적 과오까지 진지하게 고백하고, 집단적 비판 세례를 받으면서 그 과오가 부르주아 사상이 남아 있는 탓이라는 크나큰 문제로 부풀려졌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177-178)
 
이런 상황은 로플랜드(John Lofland)가 ‘비정상에게 낙인찍기’라고 이름 붙인 행위로 수렴한다. 비정상(이 경우에는 ‘총괄하지 못하고’ 공산주의화를 획득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낙인을 찍을 모호한 핑계는 많았다. 반면 판단할 기준은 아주 조금만 있어도 충분했다. (178)
 
출구 없음
 
세 번째 문제점은 공산주의화를 획득할 때까지 아무도 산에서 내려가면 안 된다는 모리의 명령에 있었다. (178-179)
 
 
폭력과 정화
 
이제까지 요구한 총괄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정한 총괄을 위해 때리도록 하자. 때려서 바른 길로 이끄는 거다. 기절할 때까지 때린다. 깨어났을 때는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공산주의화를 받아들일 거다. - 모리 쓰네오, 폭력에 의한 ‘총괄’을 처음 제안하며
 
왜 이런 일을 시키는 건가 하는 원망을 느끼면서도 도야마에게 폭력을 가하라는 지시를 거부하지 못했어요... 정말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죠. 그렇다는 걸 다들 아는데 멈출 수가 없었던 겁니다. - 아오시마 리키오, 연합적군 숙청을 회고하는 인터뷰 중에서
 
자기 변혁을 위한 폭력
 
공산주의화를 달성하기 위한 강한 정신력, 자기 변혁을 위한 신체적 훈련 / 도야마 미에코(遠山美枝子), 나메카타 마사토키(行方正時), 신도 류자부로(進藤隆三郎) 총괄 / 12월 25일 가토 요시타카(加藤能敬), 고지마 가즈코(小嶋和子) 총괄 - 구타 
 
모리는 구타가 잘못된 행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과 대결함으로써 약점을 극복하게 하는 수단이라고 못박았다. ... 나아가 모리는 가토와 고지마를 기둥에 묶고 식사를 주지 말 것, 화장실에도 보내지 말 것을 명령함으로써 이 새로운 지평을 강화했다. 이런 조치는 ‘총괄’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명목으로 정당화했다. ... 일정 수준의 고통이 기대만큼의 결과를 낳지 못했다면 더 심한 고통을 가해야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이런 과정 전체가 오류라고 인식하는 것은 모리에게 불가능했다. 실제로 모리가 지닌 사고방식은 순식간에 연합적군 전원에게 퍼져 나갔다. / 폭력이 거북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감정은 자신이 나약해서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185-186)
 
전원이 참가한 폭력
 
‘공산주의화’라는 수사에 흠뻑 빠져든 멤버도 있었지만 점점 심해지는 폭력에 불안을 품는 사람도 있었다. 나가타는 머뭇거리는 멤버에게 폭력에 참가하라고 독려했고 전원의 사기를 높여 결의를 다지려했다. 으레 그랬듯 모리는 나가타의 이러한 대응에 잽싸게 이론적 위치를 부여했다. ‘총괄’을 달성하고자 수행하는 폭력에 참가하는 일은 참가자 자신의 ‘공산주의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187)
 
미국의 조직에서는 ... 자유롭게 이의를 표명할 수 있다. 물론 다수결에 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다수결로 정해진 결정을 비판하는 것은 허용된다.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은 기꺼이 따르지 않고 마지못해 따르는 태도를 보여도 상관이 없다. (187)
 
점점 심해지는 폭력 앞에서 주춤한 사람도 마음 약한 자세를 조금이라도 보이면 이번에는 자신이 비혁명적이라고 추궁당하리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188)
 
1950년대 페스팅거(Leon Festinger)를 필두로 한 연구자들은 소규모 조직 내부의 개개인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외부의 현실 사이에 불일치를 경험했을 때, 외부의 현실에 새로운 해석을 가해 이데올로기에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함을 논증했다. ... 자기 안의 모순을 해결하려면 이 선택이야말로 폭력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공산주의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굳건히 믿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188-189)
 
패배사라는 논리
 
오자키 미치오(尾崎充男) 총괄 - 결투 / 결투가 끝난 뒤 오자키는 때려줘서 고맙다고 모리에게 인사했는데, 모리도, 나가타도 이런 행동은 ‘어리광(甘え)’이고 종속적인 자세를 드러내며 아첨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90)
 
(12월 31일, 첫 번째 희생자) 오자키 사망... 전원이 오자키의 구타에 참가했지만 오자키와 자기 자신의 공산주의화 달성에 몰두하느라 그에게 얼마나 심각한 상처를 입혔는지 아무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191)
 
모리는 오자키의 죽임이 ‘패배사’라고 모두에게 알렸다. 오자키가 자신이 공산주의화를 이룩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충격으로 죽었다는 설명이었다. / 오자키는 모두가 도와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산주의화의 지평으로 나아갈 힘이 없었기에 패배사를 ‘선택’한 것이다. (191-192)
 
모리의 이론은 희생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노골적인 논법이자 자신의 행동이 초래한 결과에서 도망치는 데 쓰이는 상투적 수단이었다. ... 패배사 이론은 공산주의화를 위한 폭력적 총괄 요구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92)
 
오자키의 예기치 못한 죽음은 조직이 상황을 재인식하고 폭력을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 ‘죽음의 총괄’은 폭력에 참가하는 것에 다시금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방침을 이끌어내는 계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멤버들은 누구나 폭력이 축소된 데 마음을 놓고 쌍수 들어 변화를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2-193)
 
 
폭력과 이론적 정당화의 상호작용
 
마오쩌둥이 ‘죽음에도 태산처럼 무거운 것과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 있다.’고 했지. 오자키의 죽음은 경멸해 마땅한 가벼운 죽음이야. 나는 혁명 전사로서 태산처럼 무겁게 죽고 싶어. - 이와무라 효고, 숙청의 첫 희생자 오자키 미치오의 죽음을 두고
 
나는 내가 광기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보며 내가 그런 세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을 만큼 사리 분별을 못하게 된 상태였다거나 상황을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처리했던 것이다. - 모리 쓰네오, 감옥에서 연합적군 숙청을 자기 비판하며
 
 
오자키 미치오가 죽고 그 죽음을 패배사라고 모리가 해석했을 때부터 연합적군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난과 폭력과 죽음이 거듭해서 돌고 도는, 빠져나갈 수 없는 숙명의 여행이었다. ... 그들을 이런 행위로 몰아넣은 힘의 중심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지도부와 피지도부의 상호작용, 다른 하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호작용이다. 둘 다 적대와 의존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였다. (194)
 
1971년 12월 산악 기지에서 두 단체가 합병했을 때까지만 해도 혁명좌파는 산속에서 민주적인 오두막 생활을 꾸리고 있었다. ... 매일 열리던 회의에 전원이 참석할 수 있었으며 만장일치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회의는 갈수록 동의를 전제하고 미리 결정된 방침을 전달하는 지도부의 일방적 발언으로 점철되었다.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멤버들은 말수가 줄었고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엄격한 총괄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196-197)
 
잠깐이라도 멈칫하거나 의심하면 즉각 ‘기회주의’라고 비판당하는 상황에서, 모리는 부하의 기대에 부응하고 자신의 과거를 뛰어넘기 위해 극단적으로 급진적인 방침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 합리화, 정당화, 자기기만 (198-200)
 
사람들이 왜 권력을 따르는지, 적극적으로 모리에게 복종한 까닭 / 첫 번째로 피지도부가 자신의 판단 능력에 자신감을 가질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 이러한 판단 정지 상태는 ‘비정상’인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자기 자신의 느낌에 따라 확고한 판단을 내리기보다 외부가 자신의 판단을 보는 시각을 중시하는 일본 사회의 경향도 상황이 악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 두 번째로 상황이 전개되는 양상 앞에서 망설임을 보이면 신체적 위험이 따라왔다는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 의심은 의심을 품은 사람을 공격하는 데 좋은 구실이 되었다. (201-203)
 
가토는 이런 상황에서도 정신이 멍해 총괄에 집중하지 못해서 슬프다, 총괄에 집중하려고 머리를 기둥에 부딪쳤다고 대답했다. 모리는 이 말을 듣고 바로 진보했다며 크게 칭찬한 뒤 가토를 오두막집에 들여보내 따뜻하게 해주었다. ... (1월 2일, 세 번째 희생자) 고지마는 눈을 뜬 채 죽었는데, 모리는 무서운 얼굴로 죽은 것은 마지막까지 총괄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4)
 
연합적군이라는 조직이 지닌 다이내믹스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는 초기에 이뤄진 이론 구축과 폭력적 총괄에 참가하지 않았던 신참 멤버가 휩쓸린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 12월의 마지막 주, 가토와 고지마가 이미 구타당했고 오자키가 아직 죽지 않았던 무렵 혁명좌파 기지에서 남자 세 명이 아라쿠라의 기지에 남은 적군파 멤버 여섯 명을 데리러 갔다. 그 중에는 도야마 미에코, 신도 류자부로, 나메카타 마사토키도 들어 있었다. / 하루가 더 걸려 후발 그룹이 도착했을 때 신도는 이미 공산주의화를 위한 폭력적 총괄의 희생자가 되었고 오자키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죽은 상태였다. ... 이튿날 며칠 동안 굶고 추위에 떨던 고지마가 끝내 사망했다. / 도야마 미에코는 ... 혁명 전사가 되어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발언했지만, 모리가 발언 내용에 만족하지 못하고 비판하자 종국에는 “죽기 싫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모리는 즉시 이 말을 공산주의화를 달성하지 못한 증거라고 규정했다. (206-208)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실험, 시체를 처리하면서 괴로워 보이는 사람은 도야마와 나메카타밖에... / 지도자 모리의 판단은 모리 자신의 공포심에서 나온 자기 행동의 합리화였을 뿐 아니라 한층 깊은 불안을 품은 피지도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피지도부 멤버들은 혁명에 대한 희망과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 행위에 대한 공포의 틈바구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길은 모리의 해석을 받아들이고 그 이론을 내심 싹트는 의심을 억누르는 데 이용하는 것이었다. (209-211)
 
 
뫼비우스의 띠
 
기둥에 등을 붙이고 손이 뒤로 묶인 형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창백한 얼굴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나가타가 형의 몸을 흔들며 “왜 총괄하지 않고 죽는 거야!” “끝까지 노력하지 않고 절망하니까 죽는 거지!” 하고 허둥거리며 소리쳤다. - 가토 삼형제의 둘째, 숙청 희생자가 된 형 가토 요시타카의 죽음을 회고하며
 
 
새로운 희생자는 폭력의 가해자들 중에서 나왔으므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의식하는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양쪽의 차이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멤버들은 피해자와 거리를 두기 위해 그들을 배제하기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진정한 동지적 원조라는 기묘한 논리에 집착했다. (212-213)
 
연합적군의 경우 희생자를 집 밖에 놔두는 것은 기둥에 묶인 채 살이 에이는 듯한 추위를 견디는 가혹한 신체적 고문을 가하는 것이었고, 배제한다는 의도 역시 명확했다. 따라서 다른 멤버는 희생자와 자신을 감정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 단 때때로 사람을 보내 상태를 살펴보게 하는 것은 친구에 대한 배려라고 여겼다. (214)
 
가까운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억지로 관계를 끊어내는 과정은 쉽지 않다. ‘동지적 원조’라는 이름으로 폭력에 참가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멤버들은 자신의 고뇌를 동지인 희생자에 대한 짜증과 분노로 바꾸어 갔다. 그들은 생각했다. ‘왜 폭력을 휘두르지 않아도 되도록 빨리 올바른 태도를 갖추지 않는 거지?’ / 자신의 공포심과 의심, 혼란을 희생자에 대한 분노로 떠넘기는 것은 당시 비교적 쉬운 선택지였다. ... 이런 도착적인 논리 속에서 희생자들은 맞아도 싼 위치에 서서 스스로 자기 죽음의 ‘원인’이 된 것이다. (216-217)
 
중앙위원회 야마다의 비판, 사카구치의 분노 /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 이미 희생자가 된 사람, 약점을 경고 받은 사람, 아직 표적이 되지 않은 사람, 이 3자 사이에 명확한 구분선은 전혀 없었다. / 총괄을 완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실패했다. 자기 변혁을 못했다고 희생자를 다그치면서도 남은 멤버들 중 더 의지가 강한 사람들도 같은 고통을 극복할 자신이 없었다. ... 자신의 나약함을 지적받기 전에 누군가 다른 사람의 나약함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유일한 자기 보호 수단이었다. (218-222)
 
(혁명좌파의 부지도자) 데라오카는 순식간에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조직과 그 지도자를 팔아넘기려고 한 기회주의자로 규정되었다. ... 마녀 재판을 방불케 하는 상황에서 ... 데라오카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너는 스탈린과 똑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음송곳으로 데라오카의 심장을 찔렀다. 몇 명이 나와 또 찔렀다. 그래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마지막에는 목을 졸라 죽였다. 우에가키는 수기에서 데라오카가 죽은 뒤 커다란 투쟁을 완수했다는 기묘한 뿌듯함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 그 뒤 적군파 멤버 야마자키 준이 자신도 데라오카와 같은 문제가 있다고 고백했다. 바로 엄중한 비판이 가해졌고 맞으면서 야마자키는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데라오카와 마찬가지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223-224)
 
우에가키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가는 심리적 과정과 가해자가 되어 가는 과정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처음에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동지와 지도자를 신뢰하고 집단의 의식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똑같은 멤버다. 그러나 그 의식이 점차 멤버를 두 가지 역할, 즉 고발자와 희생자로 갈라놓는 것이다. (230)
 
가해자들은 각자 자신의 태도가 유죄 선고를 받을까 봐 두려워 공식적 해석과 다른 개인적 생각을 억눌렀다. 그러나 피해자인 우에가키는 불만과 고립감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럽게,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231)
 
희생양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느 나라에서나 관찰되며 다양한 상황에서 관련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 그런 경우 눈에 보이는 기준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부정적 요소가 더해짐으로써 마땅히 증오해야 할 부정적 특징의 스테레오 타입이 완성된다. 희생양이 동지들 사이에서 선택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32)
 
루이스 코저(Lewis a. Coser)의 지적처럼 희생양은 적개심을 진정한 적에게 향하지 못할 때 안전한 분출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싸움의 진짜 상대와 직접 대결하지 않는 한 희생양은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싸움을 심화하고 희생양에 대한 증오를 부추길 뿐이다. /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은 혁명 조직의 레종 데트르(Raison d'être,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단체는 싸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대신 그 에너지는 내부의 약자를 향한 참혹한 폭력 행위가 되어 분출했다. ... 희생양을 선택하는 기준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기에 누구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233)
 
 
1971년 
(6월 6일) 혁명좌파 멤버 무코야마 시게노리가 고소데 기지에서 이탈
(7월 13일) 혁명좌파 멤버 하이키 야스코가 임무 수행 중 이탈
(7월 15일) 적군파와 혁명좌파, 서로의 군사 조직을 통합한 ‘통일적군’ 결정. 약 1개월 뒤 감옥에 있던 혁명좌파 지도자 가와시마 쓰요시의 의견에 따라 ‘연합적군’으로 개칭했다.
(7월 21일) 혁명좌파의 나가타 히로코가 사카구치 히로시, 데라오카 고이치와 회의한 끝에 이탈한 멤버 무코야마 시게노리와 하이키 야스코의 처형을 결정
(8월 3일) 혁명좌파, 이탈한 멤버 하이키 야스코에게 수면제가 든 술을 먹인 뒤 지바 현의 인바 늪으로 데려가 목 졸라 살해, 매장.
(8월 10일) 혁명좌파, 이탈한 멤버 무코야마 시게노리를 살해하고 인바 늪에 매장. 적군파의 신도 류자부로가 모리 쓰네오의 처형 명령이 내려와 있었던 멤버(자신의 여자 친구)를 몰래 빼냄
(10월 30일) 적군파, 야마나시 현 남알프스의 나무꾼용 가건물을 군사훈련용 산악 기지로 삼기로 결정(아라쿠라 기지)
(11월 23일) 혁명좌파, 군마 현 하루나 산에 산악 기지 건설 시작(하루나 기지)
(12월 3일) 적군파와 혁명좌파, 적군파의 아라쿠라 기지에서 공동 군사 훈련 개시
(12월 5일) 공동 군사 훈련 도중 나가타 히로코가 적군파 멤버 도야마 마에코의 옷차림과 태도 등을 비판
(12월 6일) 모리 쓰네오가 이후 숙청의 근거가 되는 ‘공산주의화’ 관념을 제시
(12월 21일) 적군파와 혁명좌파, 하루나 기지에서 이루어진 지도부 회의에서 군사 조직뿐 아니라 당 조직을 합체하기로 결정. 연합적군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이 자리에서 모리 쓰네오가 혁명좌파 멤버 고지마 가즈코의 발언을 비판했다.
(12월 21일) 모리 쓰네오, 가토 요시타카가 체포되었을 때 묵비를 유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
(12월 25일) 가토 요시타카와 고지마 가즈코, 책상 앞에 마주앉아 죄과를 기록하며 총괄을 함
(12월 26일) 모리 쓰네오가 가토 요시타카와 고지마 가즈코를 멤버 전원이 구타할 것을 결정
(12월 27일) 가토 요시타카가 묶임
(12월 28일) 고지마 가즈코가 묶임. 창밖을 보고 있었기에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이후 모든 숙청 희생자가 묶이게 된다.
(12월 28일) 오자키 이치오가 총괄을 요구받음. 가토 요시타카를 때릴 때 사적인 감정이 담긴 발언을 했던 것, 혁명좌파의 가미아카쓰카 경찰서 습격에 참가하지 않은 것 등을 비판받았다.
(12월 29일) 모리 쓰네오가 오자키 미치오에게 사카구치 히로시와 결투하라고 지시. 사카구치를 가미아카쓰카 경찰서 습격 당시의 경찰관이라고 생각하고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멤버들은 둘러서서 오자키를 응원했지만 오자키는 사카구치에게 일방적으로 맞았다.
(12월 31일) 오자키 미치오 사망(첫 번째 희생자). 결투가 끝난 뒤 묶인 채 모리 쓰네오 등에게 몇 차례 맞은 상태였다. 오자키의 죽음을 두고 모리 쓰네오는 ‘패배사’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아라쿠라 기지에 있던 적군파 멤버 여섯 명이 연합적군이 있는 하루나 기지를 향해 출발. 이미 모리에게 총괄 요구를 받은 상태였던 도야마 미에코, 신도 류자부로, 나메카타 마사토키는 당일 연합적군에 합류하자마자 비판 대상이 되고 곧 숙청으로 죽음을 맞는다. 아오시마 리키오, 우에가키 야스히로, 야마자키 준은 1월 2일에 합류한다.
 
1972년
(1월 1일) 신도 류자부로가 총괄을 요구받음. 적군파 멤버였던 여자 친구를 숙청하라는 모리의 명령을 듣지 않고 도망치게 한 것을 비판받았고, 돈에 대한 욕심과 여성 관계 등을 추궁 당했다. 모리 쓰네오는 맞아서 기절한 뒤 다시 깨어나면 새로운 의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멤버들에게 신도를 구타할 것을 제시했다. 신도는 맞은 뒤 바깥에 묶인 채 사망했다(두 번째 희생자).
(1월 2일) 고지마 가즈코 사망(세 번째 희생자). 도야마 미에코, 나메카타 마사토키가 총괄을 요구받음. 도야마는 화장하고 반지를 끼는 등 혁명 전사로서 자각이 부족하며, 적군파 간부의 아내로서 특권을 행사하며 여자라는 점을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받았다. 나메카타는 투쟁에 소극적이라고 비판받았다. 야마다 다카시가 지도부 회의에서 모리 쓰네오와 잠시 대립했으나 곧 모리의 의견을 받아들임.
(1월 3일) 도야마 미에코가 나가타 히로코의 제안에 따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고지마 가즈코의 시신을 매장. 나메카타 마사토키도 거들었다. 도야마는 이후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때리라고 명령받았다. 연합적군 중앙위원회 결성.
(1월 4일) 가토 요시타카 사망(네 번째 희생자)
(1월 7일) 도야마 미에코 사망(다섯 번째 희생자). 사카구치 히로시가 나가타 히로코에게 총괄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중앙위원회사퇴를 선언. 그러나 결국 뜻을 굽히고 사과했다.
(1월 9일) 나메카타 마사토키 사망(여섯 번째 희생자)
(1월 10일) 모리 쓰네오가 전체 회의에서 이제까지 6명의 죽음을 ‘고차원적 모순’이라고 해석
(1월 17일) 데라오카 고이치가 총괄을 요구받음. 멤버들에게 고지마 가즈코의 시신을 때리게 한 것. 도야마 미에코를 묶을 때 다리를 벌리라고 발언한 것, 연합적군 멤버인 아내 스기타 쇼코의 이혼 요구를 무시한 것 등을 비판받았다.
(1월 18일) 데라오카 고이치 사망(일곱 번째 희생자). 이전의 희생자와 달리 사형 선고를 내리고 목 졸라 살해했다. 외부에 파견되었던 이와무라 효고가 동행한 이토 야스코에게 이탈을 선언하고 떠남(첫 번째 이탈자). 야마자키 준이 총괄을 요구받음. 데라오카의 사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것이 빌미가 되어 개인주의적 경향 등을 비판받았다.
(1월 19일) 야마자키 준 사망(여덟 번째 희생자). 데라오카 고이치와 마찬가지로 사형 당했다. 이토 야스코가 기지에 돌아와 이와무라 효고의 이탈을 보고, 가쇼 산으로 기지를 이동하기로 결정. 오쓰키 세쓰코와 가네코 미치요가 총괄을 요구받음. 오쓰키는 총괄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 남편 요시노 마사쿠니와 이혼하고 모리 쓰네오를 유혹하려 한다는 것, 죽은 오자키 미치오와 사카구치 히로시의 결투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한 것 등을 비판받았다.
(1월 26일) 야마모토 준이치, 우에가키 야스히로가 총괄을 요구받음. 야마모토 준이치는 차를 운전하다 실수한 것이 빌미가 되어 비판받았다. 우에가키는 오쓰키 세쓰코와 입맞춤했다는 것 등을 비판받았다.
(1월 29일) 하루나 기지에 남아 있던 멤버들이 전원 가쇼 기지로 이동
(1월 30일) 야마모토 준이치 사망(아홉 번째 희생자), 오쓰키 세쓰코 사망(열 번째 희생자)
(1월 31일) 야마다 다카시가 총괄을 요구받음. 관료주의적 태도, 조직 활동 도중에 공중목욕탕에 갔다는 것, 조직 후원금을 목표액만큼 모금하지 못했다는 것 등을 비판받았다.
(2월 4일) 가네코 미치요 사망(열한 번째 희생자). 모리 쓰네오와 나가타 히로코가 도쿄로 떠남. 사카구치 히로시가 지도자 다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2월 6일) 하루나 기지의 짐을 가쇼 기지로 옮기던 중, 죽은 야마모토 준이치의 아내 야마모토 요리코가 아이를 두고 탈주(두 번째 이탈자). 그녀가 경찰에 출두할 것을 염려하여 사카구치 히로시는 기지를 묘기 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2월 7일) 나카노 아야코 이탈(세 번째 이탈자). 야마모토 요리코의 아이를 데리고 택시를 탄 그녀를 택시 기사가 아이와 함께 자살하려는 어머니인 줄 착각하고 경찰서로 데려갔다. 하루나 기지의 흔적을 없앤 뒤 가쇼 기지로 돌아가던 마에다 데루요시가 탈주(네 번째 이탈자).
(2월 9일) 남은 연합적군 멤버들이 묘기 산에 도착. 동굴을 발견해서 거처로 삼았다.
(2월 12일) 야마다 다카시 사망(열두 번째 희생자)
(2월 16일) 오쿠다 유지와 스기타 쇼코가 고장 난 승합차를 견인하여 도쿄로 향했다. 이들은 곧 경찰에 체포되었다. 차에서 내린 나머지 멤버들은 묘기 산의 동굴에 남아 있던 멤버가지 총 9명을 데리고 걸어서 도주하기로 했다.
(2월 17일) 도쿄에서 돌아온 모리 쓰네오와 나가타 히로코가 텅 빈 묘기 산의 동굴에서 체포되었다.
(2월 19일) 우에가키 야스히로, 아오시마 리키오, 이토 야스코, 데라사키 마사에가 식료품과 옷을 사러 가던 길에 가루이자와 역에서 체포됨. 레이크 뉴 타운에 남아 있던 5명(사카구치 히로시, 반도 구니오, 요시노 마사쿠니, 죽은 사토 요시타카의 동생 두 명)은 곧 라디오로 이 소식을 알았다. 도주하던 중 들어간 사쓰키 산장에서 순찰 중인 경찰에게 발각된 그들은 아사마 산장으로 이동하여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농성하기 시작했다.
(2월 28일) 아사마 산장 농성 열흘째. 이날 아침까지 확성기로 투항을 설득하며 최루탄, 물 뿌리기와 같은 원거리 공격만 시도하던 경찰이 항복하지 않으면 강제로 밀고 들어가겠다는 최종 통보를 했다. 이윽고 약 1,500명의 경찰 기동대가 산장에 진입했고 멤버들과 벌인 총격전에서 경찰 2명이 사망했다. 농성하던 5명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연합적군은 괴멸되었다.
(3월 7일) 야마다 다카시의 시신 발굴. 이날을 기점으로 3월 12일까지 숙청 희생자의 시신이 연이어 발굴되었다.
 
 
4장. 아사마 산장 농성 - ‘섬멸전’의 아이러니
 
 
숙청의 끝
 
오늘의 가해자가 내일의 희생자 (237)
 
 
보이지 않는 사슬
 
집단의 감시, 조직에 충성심, 집단에 강한 책임감 (240)
 
지도자의 빈 자리
 
2월 초순에 모리와 나가타가 급한 용무로 도쿄로 떠난 뒤... 사상적·심리적 지도자가 사라지자 서서히 규칙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245)
 
 
아사마 산장 농성
 
산장에서 무의미한 농성을 계속하며 엽총을 발사하는 그들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청춘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 민중과 동떨어지고 민중에게 외면당하는, 가엾은 말로를 걷는 ‘혁명’이다. - <요미우리신문> ‘편집 수첩’, 아사마 산장 농성을 두고 (1972년 2월 21일자)
 
 
배경과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있었지만 적군파와 혁명좌파는 ‘총에 의한 섬멸전’이라는 구호에서 중요한 일치점을 발견했다. ... 죽을 때까지 결연하게 싸우겠다는 의미, ... 화염병에서 총으로 올라서는 커다란 전술적 도약 / 남아메리카와 중동에서 혁명 영웅과 병사들은 대개 어깨에 자연스럽게 총을 멘 모습으로 사진에 등장한다. / 총은 내부에서 폭력 행위에 쓰이지는 않았어도 집단의 레종 데트르로서 항상 존재했다. 모리가 산속에서 조직을 이끌던 내내 총은 멤버 전체가 볼 수 있는 곳, 즉 오두막 안 지도부 특별석에 마련된 모리 전용 좌석 뒤에 놓여 있었다. (252-255)
 
12월 하순 경시청 공안부는 부서 총 인원의 절반에 육박하는 600명을 수사본부에 투입했고, 그에 더해 200명에 달하는 지원군을 형사부 및 각 경찰서에서 데려왔다. ‘롤러 작전’ (257)
 
사카구치는 지도자로서 집단의 행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책임을 졌으면서도 숙청은 큰 실수였다는 강한 확신을 서서히 품게 되었다. 우리는 아사마 산장에서 적과 정면 대결하여 맨 처음 계획대로 ‘총에 의한 섬멸전’을 실천할 것이다. 이처럼 직접적인 혁명적 대결에 의해서만 숙청이라는 참사를 극복하고 동지의 죽음에 의의를 부여할 수 있으리라. 사카구치는 연합적군의 숙청과 아사마 산장에서의 대결을 변증법적 반대물, 혁명이 새로운 통합으로 전진할 수 있는 토대가 될 테제와 안티테제라고 보았다. (264)
 
 
‘비밀’의 고백
 
요시노 마사쿠니가 지바 현 인바 늪 부근의 살해 현장에서 울었다. “향을 치우게 해 달라”며 꽃을 바치고 눈물 젖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사마 산장에서 체포되었을 때의 험악하게 굳어진 표정은 이제 없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었지만 양손에는 수갑이 번쩍이고 있었다. - <아사히신문>, 자백 뒤 첫 살인이 이루어진 현장을 안내하는 요시노 마사쿠니에 관한 보도 (1972년 3월 25일자)
 
 
자백 강요에 묵비로 저항 / 조직의 내부 문제를 폭로하는 것은 가장 중대한 배신행위 / 체포 대응책, 법적·재정적 지원, ‘구원 연락 센터(救援)’ (273-275)
 
연합적군의 숙청과 체포된 뒤 멤버들이 보인 행동의 관계는 아이러니 그 자체다. / 연합적군의 ‘총괄’은 그 사사와 추구하던 목적과는 달리 사실상 자백을 강요당하는 데 저항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백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멤버들을 훈련하고 말았다. / 경찰이 아무런 폭력도 행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멤버들이 서로를 대한 것보다 훨씬 온화한 태도를 취했을 때 그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287-288)
 
 
5장. 사건 이후 - 끝없는 이야기 지어내기
 
 
객관적 사실은 동지를 죽였다는 것이며, 동지의 눈에 비쳤을 ‘괴물’의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 모습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임을 인정하고, 그 모습을 부정하고, 부정을 끝까지 완수했을 때 비로소 총괄의 첫걸음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 반도 구니오, 감옥에서 나가타 히로코에게 쓴 편지 중에서
 
 
자기 비판과 전향 사이
 
미국의 형사 재판은 판사나 배심원 앞에서 하는 구두 증언이나 취조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토대로 삼아 진행되지만, 일본에서는 피고인이 직접 쓴 진술서가 변호의 중심이다. ... 이러한 진술서는 사실 관계와 피고인의 현재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판사가 면밀하게 조사한다. 근대 일본이 채용한 유럽 법 제도의 전통에서는 피고인이 개전의 정을 보이는지, 또 일반 시민 사회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는지가 판결을 내릴 때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된다. (291)
 
전전의 치안유지법으로 일본공산당이 탄압받은 이후 생겨난 관점, 즉 경찰 권력은 활동가로 하여금 혁명을 향한 정열을 버리게 하고 전선에서 이탈시키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한다는 관점이 현대 학생들에게도 심어져 있었던 것이다. 묵비는 전향하라는 압력에 대항하는 기본 대응책이었다. / 나는 전향 문제가 일본공산당 내부의 역사적, 사상적 문제일 뿐 아니라 개인이 사회의 압력에 직면했을 때 정치적 신념을 유지할 가능성을 둘렀나 보편적 문제라고 본다. (293)
 
자백과 전향 사이에 그어진 선은 무척 애매하다. ‘탄압에 꺾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유지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의 생각은 얼마나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을까? 무엇이 사상의 발전이며 무엇이 사상의 포기인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하는 것일까? / 모리가 쓴 두 번째 성명문은 더 짤막한 문서였다. 여기서 모리는 12명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죽겠다는 뜻을 암시하면서도, 혁명법정이 자신을 재판할 날까지 묵비를 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전투적인 자세를 지키고자 했다. (294)
 
사카구치는 여전히 취조관에게 묵비로 대응했지만 4월 초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기어이 성명문을 발표했다. ... 적 앞에서 묵비를 관철한다는 원칙을 지키고자 1개월을 참았으나, “우리가 저지른 과오가 권력의 손안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데다 그런 이용에 반격할 수단을 남김없이 빼앗겼을 때, 완전 묵비만으로는 이제 싸울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라고 그는 썼다. / “지도부가 유총주의에 기반을 두고 위로부터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지도하려 했다.”, “프티 부르주아 급진주의가 조장되었고 점차 오만한 산속의 두목이 만들어졌다.” / 연합적군 관계자 중에서는 ... 전향 표명이 아닌 자기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국은 사카구치의 글을 다른 연합적군 멤버의 마음이 조직에서 떠나가게 하려는 목적으로 공개했다. (295-296)
 
지도부에 대한 적의가 강렬하게 드러난 것은 4월 초순 연합적군 멤버들이 함께 합동 재판에 나갈지 여부를 결정할 때였다. / 어느 재판을 고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몇 년은 걸릴 정치적 재판에 참가하여 형사상의 혐의를 부정하고 자신을 변호할 것인가, 아니면 얌전히 죄를 인정하고 개전의 정을 보여줌으로써 감형을 노릴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297-298)
 
사카구치와 모리가 구치소에서 벌인 논쟁 / 자신(모리)에게는 지도력이 모자라 12명을 죽음으로 밀어 넣은 책임에 더해 (사노와 나베야마처럼) 대량 전향을 촉발한 책임이 또한 생겼다, 들 낯이 없게도 자신은 묵비를 중단했을 뿐 아니라 적에게 ‘부탁’까지 했다 / “나는 왜 살아 있는가?” ... 자기 생애의 목적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분석, 즉 ‘총괄’을 완성하기 위해서 / 그(모리)는 숙청 책임을 자기 자신의 모자란 지도력과 해결하지 못한 개인의 내정 갈등, 사람이 급격히 탈바꿈할 수 있다고 비현실적으로 기대한 데서 찾았다. / 사카구치와 모리의 성명문에 공통되게 나타나는 중요한 점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간에 자기 자신은 여전히 헌신적 혁명가라고 믿는 글쓴이의 의식이다. (299-302)
 
 
책임의 형태
 
사건이 착오였다는 것은 모두 인정했고 어느 정도 책임을 졌다. 그러나 누가 어느 시점에서, 왜 길을 잘못 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일치점을 찾을 수 없었다. / 적군파 지도자 시오미 다카야, 혁명 전선에서 탁락한 자의 문제로 보편화 / 혁명좌파 지도자 가와시마 쓰요시, 자신의 지령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 사카구치, 두 잔체가 군대를 통일하기 전에 방침의 차이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 나가타, 가와시마를 적대시, 시오미와 적군파에 매료 / 모리, 1972년 가을, 편지 교환은 일종의 집단 치료, 정신 분석의 과정 ... 스스로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 편지에서 모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조의 무게가 수치스러운 나머지 깊은 실의에 빠졌음을 표현하려는 마음과 곧 닥칠 법정 투쟁에 집중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 우에가키는 ... 자신이 그를 자살로 몰아넣었음을 “자기 비판한다”고 밝혔다. 단 그렇다고 해서 모리의 봉건적인 사상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사카구치는 모리가 죽고 한 달 뒤에 쓴 반성문에서 자신이 모리의 개인적인 측면가지 비판한 탓에 결과적으로 모리를 죽음으로 떠민 것이 아닌지 염려했다. (308-315)
 
모리의 자살은 고전적으로 해석하자면 지도자로서 자신이 이끄는 집단의 행동에 책임을 짐으로써 다른 멤버들이 책임을 면하게 하고자 한 상징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모리를 숙청과 그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고안한 인물로 규정하여 다른 멤버들의 책임을 경감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이루어져 왔다. ... 피고들은 또한 숙청의 직접적 책임이 모리에게 있다고 하며 자신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모리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한 한편 어떤 측면에서는 참가를 강요당한 희생자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40년 전 전쟁 당시 일본의 지도 체제에 대해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날카롭게 지적했던 것처럼, 그들은 책임 소재가 흩어진 시스템에 참여했고 전원에게 책임이 있다고도,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319-320)
 
그러나 법정은 ... 숙청의 실제 지도자를 처벌할 수 없다면 남은 피고들이 대신 책임을 져야 한다며 모욕 / 사카구치, 자살할 용기도 없는 겁쟁이 / 나가타, “자기 현시욕이 왕성하고 감정적이며 공격적인 성격과 더불어 강한 시기심과 질투심을 가진 데다 여성 특유의 집요함, 못된 심성, 냉혹한 가학 취미까지 있어 그 자질에 다수의 무제를 내포하고 있다.” (320-321)
 
합동 재판 그룹의 피고들은 ... 적인 체제와 어디서든 계속 싸워 나가는 혁명가로서 자신들을 자리매김했다. 경찰에게 폭탄을 던지거나 심문에 묵비로 맞설 수 없다면, 법정을 정치 투쟁의 장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321)
 
그들에게 책임은 혁명 행동이나 광범위한 정치적 의미에서 ‘인민’에 대한 책임만이 아니라, 다름 아닌 숙청에서 죽어 간 동지들에 대해 져야 할 정치적 책임이었다. / 모리는 희생자의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 달라는 첫 번째 호소에서 희생자들이 혁명 활동을 하다 혁명 전사로서 죽어 갔음을 강조했다. ... 모리의 이 발언은 동지에게 중상과 배척을 당하며 죽어 간 사람들의 정치적 복권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 친구 12명을 고문해서 무의미하게 살해한 책임을 달게 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만약 동지들이 혁명 운동 속에서 ‘착오’ 탓에 죽어 간 것이라면, 그들의 죽음을 갚기 위해서는 ‘착오’를 수정하여 혁명 운동을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리는 수밖에 없다. 일어난 일을 분석하고, 자기 비판을 통해 그 일에 책임을 지고, 장래를 위해 올바른 길을 찾아낼 실마리를 남기는 일이 살아남은 자이자 숙청을 저지른 범죄자의 의무였다. / 18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이 책이 처음 출간된 1991년 기준) 연합적군 멤버들, 그리고 그들과 정치적 책임감을 공유하는 후원자들은 숙청의 끔찍한 실태를 세부에 걸쳐 검증하고 자기 비판하며 끝없는 분석을 계속하고 있다. / 연합적군 피고들이 죽어 간 동지들을 대신하여 혁명에 계속 몸담는 것은 책임을 지는 일이지 결코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아니다. 현재 상황에서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최선의 길이리라. (321-324)
 
 
죽음의 이데올로기
 
목욕물에 몸을 담그면 옷을 벗고 흙 속에 묻힌 그이의 얼굴이 매번 떠오른다. 희생자와 얼굴이 꼭 닮은 직원을 만나면 하루 종일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책을 읽다가 희생자와 같은 이름의 활자가 눈에 들어오면 마음이 절로 꽉 막힌다. ... 사건 뒤 15년간, 나의 마음속 풍경은 늘 변함없이 군마와 하루나의 산속 오두막이다. 이 풍경은 평생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으리라. - 사카구치 히로시, 감옥에서 지인에게 쓴 편지 중에서
 
 
연합적군 숙청 사건은 갈등이라는 것의 본질,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지닌 힘에 대해 중요한 의문을 여럿 던졌다. ... 여기서 갈등은 오히려 가해자를 피해자로, 친구를 적으로 몰아가는 회오리바람 같은 것이었다. / 이 사건은 그런 집단적 갈등의 동기로서, 또 도덕적 정당화로서 이데올로기가 맡는 위험한 역할을 드러낸다. 갈등 과정에서 새로운 시스템을 조금씩 도입하다 보면 결국 무시무시한 결과가 찾아온다. / 개인과 사건 사이의 상관관계, 심리학적 환원주의라는 위험한 함정이 있다. (325-326)
 
중요한 것은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숙청으로 가는 방향을 바꿀 조정자가 될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 올바른 선택을 진지하게 행한 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경로에 무의식적으로 휘말릴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돌이켜봐도 여기서 멈추었어야 할 명확한 지점은 아무데도 없다. 여기서 뛰어내리지 말았어야 할 눈에 보이는 낭떠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걸어가던 사람이 이곳에서 갑자기 늪에 발이 빠졌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없는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어떤 사람이 헤엄을 치다 너무 멀리까지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발장구 한 번이 도를 넘는 한 번이었는지, 물결치는 파도 속에서 정확히 어느 시점에 돌아가야겠다고 판단해야 했는지 정확히 답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 이런 사례 연구를 통해 우리는 어떤 특정한 문화적 다이내믹스에서 보편적인 사회적 경로를 추출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이 삶을 꾸리며 한 올 한 올 엮어 가는 직물의 일부다. 내가 배운 가장 근본적인 교훈은 우리가 인간 조건을 얼마나 긴밀하게 공유하고 있는지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차이, 너와 나의 차이는 모리와 우에가키와 사카구치가 지난 개성의 차이보다 크지 않다. / 우리 모두가 연합적군 사건 같은 비극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다. 그런 비극은 혁명 이후에도, 이전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으로 인식한 것보다 더욱 진실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한, 그리고 조직의 결속과 지도자의 권위가 개개인이 ‘아니오’라고 말할 가능성을 짓밟는 한 몇 번이고 거듭 일어날 것이다. (327-329)
 
 
에필로그
 
 
경찰 권력을 피해 지도부를 숨기려고 여기에 온 그들은 희망찬 포부 또한 품고 있었으리라. 그들은 비좁고 굽이굽이 꺾인 골짜기 깊숙한 곳 안전한 장소에 겨울을 날 튼튼한 우두막을 세우고자 힘을 합쳐 일했다.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소박한 공동 생활을 꾸렸을 것이다. (335)
 
산장을 점거한 멤버 다섯 명이 전원 체포되고 인질이 무사히 구출되어 농성이 막을 내렸어도 그들은 변함없이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연합적군 숙청 사건 희생자의 첫 시신이 발견되었다. 숙청의 전모가 밝혀짐에 따라 아사마 산장의 열광은 자취를 감췄고 연합적군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사라지고 말았다. (344)
 
숙청 사건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출발점은 대체로 분노와 슬픔이다. / 숙청 사건이 제기한 문제를 추적하면서 나는 숙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났으며 왜 살인에 이르고 말았는지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상징적 상호작용(symbolic interaction)이라는 사회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삼아 숙청 참가자의 입장에 서서 사건을 이해하려고 했다. 다시 가능했을 선택지는 무엇인지, 선택지가 멤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그리고 최종적인 비극을 향해 쌓여 갔을 작은 선택을 하나하나 검토 했다. / 숙청 과정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해봤자 생존자들의 가슴 아픈 자기 반성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될 테고, 숙청으로 친구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연합적군 숙청 사건과 비슷한 일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거기서도 똑같은 아픔이, 분노가, 슬픔이 생겨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뿐이다. 그런 사건을 일어나게 하는 다이내믹스를 이해하고 그런 사건에서 드러난 인간의 나약함과 계속 대결함으로써 그런 사건을 막을 수 있는 사회 환경을 만들어내기. 그런 노력을 통해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45-347)
 
시오미 씨는 어떤 증언이 아무리 사실을 생략하고 왜곡한 것이라 하더라도 몇 번씩 반복하는 사이에 증언자에게는 진실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348)
 
조직의 멤버가 나라와 사회가 가하는 전향하라는 압력에 저항하여 자신들의 사상에 대한 충성심을 어떻게 표명했는지 조사하는 대신, 나는 똑같은 싸움의 축소판을 연합적군 내부에서 발견했다. 거기서는 사상적 충성심을 공유한다는 명목을 근거로 삼아 조직과 그 지도자가 일체가 되어 개인에게 전향 요구[공산주의화]라고 할 만한 압력을 들이댔다. 이런 상황이 출현할 조짐은 사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1969년 분트의 우치게바에 따라 적군파가 독립 조직으로 분열했을 때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349)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과 연합적군 숙청 사건에 관한 나의 탐구는 답을 찾기는커녕 의문만 늘어 갈 따름이다. (350)
 
 
옮긴이 후기
 
 
그들은 ‘전공투(全共鬪)’라는 이름으로 전공과 학교를 넘어 폭넓게 연대했으나, 이 연대는 오래 가지 못하고 치열한 파벌 다툼으로 무너졌다. 이를테면 와세다 대학은 당시 유력한 신좌파 파벌이었던 ‘혁마르파(革マル派)’의 본산이었다. 혁마르파는 와세다 대학 자치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중핵파(中核派)’와 격렬하게 부딪쳤다. 두 파벌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와세다 대학 캠퍼스에서는 부상자와 사망자가 날로 속출했다. ‘우치게바’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신좌파 파벌 사이의 폭력 항쟁은 일본 학생 운동을 몰락으로 이끈 주된 원인 중 하나였다. (359)
 
“이론이나 논리 같은 게 딛고 있던 땅에서 발이 떨어져 붕 떠버렸을 때, 인간은 그런 ‘광기’의 방향으로 가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요.” - 야마모토 나오키(山本直樹) (361)
 
연합적군 숙청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도 같은 양상이 어김없이 반복됐다. 지도자가 지난 개인적 콤플렉스, 남녀 멤버의 애정 관계, 여성 멤버간의 질투 따위를 조명하여 그럴듯한 이야기가 만들어져 퍼졌다. 심지어 재판을 맡은 판사나 적군파의 옛 멤버들까지도 그런 흐름에 동조했다. / 개인의 특성이 작용한 부분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숙청을 한낱 권력 다툼이나 치정극, 또는 악인 한두 명의 전횡에서 비롯한 결과라고 ‘정리’해버리려는 안이한 태도를 스테인호프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 대신 그가 주목하는 것은 숙청 당사자의 판단과 행동에 주춧돌이 된 ‘이론’의 힘이다. 이론은 본디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변혁하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시도의 산물이다. 그러나 연합적군은 스스로 만들어낸 이론에 눈이 가리고 만다.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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