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19
: 김항, <종말론 사무소> 알콜토크

종말론 사무소.jpg


* 일시: 2016년 12월 5일(월) door open 19:00 / alcohol talk 20:00
* 장소: 공중캠프
* 참가비: 무료 (알콜/음료 별도 구매, 안주/음식 반입 환영)

* 이번 알콜토크는 사전에 초대된 분들만 참여하는 비공개 형식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 프로그램:
- (19:00~20:00) 충분한 알콜 섭취
- (20:00~22:00) 김항, <종말론 사무소> 알콜토크
- (22:00~24:00) 못다한 알콜 섭취


* 출판사 서평

“몰락을 추구하는 일이 세계 정치의 과제”가 되었다_발터 벤야민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유가 탄생한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초기 기독교와 교회는 왜 세계가 ‘창조’되어 ‘유지’되면서도 ‘파멸’되어 ‘구원’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사악한 ‘창조의 신’과 그의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구원의 신’을 대치시켜 현세를 부정하고 구세주의 새로운 세기를 갈망하게끔 한 그노시스의 사상에 맞서기에, 교회의 논리는 빈약했다. 따라서 교회는 창조신과 구세주가 동일 존재의 서로 다른 두 위격임을 설파하는 삼위일체설과 같은 다양한 논리를 구축하여 신의 지상 통치를 이론화하고 정당화해나갔다. 그에 따라 지상의 삶은 구원을 기다리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신의 계획이 실행되고 있는 유의미한 시간으로 탈바꿈되고, 그러면서 종말과 구원의 ‘구체적’ 형상은 기독교 교리에서 말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낡은 신학과 형이상학이 과거의 유물로 치부되자, 종말의 임박이나 구원자의 임재 같은 상상력은 더욱더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런데 상황이 일변한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전쟁이 초래한 파국 속에서 모종의 종말을 감지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슈미트는 종말에 즈음하여 가짜 구원을 설파하는 ‘적그리스도(마르크스주의, 진보를 약속하는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등)’를 억제하는 자인 카테콘에 의존해서 이 종말을 사유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카테콘의 자리를 넓은 의미에서의 ‘법학’에 마련한다. 이는 기독교의 종말론 신앙을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현존하는 국가와 교회의 통치와 존재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며, 종말과 구원을 통해 끝이 나야 할 오이코노미아(아감벤은 근대 정치의 주요 범주들이 신학이 세속화된 것이 아니라, 신학 자체가 출발부터 인간을 관리하고 질서 정연하게 배치하는 오이코노미아 패러다임에 기반한 사유체계라는 것을 논증했다)는 영원히 지속된다. 

“메시아적 종말이란 연대기적 시간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지상에서의 삶을 매 순간의 행위로 파악하고, 
그 행위의 종말 혹은 완성과 관계시키는 실천과 사유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한편에서, 창조주가 만든 세계를 파멸시키고 구세주의 새로운 세기를 갈망하는 마르키온(2세기의 급진적 그노시스주의자)적 사유가 부활한다. 벤야민을 필두로 하는 이 마르키온의 후예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파국을 개혁이나 개선으로 회복할 수 있는 사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이질적인 무언가에 대한 기대 속에서 종말을 맞이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몰락을 추구하는 일이 세계 정치의 과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왜 아감벤이 긴 시간을 가로질러 벤야민의 사유를 소환해왔는지 밝힌다. 벤야민의 재개하려 했던 ‘종말론 사무소’란 오이코노미아가 은폐되어,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태에 대한 개입이다. 그것은 오이코노미아 통치 장치로부터의 탈피를 구상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상 유래 없는 촘촘함과 광범위함으로 인간 삶을 관리-감시하는 기술관리 체계의 통치 패러다임에 맞서기 위해서는, “근대의 정치 이념으로 가려져 있던 서양 정치의 ‘은폐된 장치’를 드러내고, 이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메시아니즘을 대치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의 메시아니즘은 “구원을 기다리며 비교祕敎적 앎을 공유하는 신비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위약한 공생을 유적 본질로 하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고 향유하는 가능성에 대한 타진”이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정치’는 전혀 다른 토대 위에서 구상되어야 한다.” 국가 제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고전적 혁명론이나 현존하는 정치 체제의 개혁을 말하는 복지국가론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전면화한 생명정치-오이코노미아 통치 패러다임에 적합한 비판 프로젝트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사유와 글은 정치를 조직할 수도 이끌어낼 수도 없다고 말한다. “정치가 있던 자리를 인간에게 환기시켜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지시와 환기야말로 인간의 본질인 언어의 역할”일 것이며, “정치라 명명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행위를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치란 통치가 지워버린 과거의 흔적으로서만 현재 속에 실존하며, 통치가 뿌리내리고 있는 서사와 대항함으로써만 미래를 꿈꾸는 실천일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이 책은 ‘종말론 사무소’ 이외에도, 벤야민과 슈미트 사이의 숨겨진 논쟁을 논제로 삼아 예외상태를 둘러싼 서구 정치사상의 근원적 대립을 분석하기도 하고, ‘적’이라는 개념에 대한 칼 슈미트, 레오 스트라우스, 프로이트의 논의를 검토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인 것’의 재구성을 향한 20세기적 상상력의 전용 방향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층위에서 ‘정치’의 문제에 접근한다.




* 진행: 김항(Ha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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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도쿄대학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표상문화론 과정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군중과 개인의 상관관계를 통한 역사 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20세기 초 일본의 대의제와 화폐 제도를 연구하였으며, 현재는 국가나 지역에 얽매이지 않는 ‘문화-사상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지금은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말하는 입, 먹는 입』, 『제국일본의 사상』, 『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변동』(공저)이, 옮긴 책으로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근대 초극론』, 『예외상태』, 『정치신학』, 『세계를 아는 힘』, 『중국의 체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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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Vino Veritas! (술 속에 진리가!)"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는 맥주 한잔 하면서, 느슨하고 흐릿한 기분으로 특정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비정기 프리 토크 이벤트입니다. 입과 귀, 앎과 삶이 분리된 강의/세미나,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내용과 과정, 학연/가방끈주의자들의 허세와 먹물질 등을 지양합니다. 쉽게 바뀌지 않는 익숙하고 오래된 습관을 목도하거나 다시 한 번 절망하면서, 새로운 형식과 모랄/리추얼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입니다.




[Brief History of 공캠x자캠 present "알콜토크"]

- vol.1 2013.03.09 - 후쿠시마와 우리
- vol.3 2013.11.15 - 맑스 재장전(Marx Reloaded)
- vol.4 2014.03.08 - 후쿠시마와 밀양
- vol.5 2015.05.02 - 세월호와 우리
- vol.8 2016.01.31 - <옥상자국>
- vol.12 2016.03.11 - <맨발의 겐>
- vol.18 2016.10.29 - 라캉, 알튀세르,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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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리듬을 믿고(この胸のリズムを信じて)", "우리는 걷는다 단지 그뿐(ぼくらは步く ただそんだ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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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캠프

2016.11.07 23:59:19
*.1.197.192

[교수신문] 변혁적 기획이 아닌 다양한 예외적 삶에 주목한 이유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3098

공중캠프

2016.11.07 23:59:47
*.1.197.192

[서평] 지배하는 ‘통치’에서 인간 회복의 ‘정치’로
http://hani.co.kr/arti/culture/book/765600.html

공중캠프

2016.11.08 11:45:44
*.70.53.93

[공중캠프 추천작품(recommend) vol.6] 김항 - 종말론 사무소 (문학과지성사, 2016.10)
http://kuchu-camp.net/xe/63649

공중캠프

2016.11.08 18:12:26
*.70.53.93

[프롤로그 밥풀때기와 개흘레꾼을 위한 레퀴엠]

종말론 사무소는 정치와 통치, 인간과 단순한 생명이 분기하는 관계를 끊어내는 일을 임무로 한다.

인간을 강제적 힘에 복속시키는 운명인 언어가 동시에 인간을 강제적 힘으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한다는 것. 자유와 복종이 언어라는 자리에서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언어와 정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 그 자체인 것이다.

“지배계급이 합의를 상실하는 것, 더 이상 ‘지도적’이지 못하고 단지 ‘지배적’·강제적인 힘만을 쓴다는 것은, 거대한 대중이 자신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멀어져 이전에 믿었던 것을 이제는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위기는 바로,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이 공백 기간에 매우 다양한 병적인 징후가 나타나는 것이다.”

국가, 자본, 노동계급, 인민대중에 대한 일반이론이나 선험적 규정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경험과 역사였다.

“현대의 군주는 자신이 발전함에 따라 지적·도덕적 관계의 모든 체계를 혁명화한다. 곧 현대의 군주 자신만을 준거점으로 하여 어떤 행위가 현대의 군주를 강화시키는 데 일조하는 것이냐 아니면 현대의 군주에 대립하는 것이냐에 따라 그 행위의 이와 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의식에서 현대의 군주는 신성, 또는 지상명령의 위치를 차지하며 삶의 모든 측면과 관습적인 관계를 완전히 세속화화는, 현대의 세속주의의 기초가 된다.”

관계의 상하를 뒤집어놓는 것이 아니라, 상하 관계 자체를 일소하는 해체가 요청된다. ... 혁명의 과제는 지배계급이 설정해놓은 사회관계 전체를 일단 해체하고 전혀 다른 관계로 재조직해야 한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991년 5월, 을지로 백병원 앞마당의 밥풀때기

정상성에 대한 집착, 5·18 광주 – 87년 6월 항쟁의 ‘승리의 역사’, 국가의 역사,

“나의 아비는 숙명의 종도, 그리고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남로당이었다고 외칠 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했기 때문에 나는 또 다른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아비는 군바리였다“거나 ”아비는 악덕 자본가였다“라고 외칠 처지는 더욱 아닌 데 나의 절망은 깃들여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테제도 안티테제도 아니었다.”

“그런 사실마저 다 까발리면 난 기운이 죽 빠져버리고 말 것 같았다.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사실 나도 이제는 이런 명제로 뭔가 얘기 좀 해보고 싶었던 거다. 이런 명제로......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

망각의 구멍(어디에도 환원 불가능한 개별자의 고유한 실존을 집합적 역사 서사 속에 가두어 과거를 매끄럽게 마름질하는 장치)

아버지는 처음에는 북쪽으로 가는 쪽에 서 있다가 키우던 하얀 쥐를 따라 남쪽으로 가는 쪽으로 이동한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는 모른다.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아버지는 모른다.

개흘레꾼을 종이나 남로당이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안티테제의 서술어로 귀속시키는 대신, 김소진은 개흘레꾼의 환원 불가능한 고유성을 고스란히 남기는 길을 택했다. 벤야민을 참조하자면, 그것은 억압받은 자와 쓰러진 자를 ‘최후의 날’에 소환하여 현재를 구성하는 실천이었다.

김소진이 밥풀때기와 개흘레꾼을 망각의 구멍으로부터 구원할 대상으로 소환한 것이 그때 종말론 사무소의 안건이었다. 그는 밥풀때기와 개흘레꾼을 통해 정치와 통치의 관계를 해제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그 열정은 망각의 구멍으로 내던져져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서사 속에서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비극적으로 스스로의 몸을 불사른 자들을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열사로 추앙하는 한, 그들이 꿈꿨던 정치는 언제나 통치로 귀속된다. 국가의 역사나 민주주의의 숭고한 승리가 그들의 정치와 꿈과 죽음을 착취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정치란 통치가 지워버린 과거의 흔적으로서만 현재 속에 실존하며, 통치가 뿌리내리고 있는 서사와 대항함으로써만 미래를 꿈꾸는 실천일 수 있음을 제시한다. 진보가 아닌 정지, 구성이 아니라 분해, 주체가 아니라 실존, 대안이 아니라 공백.

공중캠프

2016.11.09 18:01:54
*.70.53.26

제1부 20세기 정치사상의 임계
1장 20세기의 보편주의와 ‘정치적인 것’의 개념: ‘적’을 둘러싼 정치사상의 계보학

<극단의 20세기>

돌파도 초극도 아니고 굳이 ‘퇴각’으로 이 철학적 기획을 파악하는 까닭은, 그것이 20세기 정치 체지의 ‘지나침’, 즉 ‘극단화’를 반성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사유이기 때문이다.

<정치냐 도덕이냐: 칼 슈미트와 레오 스트라우스>

인류 일반은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류는 적어도 이 행성 상에서 적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 개념은 적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 “인류를 입에 담는 사람은 기만하려는” 것이다.

만약 인류의 이름 아래 ‘물리적 살육’이 일어난다면, 살해되는 것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법의 바깥으로 추방된 비안간일 뿐이다.

정치적인 것을 부정하고, 모든 단체를 다원적으로 동등하게 두고자 하는 자유주의·다원주의의 시도는 “인간의 자연적 생명을 지배하는 [국가주권의] 힘, 모든 종류의 공동체 내지는 이익사회보다도 상위에 위치하는” 정치적 공동체, 즉 국가의 부정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당대의 지배적 문화 이해는 문화를 인간의 정신 활동으로 규정했기에(신칸트학파), 문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끊임없는 자연의 ‘경작’이란 계기를 제거했다. 자율적인 여러 문화 영역이란 개념은 문화가 비롯된 자연을 망각시킨 것이다.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과 국가를 옹호한 목적이 여기에 있다. 즉 그는 근대인이 자연(홉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마주하며 만들어낸 “가장 기계적인 기계”인 국가를 문화로서 지켜내려 했던 것이다. “인간 세계의 질서”

슈미트의 한계 : “정치적인 것을 그 자체로서 시인하는 자는 싸우려는 것을 모두 존경한다. 그는 자유주의자와 똑같은 정도로 관용적이다. 다만 전혀 반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도덕적 판단을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내쫒는다. “도덕적 판단의 은폐”, “부호를 반대로 한 자유주의”

스트라우스의 정치적인 것 : ‘올바른 삶’에 대한 도덕적 판단, (슈미트의 법과 국가가 아닌) 개인의 ‘도리에 맞는 마음가짐’을 기초로 인간 세계의 질서를 구축

<적의 두 가지 형상: 외부의 적과 내면의 적>

자유주의·개인주의·다원주의에 대한 비판이란 공통의 과제를 앞에 두고, 슈미트는 인간학적 언설을 피해 국가주권과 법이 존립하는 형식에 초점을 둔 반면, 스트라우스는 인간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올바른 생과 질서를 구성시킨 개인의 마음가짐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홉스의 자연 상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국가 간의 상태로서 간주하지만, 스트라우스는 이 투쟁을 개개인 간의 문제로 파악하고 근원적인 인간 이해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적의 크기에 비례하여 국가를 구성함으로써(슈미트), 또한 자기 안의 적을 기억과 언어를 통해 도야함으로써(스트라우스), 근대의 정치적 기획은 개인의 안전을 보장하게 된다. 이를 거꾸로 보면 눈앞에 적이 현전하지 않는다면, 혹은 적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정치적 기획은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슈미트와 스트라우스가 보기에 이런 근대의 정치적 기획은 당대에 위기에 직면했다. 스트라우스의 지적대로 당대 부르주아의 지배적인 문화에 대한 사고는 정치적 사고에서 적을 소멸시켰다. 그래서 슈미트와 스트라우스는 적을 중심에 두고 ‘정치적인 것’을 20세기의 ‘보편화’에 대항하는 정치적이며 도덕적인 원리로서 대치시킨 것이다.

<두 개의 근대: 홉스와 로크 사이에서>

로크의 자연 상태는 (처벌 권리를 개개인에게 부여하는 실질적인) 자연법이 지배하고 있는 상태다. ...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법 바깥으로 추방된다. 이 위반자는 이미 인간이 아니고 위험하고 유해한 맹수인 것이다. ... 또한 자연법에 의해 평화와 존속을 명령받은 인간은 자기 안에 위험성을 발견할 필요가 없다. ... 인간은 절대로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없고, 위험한 존재가 되면 곧바로 비인간이 되는 것이다.

국제연맹 주도로 실현되려던 전쟁의 위법화와 자유주의·다원주의적 질서의 확립은 적의 현전과 잠재성을 법과 인간성의 외부로 밀어냈던 것이다. ... 또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슈미트와 스트라우스가 아무리 저항하려 했어도, 로크적 패러다임이 정치사상과 국제정치학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체주의를 경험한 20세기의 사유는 근대의 발자취를 단순히 홉스적 세계에서 로크적 세계로의 ‘진보’로 파악할 수만은 없었다. 인류의 진보를 가능케 한 과학기술적 합리성이 새로운 야만으로 전락했다는 ‘계몽의 변증법’이나, 프랑스 혁명이 잉태한 보편 인권과 국민국가의 원리가 전체주의의 씨앗이 되었다는 ‘근대의 역설’은 홉스에서 로크로 이르는 길이 평탄한 진보라는 믿음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개의 인간 실존을 습격하는 ‘외부의 적’과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인간의 ‘내면의 적’은, 프로이트에 의해 역사와 진보의 이야기 속에 제자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자리는 전 지구를 진보의 시간 축에 따라서 서열화시키는 식민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지정학적으로 배치된다.

<적의 변용: 전 지구적 질서와 근대 합리주의>

홉스에게 주권국가의 크기는 적의 강대함과 비례한다. ... 적 이전에 국가가 생성할 수 없다면, 적은 반드시 국가 생성 전에 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한 이 적은 국가 성립 이전의 개별 생명에 대한 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작물을 심고, 씨를 뿌리고, 집을 짓고, 쾌적한 거처를 마련하면, 다른 이들이 힘을 합쳐 찾아와 그 노동의 성과뿐 아니라 생명과 자유까지 빼앗게 될 것이다”.

즉 적은 언제나 국가 이전의 인간 실존에 대한 적이며, 항상 그것보다 크고 강력하다. ... “만약 계약이 없으면, 지배는 어머니에게 있다. 왜냐하면 혼인에 관한 법률이 없는 완벽한 자연 상태에서 누가 아버지인가는 어머니에 의해 선언되지 않는 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부권의 기초가 되는 어머니의 선언이 아버지의 습격에서 비롯된다. ... 따라서 최초의 적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이 적의 살해를 통해 인간 문화는 생성된다.

“어느 날, 추방된 형제들이 연합하여 아버지를 죽여 먹어버리고 거기서 아버지 혈족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들은 단결하여 개개의 인간에게 불가능했던 것을 감행하여 그것을 실현했던 것이다. ... 확실히 폭력적인 원부는 형제 집단의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며 두려운 규범이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원부를 전부 먹어 치우는 행위를 통해 아버지와의 일체화를 수행하고, 각각이 아버지의 강력함의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인류 최초의 축제일지 모르는 토템 향연이란 이 중대한 범죄 행위의 반복이며 기념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와 함께 사회적 조직, 도덕적 제약, 종교 등 많은 것이 시작된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나 ‘계몽과 진보에 대한 순진한 믿음’ 없이 적이 세계 저편으로 사라진 인간 문화를 정당화한다. 여기서 적은 눈앞에 현전하거나 내면에 숨어 있지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는다. 적은 부재하면서 그 강대한 힘을 그대로 유지한다.

“전 세계는 처음에는 아메리카와 같은 상태였다”

<탈보편과 탈식민 사이의 정치적 사유>

“유럽 공법이 [땅과 장소의] 구분을 모르는 보편적인 세계법으로 몰락해가는 것은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일반적-보편적인 것으로 해체된다는 것은 동시에 지금까지의 전 지구적 대지의 질서가 멸망하는 일이었다. 그 자리를 공허한 규범주의가 대신하게 된다. 수십 년간에 걸쳐 표면상으로만 일반적 승인을 얻은 규칙들이 말이다.”

“콩고회의에서 1914~1918연까지에 이르는 세계 정치의 발전은 유럽의 문명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아무런 국제법적 제도도 형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을 논의한 1885년의 제1차 콩고회의, 유럽 바깥에 국가의 영토를 인정함으로써, 유럽이라는 땅에 고유한 구체적 질서가 파괴되었다. 유럽 내 국가로 한정되어 있던 전쟁은 인류 차원으로 확대되어 한계를 상실한다. 유럽 공법 체제의 붕괴는 ‘정치적인 것’의 상실이었다. 그것은 지구 상에 ‘적’이 사라지는 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슈미트가 이해한 바와 달리 전지구의 보편화는 야만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전쟁이었고, 그것이 바로 식민지 쟁탈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슈미트와 스트라우스가 유럽의 고전적 법질서 및 도덕의식을 통해 고수하려 했던 ‘정치적인 것’은 이렇게 전 지구적 차원에서 모습을 바꿔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래할 ‘정치’는 어떤 ‘정치적인 것’의 개념 위에서 구상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특정 지역의 전통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식민주의를 내장한 공허하고 폭력적인 식민주의적 보편화에서도 벗어나는 구상이어야 할 것이다. 즉 유럽 태생의 주권국가에 정치를 일임하지도 않고, 전 지구를 서열화하여 진보를 정치의 절대 목적으로 삼는 일도 멈춰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탈보편과 탈식민의 정치적 사유는 제도나 가치를 통해 적을 개념화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데에서 가능할 수 있다. 그것은 적의 존재를 새로이 정의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 집단에 대립하는 집단도 아니고 진보에 뒤쳐진 야만도 아닌, 적을 포착하고 개념화하고 발화하고 관계 맺는 새로운 사유가 요청되는 것이다.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 현재 자신의 안락한 상황에 자발적으로 예속되는 것은 지금까지는 없던 새로운 형태의 예종이다. 그러한 상태를 사회적으로는 혈색 좋게 죽어 있는 상태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운동도 잘하고 힘들여 머리도 쓰며 일도 잘하지만, 대립적 타자 – 경쟁자는 같은 목표를 향해 경합하는 자이지 사회구조상 대립자는 아니다. 그것은 ‘집안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 와의 상호 관계를 살아가지 않는 한, 사회 형성 면에서 볼 때 그것은 시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 역설적인, 볼이 통통하게 살찐 시체야말로 현대판 건강의 지배적인 형태가 아니겠는가.”

후지타 쇼조의 ‘경험’ - ‘대립적 타자와의 상호 관계’, ‘대립적 타자’란 “자신을 원초적인 혼돈 속으로 되돌려놓는 절대적 타자”, ‘경험’이란 이 혼돈 속에서 타자와 사물을 만나는 공포의 경험.

정치적인 것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제도나 가치 차원의 변혁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쇄신/재생시키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 사회의 새로운 질서는 자연과 사물과 타자 경험의 근본적 변혁에서 가능하다. 질서의 쇄신보다 경험의 쇄신.

공중캠프

2016.11.10 17:49:19
*.70.53.90

2장 전쟁의 정치, 비판의 공공성: 슈미트와 하버마스 사이에서

<문제의 소재>

하버마스, 공공성/공론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본 연구 전체를 인도한 지향점을 이전과 같이 고수한다. 사회복지국가의 대중 민주주의는 스스로의 규범적 자기 이해에 따른다면, 정치적으로 기능하는 공론장의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자유법치국가의 헌법과 연속될 수 있다.”

따라서 ‘작은 정부’(자유주의)와 ‘큰 정부’(사민주의)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변증법적으로 등장한 것이 후자라는 것이 하버마스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적 영역의 자유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부르주아 공공성을 통해 매개된 법치국가의 다양한 제도가 적극적으로 사적 영역에 개입하여 ‘사회의 법제화’를 추동해야 한다. 즉 사회복지국가는 자유주의 법치국가의 ‘방어적인 자유 보호 원리(금지/명령)’가 시민들의 공론을 매개로 하여 ‘적극적인 정의 실현(사회의 법제화)’으로 질적 전화를 이룬 결과 탄생한 체제인 셈이다.

“유럽적 정체성의 형성을 위해서는 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정치적 공론장의 생성”이 필요하며, 유럽연합 헌법은 유럽 민족이 아니라 유럽 인민의 ‘토의’에서 정당성 원천을 갖는다.

하버마스는 사회복지국가의 사적 영역에 대한 개입,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그리고 유럽연합 헌법 제정 등 눈앞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현안에 언제나 ‘공론장=토의의 장’을 ‘정의’와 ‘정당성’의 근거로 하여 비판적으로 개입했던 것이다.

자율적 시민의 비판적 토의를 근간으로 하는 공공성의 이념과 공론장의 실천이 ‘지배 제도의 탈지배화’를 끊임없이 추동한다.

‘왜 탈지배화를 지향하는 공공성의 질서가 지배의 질서로 변질되느냐?’ 근원적으로 지배의 해소를 지향하는 공공성의 질서가 왜 재봉건화나 생활세계의 식민화와 같은 지배 일반의 법칙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일까?

<‘괴테의 교양’과 ‘투쟁하는 민주주의’>

비나치화 처리 방법, 페르지르 증명서, 헤르만 헤세, 칸트와 실러, 괴테하우스 재건, 본 기본법 –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 질서, ‘정상성normality’

「하이데거에 의한(mit), 하이데거에 대항한(gegen) 사유」(1953) “이 운동(나치즘)의 내면적인 진리와 위대함”


<프리메이슨과 인류: 정치와 도덕의 변증법>

코젤렉, 『비판과 위기』(1959)
슈미트 - 국제연맹이 초주권적 권한을 통해 적을 결정하게 되면, 전쟁은 피비린내 나는 전면전으로 폭주하여 철저하게 비도덕적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반면, 각 주권 사이의 전쟁은 결코 상대를 도덕적·신앙적으로 말살하는 전면전으로 비화하지 않는다.

코젤렉 - 개인의 표현/행위 차원에서의 복종과 국가의 개인 내면에 대한 불간섭은 17세기 절대주의 국가가 견지한 정치 원리였다. 이를 통해 절대주의 국가의 정치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절대 악으로 간주하여 말살하는 종교 내전과 같은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홉스는] 정치 체계 속에 내적이고 사적인 사상과 신앙의 자유에 대한 유보를 두었는데, 이 유보야말로 강력한 리바이어던을 내부로부터 파괴한 것이며, 죽을 수도 있는 신(국가)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맹아가 된 것이다” 절대주의 국가 쇠퇴의 맹아 – ‘프리메이슨’의 비밀 결사

“사회적 평등은 국가 바깥에서의 평등이었다. 프리메이슨의 집합소에서 구성원은 더 이상 신민이 아니다. 그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계획하고, 프리메이슨의 일에 관여하는 자유로운 인간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계몽주의가 표상하게 될 “‘인류’라는 새로운 엘리트”들은 절대주의 국가의 정치 원리가 절대 인지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한 ‘인류’라는 평등한 규정 하에 커피하우스, 살롱, 아카데미, 그리고 거리에서 제3의 지대를 형성하게 된다.

슈미트가 국제연맹에서 주권국가의 권능을 무화시키고 상회하는 초주권적 제도체를 보았듯이, 코젤렉은 프리메이슨을 극한적 패러다임으로 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법치국가가 보다 상위의 권위를 따르는 것을 정치의 실종이라 보았다. 이때 국가는 구체적인 현안들에 자율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정치의 최종심급이라기보다는, 인류라는 이름의 보편적 원리를 대신 실행하는 단순한 기구로 전락한다. 코젤렉은 이런 과정이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으로 추동되어 1950년대의 냉전까지 이르렀다고 분석하는데, 미국과 소련은 전 세계를 하나의 이념으로 통일시키려는 ‘프리메이슨’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이름으로 전개된 혁명 과정이 인류를 전멸시킨다는 이 ‘정치와 도덕의 변증법’이야말로 슈미트-코젤렉의 핵심적 비판이었던 것이다.

<전쟁 없는 정치: 공공성과 주권>

하버마스의 비판: 슈미트와 코젤렉의 작업 속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이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전쟁의 극단화와 세계 내전화를 지연시킨 유럽 보수주의의 훌륭한 맹아로 평가된다. 코젤렉이 냉전 위기의 근원으로 본 프리메이슨적인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을, 절대주의 국가의 지배를 탈지배화하는 자유주의적 비판 기획으로 재전유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 정치의 도덕화 자체가 아니라 공공성의 원리로 매개된 정치의 합리화가 목적이었다.”

하버마스는 프리메이슨적 비밀 결사 속에서 인류의 이름으로 보편화된 도덕이 정치를 부식시킨다는 코젤렉의 ‘정치의 도덕화’ 테제에 맞서, 프리메이슨적 비밀 결사의 도덕이 공론장에서 토의되어 정치에 영향을 미칠 때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 ‘정치의 합리화’를 추동하는 ‘공공성’이 통치 권력의 지배를 탈지배화시킨다는 역사 이해를 내세웠던 것이다.

“공론은 의지를 이성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며, 이 이성의 사적 논의의 공공적 경합 속에서 공공 이익을 위해 실천적으로 필요한 것에 대한 합의로 형성될 것이다.”

슈미트와 코젤렉이 ‘인류’의 이름으로 도덕이 보편 원리가 될 때 전쟁이 극단적인 적의 말살로 이어짐을 우려했다면, 하버마스는 ‘인류’라는 보편 이념이 공론장에서의 토론으로 매개되어 등장할 때 ‘지배 의지’의 탈지배화를 추동하여 전쟁 자체를 억제하는 ‘정치의 합리화’를 이뤄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지배의 탈지배화’라는 공공성의 기획

<비판과 정지: 공공성 기획의 재전유를 위하여>

벤야민, 「폭력비판을 위하여」 - 예외 상태, ‘신의 폭력’, 기존의 법률질서를 정지시키는 힘, 총파업 – 통치와 착취가 작동하기 위한 ‘정상적 상황’을 일거에 정지시키는 사태, 법 체제를 아래로부터 해체하는 잠재력

슈미트, 『정치신학』 -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 위로부터 통제하는 힘

하버마스, 공공성 기획 – 벤야민의 ‘신의 폭력’을 어떻게 일상적 토론 속에 내장시키느냐. 부르주아 공공성의 정치적 기능은 일상적이고 사적인 토론을 의회나 여론 형성 기구 등으로 제도화하여 근대의 자유주의적 법치국가를 탄생시켰다. 또한 이 법치국가는 소극적 자유의 보장이 아니라, 적극적인 개입을 통한 정의의 실현을 통해 자유의 폭을 확장시키는 사회의 법제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주의 법치국가의 자기 발전 과정 속에서 지배 기구로서의 국가라는 성격은 전혀 퇴화되지 않은 채,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오히려 더욱 잔인한 전쟁을 통해 지배 의지의 관철을 고집하고 있다. 슈미트와 코젤렉의 비판이 유의미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공공성 기획이 갖는 잠재력을 재전유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지배 의지를 정지시키는 권능을 총파업이라는 예외적 상황이 아니라 일상적 커뮤니케이션 속에 정위시키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공공성은 전쟁을 범례로 하는 지배 기구로서의 국가를 합리화시키는 ‘지양의 변증법’이라기보다는, 전쟁 패러다임을 일상에서 관철시키는 온갖 장치들을 ‘이렇게 통치당하려 하지 않을 의지’로 ‘정지’시키는 ‘비판’을 요체로 한다. 그것은 공롱장이나 토의를 통해 지배를 탈제도화함과 동시에, 새로이 제도화하는 문턱의 자리에서 ‘정지’를 요체로 하는 일상적 비판을 도처에서 꽃피우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이 정지의 비판을 일상적 공간 속에서 전개할 수 있을까?

공중캠프

2016.11.11 15: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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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정치신학의 쟁점들
3장 ‘적의 소멸’과 정치신학: 칼 슈미트의 카테콘과 메시아

<칼 슈미트의 서사>

제1차 세계 대전의 충격, 슈미트는 유럽 공법 체계를 옹호하기 위해 홉스 이래의 ‘결단주의’를 주장하면서 인격적 주권과 예외상태를 규범과 보편주의에 맞세운다.

슈미트에게 법이란 창조와 구원 사이의 ‘유예된 시간’의 질서를 의미하며,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세속 국가의 권력은 구원을 참칭하는 적그리스도를 억제하는 역사 세계의 수호자, 즉 카테콘이다. 무정부주의, 보편주의, 의회민주주의 등은 슈미트에게 적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비춰졌으며, 이에 대한 투쟁이야말로 그가 평생을 바친 과업이었던 것이다.

과연 슈미트는 구원을 믿었던 것일까? 다시 말해 그에게 메시아의 도래란 무엇이었을까?

<‘파르티아의 화살’은 어떤 상처를 남겼나: ‘정치신학의 일소’와 ‘근대의 정당성’>

<‘정치신학의 일소’라는 전설>

에릭 페터존, 「정치 문제로서의 일신교」(1935) : 기독교 교리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통치를 찬양하기 위해 ‘유용한’ 교부 에우제비우스를 비판함으로써, 이를 히틀러와 나치즘에 찬동한 슈미트를 비꼬기 위한 유비적 서사로 제시

그에 대한 응답으로 『정치신학Ⅱ』(1970)를 출간 : 페터존의 공격(“파르티아의 화살”)은 신학적이 아니라 정치적이다. 신학 교리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

<‘근대의 정당성’과 그노시스>

한스 블루멘베르크, 『근대의 정당성』(1966) : 슈미트의 정치신학적 테제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 비판

블루멘베르크 - “인격적 자기주장” : 중세를 관통하여 절대적인 것(신학이나 형이상학)의 지배가 지상의 존재, 즉 인간의 생을 위기로 내몬 결과, 정당방위로서 긴급피난의 형태로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고, 이에 따라 근대는 과거나 초월적인 것 따위의 절대적 근거가 아니라 “자기주장”을 정당성의 기초로 삼을 수 있었다.

“근대는 그노시스의 극복” : 전지전능하고 정의로운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세상에 널려 있는 ‘악’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마르키온으로 대표되는 그노시스의 사상은 사악한 창조의 신과 그의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구원의 신(메시아)의 구분을 통해 극복 ... 중세 초기의 그노시스주의 극복의 노력(우주/세계가 왜 유지되면서도 파멸되어 구원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하는 지상의 교회, 창조신과 구세주가 동일 존재의 서로 다른 두 위격임을 설파하여 창조와 구원의 통일을 꾀한 삼위일체설 등)은 실패로 끝났으며, 이 정신적 외상이 중세 말기까지를 지배하여 근대의 자기주장을 가능케 했다. 현세 부정과 메시아의 갈망

슈미트 – 블루멘베르크의 그노시스 극복 서사는 ‘정치의 실종’, ‘적의 사라짐’, 삼위일체설의 핵심은 ‘내전’ : “일자는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내전 상태에 있다.” 창조신 아버지와 구세주 아들간의 내전, “삼위일체론은 창조자 신과 구원자 신의 차이를 아버지와 자식의 동일성이라는 옷으로 은폐했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의 핵심 부분에서 진정한 정치신학적 내전론과 조우했다. 이렇게 하여 적대성의 문제, 적의 문제는 은폐한 채로 넘어갈 수 없다.”

슈미트는 페터존의 비판이 삼위일체설을 절대시하여 신성 안에 내장되어 있는 내전을 보지 못했음을 비판함과 동시에, 블루멘베르크가 그노시스 극복을 지렛대로 삼아 신학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정치신학에 고유한 적과 동지의 투쟁, 창조신과 구원자의 내전을 무화시켰음을 비판.

페터존과는 창조와 구원 사이의 시간을 수호하는 카테콘적 사유를 공유하며, 블루멘베르크와는 지상의 삶의 정당성이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아프레게르와 마르키온의 후예들>

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벤야민은 스스로를 기독교와 유대교의 특이한 교차점에 자리한 사상가로 자리매김했는데, 그런 그가 종말론 사무소를 주저 없이 재개하려 했을 때...”, “교회의 실존은 유대교 회당의 지속을 기초로 한다. ...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의 연관”

종말론 사무소는 교회의 존립 근거, 즉 신의 임재의 지연 및 유대인의 개종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이 사무소는 지상에서 신의 왕국 완성까지 신의 섭리를 관리하고 집행하는 교회가 역사적 종말/구원 및 유대인의 개종과 맺는 관계를 관장한다. 즉 이 사무소는 교회 권력이 종말론적 역사철학 및 반유대주의적 정치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상징하는 장소인 셈이다. 그것은 슈미트와 동세대 사상가들의 종말론적 ‘언어’ 속에 자리한다.

19세기에는 수많은 동화된 유대인이 유대교 신앙을 버리고 이른바 ‘문화 프로테스탄티즘’의 분위기 속에서 자유주의적 계몽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트뢸치가 말하는 종말론 사무소의 폐쇄는 유대인의 개종 문제가 더 이상 정치신학적 적대 상황을 낳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철저한 세속화 과정 속에서 종말의 임박이나 구원자의 임재 같은 상상력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블루멘베르크의 말대로, 19세기를 풍미했던 실증주의적 사유와 언설은 그와 같은 낡은 신학과 형이상학에 더 이상 자리를 제공할 수 없었던 셈이다. 트뢸치가 말하는 사상적 뿌리의 일실은 이런 과정을 지칭한다. 계몽과 세속화 과정 속에서 지상 세계의 종말과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이고 정치적 박해는 과거의 낡은 유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파국으로) 상황은 일변한다.

타우베스 –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종언(계몽과 세속화의 위기) :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1918), 아돌프 폰 하르나크 『마르키온』(1921) “구원은 원래 상태의 재생을 위한 귀환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낯섦의 열림이자 집으로의 귀환”, “이 무언가는 모든 사람의 유년기를 밝혀주지만 아무도 그 빛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곳, 바로 ‘집’”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세계의 의의는 세계 밖에 있어야만 한다. ... 세계 속에는 가치가 없다. ... 신은 세계 속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벤야민, 「신학적·정치적 단편」(1921/22) “메시아 자신이 비로소 모든 역사적 사건을 완성시킨다. ... 신의 왕국은 역사적 잠재성의 목표가 아니다. ... 종말이다.” “몰락을 추구하는 일이 세계 정치의 과제이고, 그것의 방법은 니힐리즘으로 불러야 한다.”

<카테콘과 메시아: 내전을 지속시켜야 한다>

마르키온의 후예들이 진보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현세에 모든 질서를 끝내야 하는 것으로 본 반면, 슈미트는 과학기술과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진보에서 적그리스도의 도래를 읽어낸다. ...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규범을 설파하는 한, 그것은 세계의 구원을 거짓 선포하는 적그리스도의 율법이었던 것이다.

슈미트는 가톨릭교회의 오래된 교리(바울)인 카테콘, 즉 종말에 즈음하여 구세주의 참칭을 억제하는 자에 의존해서 이 종말을 사유하고자 했다. 그는 이 카테콘의 자리를 넓은 의미에서의 ‘법학’에 마련하고자 했다. 법학이 철저하게 지상에서의 질서를 옹호하고 유지하는 것이라면, 슈미트는 지상의 현세를 부정하는 마르키온과 첨예한 대립점을 형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카테콘과 메시아 사이를 가르는 유예된 시간 속에서 슈미트가 구체화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적’은 무엇이었는가? 슈미트에게 구원은 기다리되 오지 말아야 할 시간이며, 적은 맞서 싸워야 하지만 사라져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마르키온의 후예들은 이 내전을 메시아의 손으로 끝장내기를 원했던 것이며, 슈미트는 이에 맞서 카테콘의 형상을 통해 내전의 지속을 주장했던 것이다.

슈미트에게 가톨릭교회와 근대 주권국가가 카테콘의 형상이 중첩되는 제도물이었듯이, 나치란 슈미트에게 주권국가 체제의 붕괴 이후에 도래한 카테콘이었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와 테러라는 새로운 전쟁이 주도하는 현재의 세계를 슈미트와 마르키온의 후예들의 대립 속에 정위시키는 일은 유효하고도 유용한 사유 실험일 것이다. 여전히 세계는 비참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세계가 종말을 고하실 학수고대하는 이들이 있으며, 이 비참이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는 보편주의에서 비롯됨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공중캠프

2016.11.14 10: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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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voj Žižek - How Political Correctness Elected Donald Trump
https://m.youtube.com/watch?v=AyRMLwJ4KjU

공중캠프

2016.11.14 11:34:04
*.70.53.12

규범과 사실의 틈새

"하지만 여기에 근원적 아포리아가 도사리고 있다. 슈미트의 주권론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에서 알 수 있듯이 유한한 인간이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내는 결단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푸꼬와 데리다의 논쟁에서 드러난 것처럼 데까르뜨적 회의는 인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광기의 식별 불가능성을 알려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논쟁 자체라기보다는 결단의 주체가 유일신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사실과, 강인한 정신은 광기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이다. 신을 모델로 하는 한 결단하는 주체는 결코 현실의 영역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그것은 있어야 할 규범의 인격화로서 미래로 투사되든지 초월적 자리에 고상하게 앉아 있을 따름이다. 반면에 강인한 정신이 광기와 식별 불가능한 한에서 정신은 기존의 규범을 정지하는 정신으로 존립할 수 없다. 기존의 규범을 방법적으로 효력 정지해 사실을 발견하는 정신이 광기라면 기존의 인식-이해틀은 결코 방법적으로 포착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범에서 사실에 이르는 코바야시의 정신과, 사실에서 규범으로 향하는 마루야마의 결단은 규범과 결단의 틈새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실존을 은폐한다. 이 무능하고 우울한 삶의 형상을 회피하고 은폐한 허구의 형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의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지적 영위로 추출된 일본은 매우 이성적이고 지적인 주체와 정신의 장소이자 이름이었다. 이 일본은 통속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일본론과 결연하면서 엄격한 방법과 금욕적 태도를 통해 추출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일본론은 극한형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극한의 일본론은 신을 모델로 한 주체론이며 엄격한 방법적 회의 끝에 다다른 광기의 정신론이다. 이 주체론과 정신론은 늘 외부 상황에 휘둘리며 살아가면서 과거와 깨끗하게 단절할 수도 없는 우유부단한 일상의 주체와 나약한 보통의 정신을 사유할 수 없다. 이 책의 맥락에서 보자면 단호한 결단과 강인한 정신이 국민국가 성립을 위한 극한의 주체론이었다면, 이 논리는 제국일본의 지층을 콘크리트 공사로 덮어버리려는 시도의 가장 세련된 버전인 셈이다.

아마도 코바야시와 마루야마 일본론의 아포리아를 돌파한 곳에서 더디지만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그 지평은 근대적 사유가 꿈꾸고 원하던 단호하고 강인한 주체의 세계가 아닐 것이다. 아포리아를 돌파한 곳에 서 있는 것은 비겁하고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실존들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타자의 폭력 앞에 벌벌 떨면서도 타자에 대한 폭력에 탐닉하는 모순 덩어리의 실존이 살고 있다. 과연 이 괴상한 실존이 사는 포스트 제국의 동아시아를 그려낼 수 있을까? 이 과제와 마주할 때 포스트 제국의 동아시아는 때로는 폭력적이고 때로는 사랑이 넘치는 분열적 공생의 장소로 재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제일사, 323-325)

http://kuchu-camp.net/xe/57951#comment_58412

공중캠프

2016.11.14 11: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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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의 사상

유럽의 근대사상사에서 체계와 개념조직과 ‘역사의 합리성’을 대표하고 있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헤겔이었다. 마르크스와 키에르케고르의 작업은 바로 그런 전형적인 ‘체계’의 물신숭배성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 그런데 일본에서는 바로 체계와 개념조직을 대표하고 있던 것은 헤겔이 아니라 마르크스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바야시 히데오는 ‘의장(意匠)’에 의해 무장된 ‘사상의 제도’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주의자를 격렬히 적대시하면서 통화(通貨) 형태를 취하기 이전의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개성적 사고와 ‘문체(文體)’ 앞에 모자를 벗고, 또 코토바(말, 언어)가 되어버린 변증법을 극도로 싫어한 반면에, 이를테면 말하기 어려운 구극(究極)의 것에 말이 막혀버린 나머지 뿜어져나온 역설로서 변증법을 인정했던 것이다. (192-193)

어떤 조직이나 그 조직 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말(언어)이나 외부의 상황에 대한 이미지 같은 것이 조직 바깥에서 어느 정도 통용되는가 하는 데 대한 반성이 결여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조직 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말(언어)을 조직의 바깥에서 그 유효성을 시험해간다는 노력이 잊히고, 다시 말해서 이미지의 층이 얼마나 두터우며, 또 얼마나 어긋나 있는가 하는 현실이 잊히고, 단순히 조직 대 미조직(조직되지 않은 것)이라는 문제, 혹은 단순히 그것은 아직 조직 바깥의 사람이 ‘진리’에 도달해 있지 않다는 문제로 귀착됩니다. 따라서 자신들이 가진 이미지와 서로 다른 이미지는 모두 오류이므로 ‘계몽’해서 자신들의 이미지를 보편화하면 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이 전체 상황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게 만들고, 설득으로서도 아주 유효하지 않다는 결과를 부르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 조직의 힘, 혹은 그 조직의 진보성이라는 것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그 주변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막막한 바다의 외딴섬처럼 떠올라버리게 되는 그런 사태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조직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들의 이미지에 의거해서, 자신들 사이에서 자명한 것이라 여겨 take for granted(당연한 것)로서 통용되는 말(언어)에 의거해서 안심하고 있으면, 어느 날 아침 깨어나 보니 주위의 풍경이 완전히 변해 있는 그런 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30-231)

다시 말해서 이것이 참된 ‘진리’다 그 나머지는 모두 환상(illusion)이라 말하면서 속 편하게 있으면, 환상이 점점 더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가서 ‘진리’ 쪽을 내버려두고 현실이 진행되어버린다는, 그런 상황 속에 우리가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 겹 스무 겹의 이미지의 벽 속에서 홀로 ‘진리’의 깃발을 지킨다는 것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의 이미지를 합성해가든가, 조직 내의 언어의 침전을 타파하고 자주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폭을 넓혀가든가 하는 것이 지금부터 사회과학이 해나가야 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마치 범인을 찾을 때, 범인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인상으로 몽타주 사진을 작성하는 것과 같은 조작을 학문의 방법에서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원리원칙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영화의 수법처럼 현실에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소재로 하여 그것을 겹쳐놓으면서 관객들에게 하나의 논리나 아이디어를 느껴서 얻게 만드는 방법을 좀더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문제를 여러분들과 같이 지금부터 생각해가고 싶기 때문에, 그 전제로서 조직의 문어항아리화 문제와 이미지의 혼자걷기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 드린 것입니다.(233-234)

http://kuchu-camp.net/xe/59984#comment_60188

공중캠프

2016.11.14 1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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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과 자기부정의 논리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옮긴이의 서문

다자이 오사무는 전쟁 직후 사카구치 안고 등과 함께 ‘무뢰파(無賴派)’로 불리면서 문단을 주름 잡았다. 이들은 ‘타락’이나 ‘가면’을 역설적 방법으로 삼아 ‘인간’의 ‘진짜 얼굴’을 제시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이 역설적 방법으로 구원하려 했던 인간의 진짜 얼굴은 천황과 국민이라 이름 붙여진 ‘가면’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왜냐하면 타락하고 가면을 씀으로써 가까스로 구원될 인간이 아니라, 문화와 민주주의란 깨끗한 의상으로 치장된 인간은 인간의 진짜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자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안고는 히로뽕 중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미시마는 달랐다. 그는 인간의 진짜 얼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전후란 이미 죽었어야 할 자의 삶에 다름 아니었기에. “나중에 문득 든 생각이지만 전쟁이란 에로틱한 시대였다. 지금 항간에 범람하고 있는 지저분한 에로티시즘의 단편들이 하나의 거대한 에로스로 빨려 들어가 정화되던 시대였다. 그래서 전쟁 중에 죽었더라면 나는 무의식적이고 자족적인 에로스 속에서 죽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 그런데 전후는 나에게 삼등석에서 보는 연극이었다고나 할까. 모든 것에 진실이 없고 겉보기뿐이었으며, 공감이 갈만한 희망도 절망도 없었다. 이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나의 전쟁과 전쟁체험―20년 후의 8월 15일」, 1965). 삼등석에서 보는 따분한 연극에 희망이나 절망이 있을 리 없다. 희망이 없기에 좌절도 없고, 절망이 없기에 성취도 없다. 이것이 미시마의 모든 예술적 영위와 정치적 행동의 ‘진실’이었다. 거기에는 ‘인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970년 자위대 본부에서 할복한 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어떤 인간이 가면을 쓰고 연기한 것이 아니라, 어떤 가면이 육체를 얻어 스스로를 파괴했던 것이다.

......

전공투에게 동경대학은 근대 일본, 나아가 아메리카를 위시한 제국주의 그 자체였다. 그들에게 투쟁의 대상인 동경대학은 근대 일본을 틀 지어온 참모본부였고, 베트남과 제삼 세계를 침략하는 제국주의의 하위 관료 양성소였다. 그런 참모본부이자 양성소에 그들이 속해 있다는 사회적 사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사회적 적대를 자아의 윤리적 문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공했다. 따라서 그들의 자기부정은 그대로 근대와 제국주의에 대한 부정이었고, 그 부정에 기초한 연대의 구축은 고립된 개개인의 윤리 속에서 결정되어야 했다. 자기부정의 논리와 고립에 기초한 연대는 이렇게 전공투 운동을 특징 지웠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고유의 위험성이 따라붙었다. 다시 하세가와의 말을 들어보자.

“현실의 문제를 윤리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일에는 큰 위험이 뒤따른다. 현실 체제의 존재방식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모순되는 것이 계급사회의 필연이기 때문에, 모순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전사회적인 변혁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투쟁을 개인의 윤리 문제로 바라보는 눈은 종종 계급사회의 모순의 해결을 개별적인 자아에 떠맡기게 된다. 투쟁의 와중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 극한 형태 중 하나가 연합적군의 집단 린치였다. 린치를 한 쪽도 당한 쪽도, 이 폭력을 개인의 공산주의화를 위한 ‘총괄’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체제와 정치체제의 문제이어야 할 공산주의가 극단적으로 개인의 윤리문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존재하는 개인을 윤리의 주체라는 극한의 지점에서 파악하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혁명가들의 이런 발상에는 투쟁 속에서 윤리의 비대화를 낳고만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연합적군의 린치 사건이란 1972년에 일어난 것으로, 깊은 산 속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던 도중, 혁명 완수를 위한 인간형에 다다르지 못한 동지를 집단 린치를 통해 살해한 사건이었다. 매일 밤 ‘총괄’을 통한 자기반성, 그리고 훈련 지휘자의 감시와 처벌에 의해 린치의 대상이 결정되었고, 그 대상은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스스로를 지양하지 못했음을 시인한 뒤 잔인한 폭력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물론 전공투 운동이 내세웠던 자기부정의 논리라는 윤리가 이런 사태로까지 이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으로 결정된 문제를 개인의 윤리라는 관념론으로 몰아갈 때, 즉 유물론의 원리를 져버렸을 때, 그 운동은 극한의 폭력으로 파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했던 것이다. 전공투 운동은 이 유물론과 관념론이 맞닿은 지점에서, 혹은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전공투는 ‘인간’과 ‘역사’의 운동이 유물론과 관념론의 극한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세계와 역사의 문제를 한없이 개인의 윤리 문제로 환원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극한의 관념론이었으며, 개인의 삶이 대학, 사회, 한 나라를 넘어서 세계 전체와 역사에 의해 규정된다는 첨예한 의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극한의 유물론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인간’과 ‘역사’는 서로가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는, 결코 어느 한 편으로 귀결될 수 없는, 끝없이 펼쳐지는 투쟁의 주체와 공간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는 연속되는 시간으로서의 역사라든가, 영원한 공간 속에서 활동하는 인간은 쓸모없어진다. 문제는 연속하는 시간이나 영원한 공간이 아니다. ‘인간’과 ‘역사’는 종말을 고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인간’이 자연과 세계와 타자와의 투쟁을 통해 그려내는 ‘역사’란 없다. 따라서 관념론도 유물론도 없다. 이 극한의 상황을 그들은 ‘해방구=바리케이드’라고 불렀다. 갇혀 있음이 가장 열려 있다는 역설, 이것이야말로 모더니티가 다다른 종말일지도 모른다. 이 모더니티의 극한에 사는 주민들이 1969년 동경대학 고마바 캠퍼스에서 미시마와 만났던 이들이다.

http://kuchu-camp.net/xe/58174

공중캠프

2016.11.15 13: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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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신의 폭력과 지상의 행복: 발터 벤야민과 탈정치신학

<벤야민 르네상스와 숨겨진 비사>

게르숌 숄렘, 『유대 신비주의의 주요 흐름』(1941)

벤야민 르네상스의 ‘정사’(아도르노 – 도구적 이성과 비판적 이성 사이의 칸트적 대립)와 ‘비사’ - 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신학』(1987), 아감벤, 『호모 사케르』(1995), 『예외상태』(2003) “우리 시대의 궁극적 지배의 비밀”을 둘러싼 “거인족의 싸움” (‘예외상태’를 ‘법질서’와의 관계하에 묶어두려는 슈미트와 ‘예외상태’를 ‘법질서’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벤야민 사이의 싸움) : 벤야민, 「폭력비판을 위하여」 - 슈미트, 『독재』(1921), 『정치신학』(1922) -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1930) - 슈미트 『햄릿 혹은 헤쿠바』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법이 – 더 이상 집행되지 않고 궁리되는 – 정의가 아니라 단지 정의로 이끄는 문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정의에 이르는 길을 여는 것은 법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법에서 활력을 빼앗고 작동을 멈추게 하는 일 – 즉 법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법의 작동과 정지 사이에서 펼쳐지는 “궁극적 지배의 비밀”

<칼 슈미트의 결단과 회한>

아감벤, 『예외상태』 “법학자들이여, 어찌하여 그대들 소임 앞에서 입을 다물고 계시는가?”
겐틸리스 “신학자들이여, 타인의 소임 앞에서 침묵하라!”
슈미트, 『옥중기』(1950) “침묵하라, 법학자들이여!”

슈미트의 적(이자 동지) - 자유주의/민주주의/의회주의, 사회주의/무정부주의/공산주의, 개인주의/낭만주의/실존주의에 맞서 주권자의 결정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의 편에서 투쟁

“나는 ‘유럽 공법’에 대한 최후의 자각적 대표자이자 실존적 의미에서 최후의 교사이고 연구자이며, 그 종말을 베니토 세레노가 해적선 항해에서 겪었던 식으로 체험했다.”

“프로메테우스(예언, 예지)로서가 아니라 기독교적 에피메테우스(후회, 회한)”

<무구한 육체와 벌거벗은 생명: 슈미트와 벤야민의 대립>

슈미트, 『테오도어 도이블러의 북극광』(1916) - 낭만주의 시인
막스 슈티르너 – 헤겔 좌파 철학자, 급진적 실존주의 : “무구한 육체”의 행복이야 말로 자아의 행복 - “‘인간은 벌거벗었다’”, “육체적 행복의 분출”

슈미트의 정치적 결단 – 개인이냐 국가냐, 육체(삶)냐 법이냐, 절대적으로 벌거벗은 육체로 남겨질 것이냐, 아니면 그런 육체를 깡그리 추방하여 법복을 입은 채 국가에서 삶을 영위할 것이냐의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 – 그 결단이 파국으로 종결되었을 때, 조용히 벌거벗은 육체로 되돌아와 “침묵”

벤야민은 개인과 국가, 육체와 법이라는 이분법을 거부, 양자택일의 정치적 결단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요소가 불가분으로 결합되어 있다.

“약동하는 삶에 대한 법의 지배는 단순한 생명과 함께 사라진다. 신화적 폭력은 폭력 자체를 위해 단순한 생명으로 향하는 피의 폭력이며, 신의 순수한 폭력은 약동하는 삶을 위해 모든 생명으로 향하는 폭력이다.”

‘운명-죄-신화적 폭력-법’ : 벤야민에게 역사란 무구한 인간에게 죄를 덧씌워 속죄로 이끄는 운명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이 운명을 덧씌우는 것이 신화적 폭력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법이다. 신화적 폭력이 영웅의 희생을 대가로 법의 지배를 개시한다. 세상의 파국을 영웅의 희생으로 막은 결과, 이후의 역사 세계에 사는 피조물은 모두 이 영웅에게 생명을 빚지게 되는 것이 법의 지배이다. 역사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이미 “죄-부재”를 짊어진 존재이며, 자신의 삶 자체를 빚지고 있는 만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죄-부재 연관’에 종속된 존재이다. 이 연관 속에서 인간으로부터 “단순한 생명”을 분리시킴으로써 약동하는 삶을 파괴한다. 이 단순한 생명의 등장으로 법은 결코 약동하는 삶을 지배할 수 없으며, 약동하는 삶이란 법의 지배하에 있는 삶의 형태가 아니게 된다.

슈미트에게 벌거벗은 육체, 즉 단순한 생명은 낙원에 머물던 아담의 행복을 뜻했고, 그는 국가와 법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나 벤야민에게는 그런 벌거벗은 육체야말로 국가와 법이 삶과 맞닿는 장소이다.

슈미트는 결단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유일한 계기라고 보았고, 그 결단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벌거벗은 육체만을 간직한 채 자아의 낙원으로 침묵하며 침잠하는 삶의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벤야민에게는 슈미트의 결단하는 인간이야말로 벌거벗은 육체와 중첩되는 것이며, 그 순간 인간의 삶은 국가와 법 안에 포섭되는 것이었다.

슈미트가 인간의 수많은 정의 중에 벌거벗은 인간을 결단하는 인간의 대척점에 세운 것과 달리, 벤야민은 벌거벗은 인간도 결단하는 인간도 인간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한다. 아감벤이 슈미트와 벤야민을 대질시키며 도출해낸 예외상태가 “본질적으로 텅 빈 공간이며, 법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은 인간의 행동이 삶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은 규범 앞에 놓이게 되는 공간”이라면, 벤야민의 인간은 바로 이 예외상태 속에 머무르는 인간일 터이다.

<바로크적 종말론과 지상의 행복>

슈미트의 정치신학은 법학이란 신학의 개념을 세속화한 체계이며, 따라서 ‘주권자=신’이라는 초월 표상이 법학의 기초 개념이라는 점을 근간으로 삼는다.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자”, 낭만주의자들의 내면적 자기 고취, 자연과학적 인식론에 기반한 법실증주의의 과학주의 등의 “내재 표상의 지배”가 주권자의 결단과 결정을 불가능하게 하고, 국가와 법질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벤야민은 주권자의 결정 불가능성과 우유부단을 통해 정치신학의 불가능성을 주장

“근대적 주권 개념이 군주의 최고 집행권에 주력했다면, 바로크적 주권 개념은 예외상태에 관한 논의에서 발전해 나온 것으로서 이 예외상태의 배제를 군주의 가장 중대한 기능으로 삼았다.”

바로크의 군주는 예외상태를 법질서 속에 끌어들여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예외상태가 밖으로 못 나오도록 가둬두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바로크의 군주는 언제나 불안에 사로잡혀 있고, 무엇이 예외상태인지를 결정내릴 권한이 있는데도 예외상태가 세상에 나타날까봐 노심초사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주권자는 “최상의 호조건에서도 어떤 결단을 내리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월을 지향하더라도 피조물일 수밖에 없는 군주의 우울, “주권자가 아무리 피조물들의 주인이라고 해도 그 역시 피조물인 채로 머무른다.”

바로크 비극이 파국으로 치닫는 까닭은, 즉 바로크 비극의 예외상태가 정상상태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군주의 광기나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까닭은, 한번 고삐 풀린 예외상태를 다시 가두는 능력을 가진 이가 지상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크적 종말론 – 바로크의 인간은 종교적이지만 현세를 고집한다. 슈미트의 결단하는 (초월적) 정치적 인간과 달리 말이다. 그리고 이 인간은 “현세와 함께 폭포(파국)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이 파국은 결코 지상의 존재를 파멸로 이끄는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세의 세세하고 하찮은 존재들은 형상화되는 일 없이 피안에서의 구원만에 의지하여 삶을 지탱했는데, 바로크 종말론은 이 존재들을 지상에서 형상화하여 그들의 풍요로움을 피안으로부터 빼앗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은 현세에서 일어나며, 이 파국은 피안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피안은 이 현세의 파국을 통해 텅 빈 채로 남는다. 즉 그 어떠한 피안에 대한 이미지도 현세로부터 도출되지 못하는 셈이다.

메시아/신학과 역사/정치의 일방적 관계 – 메시아만이 자신과 역사적 사건의 관계를 “구원하고 완성하고 창조한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 즉 인간에 의한 어떤 행위나 의미도 메시아와 스스로를 관계시킬 수 없다. 역사적 사건의 목표는 신의 왕국, 즉 메시아의 도래가 될 수 없다. 메시아는 그저 역사적 사건을 끝낼 뿐이다. 인간은 메시아의 도래를 목표로 무언가를 할 수 없고, 심지어 메시아를 기다릴 수도 없다.

이 현세의 끝을 메시아만이 결정하고 알 수 있는 한, 지상의 존재들은 스스로의 역사가 간직하고 있는 ‘잠재태’에 머무를 뿐, 그것이 어떤 ‘실현태’가 되는지 모른다. 즉 지상의 존재들의 삶에 ‘목표’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메시아가 현실을 ‘끝낸다vollenden’라고 표현한다. 이 종말론은 지상의 존재에게 피안의 세계에서의 구원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상의 존재가 스스로의 풍요로움을 현세에서 ‘형상화’할 수 있게끔 약속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형상화는 ‘구원으로서의 극장’, “스스로를 연기하는 배우”에 해당된다. 벤야민의 인간이란 ‘스스로를 형상화하는 존재‘, 스스로의 형상을 빼앗아(획득하여), 파국의 정점에서 형상화하는 존재이다.

<탈정치신학으로서의 정치학>

약동하는 삶 - ‘잠재태’에 머물면서도 ‘형상화’를 획득하는 존재, 즉 질료이면서 동시에 형상인 존재, ‘스스로를 연기하기’, ‘잠재태의 형상화’가 현세 정치의 과제이자 ‘행복’이다.

“영원히 몰락하는, 총체적으로 사멸해가는 지상의 존재, 그 공간적 총체성뿐만 아니라 시간적 총체성까지도 사멸해가는 지상의 존재의 리듬, 이 메시아적 자연의 리듬이 행복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것의 영원하고 총체적인 무상함으로 인해 메시아적이기 때문이다. 이 무상함을 추구하는 일이 현세 정치의 과제이고, 그것의 방법은 니힐리즘으로 불러야 한다.”

“지상의 존재의 리듬”이란 ‘잠재태의 형상화’를 뜻한다. 왜냐하면 잠재태가 어떤 목표로 완성되어 실현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잠재태인 채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어떤 매질이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매질 자체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지상의 존재들이 이 잠재태와 매질 ‘자체를 함께-나눌 sich mitteilen’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슈미트의 육체와 결정의 이분법을 거부하여 ‘약동하는 삶’이라는 전혀 다른 삶의 형태를 제시했다. 이것은 개인과 국가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리듬을 함께 나누는 어떤 공동성을 예감하게 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이는 어떤 외재적이고 초월적인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함께 나눔으로써 지상에서 존재하고 사멸하는 삶의 형태였으며, 이것이야말로 법의 지배=신화적 폭력이 강요하는 텅 빈 단순한 생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즉 ‘죄-연관’에 종속되어 피안으로 행복을 유보하는 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었던 것이다. 바로크 비극이 피안으로부터 빼앗으려 했던 지상의 존재들의 풍요로움은 스스로의 삶에 존재하는 리듬을 탈환하는 일이었던 셈이다. 이것이 바로 단순한 자연이 아니고 메시아적인 자연인 것이다.

(summary)
슈미트는 벌거벗은 육체와 결단하는 주권자를 양극에 놓고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았다. 그것은 내용과 형식, 내재와 초월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벤야민은 육체와 결단의 불가분성을 설파하고, 지상의 존재에게 결정이 불가능함을 주장했다. 이랬을 때 국가와 법질서란 이 불가능한 결정을 운명-죄지음의 형태로 개인의 삶에 부과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희생을 강요하는 신화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신화적 폭력이 극점에 달해 개인의 희생(영웅의 탄생)으로 마무리되는 고전 비극과 달리, 벤야민이 천착한 바로크 비극은 신화적 폭력의 극점에 파국을 놓음으로써 법질서와 국가의 재생을 불가능하게 한다. 즉 바로크 비극은 현세의 파국을 상연함으로써 하나의 리듬을 생성시킨다는 점에서 정치적이었던 셈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신의 폭력은 현세의 목표도 언젠가 반드시 도래할 구원도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의 ‘공백’, 즉 아감벤이 말하는 예외상태 그 자체이다. 슈미트는 이 신의 폭력을 현세로 끌어내려 정치적 형식을 유지하려 한 반면에, 벤야민은 신의 폭력을 현세의 영역에서 급진적으로 배제하여 공백으로 남겨두려 했다. 아감벤이 말한 ‘법의 다른 사용’이란 이 신의 폭력을 현세로 끌어내려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백인 채 남겨두고 자연의 사멸에 리듬을 부여하는 일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피안, 즉 초월자나 초월적 형식이나 이념에 내맡겨 의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세의 삶 그대로 ‘형상화’하는 일이다. 아감벤이 말하는 “삶-의-형태 forma-di-vita”란 자연=삶에 리듬을 부여하여, 인간으로부터 단순한 생명을 분리시키지 않는 약동하는 삶을 의미했었던 셈이다.
벤야민이 슈미트와 대결하면서 구축한 탈정치신학은 이렇게 인간의 삶을 어디에도 종속시키지 않되 형식을 부여하는 ‘잠재태의 형상화’였다.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의 천사, 즉 근원에서 불어오는 진보라는 바람에 맞서며 지상의 폐허를 모두 세세하게 목도하는 저 천사는 이 ‘잠재태의 형상화’를 위한 천사였으며, 메시아란 이 천사의 고군분투를 왕국으로 이끌어 구원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끝내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시아란 사멸해가는 자연의 리듬에 붙여진 이름이며, 이 이름을 텅 빈 공백으로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신의 폭력과 지상의 행복을 주춧돌로 하는 벤야민의 탈정치신학적 정치였다.

공중캠프

2016.11.24 16: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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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파국 너머의 메시아니즘
5장 종말론 사무소의 일상 업무: 조르조 아감벤의 메시아니즘

1. 문제의 소재 : 푸코를 위로하는 하버마스를 넘어서

푸코, 「계몽이란 무엇인가」(1982)

이제까지 푸코는 이 지식에의 의지를 현대적 권력구성체 속에서 추적하여 그것을 고발하려 하였던 반면, 이제는 그것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즉 자기 자신의 사유를 현대의 시초와 연결하는, 보존할 가치가 있으며 개선할 필요가 있는 비판적 자극으로 보여준다. (...) 푸코가 자신의 마지막 텍스트에서 폭파시키려 했던 그 현대의 철학적 담론의 영향권 속으로 다시 스스로를 끌어들였던 것은, 바로 이 모순(이성 비판의 명목으로 온갖 이념을 해체/파괴했음에도, 그 폐허의 자리에서 새로운 규범적 이념을 찾아야만 하는 현대 철학의 조건)의 힘이었을지도 모른다(하버마스, 「현재의 심장부를 겨누는 화살」, 151).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라는 규범 정초적 물음, 하버마스의 푸코 평가 = 아감벤에 대한 비판 (정치적 니힐리즘, 정치적 사명 없는 사상가, 역설이나 과장을 다용하는 도발적인 전략가, 묵시록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비전 제시 등)

2. 푸코의 계몽, 메시아니즘의 흔적

『월간 베를린』에 두 개의 텍스트[칸트와 멘델스존의 텍스트]가 게재되면서 비로소 독일의 계몽(Aufklaerung)과 유대의 하스칼라(Haskala)가 같은 역사에 속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리하여 이 두 운동 모두 그들이 어떤 과정에 공통적으로 속해 있는가를 검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어떤 공통의 운명을 수용하겠다는 것을 공표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 우리는 그것이 어떤 드라마로 이어졌는지를 잘 알고 있다(계몽,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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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유대교의 시간관 안에서 현재란 종말과 구원을 예지하는 징후로 파악이 되거나, 아니면 덧없는 육체적 향락의 지옥으로 표상될 뿐이다. 즉 눈앞의 현재 그 자체의 의미를 탐구하는 일은 이 양대 일신교의 전통에 없는 태도였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푸코는 칸트의 계몽을 기독교와 유대교가 경험한 사상적 전회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이 맥락 속에서 계몽이 개시한 ‘현대성 modernity’을 “역사상의 한 시대”가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 고려하자고 푸코는 제안한다(계몽, 186). 이는 계몽과 현대성을 연대기적 시간의 의식으로부터 떼어내려는 시도인데, 여기서 소환되는 것이 놀랍게도 보들레르이다(93).

[보들레르의] 현대적 태도에 따르면, 현재가 높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상상하려는 필사적인 열망, 이 순간의 그것과는 다른 것을 한 번 상상해 보려는 필사적인 열망, 그것을 파괴해 버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포착함으로써 그것을 변형시키려는 필사적인 열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보들레르적 현대성은 일종의 훈련이다. 그것은 현실에 극단적으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 현실성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뒤흔들어 버리는 자유의 실천이다(계몽, 189~190).

(...)

우리는 경계선에 위치해야 한다. 사실 비판이란 한계를 분석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적 질문이 앎이 넘어서지 말아야 할 한계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의 비판적 질문은 좀 더 긍정적인 질문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요컨대 필연적 한계라는 형태로 수행된 비판을 가능한 위반의 형태를 취하는 실천적 비판으로 변형하는 것이 문제이다(계몽, 194~195)

이것이 푸코가 말하는 계몽의 실천적 함의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이 전체주의적인 모든 기획 또는 근본주의적인 모든 기획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20세기 내내 최악의 정치 체제가 반복해서 주장했던 새로운 인류 창출이라는 약속”을 물리치는 것을 뜻한다(계몽, 196). 푸코는 이를 “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에 적합한 철학적 에토스”라 칭하면서,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한계들을 역사적-실천적으로 시험”하고 “그를 통해 우리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실현하는 것”이라 부연하여 설명한다(계몽, 196).

따라서 푸코의 계몽이랑 하버마스와 같은 규범의 정초를 지향하는, 잘 짜인 논리와 체계를 가진 철학적 건축의 설계도가 아니다. 오히려 푸코는 칸트의 계몽을 인식론과 진보적 역사철학으로 보편화하여 체계화한 근대적 비판철학의 전통을 비껴가면서, 그 속에 침전되어 남겨진 어떤 철학적 태도를 추출하려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파레시아’ 개념)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것” (...) 왜냐하면 푸코의 칸트 읽기는 규범의 정초와 파괴 사이의 모순 속에서 스스로의 철학적 처지를 토로한 텍스트 따위가 아니라, 현재의 규범과 자아 혹은 타자 사이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되물음으로써 그 관계의 변용 속에서 실험 가능한 자유를 철학적 에토스로 제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은 이론이나 교리, 또는 축적되고 있는 앎의 영원한 총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 모습에 대한 비판이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는 한계들을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동시에 그러한 한계들을 넘어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는 태도, 에토스, 철학적 삶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계몽, 200)


3. 종말론 사무소의 재개

벤야민은 스스로를 기독교와 유대교의 특이한(singular) 교차점에 자리한 사상가로 자리 매김 했는데, 그런 그가 종말론 사무소(eschatological bureau)를 주저 없이 재개하려 했을 때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이나 찰스 도드(Charles H. Dodd)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 그러나 종말론보다는 메시아니즘에 관해 말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KG, 8).

(1) 『왕국과 영광』 : 오이코노미아 신학과 서구 통치의 본원적 패러다임

오히려 신학 자체가 이미 언제나 오이코노미아에 관련된 교리라는 것이 아감벤의 독창적 해석이기 때문이다(98~99).

기독교 신학이 이미 시작부터 지상의 통치를 위한 앎의 체계를 마련했고, 이는 ‘구체적 종말론 concrete eschatology’을 회피하는 가운데 시작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99). ... 아감벤은 지상의 통치로서 오이코노미아 신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삼위일체론(신의 지상 통치를 이론화하고 정당화하는 장치, 지상의 삶(현세)은 구원을 기다리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신의 계획이 실행되고 있는 유의미한 시간으로 탈바꿈), 제국-교회론, 섭리론, 천사론 등을 통해 분석한다.

(...) 그렇게 하여 아감벤은 교회와 제국이 주도한 지상의 통치가 결국 인간을 관리하고 질서정연하게 배치하는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을 출발부터 핵심으로 삼은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주장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테제는 서구의 인간은 고유한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인간과 사물의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질서/관리를 집행하는 ‘통치’만을 반복해왔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희구하는 영원한 삶은 결국 “정치 polis”라는 패러다임 하에서가 아니라 “가정 oikos”라는 패러다임 하에 있다. 야콥 타우베스의 조롱과 같은 경구에 따르면 “삶의 신학 theologia vitae”는 언제나 “신학동물학 theo-zoologie”로 변질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KG, 3).

왜 신은 영광을 필요로 하는가, 주권은 왜 갈채를 필요로 하는가? 지상의 촘촘한 통치 실천, 제도, 조직이 신의 의지를 대변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결코 가시화될 t ndjqtsms 신의 자리를 영광-갈채의 빛-열광을 통해 현시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아들(집행자)의 오이코노미아적 행위가 아니라, 아버지의 신성한 존재를 영광이라는 성화 聖花를 통해 가시화하기 위한 필연적 의례가 교회의 신에 대한 찬양이다. (...) 신의 존재가 잠재태(potentiality)이며 신의 행위가 실현태(actuality)라면, ‘영광-찬양’이란 오이코노미아적 통치가 신의 존재라는 잠재태의 실현태임을 보여주는 의례인 셈이다. 그리고 주권이 존재로서의 신이 세속화된 관념이라면, 통치를 주권의 의미의 발현으로 표상함과 동시에 텅 빈 주권의 자리를 성화(sacramento 聖化)하는 것이 바로 인민의 갈채에 다름 아니다. 아감벤은 이러한 서구의 통치 패러다임에 맞서 존재로서의 신과 주권의 텅 빈 자리를 영광이나 갈채로 은폐하면서 통치를 정당화하는 세속의 질서에 맞서, 신과 주권의 본래적 ‘무위=잠재태’를 그 자체로 남겨두는 것을 정치의 고유한 임무라 주장한다(102).

(2) 역사철학, 종말론, 그리고 메시아니즘

카테콘(Katechon)이란 신의 왕국의 도래까지 지상을 지키는 존재로, 진정한 구원이 아닌 가짜 구원을 설파하는 ‘적그리스도 anti-christ’를 억제하는 자이다.

오이코노미아 신학이 지상의 통치를 뜻한다는 한에서, 영광이 텅 빈 신의 자리를 은폐하면서 현시함으로써 지상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실천인 한에서, 카테콘이란 오이코노미아와 영광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형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종말과 구원을 통해 끝이 나야할 오이코노미아와 영광은 카테콘에 의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과 역사철학에서 오이코노미아를 은폐하고 망각했다는 것은 오이코노미아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아감벤 주장의 핵심은 오이코노미아의 은폐와 망각이 지상 질서의 끝을 상상하는 일을 사유와 실천으로부터 추방했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의 인민의 갈채와 교회에서의 신도와 사제에 의한 영광은 결국 ‘구체적 종말론’을 기독교 신학과 역사철학에서 배제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셈이다.

그래서 오이코노미아의 전면적 통치를 용인하고 영원화하는 기독교의 종말론은 영광에 기반한 현존하는 통치 권력의 옹호에 다름 아니다. 그 종말이 구체적 모습으로 상상되지 않고 억제되고 지연되는 것으로 사념되는 한에서 말이다. 벤야민이 재개하려 했던 ‘종말론 사무소’란 이 상태에 대한 개입이다. 그것은 인간을 관리되고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야 하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간주하는 이 거대한 오이코노미아 통치 장치로부터의 탈피를 구상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의 메시아니즘은, 따라서, ‘구체적 종말론’을 전개하는 메시아니즘이라 할 수 있다. 아감벤이 벤야민의 메시아니즘을 서구 통치 패러다임에 대한 극한의 대립점으로 삼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 메시아니즘의 시간관과 언어에 대한 근원적 사유를 통해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다(105~106).

4. 메시아적 종말과 언어 경험

메시아적인 것은 시간의 종말이 아니라 종말의 시간입니다. 메시아적인 것은 시간의 종말이 아니라 매 순간, 즉 하나하나의 카이로스(kairos)가 시간의 종말 및 영원성과 맺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관심은 시간이 끝나는 순간, 즉 마지막 날이 아니라 종말과 관계 맺고 그것을 개시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메시아적인 것은 시간과 그 종말 사이의 남겨진 시간(time that remains)이라고 말입니다(CK, 8).

“매일, 매 순간은 메시아가 도래하는 작은 문이다(CK, 5).”

오히려 이 메시아적 시간 경험은 인간의 언어활동을 구성하는 본래적 어긋남 혹은 위약함(weakness)에서 비롯된다(107).

이는 마치 메시아적 종말이 현재와 종말 사이에 펼쳐진 ‘남겨진 시간’이라(...)면, ‘근원(arche)’에 대한 물음은 현재와 시작 사이에 남겨진 시간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109).

“내 이름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라면, ‘참’ 또는 ‘거짓’이 의미하는 바를 나는 어떻게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 말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맹세한다는 것,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다(『언어의 성사』, 115~116).

아감벤은 이 위약함을 외재적으로 보충하여 의미를 확정지으려는 시도가 바로 종교와 법이라 간주한다. 여기서 종교는 언어활동에 내재한 근원적 믿음(혹은 위약함)을 특정 존재자에 대한 믿음으로 환원하여 그 의미를 위계화하는 ‘언어의 성사 sacramento’이며, 법이란 언어활동의 수행적 경험을 무수한 일반 법칙(문법)으로 환원하여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고정시키는 ‘권력의 성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을 제도화하는 종교와 삶을 법칙화 하는 법은 모두 인간의 유적 본질, 즉 언어활동의 위약함을 은폐하고 말소하려는 장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 위약함은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믿음과 타자에 대한 맹세를 수반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타자를 믿고 타자에게 맹세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공생하는 존재 communal being’라는 것이 이 위약함이 뜻하는 바인 것이다. 종교와 법은 이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위한 믿음과 맹세를 ‘보편화’한다. 즉 진심과 진실을 가늠하는 수직적 잣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111-112).

(...) 법과 종교는 언어활동의 위약함의 다른 이름인 믿음-맹세를 보다 상위의 권력/규범에 위탁함으로써 삶의 안정을 얻는다. 하지만 이 때 인간의 삶은 타자에 대한 믿음-맹세를 권력적 잣대에 기대어 가늠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포기해버린다. 즉 공생하는 이웃에 대한 수평적 믿음-맹세가 아니라, 신이나 규범에 대한 수직적 믿음-맹세를 통해 스스로를 관리당하고 규율당하고 처벌받는 ‘벌거벗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아감벤의 오이코노미아 신학에 대한 분석은 삼위일체의 교리와 세속화된 정치신학을 통해 인간 삶의 위약한 공생(이웃에 대한 믿음-맹세)이 어떻게 텅 빈 신-주권에 대한 영광과 갈채 속에서 형해화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작업이었던 셈이다(113-114).

(...) 그렇기에 아감벤이 말하는 벤야민의 ‘종말론 사무소’란 저 ‘남겨진’ 위약함을 수평적인 공생의 지평 속에서 붙잡는 것을 일상적 업무로 삼는다. 그것은 주인공의 성장 없이 삭막한 산문적 세계만이 남은 근대의 끝자락(역사의 종말)에서, 말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유일한 행위, 즉 ‘정치’인 것이다.

5. 정치적 메시아니즘을 위하여

역사에서 살아남은 국가, 또 자신의 역사적인 텔로스를 성취한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국가 주권이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 오늘날 국가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을 동시에 사유하면서 전자를 후자에 맞세울 수 있는 사유만이 우리의 과제에 적합한 것이 될 것이다(『호모 사케르』, 140~141).

생정치-오이코노미아-통치의 패러다임은 서양 정치의 근원에 자리하면서 인간의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치환하여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오래된 장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종말과 국가의 종말’을 동시에 사유하는 정치적 사유란, 이 생정치-오이코노미아의 통치 패러다임에 맞서기 위해서는 근대 정치의 이념이나 국가 장치의 민주화 따위에 기댈 수 없음을 전제로 삼을 때 가능한 전망이라 할 수 있다. 즉 어떤 이념의 실현을 위한 전략/전술로 인간 행위를 바라보거나(고전적 혁명론), 국가의 공공기능 강화를 통한 사회성의 회복(복지국가론)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전면화한 생정치-오이코노미아 통치 패러다임에 적합한 비판 프로젝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감벤이 수평적 언어 경험을 메시아니즘의 요체로 제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치적 행위가 전략/전술이나 국가제도의 변혁으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아니 애초에 그런 기획 자체가 생정치-오이코노미아 통치 패러다임에 종속된 것이라면(소비에트의 실패),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정치’(아리스토텔레스)는 전혀 다른 토대 위에서 구상되어야 하며, 그것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유일한 유적 행위인 ‘언어’에서 다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 이 ‘정치적 메시아니즘’은 결국 혁명적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 예외’를 거주하는 장소로 삼을 수밖에 없다. 혁명적 예외공간이 결국 국가제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면, 언어의 위약함을 법칙화 하여 안정화하는 법과 종교 대신에 언어가 근원적으로 내장하는 의미와 무의미의 문턱, 즉 규범/규칙화될 수 없는 예외의 공간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되고 생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재개하려 했던 종말론 사무소가 특수한 임무가 아니라 ‘일상적 업무’를 업으로 삼아야 하는 까닭이다(118).

공중캠프

2016.12.01 11: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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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절대적 계몽, 혹은 무위의 인간: 아감벤 정치철학의 현재성

1. 어느 담론 공간의 풍경

담론 공간의 내진 耐震 능력

2. ‘사유’와 ‘현실’의 이분법을 넘어서

아감벤의 현실 분석과 비판적 재구성의 논의를 마주할 때에, 아감벤의 현실 구성을 현실 그 자체로 받아들여 비관으로 빠지는 한편, 그의 대안적 이미지는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아감벤의 논의는 ‘현실-이론’이나 ‘목적-수단’ 등의 인식 틀로 보자면 비관적이거나 무정형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런 이분법적 틀 자체를 되묻는 일을 본연의 임무로 삼고 있다. ... 오히려 현실이 사유의 대상이라 전제될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지를 되묻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논의가 언어와 현실 또는 법규범과 적용 사이의 관계를 되묻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근대적 사유 체계가 사로잡혀 있는 현실-이론, 주체-대상, 목적-수단 등 수많은 이분법과 그에 기초한 목적론적 사고 틀의 근본적 재검토인 셈이다.

3. ‘역사의 종말’과 ‘국가의 종말’

“소비에트 공산당의 붕괴와 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에 의한 전지구적 차원의 노골적 지배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정치철학의 재탈환을 저해하고 있던 두 가지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방해물을 제거해주었다. 스탈린주의와 진보주의-제헌적 국가가 그것이다. 따라서 사유는 처음으로 그 어떠한 환상도 변명도 없이 본연의 임무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 주권, 권리, 네이션, 인민, 민주주의, 그리고 일반의지와 같은 용어들은 지금 예전에 그것들이 지칭해온 것과 아무런 상관없는 현실을 지칭하고 있다. 그리고 이 용어들을 무비판적으로 계속 사용하는 이들은 사실 자신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역사에서 살아남은 국가, 또 자신의 역사적인 텔로스를 성취한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국가주권이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 오늘날 국가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을 동시에 사유하면서 전자를 후자에 맞세울 수 있는 사유만이 우리의 과제에 적합한 것이 될 것이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1992) - 정치적 투쟁이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나고 무해한 관리-행정 기술이 인정 욕구가 거세된 인간의 목가적 삶을 떠받치는 세계에 대한 사변적 표현

“다가올 사유는 헤겔-코제브(그리고 마르크스)의 역사의 종말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존재의 역사가 종말을 고했음을 뜻하는 하이데거적 ‘생기’로의 진입이라는 주제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4. ‘목적론’과 집합론‘을 재고하기

“일단 자유의지의 내용을 제거하게 되면, 자유의지의 형식적 요소에 관해서는 유일하게 법만이 남기 때문이다.”

개인과 국가를 주인공으로 삼은 역사라는 연극은 어떤 목적을 실현해나가는 목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목적론의 동력이 되는 의미와 형식 사이의 부정의 변증법은 없는데, 법은 아무런 의미 없이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외란 자신이 귀속되어 있는 집합에 포함될 수 없으며, 또한 자신이 이미 항상 포함되어 있는 집합에 귀속될 수 없다.”

‘포함하는 배제’, “만약 ... 이라면, 그 경우엔 ...” - 법적 규칙의 본래적인 형식. 법규범은 어떤 사실적 영역에서 일어난 사태(위반 사례)를 다루는 규칙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때 발생한 사태를 언제나 규범의 바깥으로, 즉 규칙으로부터 배제함으로써 내부에 포함해야 한다. 가령 살인을 금지하는 규범이 법률 형식을 취할 때에는 ‘만약 살인을 하게 되면, 징역형에 처한다‘는 문장 형식을 가질 터인데, 이는 살인을 법규범을 벗어난 사태로 삼음(배제)으로써 규칙화(포함)하는 일임을 이해할 수 있다.

“예외란 법의 본래적 형태”이다. 법규범 속에서 인간 행위가 법적 사실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집합의 항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예외화’라는 조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조치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주권’이다. 아감벤은 칼 슈미트를 따라 주권을 ‘예외상태의 결정’으로 이해한다. 슈미트의 주권론은 ... 법규범 바깥에서 일어나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일이야말로 주권의 본질이라 규정한다.

주권의 성립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폭력을 ‘예외상태’라는 (법)사실로 포함함으로써 가능함을 의미한다. ... 주권의 성립이란 개인이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함과 동시에,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법적 주체가 되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주권의 성립은 개인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배제하는 식으로 포함한다. 벌거벗은 생명 없이 주권은 탄생할 수 없지만, 벌거벗은 생명은 국가의 바깥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은 주권의 구조 속에서 ‘법적 주체’와 ‘벌거벗은 생명’으로 분할되는 셈이다.

하이데거의 “생기” -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이 조작과 작위의 네트워크 속에 하나의 단위로 조직되어버린 사태/상황(“총동원”)에 대한 비판.

푸코의 “생명정치” - 법적 주체로서의 국민이 벌이는 투쟁(역사)이 종말을 고했음에도 살아남은 국가란 생명정치를 통치의 패러다임으로 삼음을 보여주는 증좌.

“민주주의가 마침내 적대자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정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왜 민주주의가 – 조에zoe의 해방과 행복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 조에를 전례 없는 파멸에서 구해내는 데 무능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확실하게 이해해보려는 것이다.”

법적 주체의 투쟁이 종식되었다는 선언에도 벌거벗은 생명이 배제됨으로써 포함되는 구조가 존속된다면, 근대의 정치 기획을 지탱하던 목적론과 집합론은 재고될 수밖에 없다. 그랬을 때 근대 통치의 패러다임은 의회도 광장도 대통령궁도 아닌 수용소가 된다. 수용소야말로 귀속되지만 포함되지 않고 포함되지만 귀속되지 않도록 개인을 분할하는 법의 힘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소이며, 수용소의 주민은 아무런 법적 지위도 갖지 못한 채 법 안에 포함되어 있기에 그렇다.

5. ‘예외상태’와 ‘정치’

아감벤이 말하는 예외상태란 긴급상태나 비상사태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질서의 존립을 보증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법률의] 효력 정지”와 관련되며, “규범의 존립과 정상 상황에 대한 규범의 적용을 보증하기 위해 질서 안에 하나의 픽션적 공백을 만들어내는” 일과 관련된다.

“예외상태란 법률 없는 법률-의-힘(따라서 법률-의-힘이라고 표기되어야 한다)이 핵심이 되는 아노미적 공간인 셈이다.”

규범(법)과 현실(생명)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벌어진 살인과 살인을 금지하는 법규범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다. 이 둘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살인을 법사실로 구성하는 “만약 ... 라면, ...이다”라는 예외화가 필요한 것이다. 아감벤이 말하는 예외상태, 즉 픽션적 공백이란 이 사태를 뜻한다. 이 픽션적 공백 속에서 법규범을 구성하는 내용은 아노미 상태인 채로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아니라 “만약, 라면, 이다”라는 “법률-의-힘”이기 때문이다.

슈미트, 『독재』 - 독재란 국가의 목적과 그 실현 방법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국면이다. 목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그 목적을 무화시켜야 한다. “예외상태라기 보다는 이상적 정상 사례”(패러다임)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생명과 자연상태의 아노미가 먼저 있고, 그런 다음 예외상태를 통해 그것들이 법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생명과 법, 아노미와 노모스를 구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생명정치적 기계를 통한 이 둘 사이의 절합과 일치한다. 벌거벗은 생명은 이 기계의 산물이지 그것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정치적인 행위란 폭력과 법 사이의 연계망을 끊어내는 행위뿐이다. 그리고 오직 그렇게 해서 열리는 공간에서 시작해야만 예외상태 속에서 법을 생명과 연결시키던 장치dispositif를 중지시킨 후 법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물을 수 있다.”

벤야민, “진정한 예외상태”

푸코, ‘통치성’governmentality – 정치의 분석철학. 권력의 원천과 권력의 작동 사이의 균열. 장 이폴리트의 ‘실정성’positivity에서 유래. 자연종교는 신의 존재에 무매개적으로 합일되는 종교이며, 실정적 종교는 신에 복종하기 위해 강제와 규칙이 필요한 종교이다. 신의 존재와 통치 사이의 균열,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은 이 균열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삼위일체나 예외상태란 이 균열을 메우기 위한 픽션이며, 그 속에서 개인을 통치의 대상으로 만드는 다양한 규칙, 믿음, 강제, 기술의 네트워크인 ‘장치’가 작동한다. (오이코노미아 - 기독교의 인간 통치 패러다임)

6. 절대적 계몽과 무위의 인간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1978) - 통치의 기술 속에서 산출되는 효과로서의 주체(신민)subject가 어떤 능동성을 갖느냐, 즉 삭막한 장치의 산출 또는 효과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옥죄는 통치의 힘과 맞서려는 주체의 의지를 탐색하려는 시도

통치의 기술의 탄생 : 푸코 - 중세 기독교의 사목 권력, 수도사들의 일상적 행위에서 양심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규칙을 통해 지도하는 일 (아감벤 3~4세기 기독교 교리)

“어떻게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 통치를 아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이런 명목 아래, 이런 목표들을 위해, 이런 절차와 수단으로, 이들에 의해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성서 비판, 실정법 비판, 권위 비판. 진실의 이름으로 복종을 산출하는 일련의 장치를 정시시키는 일. 칸트의 비판철학, 계몽.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

칸트는 어떤 성직자가 자신이 속한 교구의 교리에 따라 교회에서 설교할 때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교리를 비판할 자유가 없다고 말한다. 반면 이 성직자가 교회에서 퇴근하여 불특정의 공중을 대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때에는 교리를 비판할 자유를 가진다. 칸트는 이 이성의 공적 사용이 계몽을 가져다준다고 말하면서, 이성의 사적 사용은 제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 말한다. 결국 칸트는 제한 없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이성의 사적 사용에 대한 적절한 제한이 계몽의 조건임을 설파한 것이다. 여기서 이성의 사적 사용이 특정한 복종의 규칙을 통한 통치화된 주체의 산물이며, 이성의 공적 사용이 푸코가 파악한 비판에 해당한다. 전자는 벌거벗은 생명의 예외화에 기반한 개인의 분할로 이뤄지는 ‘주체화’이며, 후자는 벌거벗은 생명의 분할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 생명과 몸짓의 통합, 즉 아감벤이 “조에 천연의 감미로움”이라 불렀던 “삶-의-형식”이 체현된 형태이다.

“플루트 연주자, 조각가 혹은 모든 전문가들의 훌륭함과 행위, 그리고 일반적으로 일정한 기능과 일정한 행위를 수행하는 이들이 자신에게 고유한 기능ergon 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인간의 훌륭함과 행위도 그의 고유한 기능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즉 목수나 제화공이 고유한 기능과 행위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즉 아무런 기능 없이 무위의 훌륭함만이 본성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무위의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이는 그의 행위와 삶이 그 어떠한 기능이나 목적에 결코 종속되지 않음을 뜻한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이 인간 고유의 ‘무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실정적 법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실정적 법이 작동하여 산출하는 통치의 장치를 정지시켜 법의 다른 사용처를 궁리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잠재성’이나 바틀비의 “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I prefer not to. 복종을 일소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을 가능케 하는 장치를 멈추는 비판과 계몽으로 인간을 인도한다. 이것이 벌거벗은 생명과 법적 주체로 분할된 개인을 ‘인간’으로 통합하는 길이며, 그런 의미에서 ‘절대적 계몽’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공중캠프

2016.12.01 14: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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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언어의 운명과 문학의 자리
7장 자연, 법, 그리고 문학: 발터 벤야민과 인간의 언어에 관하여

1.

전쟁과 갸쿠엔콘逆縁婚이라는 질서/제도와 장남의 분노, 원한, 회한, 황망함

2.

결혼, 가족 - 자연과 법 사이에서 펼쳐지는 인간 삶의 운명과 파국

“만약 계약이 없으면, 지배는 어머니에게 있다. 왜냐하면 혼인에 관한 법률이 없는 완벽한 자연상태에서 누가 아버지인가는 어머니에 의해 선언되지 않는 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식에 대한 지배권은 그녀의 의지에 달려 있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것인 셈이다.” (홉스, 『리바이어던』)

자연법lex naturale은 시민법lex civile의 성립을 통해서만 법이 된다. “자연의 모든 법은 공평, 정의, 보답 및 그것들에 기초한 도덕을 기초 짓기 위한 것이지만, 완전한 자연상태에서는 원래 법이 아니라 사람들을 평화와 순응으로 향하게 하는 성질들”. 자연(어머니의 지배)은 전적으로 법의 산물이다. 자연적이라고 사념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인간의 법과 언어와 제도가 성립해야만 전제될 수 있는 전도된 ‘기원’인 셈이다.

“자연 속에서 형제와 만난 적이 있는가? 자연 속에서, 말하자면 동물이 탄생했을 때 말이네. 형제성에는 법과 이름이, 상징이, 언어가, 계약이, 서약이, 언어적인 것, 가족적인 것, 그리고 민족적인 것이 필요하네.” (데리다)

법 이전의 자연상태가 법이 성립해야만 존립 가능하다는 이 전도는 ... 법이 언제나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상태를 상기토록 ‘명령’한다는 사실이며, 이때 인간은 인간 이전의 존재로 전락한다는 사태이다. (“기술도 문자도 사회도 없는”, “고독하고 빈곤하며, 험악하고 잔인한” 동물적 삶이라는) 끔찍한 자연상태로의 전락을 바로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법이 명령하고 있다. 즉 인간은 자연과 법의 이 오묘한 위상 속에서 인간 아닌 존재로 전락하라는 명령에 이미 언제나 복종하고 있는 셈이다.

자연 상태 - “인간이 인간에 대해 신이라는 것도, 인간이 인간에 대해 악의에 가득 찬 늑대인 것도 진실”. 전쟁과 낙원. 타락과 초월. 자연과 법의 “관절이 어긋난” 세상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비-인간이라는 상태를 벗어던지고) 인간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3.

블루멘베르크, 『코페르니쿠스적 우주의 생성』 “코스모스와 비극” 행복과 불행, 질서와 혼돈이 결코 대칭적인 이항 대립을 이루지 않는다.

벤야민, ‘법의 저울’,
역사적 세계, 신화적 폭력(‘운명-불행-죄-법’의 연쇄), 메시아의 도래, 신의 폭력(‘행복-무죄-종교’의 연쇄)

“메시아 자신이 바로소 모든 역사적 사건을 완성시킨다. 그것도 메시아가 그 역사적 사건이 메시아적인 것에 대해 갖는 관계를 스스로 구원하고 완성하고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역사적인 것도 그 자체로부터 메시아적인 것과 연관되기를 바랄 수 없다.”

관계의 해제가 관계의 충만이고, 관계의 충만이 관계의 창조이며, 관계의 창조는 관계의 해제이다. ‘신화적 폭력=법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 신의 폭력, 법의 해제.

“신화적 폭력이 법 정립적이라면 신의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의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의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의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

법의 해제 – 총파업, 예술의 정치화, 비극(산양의 노래)적 영웅의 죽음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

“주인공은 무엇을 위해 죽는가? ... 비극적 희생은 옛 법을 수호하는 신들에 바쳐지는 속죄의 희생물이라는 점에서는 최후의 희생이지만, 민족 생활의 새로운 내용들을 알리는 대임 행위라는 의미에서는 최초의 희생이다.”

비극적 영웅의 죽음은 법의 수호와 법의 탄생을 알리는 이중의 표식이다. 신화적 폭력 – 법을 유지하고 정립시키는 폭력, 비극적 영웅을 운명으로 이끄는 힘. 법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 인간은 여전히 비-인간으로 전락하거나 초월한다. “단순한 생명”blosses Leben = 자연상태

단순한 생명은 한편에서 신화적 폭력 고유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신화적 폭력=법의 폭력이 그치는(해제되는) 결절점이기도 하다. 법이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법이 탄생할 때에 생기는 틈새야말로 단순한 생명의 이중성의 장소인 셈이다.

장남은 단순히 법적 지배를 위한 희생양의 지위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장남은 분명히 이 법적 지배를 해제할 장을 열어젖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할 언어를 상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

단순한 생명의 이중성

“비극적 영웅은 자신에게 완전하게 부합되는 하나의 언어만을 갖는다. 침묵이 바로 그 언어이다.”

비극적 영웅은 한편에서는 단순한 생명의 극한이다. 왜냐하면 그는 피를 흘리며 희생양이 됨으로써 법적 지배를 유지시킨다. 즉 그는 자연상태를 상기하라는 저 법의 명령, 비-인간으로 전락하라는 그 명령을 피를 흘리며 대임하여 스펙터클화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그는 침묵함으로써 이 법의 명령을 거스르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어디에도 스스로의 처지를 호소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고유한 실존을 지켜내려 한다. 그것은 바로 법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의 언어-이름 붙이기’ - 그때그때마다 고유한, 절대로 반복 불가능한 타자와의 관계 맺기. ‘아우라’

‘행복’ - 불행과 죄의 사슬에서부터 벗어나는 길, 법적 폭력의 해제, 인간이 스스로의 몰락을 순수하게 추구하는 일, 유한한 자의 유한성(죽음)이 그 어떤 상위의 질서나 권력으로 회수되지 않고 순수한 ‘끝’이 될 수 있느냐, 즉음이 죽음 자체로서 성취될 수 있느냐. 전쟁이나 낙원 속의 비-인간(희생양)의 극한으로서 피를 흘리는 벌거벗은 생명이자 신성한 존재가 아닌 인간을 인간으로서, 몰락을 몰락으로서 순수하게 추구하는 것

“생명의 성스러움에 관한 도그마의 원천”에 대한 탐구, 아감벤 『호모 사케르』. 인간의 법이 왜 인간을 끊임없이 비-인간으로 만들면서 존속해야 하는지, 인간의 언어가 왜 인간의 일회적이고 고유한 표현을 방해하는지. 즉 그것은 인간 사회가 비-인간의 형상을 바탕으로 성립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문명의 원천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벤야민에게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순수한 목소리를 회복함으로써 끊임없이 인간이고자 하는 존재이다.

6.

“이처럼 영원히 사멸해가는, 총체적으로 사멸해가는 속세적인 것, 그 공간적 총체성뿐만 아니라 시간적 총체성까지도 사멸해가는 속세적인 것의 리듬, 이 메시아적 자연의 리듬이 행복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것의 영원하고 총체적인 무상함으로 인해 메시아적이기 때문이다. 이 몰락을 추구하는 일이 세계 정치의 과제이고, 그것의 방법은 니힐리즘으로 불러야 한다.”

사멸=무상함=몰락=죽음. 언어론. ‘이름 붙이기’. 일회적 만남, 반복될 수 없는 만남, 일회적 소통mitteilen=함께 나누기. 역사적 사건을 정해진 준칙이나 규율을 통해 일반화하는 것이 법적 폭력이라면, 벤야민은 이 법적 폭력을 해제하는 일회적이고 고유한 언어를 추구했던 것이다. 침묵을 몰락으로서 추구하는 세계의 정치. 순수한 음성언어, 음성언어의 반복 불가능성, 일회적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아우라. 모든 서술어(보편)를 거부하는 존재, 지상의 존재들이 유한함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간)

다만 저 장남의 밑도 끝도 없는 황망함에서 자그마하고 순간적으로 열리는 틈새를 들여다보는 일, 이것이 문학이 인간과 맺어야 할 관계의 시작이자 끝이 아닐까?

공중캠프

2016.12.01 16: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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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신화를 거스르는 문학의 언어: 발터 벤야민의 비평에 관하여

1.

슈미트, 『정치신학』(1933) 2판 서문. “국법은 여기서 끝난다.” 법실증주의, 무정부주의자들, ‘영원한 수다’로 결정을 회피하는 ‘정치적 낭만주의=의회주의=다원주의’에 대한 비판. 패전의 폐허로부터 독일 재건을 위하여 ‘헌법-체제’의 수호를 위해 예외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일원화하는 일.

‘정치적인 것’의 고유 영역은 ‘적과 동지의 구분’,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여기서 ‘결정’entscheiden은 ‘구분’scheiden을 실행하는 일이며, ‘예외’Ausnhme는 ‘밖에서-취득함’Aus-nahme을 의미한다. 법규범이 통용되는 정상상태가 이미 있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예외상태가 법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바깥에서 취득하여 구분함으로써 안쪽이 확보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권자란 법의 정상상태에 의존하는 자가 아니라, 법의 바깥과 안을 구분하여 법이 통용되는 상태를 확보하는 자이다. 법 바깥, 법이 끝나는 지점, 예외상태 = 법의 ‘효력 정지’ = 법의 공백(아감벤)이야말로 법학적 사유의 시작이자 법학의 존립 근거

2.

문학과 법 사이의 관계, 인간과 세계의 근원, 언어 형식

3.

아감벤, 『예외상태』 4장 「공백을 둘러싼 거인족의 싸움」 “법학자들이여, 어찌하여 그대들 소임 앞에서 입을 다물고 계시는가?” - 슈미트, 『옥중기』(1950) “침묵하라, 법학자들이여!”

슈미트 - 보편주의(법규법이 탄생한 일회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법규범의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입장, 법이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보편타당하게 통용될 수 있다)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고, 유럽 공법 체제(일회적이고 구체적인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내전을 종식시킨 주권국가와 이들 주권국가들로 이뤄진 국제 질서. 복수의 주권이 전쟁 권한을 독점하여 세력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럽 내에서의 국가 간 전쟁을 합법화하여 평화를 구축. ‘적’을 범죄자로부터 구분)를 형해화하는 ‘베르사유 체제’ - 국제연맹 체제(전쟁을 불법화, 주권 국가 위의 상위의 권위체)에 대해 비판

but, 20세기 막바지의 냉전 종식과 민족 분쟁, 종교 갈등의 시대에 아감벤이 슈미트의 침묵을 깨려한 까닭. 정치철학의 재탈환

4.

예외상태를 법학적 사유에 묶어두려는 슈미트와 예외상태를 공백인 채로 남겨두려는 벤야민의 싸움. 벤야민, 「폭력비판을 위하여」 - 슈미트, 『독재』(1921), 『정치신학』(1922) -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1930) - 슈미트 『햄릿 혹은 헤쿠바』

아감벤의 정치철학, 사유의 임무, 폴리스의 존립 근거를 순수한 부정 형식 속에서, 부정적 초월론 속에서 사유하는 것. 예외상태 = 법의 효력 정지, 법규범의 공백

“[주권자는] 최상의 호조건에서도 어떤 결단을 내리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 주권자가 아무리 피조물들의 주인이라고 해도 그 역시 피조물인 채로 머무른다.”

바로크 비애극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저 희비극은 모두 체제의 위기에 봉착한 통치자(군주나 왕자나 왕비)의 우유부단함과 나약함에 기인한다. 이 통치자들은 위기에 대처하여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위기가 정말 위기인지 고민하고 의심한다.

벤야민의 비평 언어의 급진적 정치성 - 예외상태를 법의 테두리에서 해방하는 언어 형식을 내세우는 일

5.

“어른들은 경험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윗세대가 아랫세대에게 가르쳐 이어가면서 형성된 것이다. ... 반지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내려갈 정도로 확실한 말을 오늘날 임종에 임한 이의 입으로부터 들을 수 있을까? ... 자신의 경험은 이렇다고 나열하여 젊은이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다는 따위의 생각을 하는 이가 아직도 있는 것일까?”


“경험(전달-가능)” “이야기하기(지불-가능)” “전달 가능한(함께-나누기-가능한)”

법에 대항하는 문학(비평)의 언어 : 법의 지배, 신화적 폭력, 희생을 요구, 아랫세대가 윗세대에게 ‘빚지고 있음’을 반복 / 윗세대가 아랫세대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전달하여 함께 나누어 형성하는 ‘경험’, 삶의 형식 자체

6.

‘비평’=‘비판’=‘한계 영역’에서의 사유, “(폭력) 비판이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역사철학), “현재와 더불어 사라지려 하는 과거의 복원할 수 없는 이미지”(기억),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 것(역사철학), 비판=비평이란 역사를 거슬러 기억의 이미지를 붙잡는 일.

신화가 법의 지배를 알리는 이야기 형식, 즉 하나의 문학 형식이라면, 벤야민의 비평 언어는 그것을 탈구축하는 또 하나의 문학 형식이다. 법과 문학의 언어는 이렇게 서로 얽혀 있으면서도 섞이지 않는 모호한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슈미트는 이 지대를 법의 언어 속으로 완전하게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 지대를 공백 상태로 남겨둠으로써 신화적 언어로부터 비평의 언어를 구출하려 했다. 아마도 문학의 가능성이란 이 지대를 법의 언어와 신화로부터 탈환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공중캠프

2016.12.01 16: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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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종말론 사무소는 왜 지속되어야 하는가?]

기 드보르, ‘분리’separation : 현재 자본주의 아래에서 삶이 언제나 분리된 채로 있다. 분리된 삶을 온전한 삶으로 통합하려 했다.

맑스, 소외Entfremdung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 자연의 대상화, 법칙화. 인간의 말은 사물이나 현상과의 일회적 마주침 속에서 발화된 영적 음성의 가치를 상실한다. 오히려 말은 번개나 폭설이나 태풍이나 지진 등을 정령이나 신이나 과학 지식에 의거해서 이해하고 지배하는 매개체가 된다. 사물이나 현상과 한없이 가까웠던 말은 지시 대상과의 인접성을 상실하여 기호의 차이로 구성되는 매끄러운 질서로 ‘랑그’화되는 것이다.

운명의 굴레 – 출구 없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출발점으로 전유

벤야민, 아우라 : ‘아우라 상실의 경험 불가능성’, 재현 불가능성으로서만 경험되는 시공간의 향취, 사진이나 영화가 ‘거기 있었던 찰나의 향취’를 포학하여 재현해낼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문제화. 소외론은 아우라가 예전에는 실제로 있었고 회복해야 한다는 사유로 이어진다. 물신론은 잘못된 사물 속에서 아우라를 보려는 환상을 깨려 한다. 소외론이나 물신론이나 아우라가 반드시 존재하고 언젠가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다. 벤야민은 원천적 상실의 경험으로서의 아우라를 통해 인간과 세계의 온전한 상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다만 지금이 무언가를 상실한 상태임을 경험 가능할 뿐임을 설파한다.

아감벤, 『열림』 : 구원된 인간은 어떤 형상일까? 그것을 알 길은 없다. 단지 구원은 상실된 상태로서의, 소외된 상태로서의, 분리된 상태로서의 인간 삶과 관계한다는 사실 외에 인간에게 주어진 지식이나 계획은 없다.

벤야민, 아감벤의 ‘구원’과 드보르의 ‘분리’ : 애초에 드보르의 난제에 답은 없다. 그 답이 최종적 정답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드보르는 하나의 정답을 몸소 살았다. 답이 없다는 정답을 말이다.

종말론 사무소의 안건은 상실과 소외와 분리의 경험을 말소하고 은폐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이의 제기라 할 수 있다. 이것이 1991년 5월 언저리의 거리 주변을 배회한다고 프롤로그에서 말한 까닭이다. 정작 안건에서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거리 어디에선가 상실과 소외와 분리의 경험이 말소와 은폐의 문턱을 넘어 망각의 구멍 속으로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이 망각의 구멍은 민주화의 이름으로, 성장의 이름으로, 풍요의 이름으로, 진보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장치였다. 1991년 5월 이후에 펼쳐진 일은 인간의 운명, 즉 원천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것으로서만 경험되는 상실과 소외와 분리를 소외론과 물신론으로 환원하여 더 나은 미래(진보와 성장)라는 미명하에 망각한 광경이었던 셈이다.

김소진은 그런 광경을 목도하면서 밥풀때기와 개흘레꾼을 소환하여 인간의 해방, 즉 구원이란 결국에는 상실과 소외와 분리를 상실과 소외와 분리 그 자체로 경험함으로써 열리는 삶의 지평임을 드러내 보였다.

일련의 물음에 대한 답을 공백으로 남겨두는 일, 그것 없이는 해방도 구원도 불가능하다는 사실, 아니 해방과 구원을 참칭당해 박탈당한다는 사실, 그것이야 말로 종말론 사무소가 문을 닫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그것만이 인간의 사유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확보하는 일, 그것이 통치가 되어버린 정치의 자리를 되찾는 일이다. 무언가를 산출하고 집행하여 성취하는 언어가 아니라, 상실과 소외와 분리의 삶에 머무르며 신음하는 언어, 이 책이 시론적으로 제기한 여러 안건들이 그러한 언어의 연쇄로 이어지길 기대하며 길었던 종말론 사무소의 회의를 여기서 일시 정회한다.

공중캠프

2016.12.06 18: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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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http://nomadist.tistory.com/entry/%EC%B9%BC-%EC%8A%88%EB%AF%B8%ED%8A%B8-%EC%9E%85%EB%AC%B8-%EA%B0%95%EC%9D%98-1%EA%B0%95-%EC%B2%AB-%EB%B2%88%EC%A7%B8-%EB%B6%80%EB%B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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