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공중캠프

2017.09.29 10:39

[크리틱] 서동진, 러시아혁명 백주년을 위하여


이제 몇 시간을 더 셈하면 2017년이라는 새해가 들이닥칠 것이다. 보신각종을 타종하고, 새해가 밝았음을 축하하는 몇 마디 들뜬 말들을 들을 것이다. 그러곤 다시 심드렁하게 새해가 아닌 또다시 찾아온 오늘 속으로 묵묵히 들어갈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시간은 이런 것이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오늘이란 시간의 세계. 오늘날 시간이 처한 운명을 간략히 보여주는 것은 주식시세와 환율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시간을 통해 거래한다. 수십년 전의 주가나 환율은, 역사학자나 경제사가 몇을 빼곤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서는 역사적 시간은 사라지고 다만 지금이란 순간, 무한히 작게 축소된 오늘이 중요할 뿐이다. 지금 살 것인가 팔 것인가 아니면 더 가지고 있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데 고려되는 시간은 지금일 뿐이다. 이는 한 세기 전 겪고 느낀 시간과는 다를 것이다.

지난 세기의 시간은, 마냥 선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와 미래라는 이름으로 시간의 범위를 벌리고 그 속에서 어제의 결과로 또 내일의 기획으로 경험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집단의 이름으로 혹은 모두의 이름으로 그렇게 시간을 겪고 집행할 때, 그에 붙여준 이름은 혁명이었다. 오늘날 혁명은 평온하고 정상적인 정치를 중단시키는 병적인 현상으로 치부되는 듯하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정치가 내건 목표는 언제나 혁명이었다. 식민지배와 내전, 분단으로 이어진 역사가, 혁명을 둘러싼 갈등의 역사가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을까. 또 그것은 여기 대륙 끝에 자리한 작은 나라의 사태가 아니라 세계적인 사태였던 것이 아닐까. 내년은 그러한 세기의 시작을 알렸던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정치는 미래의 세계를 창설하는 것이라는, 지금은 흐릿해질 만큼 흐릿해진, 시간으로서의 정치, 정치로서의 시간을 기약했던 사건이, 러시아혁명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감히 세계사적 혹은 보편사적 사건이라고 할 만한 그 사건을 기억할 기력이 우리에겐 없는 듯하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따위 혁명이란 악몽 혹은 미친 꿈은 이미 결산되었다고, 그것은 완벽한 실패로 판정되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리고 더 이상 무슨 뜻인지 모르게 된 민주주의라는 수수께끼 같은 개념을 엄호하고, 인권을 보호하는 일에 정치의 소임을 묶어두어야 한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를 미래로부터 떼어놓는 일일 뿐이다. 미래를 다루는 일에서 벗어난다면 정치는 따분한 행정업무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물론 많은 정치인들은 미래를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미래는 고작해야 점성술사가 말하는 것 같은 예언, 이를테면 4차 산업혁명, 인구절벽, 성장률 하락 운운의, 그저 그렇고 그런 예측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과 같은 현실이 지속된다면 도래할 결과들을 합산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미래라기보다는 현재의 후유증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며칠 뒤면 도래할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기꺼이 기억할 이들은 아마 희박할 것이다. 그럴수록 발터 베냐민이 말했던, 미래가 위험해지면 과거도 위험해지고 말 것이라는 쓰라린 경구가 머릿속을 맴돈다. 미래가 없다면 과거는 그저 골동품 수집가들이나 관심을 기울일 시간으로 전락한다. 미래를 살리려면 기억 역시 되살려야 한다. 100년을 맞이한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일은 미래라는 낱말을 덮고 있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일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새해란 것은 오늘치의 시간들을 쌓아놓은 시간의 자루가 더 이상 아닐 것이다.

서동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한겨레, 2016.12.30]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67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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