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공중캠프

2017.09.30 16:59

[서평] 양돌규, 김진숙 쩜 에이치더블유피 파일을 만들었던 이유


옛날이야기다. 김진숙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건 고등학생이었던 1990년대 초입이었을 것이다. 부산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어떤 분이 그분을 일컬어 ‘한국 조선산업 최초의 여성 용접사’라 했고 난 용접사가 그 무슨 항공기 조종사쯤 되는 것처럼 멋있어 보였다. 그 당시 내가 아는 ‘용접사’라고는 길을 지나치며 본, 불꽃 튀는 철공소에서였고 한참 들여다보면 눈이 먼다는 섬광의 주인공은 늘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서부영화의 총잡이처럼 허리에 용접봉 뭉치를 꽂은 가죽 벨트를 하고 여성이 그런 거칠고 위험하기까지 한 일을 한다는 걸 상상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늘 편견보다 앞서가고 그래서 굴러갈 수 있나 보다.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조선, 자동차, 중장비, 광업 등 중공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1992년 울산의 직업훈련원에서 쇠를 깎는 선반 일을 처음 배우던 시절, 이제 막 노동현장에 온 나를 이따금씩 돌봐주던 선배 부부가 있었다. 당시 그분들은 갓 결혼해 신혼 살림을 꾸리고 계셨는데, 혼자 자취를 하는 나를 긍휼히 여겨 아나고며 광어며 히라스며 서울에서는 잘 알지도 못했던 활어의 세계에 입문시켜 주었다. 술이 한 순배 돌자 형님은 예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공고를 막 졸업하고 현대중공업에서 용접을 하던 때였는데 비계를 타고 건조 중인 배 바깥에서 용접을 하고 있노라면 미포만의 겨울 바닷바람에 얼어붙은 철판에 손이 쩍쩍 달라붙어 자칫하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었다는 ‘노동의 모험담’ 같은 것들이었다. 발을 헛딛어 족장 바깥 수십미터 아래 도크에 추락해 죽거나 또는 크레인의 전자석에서 전기적 이상으로 철판이 떨어져 그 아래 깔려 죽거나 하면 사람의 시신을 삽으로 긁어내 큰 통에 담고 다시 크레인에 걸어 올렸다는 얘기 같은 건 덤이었다. 그때 떠올렸던 분은 다시 김진숙이었는데, 머릿속에 떠오른 수식어는 ‘한국 조선산업 최초의 여성 용접사’에서 ‘대한조선공사 해고자’로 바뀌어 있었다. 현대중공업이나 대한조선공사, 그러니까 지금의 한진중공업이나 무간지옥 같은 노동 현실은 매한가지였을 거고, 걸핏하면 사람이 죽어 나가는 죽음의 공장에서 투쟁 말고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당대에 그분 역시 해고노동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싶었다.

그런 얘기를 나누던 활어의 세계로부터 새마을 연탄보일러를 때던 달세 5만 원짜리 울산 성내삼거리의 단칸방으로 돌아와 보면 이곳에도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내가 세든 방 옆과 앞에는 그런 방이 한 예닐곱 개 있었는데 맞은편에는 나보다 두세 살 위로 보이는 여성 노동자들이 살고 있었다. 양말이나 속옷 등속을 빨던 마당 수도꼭지에서 말을 튼 옆방 이웃은 그녀들은 현대중공업 하청에 나가는 용접사들이라고 귀띔했다. 여성 노동자라고 하면 서울 구로의 전자 쪽이나 대구, 구미의 화학섬유 공장을 떠올리던 때였지만 ‘중공업의 그녀들’은 도처에 있었고 그런 그녀들을 마주칠 때마다 전설 같던 그 이름 김진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도 다 옛날이야기다.

시간이 흐르고 2006년 즈음해서 후마니타스 출판사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나, 김진숙 씨 이야기를 꺼낸 안 편집장으로부터 그의 원고를 모아 책을 내고 싶다고 했다. 아뿔싸! 내 노트북에도 그녀가 썼던 글들을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편집해 둔 ‘김진숙 쩜 에이치더블유피’ 파일이 있었다. 안 편집장이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갔나 싶었다. 내가 출판사를 차리게 된다면 꼭 책을 내야겠다고 아껴 뒀던 필자 중의 한 명이 김진숙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안 편집장으로부터 원고를 모은 파일을 받아 부를 나누고 글 배치를 이렇게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며 살펴보니 나보다 더 많은 글을 꼼꼼하게 모아두기까지 했더라. (출판사를 차린 것도 아니었던 나로서는) 아깝지만 김진숙 씨를 ‘단념’해야 했고 (역시 김진숙 씨에게는 죄송스러운 이야기겠지만) 후마니타스에 ‘양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진숙 씨께서는 책을 낼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사를 밝혔고 편집장은 혼자 애면글면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이런저런 조언을 주었는데 그게 도움이 되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소금꽃나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007년 난 공교롭게도 15년 만에 울산에 내려가 있게 됐는데 마침 김진숙 씨의 강연이 열렸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20주년 기념 사업이었다. 근로자복지회관 입구에서 50여 권을 완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생생하긴 한데, 이것도 10여 년 전 옛날 얘기다.

세대의 순환은 계절처럼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작년, 민주노총이 20주년 기념 행사를 했고 내년이면 1987년 789노동자대투쟁이 30주년을 맞게 된다. 현대중공업, 대우자동차 등 노동자대투쟁을 주도했던 대공장 조합원들이 매년 수천 명씩 정년퇴직으로 공장 문밖을 나서는 게 작금의 상황이다. 활어 같던 그 세대의 노동자들은 백무산 시인의 시구처럼 국가로부터 ‘산업전사’로 호명되던 시간을 넘어 ‘노동전사’로서 투쟁했지만 아직 전사도 뭣도 아닌 미생의 후속 세대들을 뒤로하고 있다. 김진숙이 떠나야 했던 죽음의 조선소도 여전해 올해 2월 울산에서는 4톤의 철구조물에 깔린 노동자가 사망하는 산재사고가 발생했다.

2003년 김주익 열사의 추도사로 김진숙은 널리 알려졌고 2007년 『소금꽃나무』가 출간됐으며 2011년 그녀는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올라 309일을 싸웠다. 하지만 난 그녀의 이름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1980년 신군부의 쿠데타로 압살당한 이후 다시금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터져나오던 시절을 예비하던 그 모든 노동자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1990년 ‘전노협’을 건설했고 1996년 ‘민주노총’을 세웠으며 1996-1997 총파업을 조직했다. 그 세대가 잘나고 잘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조운동을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다. 지금의 분절된 노동시장, 비정규사회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따라서 민주노조운동 내에도 그 책임이 있지만 이 운동이 그러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지금 같은 상황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김진숙이 쓴 자신의 노동사를 통해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어떻게 건너가고 넘어가야 할지를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1980년대를 넘어섰던 이 노동의 선배들이 갖고 있던 문제의식, 실천 의지, 치열함, 삶과 주위 사람들을 대하던 태도 같은 것들이 한 시대를 건너게 했다. ‘충분치 않다?’ 물론이다. 하지만 강화에서 가출한 십대 소녀 김진숙이 35년이 흘러 여기까지 멀리 왔다. 그건 우리 노동자들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웅변한다. 김진숙이 올랐던 85호 크레인은 도크에 추락사해 죽기나 하던 우리 노동자들이 어디까지 오를 수 있는지, 뿔뿔이 흩어져 각개격파 당하던 이들이 희망이라는 이름의 버스를 타고 어디까지 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 상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통을 이어가며 달려야 하는 이 길은 김진숙의 말처럼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의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선배 세대들은 아직 짱짱하다. 옛날 사람도 아니고 옛날이야기도 아니고 옛날 꿈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 되고자 하는 노예의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은가. 여전히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이 있다. 이것이 내가 김진숙 쩜 에이치더블유피 파일을 만들었던 이유다.

양돌규 레드북스

[후마니타스 블로그, 2017.1.30]
http://humabook.blog.me/220922626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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