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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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7 15:32

[밑줄]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

1. 생태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과 생태주의 운동의 발전

2. 제임스 오코너의 “이차모순론”은 생태문제에 대해 맑스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시도였지만, 생태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협소화시켰으며, 사회주의와 생태주의를 병렬적으로 결합시키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요컨대 오코너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자본의 과잉생산(over-production)과 경제위기, 그리고 위기가 야기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보다 명백하게 사회적인 따라서 잠재적으로 사회주의적인 형태들로의 재구조화 과정에 관한 전통적 맑스주의 이론”과 병렬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및 생산력과 생산조건들 사이의 모순, 자본의 과소생산(under-production)과 경제위기, 그 결과 역시 위기가 야기하는 생산조건들과 사회적 관계들의 보다 명백하게 사회적이고 따라서 잠재적으로 사회주의적인 형태들로의 재구조화 과정에 관한 “생태주의적 맑스주의” 이론”을 제기하였다. 즉 오코너에 따르면, 전통적 맑스주의의 설명과는 별도로 기본모순과 경제위기의 원인, 투쟁의 주체와 내용이 다른 “하나가 아닌 두 가지의 사회주의로의 길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태문제에 대한 오코너의 설명은 이러한 이중적 설명구조 때문에 “이차모순(second contradiction)론”이라고 칭해졌다.

1) 오코너의 핵심개념인 생산조건은 맑스주의적 범주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었고, 이에 기초하여 생산관계, 생산력간의 모순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생산관계 및 생산력 대 생산조건의 모순이라는 잘못된 이론을 가공해내었다.

2) 오코너는 자본주의의 경제위기를 낳는 것으로 생태위기를 설명하려고 하여, 오히려 생태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협소화시켰다.

3) 오코너는 생태문제를 경제위기와의 관련 속에서만 바라보면서 문제를 협소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의 이차모순론은 사회주의노동운동과 생태운동을 병렬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면서 이 둘의 기계적 결합을 넘지 못하였고 결국 실천 상의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3. 맑스주의적 생태론에 관한 최근 성과들은 맑스주의가 생태문제에 대해 풍부한 설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의 입장은 생태문제가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의 문제라는 기본적인 사상적 틀을 제공해준다.

“동물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서도 유적 생활은 육체적으로는 첫째로 인간이 (동물과 마찬가지로) 비유기적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점에 그 본질을 두고 있는바, 인간은 동물보다 더 보편적이며, 그가 그것에 의해 생활하는 비유기적 자연의 범위도 동물보다 더 보편적이다. … 인간이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자연은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과의 지속적인 [교호] 과정 속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자기 자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 존재로서 그리고 살아 있는 자연 존재로서 자연적 힘들·생명력들을 갖추고 있는 활동적 자연 존재이며, 이 힘들은 그의 안에 소질과 능력, 충동으로 존재한다; 한편 인간은 자연적·육체적·감각적·대상적 존재로서 식물이나 동물과 마찬가지로 시달리고, 제약되고 한계 지어진 존재이다. 그의 충동의 대상들이 그의 밖에, 그로부터 독립된 대상들로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 대상들은 그의 욕구의 대상들로서 그의 본질적 힘들을 실증하고 확증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본질적 대상들이다. 인간이 육체를 지니고 자연적 힘들을 지니고 살아 있고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들을 자신의 존재의 대상으로, 자신의 생활 표현의 대상으로 가진다는 것 혹은 그가 오직 현실적인 감각적 대상들에만 자신의 생활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 배고픔은 자연적 욕구이다; 그러므로 배고픔은 충족되고 가라앉혀지기 위해 그것 바깥에 있는 자연, 그것 바깥에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배고픔은 그것을 채우고 그것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그것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내 육체의 욕구이다. 식물이 생명을 일깨우는 태양의 힘, 태양의 대상적인 본질적 힘의 표현으로서 태양의 대상이듯이, 태양은 식물의 대상이며 식물의 생명을 확증하는 필수 불가결한 대상이다.”(맑스,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맑스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과 자연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대안사회로서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로서,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서 존재하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충돌의 참된 해결”이라고 보았다. 이는 맑스가 인간과 자연을 분리된 관계로서 보지 않았으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구성하는 가운데, 이를 통한 인간과 자연의 공존, 자연적,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발전을 전망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대사 관계와, 이를 매개, 규제, 통제하는 매개체로서 노동 규정

“생물학적, 생태학적 분석 안에서 물질대사 개념은 1840년대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의미 확장이 되었으며, 유기체들과 그들의 환경들의 관계에 대한 체계이론적 접근에서 중심적 범주로 사용되어 왔다. 이것은 물질대사 교환의 복잡한 과정에 주의를 돌리는데, 이 과정에서 유기체(혹은 일정한 세포)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물질과 에너지를 끌어와서, 이것들을 다양한 물질대사 반응을 통해 성장에 필요한 단백질 및 다른 여러 합성물 등의 구성요소들로 전환한다. 물질대사 개념은 또한 유기체들과 그들의 환경 사이의 이러한 복잡한 상호교환을 지배하는 조절과정들을 언급하는데 이용된다. 오덤(Odum)과 같은 지도적 체계생태학자들은 단일 세포에서 시작하여 생태계로 끝나는 전생물학적 수준과 관련하여 “물질대사”를 채택한다.”(존 벨라미 포스터, “물질대사의 균열에 관한 맑스의 이론”)

이제 맑스가 실제 물질대사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보도록 하자. 우선 맑스는 자본론 1권, 1장에서 상품에 투하되는 노동의 이중성을 논하면서, 상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추상적 인간노동”의 측면을 제거하고,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유용노동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의 노동, 유용노동으로서의 노동은 사회 형태와 무관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따라서 인간생활 자체를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적 필연성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맑스가 인간과 자연사이의 관계를 물질대사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즉 인간본성: 역자)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맑스, 「자본론」 1권, 7장)

3) 19세기 자본주의 농업위기와 이에 대한 맑스의 분석

“자본주의적 농업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를 약탈하는 방식상의 진보일 뿐 아니라 토지를 약탈하는 방식상의 진보이며, 일정한 기간에 토지의 생산력을 높이는 모든 진보는 생산력의 항구적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다. 한 나라가 대공업을 토대로 발전하면 할수록[예컨대 미국처럼], 이러한 토지의 파괴과정은 그만큼 더 급속하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도를 발전시킨다”(맑스, 「자본론」 1권 15장)

“소비의 폐물은 인간의 자연적 배설물, 누더기 형태의 의복 등을 가리킨다. 소비의 폐물은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데, 그것의 이용에 관한 한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막대한 낭비가 일어나고 있다. 예컨대 런던에서는 450만 명의 분뇨로 템스 강을 오염시키는 것보다 더욱 좋은 처리방법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큰 낭비이다.”(맑스, 「자본론」 3권 5장)

“인구의 도시집중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회의 역사적 동력을 집중시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토지 사이의 신진대사를 교란한다. 즉, 인간이 식품과 의복의 형태로 소비한 토지의 성분들을 토지로 복귀시키지 않고, 따라서 토지의 생산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원한 자연적인 조건이 작용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은 도시노동자의 육체적 건강과 농촌노동자의 정신생활을 다 같이 파괴한다.”(맑스, 「자본론」 1권 15장)

“대규모 토지소유는 농업인구를 점점 감소시켜 최소한도로 축소시키고 점점 증대하는 공업인구를 대도시에 밀집시킨다. 이리하여 대규모 토지소유는 생명의 자연법칙이 명령하는 사회적 신진대사의 상호의존적 과정에 회복할 수 없는 균열이 생기도록 하며 지력을 탕진하는데, 이것은 무역에 의해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 타국에서도 발생한다[리비히(Liebig)].”(맑스, 「자본론」 3권 47장)

4) 생태문제 해결에 대한 맑스의 전망: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합리적 규제와 인간의 완전한 발전

“자연에 대한 우리 인간의 승리에 대해 너무 득의양양해 하지는 말자. 우리가 승리할 때마다 자연은 매번 우리에게 복수한다. … 따라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상기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자연을, 마치 정복자가 타민족을 지배하듯이, 자연 바깥에 서 있는 어떤 자처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는 살과 뼈, 머리까지 포함하여 전적으로 자연에 속하는 존재이며, 자연의 한 가운데에 서 있으며, 우리의 자연에 대한 지배의 본질이 모든 다른 피조물보다 우수하게 자연의 법칙을 인식하고 이를 올바로 사용할 줄 아는 데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자연법칙을 하루하루 더 잘 이해해 가고 있으며, 자연의 관행적인 과정에 대한 우리의 침범이 가져올 가깝고 먼 장래의 결과들을 인식해 가고 있다. 특히 금세기에 이루어진 자연과학의 엄청난 진보의 결과 우리들은 이제 최소한 우리의 일상적인 생산행위가 낳을 비교적 먼 장래의 자연적 결과들을 알게 될 것이며, 이로써 이 결과들을 지배할 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진전될수록 인간은 다시 스스로를 자연과 하나로서 느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자연과 하나임을 알게 될 것이며, 저 불합리한 반자연적 관념 … 정신 대 물질, 인간 대 자연, 영혼 대 육체라는 대립관념은 더욱 설 자리를 잃어가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통제를 실현하는 데에는 단순한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에는 종래의 생산양식과 이와 더불어 현재의 전 사회질서를 완전히 변혁하는 것이 필요하다.”(엥겔스, 「자연변증법」)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된 신진대사의 상황을 파괴함으로써, 신진대사를 사회적 생산을 규제하는 법칙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완전한 발전에 적합한 형태로 체계적으로 재건할 것을 강제한다.”(맑스,「자본론」 1권 15장)

“이 영역[필연의 왕국:필자]에서 자유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함으로써 그 신진대사가 맹목적인 힘으로서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신진대사를 집단적인 통제 아래에 두는 것, 그리하여 최소의 노력으로 그리고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적합한 조건 아래에서 그 신진대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아직 필연의 왕국이다. 이 왕국을 넘어서야만 진정한 자유의 왕국―즉 인간의 힘을 목적 그 자체로서 발전시키는 것―이 시작된다.”(맑스,「자본론」 3권 48장)

위 인용문의 핵심적 내용은, 맑스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과정의 균열을 회복하는 것과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사회주의의 전망을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로 사고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회주의적 전망의 구체적 내용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이윤 추구,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인 생산 등을 위해 자본이라는 대상이 주체인 인간을 종속시키는, 전도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처럼 인간이 사회의 운영과 통제에 대해서 소외되어 있는 상황, 인간의 노동이 소외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자본의 이윤추구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질대사의 균열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이 관계를 맺는 과정을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직접 통제할 때에만 물질대사의 균열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 개개인의 다방면에서의 발전이 진행될 때에만 물질대사의 균열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의 발전과 이 지식을 올바로 이용할 수 있는 인간본성의 발전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의 맹목적 힘에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지식이 발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자연과 공존하는 관계를 맺는데 이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이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해가야 한다.

또한 이는 인간이 자연과 맺고 있는 노동의 형태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인간발전과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맑스는 인간노동이 자연(nature)을 자신의 목적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과정인 동시에 스스로의 본성(nature) 역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보았다. 여기서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노동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는 인간의 발전과 긴밀한 연관이 있음은 분명하다.

http://programto.net/wordpress/?p=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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