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26
: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강독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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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20년 1월 9일 ~ 3월 26일 (매주 목요일) door open 19:00 / alcohol talk 19:30 ~ 22:00
(1/23 휴강, 세미나 진행 상황에 따라 일정이 조정될 수 있습니다.)

* 장소: 공중캠프 (마포구 와우산로 150 2층)
* 진행: 최 원 (<라캉 또는 알튀세르> 저자)
* 교재: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새물결)
* 회비: 무료 (공중캠프 술/음료 주문)


[참가신청 방법] 

최원 님께 이메일( wonchoi68@hotmail.com ) 혹은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주세요. (신청 마감)

(2020년 1월 9일 첫 모임 때는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될 예정이고, 교재의 1장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Le Seminaire de Jacques Lacan.jpg



라캉의 열한 번 째 세미나인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1964)은 라캉이 국제정신분석협회 및 프랑스정신분석협회에서 파문 당하고, 그 동안 세미나를 진행했던 생트 안느 병원에서도 쫓겨나, 파리 고등사범학교로 옮겨와 처음으로 진행했던 세미나로, 프랑스 인문학의 최고 지성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선보이고 자신이 생각하는 정신분석학 무엇인지를 제시했던 세미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에 대한 그의 근본적 생각이 체계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3개월 동안 이 세미나를 해부하고 퍼즐을 맞추듯이 재구성하여 이 텍스트에 대한 거의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라캉에 대한 해설서나 2차 문헌은 넘쳐 나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라캉에 대한 오해에 더 기여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세미나는 우리가 함께 라캉의 진수를 맛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세미나를 마친 시점에서 우리는 라캉의 다른 텍스트들을 마구 누비고 다닐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강독 세미나를 마친 후 지속적으로 세미나 모임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공부 주제와 세미나 방식 등에 대해서는 서로 논의하여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오래 동안 이어질 지적 우정과 배움의 기쁨을 나누는 이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 자크 라캉 (Jacques Lacan, 1901.4.13 - 1981.9.9)

라깡.jpg


1903년 4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처음에는 철학에 몰두했으나 이후 정신병리학 등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0년 파리 의대에 입학했고, 1932년 「인격에 관한 편집증적 정신병에 대하여De la psychose paranoiaque dans ses rapports avec la personnalite」로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 자격을 얻은 이후로 평생을 정신분석가로 활동했다. 대학시절부터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했으며, 1923년경 프로이트의 이론을 처음 접하게 된다. 파리의 한 유명한 서점에서 열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최초 공개 낭독회에 참석하거나,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헤겔 강독 모임에 참가하는 등 정신분석 외에도 20세기의 다양한 지적 흐름과 교류를 계속했다.

여기서 라캉의 박사학위 논문이 처음부터 프랑스 정신분석 1세대에게 외면당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4년 파리정신분석협회SPP 회원이 되고, 처음으로 1936년 마리엔바트에서 열린 제13차 국제정신분석학회IPA 총회에 참가하여 ‘거울단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지만, 회장인 어니스트 존스의 제지로 중단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이후 활동과 관련해서도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프로이트 이론에 바탕을 둔 학위논문이나 ‘거울단계’ 논의 등에서 드러나는 라캉의 견해는 한마디로 ‘무의식은 하나의 언어활동으로서 구조화되어 있다’는 테제로 집약된다. 주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사이에 타자가 되어 ‘타자의 욕망’을 가지고 자기를 재발견하려 한다. 이 타자로의 자기소외는 주체의 형성에 있어서 구성요건이며, 주체는 처음부터 분열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타자의 언어로의 관여를 정신분석 이론과 실천의 근원에 둔 그의 입장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정신생리학이나 자아심리학에 흡수하고자 하는 이른바 주류 정신분석과는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라캉의 주도로 1951년부터 매주 사적으로 열리던 세미나는 그가 SPP로부터 ‘파문(라캉 자신의 표현)’당한 이후 1953년부터 파리 생탄 병원에서의 공개적인 세미나로 전환되고, 그 뒤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이어진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시기 라캉의 입장은 마치 소피스트들에 맞서 제자들에게 산파술을 가르치던 소크라테스의 입장과 흡사한 것이었다. 같은 해 라캉의 가장 유명한 글 중 하나인 ‘로마 담화’가 나온 것 또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가 독자적으로 고안한 ‘단시간의 세션’이라는 정신분석 실천의 방법을 둘러싼 갈등으로 라캉은 동료들과 함께 SPP를 떠나 SFP(프랑스정신분석학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960년대에 IPA 내에서의 SFP 지위에 관한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그와 그의 동료들은 제명된다.

1963년에는 파리 프로이트 학교L'Ecole Freudienne de Paris(EFP)를 설립하고, 알튀세르와 레비-스트로스의 후원 하에 고등실천연구원EPHE이라는 프랑스 지성계의 최고 기관에 새로운 ‘기지’를 마련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의 파란 많은 지적 · 실천적 여정은 거듭되었고, 마침내 1981년 파리에서 “고집스러웠던 저는 이제 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남겨진 책으로는 그가 쓴 30여 편의 논문을 엮은 『에크리Ecrits』(1966)가 있으며, 40여 년간 이어온 라캉 세미나Seminaire를 책으로 펴내는 작업은 사후에도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자크-알랭 밀레Jacques-Alain Miller의 책임 하에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사상은 EFP 해산 이후 다시 설립된 프로이트 대의 학교Ecole de la Cause Freudienne(ECF)에서, 그리고 밀레,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등이 참여하는 매체 『라캉주의자의 잉크lacanian ink』 등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출처: 알라딘)



* 진행: 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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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연구자.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캠퍼스 철학과를 졸업한 뒤에 뉴욕의 뉴스쿨대학교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시카고의 로욜라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라캉 또는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반폭력의 정치를 위하여』(2016)로 제9회 일곡유인호학술상을 수상했으며,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2016), 『알튀세르 효과』(2011), 『무엇이 정의인가?』(2011) 등을 공저했고, 워런 몬탁의 『알튀세르와 그의 동시대인들: 철학의 영속적인 전쟁』(근간),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 맑스 전과 후의 정치와 철학』(공역/2007)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현대 정치철학과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와 번역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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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Vino Veritas! (술 속에 진리가!)" [알콜토크]는 맥주 한 잔 하면서, 느슨하고 흐릿한 기분으로 특정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비정기 프리 토크 이벤트입니다. 입과 귀, 앎과 삶이 분리된 강의/세미나,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내용과 과정, 학연/가방끈주의자들의 허세와 먹물질 등을 지양합니다. 쉽게 바뀌지 않는 오래된 습관에 절망하면서, 새로운 리추얼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입니다. (물론, 술을 원하지 않는 분은 소프트 드링크(Non-Alcoholic Drinks)를 마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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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ef History of "알콜토크"]

vol.1 2013.03.09 - 후쿠시마와 우리
vol.4 2014.03.08 - 후쿠시마와 밀양
vol.5 2015.05.02 - 세월호와 우리
vol.8 2016.01.31 - <옥상자국>
vol.12 2016.03.11 - <맨발의 겐>
vol.20 2017.03.11 - <핵의 나라 2>
vol.21 2017.07.28 - <전공투>


공중캠프

2019.12.09 10:40:24
*.223.30.211

[참가신청 오픈]

https://marxpino.tistory.com/260
https://www.facebook.com/won.choi.98/posts/3405996122774193

공중캠프

2019.12.09 12:00:32
*.223.30.211

"make revolution"?
https://youtu.be/6aqGYYBwKbQ

공중캠프

2019.12.09 22:09:40
*.131.236.200

"라캉 강독 세미나 신청하신 분들이 20명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지인들 통해 결합하실 분들도 더 있을 수 있어서 더 이상 받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신청을 마감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최원 님)

공중캠프

2019.12.31 18:49:15
*.131.236.200

「대위 선율」

/ 아라공

네 모습은 헛되이 나와 만나니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네. 여기서 나는 네 모습을 비출 뿐
네가 나를 향해 돌아선다고 해도 내 응시의 벽에서
네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네가 꿈꾸던 너 자신의 그림자

나는 거울과도 같은 불행한 존재
비출 순 있지만 볼 수는 없다네.
나의 눈은 마치 거울처럼 텅 비어 있고 마치 거울처럼
너의 부재에 홀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네.

(『엘자에 미친 남자』, 1963)


Contre-Chant

Vainement ton image arrive à ma rencontre
Et ne m'entre où je suis qui seulement la montre
Toi te tournant vers moi tu ne saurais trouver
Au mur de mon regard que ton ombre rêvée

Je suis ce malheureux comparable aux miroirs
Qui peuvent réfléchir mais ne peuvent pas voir
Comme eux mon oeil est vide et comme eux habité
De l’absence de toi qui fait sa cécité.

– Louis Aragon, Le Fou D'Elsa (1963)


"언제가 할례식에 초대받았을 때 안-낫지는 이렇게 말했네."

(pp.33-34)

공중캠프

2020.01.02 16:38:39
*.7.19.35

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1장. 파문

어떻게 해서 권한을 부여 받았는가?
순수하게 희극적인 요소
실천이란 무엇인가?
과학과 종교 사이
히스테리증자와 프로이트의 욕망


‘제가 어떻게 해서 이런 [이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는가?’ / 여기 계신 몇몇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진정 제 인생을 다 바쳤던 직무에서 물러났습니다. / 이번에 제가 처한 난처한 상황에 대해 묵묵히 침묵만 지키고 있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해주신 그분(페르낭 브로델)의 고매한 기품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고매함이란 단어야말로 저같이 피난민 처지에 있는 사람을 환대해준 분의 태도를 가리키기에 적격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 이 모든 것은 제 강의의 ‘기지(base)’, 장소적인 의미뿐 아니라 군사적인 의미에서의 기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11-13)

1

정신분석의 토대를 이루는 것에 관해 말하자면 제 세미나는 처음부터 그것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3)

분명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해선 몇 가지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 이 질문은 항상 박쥐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 이제 완전히 안에 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밖에 있다고도 볼 수 없게 된 것이지요. / 즉 제 수업이라고 일컬어졌던 것이 ‘국제정신분석협회’라 불리는 국제 조직의 소위 ‘집행위원회’로부터 검열을 당했다는 건데요. 전혀 평범하지 않은 검열이었지요. 결국 제 강의를 정신분석가의 자격 부여와 관련해선 ‘무효’로 간주하며 금지해버렸고, 그 금지를 제가 속한 정신분석협회가 국제정신분석협회에 가입되는 조건으로 제시했으니 말입니다. /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정신분석가 양성에 관한 한 제 수업이 ‘두 번 다시는’ 재개되지 않을 것을 보장할 때만 가입을 받아들인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 따라서 여기서 문제는 실로 다른 분야에서라면 대파문이라 불리는 것과 비견될 만한 것입니다. 그래도 그 용어가 사용되는 분야에서는 복귀의 가능성이 없이 그것이 선포된 적이 없었습니다. / 파문이 복귀의 가능성 없이 존재하는 곳은 오직 ‘유대 예배당(synagogue)’이라는 의미심장한 상징적 용어로 지칭되는 어떤 종교 단체뿐이며, 바로 스피노자가 그 대상이었지요. 묘하게도 프로이트 탄생 200년 전인 1656년 7월 27일에 스피노자는 ‘헤렘(kherem)’, 즉 대파문에 준하는 파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얼마 뒤 그는 ‘샴마타(chammata)’의 대상이 됩니다. 즉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다는 조항이 추가되었지요. / 여러분도 곧 아시게 되겠지만 제 생각에 그러한 사실[파문]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방향뿐 아니라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구조 때문에도 정신분석 실천에 대한 우리의 문제제기에 핵심적인 어떤 것을 끌어들입니다. (14-15)

저는 이 우회로에 담긴 어마어마한 희극적 차원에 속하는 무언가를 간과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 희극적 차원은 앞서 제가 파문이라 부른 수준에서 벌어졌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난 2년간 제가 처해 있던 상황에서 유래합니다. 즉 저는 다름 아닌 저의 동료나 제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제가 ‘거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 문제의 핵심은 과연 어떤 잣대에 의해, 분석가 자격을 부여하는 제 수업의 가치에 관한 양해가 다른 한편 그렇게 해서 취득되는 협회의 국제적인 자격과 맞교환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 제 생각에 이것은 오직 정신분석가에 의해서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인간의 존엄성이니 인권이니 하고 떠들어대는 것과는 정반대로 인간 주체가 거래의 대상이 되는 일이 그렇게 보기 드문 상황은 아닐 겁니다. (16-17)

그러나 분석을 통해 잘 드러나듯 주체의 진실은 이 주체가 주인의 입장에 있을 때조차 주체 자신이 아니라 대상 속에, 본성상 베일 속에 감춰져 있는 대상 속이 있습니다. 바로 이 대상을 불쑥 드러나게 하는 일이야말로 순수하게 희극적인 것의 기본이 되겠지요. / 특히 저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대한 산 증인이라는 위치에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 내부의 위치에서 저는 이러한 희극적 차원이 지극히 근거 있는 것임을 여러분에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분석적 관점에서 희극적 차원이 충분히 체험 가능한 것이며, 심지어 그러한 차원을 지각함으로써 그것을 뛰어넘게 되는 어떤 방식을 통해서도, 다시 말해 유머 - 유머란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희극적인 것에 대한 인정에 불과합니다 - 라는 관점에서도 충분히 체험 가능한 것임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17-18)

이러한 지적은 제가 정신분석의 토대와 관련해 제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토대’라는 말은 하나 이상의 의미가 담긴 중의적인 용어입니다. 이 말이 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는 점을 환기시키기 위해 굳이 카발라를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요. 카발라에서 그러한 방식은 정확히 pudendum(치부)과 동일시됩니다. ... 아마 여기서 토대는 ‘밑바닥[내막](dessous)’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겠지요. / 여기서 추문거리가 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우리는 ‘교육 분석’ - 정신분석에 관한 모든 출판물에서 아주 모호한 상태로 방치되어온 바로 그 실천 또는 그러한 실천의 단계 - 이라 불리는 것을 좀더 명확하게 파악하고, 또 그것의 목적과 한계와 효과를 조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이제 더 이상 pudendum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정신분석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기대해야 하는지를, 또 걸림돌이나 실패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18)

바로 이런 이유에서 저는 여기서 조금의 가감도 없이 [파문이라는] 한 가지 ‘사실’을 하나의 대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사실’의 윤곽과 함께 그것을 어떤 식으로 다룰 수 있는지를 좀더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사실’을, 여러분에게 넓은 의미에서 ‘정신분석의 토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지금 제가 논의해야 할 것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겁니다. 그 질문은 결국 ‘정신분석을 실천으로 정초짓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될 겁니다. (19)

2

실천이란 무엇일까요? ... 실천이란 그것이 무엇이건 상징적인 것을 통해 실재적인 것을 다룰 수 있도록 인간에 의해 의도된 행동을 가리키는 매우 포괄적인 용어이지요. 그 가운데 다소 상상적인 것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은 부차적인 가치밖에 없습니다. / 저는 제가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염두에 둔 두 가지 용어를 별다른 이행 과정 없이 소개하면서도 먼저 이렇게 단언하고 싶습니다. 제가 여기에, 이 강의실에, 이러한 장소에 이렇게 많은 청중 앞에 선 것은 저 자신에게 ‘정신분석이 하나의 과학인지’를 묻고 그것을 여러분과 함께 검토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 정신분석과 관련해 참조되는 또다른 것으로는 종교가 있는데, ... 종교와 과학, ... 정신분석은 우리가 두 용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조명해줄 수 있습니다. (19-20)

저는 탐구(recherche)라는 말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 개인적으로 저는 한 번도 저 자신이 탐구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 피카소의 말처럼 “저는 찾지 않습니다. 저는 발견합니다.” / 게다가 소위 과학적 탐구의 장에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두 개의 영역, 즉 탐구의 영역과 발견의 영역이 있습니다. / 특이하게도 이는 과학이라 규정될 수 있는 것에서 아주 잘 구획되어 있는 어떤 경계선(인간 과학/자연 과학)과 일치합니다. 여하튼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탐구와 종교적인 영역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미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를 찾으려 할 수도 없을 것이다.” / 인간과학에서는 ‘해석학적 요구’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모든 발견자의 발걸음 밑에서 불현듯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는 바로 탐구에 대한 요구입니다. 항상 새로우면서도 결코 다 헤아릴 수 없는, 그러나 다 자라기도 전에 발견자에 의해 베어질 위험이 있는 의미효과(signification)를 탐구하려는 요구이지요. / 많은 식자들이 해석학이 제시하는 바와 같은 의미효과의 발달 경로를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해석’과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1)

과학을 특징짓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대상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학은 적어도 ‘실험[경험]’이라 불리는 어떤 재생 가능한 차원의 조작에 의해 한정되어 있는 하나의 대상을 통해 규정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섣불리 단정하진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 대상은 특이하게도 과학이 진화함에 따라 변화를 겪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지적한다면 아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전술상으로라도 후퇴한 다음 다시 실천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실천이 하나의 장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우리는 만물박사라곤 할 수 없는 현대 과학자가 규정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실천에 의해 규정되는] 장의 수준에서가 아닌지를 자문해야 합니다. / 저는 모든 과학이 하나의 통일된 체계, 소위 세계라는 체계에 의거해야 된다는 뒤엠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과학의 나무가 하나의 줄기만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줄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21-22)

그러나 어떤 실천의 장으로 이해된 실험[경험]이라는 개념에만 머무는 것으로는 과학을 정의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그러한 정의는 가령 신비 체험[경험]에도 아주 훌륭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연금술은 결국 과학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즉 [연금술에서는] 조작자의 영혼이 지닌 순수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게 사태의 본질적인 요소였던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러한 지적은 부차적인 게 아닙니다. 정신분석이라는 연금술에서 분석가의 현존과 관련해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면서, 아마도 우리의 교육 분석이 추구하는 게 그런 것이 아니냐는, 더군다나 제가 최근 강의들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리고 극히 공개적인 방식으로 분석가의 욕망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저 핵심적인 지점을 겨냥해 이야기한 것도 그와 똑같은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니 말입니다. (23-24)

3

분석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선 분석가의 욕망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이 질문을 우리의 장의 경계선 밖에 내버려둬도 좋을까요? 과학, 가장 확실하다고 하는 유형의 현대 과학들에선 실제로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지 않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24)

농업은 과학인가 ... 이 질문에 대해 어떤 이는 그렇다고 대답할 테고, 또 어떤 이는 아니라고 대답할 겁니다. 이러한 예를 든 이유는 다름 아니라 여러분이 그래도 하나의 대상에 의해 규정되는 농학과 하나의 장에 의해 규정되는 농학을, 즉 농기술(agriculture)과 농과학(agronomie)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를 토대로 저는 하나의 확실한 차원, 즉 ‘공식화’의 차원을 등장시킬 수 있습니다. 공식화만으로 과학의 조건을 정의하기에 충분할까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짜 과학도 진짜 과학처럼 공식화될 수 있겠지요. / 정신분석에서 공식은 무엇에 관한 것일까요? 무엇이 대상의 미끄러짐을 초래하고 그것이 변주되게 만드는 걸까요?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정신분석 개념이라는 게 있을까요? 프로이트가 분석 경험을 구조화하기 위해 제안한 용어들이 마치 종교처럼 고수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 그러한 몸통, 버팀대, 기둥이 없다면 도대체 우리의 실천을 어디에 정박시킬 수 있을까요? 문제의 관건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들은 형성 중인 개념일까요? 발전하고 운동하는 개념, 재고되어야 하는 개념일까요? / 여전히 프로이트의 개념들을 이해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며, 그 개념들 중 대부분은 왜곡되고 변질되고 단편화되었고, 지나치게 난해한 개념들은 그대로 폐기되어버렸지요. 하나의 사례에서 이론의 변별적 특질을 찾아내 그것으로 왜 당신 딸이 말을 하지 않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신분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핵심은 ‘그녀가 말하게’ 하는 것이며, 이러한 효과는 변별적 특질을 참조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유형의 어떤 개입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24-26)

히스테리증자의 변별적 특질은 정확히 ... 말하는 운동 자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구성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프로이트가 바로 이 [히스테리증자라는] 입구를 통해 사실상 욕망과 언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것 속으로 들어가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발견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 프로이트에게 욕망과 언어의 관계가 베일 속에 감춰져 있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일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욕망과 언어의 관계를 완전히 해명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 또한, 히스테리는 우리로 하여금 분석이 지니고 있는 원죄의 흔적과 대면케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아마도 진정한 원죄란 하나밖에 없을 텐데요. 바로 프로이트 자신의 욕망입니다. 즉 프로이트 속의 어떤 것이 전혀 분석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 제가 아버지의-이름들(Noms-du-Pere)에 대해 말하려 했던 것은 사실 다름 아니라 오로지 기원을 문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프로이트의 욕망은 도대체 어떤 특권을 갖고 있었기에 그가 무의식이라 부른 경험의 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지요. / 분석을 바로 세우려면 이러한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 어찌되었건 분석 경험의 장을 탐사하는 이 같은 방식은 다음번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따라 인도될 겁니다. 프로이트가 근본 개념으로 도입한 용어 중 다음 네 가지, 즉 ‘무의식’, ‘반복’, ‘전이’, ‘충동’에 어떤 개념적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가? / 올해는 1시 40분에 강의를 끝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급하지 않은 분들은 잠시 남아서 제 강의를 들으며 품었던 의문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26-28)

공중캠프

2020.01.17 10:44:00
*.223.15.84

무의식과 반복


2장.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우리의 무의식

야생의 사고
잘못된 것에만 원인이 있다
간극, 헛디딤, 발견, 상실
불연속성
시뇨렐리


「대위 선율」

/ 아라공

네 모습은 헛되이 나와 만나니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네. 여기서 나는 네 모습을 비출 뿐
네가 나를 향해 돌아선다고 해도 내 응시의 벽에서
네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네가 꿈꾸던 너 자신의 그림자

나는 거울과도 같은 불행한 존재
비출 순 있지만 볼 수는 없다네.
나의 눈은 마치 거울처럼 텅 비어 있고 마치 거울처럼
너의 부재에 홀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네.

(『엘자에 미친 남자』, 1963)


Contre-Chant

Vainement ton image arrive à ma rencontre
Et ne m'entre où je suis qui seulement la montre
Toi te tournant vers moi tu ne saurais trouver
Au mur de mon regard que ton ombre rêvée

Je suis ce malheureux comparable aux miroirs
Qui peuvent réfléchir mais ne peuvent pas voir
Comme eux mon oeil est vide et comme eux habité
De l’absence de toi qui fait sa cécité.

– Louis Aragon, Le Fou D'Elsa (1963)


"언제가 할례식에 초대받았을 때 안-낫지는 이렇게 말했네."

이 시를 그 중단된 [작년] 세미나에, 그 때 개진된 불안과 대상 a의 기능에 대한 논의에 몇몇 분들이 품고 있을 향수에 바치는 바입니다. / ‘마이너스-파이[(-φ)]’의 중심적인 상징적 기능에 대상 a의 다양한 형태들이 상응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33-34)

1

몇 해에 걸친 제 모든 노력은 분석가들이 ‘말(parole)’이라는 도구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었음을 그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말에 본래의 존엄성을 되돌려주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말을 미리부터 무시하고 그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분석 작업의 준거를 다른 데서 찾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 또 다른 것을 하나 더 비판해보자면, 이곳에서라면 분명 좀 더 속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제가 개념에 대한 거부 반응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미, 첫시간 말미에 언급했듯이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프로이트의 주요 개념들 - 말 그대로 그러한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서 제가 선별한 네 개의 개념들 - 을 소개하려는 겁니다. (34-35)

그 중 처음 두 가지는 무의식과 반복입니다. ... 전이 개념은 우리를 분석 실천을 위해, 특히 진정한 분석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마땅히 개진되어야 할 알고리즘들로 곧장 인도하게 될 겁니다. 충동은 여전히 접근하기 까다로운 개념이며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미개척된 개념이기에, 올해는 전이를 살펴본 후에야 비로소 접근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렇다고 해서 충동 개념에 대한 접근이 안고 있는 불안정하고 난처한 측면을 축소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불충분하고 빈약한 준거들만 믿고 무턱대고 덤벼드는 이들과는 분명 다르게 접근할 겁니다. (35-36)

현실을 포착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 실제로 그 현실에 대한 접근을 본뜬 것이라면, 개념의 완전한 실현은 오직 도약, 즉 극한으로의 이행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 칠판 끝에 적어놓은 다른 두 개의 용어는 ‘주체(sujet)’와 ‘실재(le réel)’입니다. ...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역설적이고 특이하며 모순적인 측면을 가진 정신분석이 과학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는지, 그것이 과학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는지 질문을 제기한 바 있지요. (36)

2

여기 계신 대부분의 분들은 제가 제시했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명제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계실 겁니다. ... 저는 이 명제를 명백히 과학적이라 할 수 있는 수준에서 구체화된 어떤 것, 즉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라는 제목을 붙여 탐색하고 구조화하고 연구했던 장을 통해 설명해볼까 합니다. / 모든 경험 이전에, 모든 개별적 연역 이전에, 심지어는 사회적 욕구로 귀결될 수 있는 집단적 경험들이 새겨지기 이전에 무언가가 이 장을 조직하고 그것의 최초의 역선(力線)들을 그어놓습니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토템 기능의 진리로서 보여주었던 기능, 토템 기능의 [다양한] 외관을 축약시키는 [진리의] 기능, 바로 일차적인 분류 기능입니다. / 이를테면 자연은 시니피앙들을 제공하며 이 시니피앙들은 창시적인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조직하고 그것에 구조와 모델을 부여합니다.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여기서 주체가 구성되기 전에, 즉 사유하는 주체, 스스로를 사유하는 주체로 간주하는 주체가 구성되기 전에, 그것이 셈을 하면서 셈해지고, 그리하여 그 셈 속에서 셈하는 자가 이미 포함되어 있는 심급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주체는 거기서 자신을 계산하는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나에게는 세 명의 형제가 있어요. ... 폴, 에르네스트, 아 이렇게 말이죠”라는 한 꼬마의 말을 듣고 웃음을 참지 못했던 지능지수 검사관의 순진한 실수를 다시금 떠올려봅시다. (37-38)

오늘날 우리는 인문과학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여타 심리-사회학과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는 하나의 학문이 형성되고 있는 역사적 시기에 있습니다. 바로 언어학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전前주체적인 방식으로 저 혼자 자발적으로 작동하는 조합 작용을 모델로 삼습니다. 무의식에 본연의 위상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조입니다. 어쨌든 이 구조가 무의식이라는 명칭 아래 무언인가가 규정될 수 있고 접근 가능하며 객관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지요. (38)

오늘 제가 참조점으로 삼게 될 것은 바로 원인(cause) 기능입니다. / 만약 이성의 준칙, Vernunftsregel이 항상 어떤 비교, Vergleichung이나 등가성이라면 원인은 결국 분석될 수 없는 개념, 이성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개념이 되며 원인의 기능에는 본질적으로 어떤 ‘간극(béance)’이 남아 있게 된다. 칸트, 『부정량 개념에 대한 시론』, 『프롤레고메나』 (39)

원인은 ‘법칙(loi)’과 구분됩니다. 법칙은 하나의 연쇄 속에서 결정 작용을 수행하는 어떤 것이지요. 가령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여기서는 [각 항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하나는 다른 하나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물체가 땅에 떨어져 으깨졌다고 칩시다. 그 물체의 활력의 대가로 되돌려받은 것의 원인은 그 물체의 질량이 아닙니다. 질량은 오히려, 반동 효과를 통해 물체로 되돌아가 그것을 으깨버린 그 활력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지요. 최후의 순간이 아니라면 여기에는 어떤 간극도 없는 셈이지요. / 반면 원인에 대해 말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반反개념적이고 규정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습니다. 달의 상相은 조수의 원인입니다. 마찬가지로 장독臟毒은 고열의 원인입니다. ... [원인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경우] 거기에는 어떤 구멍이 있고 그 틈새로 무언가가 흔들릴 뿐이지요. 요컨대 뭔가 잘못된[절뚝거리는] 것에만 원인이 있다는 겁니다. / 무의식은 우리에게 간극을 보여주며 신경증은 바로 이 간극을 통해, 결정될 수 없는 어떤 실재에 다시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원인에 특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구멍, 틈새, 간극 속에서 그는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실현되지 않은 것(non-réalisé)’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입니다. (40-41)

처음에 무의식은 우리에게 ‘태어나지 않은 것’의 영역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으로 나타납니다. 억압이 그러한 영역 속에 무엇인가를 쏟아붓는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낙태전문 산파와 림보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 분석가가 누군가에게 있는 악령들을 미처 빛이 있는 곳으로 끌어내지 못한 채 그들의 세계를 환기시켰다면, 아마도 그 분석가는 그 누군가에 의해 ‘실재적으로’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될 겁니다. 이 경우 위험성이 전혀 없는 담화는 없습니다. ... 심지어 어떤 공적인 담화일지라도 그것이 주체들을 겨냥하고 프로이트가 배꼽 - 그가 궁극적으로 꿈의 미지의 중심을 지칭하기 위해 쓴 용어인 ‘꿈의 배꼽(nombril des rêves)’ - 이라 불렀던 것을 명중시키게 된다면 어떤 효과가 없진 않을 겁니다. 해부학적 배꼽이 그러하듯 그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된 간극을 가리킵니다. (41-42)

사실 프로이트가 정확히 예견했듯이, 제가 환기하고 있는 이러한 차원의 무의식은 ‘망각되어 버렸습니다’. 2세대, 3세대 분석가들이 분석 이론을 심리학화하면서 그러한 간극을 봉해버리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정형외과의로 열심히 활동해준 덕분에 무의식은 자신의 메시지를 닫아버렸습니다. / 제가 오직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 간극을 다시 열어 보이리라는 것을 믿고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42)

3

물론 이 시대, 이 시점, 지금의 저는 원인과 관련해 이러한 간극이 발생하는 지점에 시니피앙의 법칙을 도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정신분석에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프로이트가 무의식 개념을 고안하기 위해 거쳤던 다양한 시기들에 따라 그 개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 프로이트적 무의식은 결코 상상력이 빚어낸 낭만주의적 무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밤의 신령들이 지배하는 장소가 아니지요. ... 프로이트가 낭만주의적 무의식의 용어들을 이어받은 융을 파문했다는 사실은 정신분석이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시사해줍니다. (42-43)

무의식을 원초적인 것으로 간주된 어떤 불투명한 의지, 많건 적건 언제나 의식 이전의 것과 연관시키는 이 모든 관념들에 반해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수준에는 주체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의식도 의식의 수준만큼이나 정교한 방식으로 말하고 기능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의식은 자신의 특권처럼 보였던 것을 잃고 맙니다. /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현상이라고 제시한 것의 작동 방식... 꿈, 실수 행위, 재담 등에서 제일 먼저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어떤 헛디딤(achoppement)이란 양상 아래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43-44)

헛디딤, 실패, 균열. 말해진 문장이든 쓰인 문장이든 그 속에서 무언가가 발을 헛디디게 됩니다. / 프로이트는 이러한 현상들에 이끌려 바로 그곳에서 무의식을 찾게 되지요. 거기서는 다른 무언가가 자신이 실현되기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분명 의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기이한 시간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간극에서 발생하는 것은 ‘발견(trouvaille)’처럼 나타납니다. / 우리를 동요시키는[적중시키는] 알 수 없는 무언가... 그것은 바로 ‘뜻밖의 것(surprise)’입니다. 주체는 ‘뜻밖의 것’에 압도당함을 느끼며, 거기서 자신이 기대한 것보다 더 많으면서 동시에 더 적은, 그러나 어쨌거나 자신이 기대한 것에 비해 독특한 어떤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44-45)

그런데 이러한 발견(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곧 재발견이 되어버립니다. 게다가 그것은 상실의 차원을 수립하면서 항상 다시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지요. / 이는 오르페우스가 두 번이나 잃고 마는 에우리디케와 비유할 수 있는데, 이것은 분석가 오르페우스와 무의식의 관계에 대해 신화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 바로 이런 점에서 무의식은 사랑 속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사랑은 언제나 둘도 없이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은 “하나를 잃으면 열을 되찾는다”입니다. (45)

불연속성은 무의식이 처음에 현상으로 가시화될 때 나타나는 본질적인 형태입니다 - 이러한 불연속성 속에서는 무엇인가가 흔들리는 것으로서 나타납니다. / 불연속성에 대해 ‘하나(un)’가 선행할까요? ... 최근 몇 년 동안 저는 줄곧 이 완결된 ‘하나’를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이 완결된 ‘하나’는 거짓된 통일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가정되는 일종의 유기체의 분신, [육체의] 외피로서의 심리 작용을 언급할 때 붙어 다니는 환영일 뿐이지요. 무의식의 경험이 도입하는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균열, 자취, 결렬의 ‘하나’일 뿐이라는 저의 주장에 여러분도 동의하시게 될 겁니다. /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의 한 가지 몰인식된 형태인 Unbewußte(무의식)의 Un이 불현듯 나타납니다. Unbewußte의 한계, 그것은 Unbegriff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는 Unbegriff가 비개념이 아니라 결여의 개념이란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45-46)

그렇다면 그 밑바탕은 무엇일까요? 부재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결렬, 균열, 열림의 흔적이 부재를 나타나게 하지요. 외침이 침묵을 배경으로 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침 때문에 침묵이 침묵으로서 솟아나듯 말입니다. / 이 최초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무의식과 관련해 가령 ‘무의식은 담화의 소실이 욕망과 결부되는 수준에서 자신의 역사 속에서 소외된 추체이다’라는 식의 이런저런 부분적인 시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 무의식은 어떤 존재의 수준, 하지만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는 한에서의 어떤 존재의 수준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의식이 하나하나의 문장과 화법에 따라 재발견되지만 그만큼 다시 사라져버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감탄문, 명령문, 기원문, 심지어는 말실수 속에서도 항상 자신의 수수께끼를 던지면서 말을 건넨다는 점에서 그 무의식이 위치하는 곳은 바로 언표 행위의 수준입니다. 프로이트가 꿈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무의식은 요컨대 그 속에서 꽃피워진 모든 것이 균사체처럼 하나의 중심점을 놓고 퍼져나가는 수준에 있습니다. 언제나 문제의 관건은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서의 주체인 것입니다. (46)

Oblivium(망각)은 장음 e가 있는 lèvis입니다. lèvis란 매끄럽고 평탄하며 반들거린다는 뜻이지요. Oblivium, 그것은 무언가를 지우는 것입니다. 무엇을 지우는 것일까요? 바로 시니피앙 자체를 지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조작적인 방식을 통해 무언가로 하여금 다른 것을 빗금 치고 삭제하는 기능을 맡도록 만드는 기본적인 구조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는 좀 더 나중에 나타나게 될 억압보다 구조적으로 더 근원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삭제입니다. 자, 그런데 삭제를 수행하는 이러한 요소가 바로 프로이트가 처음부터 검열 기능에 대해 말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 그것은 가위로 잘라내는 것입니다. “아무개씨 부부는 기쁨에 가득 차서 자유와 같이 아름다운 아기의 탄생을 여러분에게 알리게 되었다”라는 구절에서 검열을 맡았던 호프만 박사는 ‘자유’라는 단어를 지워버립니다. (47)

여지껏 한 번도 제대로 활용된 바 없는 예를 한 가지 들어봅시다. 이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첫 번째 예로서 그가 오르비에토 대성당에 있는 회화들을 관람한 후에 ‘시뇨렐리(Signorelli)’라는 단어를 잊어버린 기억 장애에 대한 것이지요. 어떻게 여기서 사라짐, 제거, Unterdrückung, 즉 밑으로의 내리눌림이 은유가 아닌 현실로서 텍스트 자체에서 솟아나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할 수 있을까요? ... 언젠가 제가 말한 적이 있는 절대 주인, 즉 죽음이 거기서 사라져버리지요. 그런데 또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이면에서 프로이트가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신화들 속에서 자기 욕망에 대한 조율을 발견할 수밖에 없게 되는 모든 계기가 드러남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그는 자신의 신화 속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게 된다는 점에서 니체와 의견을 같이 합니다. ... ‘신은 죽었다’는 신화는 아마도 거세 위협에 대항해 찾아낸 안식처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만약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묵시록적인 벽화들을 읽을 줄 안다면, 여러분은 거기서 거세의 위협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47-48)

그리하여 주체의 절단[단절]이 프로이트가 욕망 - 우리는 잠정적으로 이 욕망을 문제의 담화 속에서 주체로 하여금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스스로를 포착하게 만드는 발가벗은[훤히 드러난] 환유 속에 위치시킬 수 있을 겁니다 - 과 동일한 것이라 생각했던 어떤 발견[물]이 불쑥 다시 튀어오르는 지점이라면, 무의식은 항상 바로 이러한 주체의 절단[단절] 속에서 동요하는 무엇으로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48)

프로이트 그리고 그와 아버지의 관계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그가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그 문제를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여자들 중 한 명에게 털어놓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문제였지요. 그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 프로이트는 만약 히스테리라는 형태로 타자에게 헌신하지 않았다면, 분명 감탄할 만한, 열렬한 이상주의자가 되었을 겁니다. (49)

공중캠프

2020.01.17 15:44:42
*.223.15.84

L’orientation lacanienne: le cours de Jacques-Alain Miller
http://jonathanleroy.be/2016/02/orientation-lacanienne-jacques-alain-miller/

공중캠프

2020.01.17 17:45:33
*.223.15.84

백상현, 라캉 세미나11_강해_수업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HxjjIQyVOtusQjW_r9xj4YGS2Zwyn4SV

라캉 정신분석 강의_ 무의식의 시간_ 세미나11의 독해 수업 (철학, 심리학, 인문학)
https://youtu.be/wkRG0oQadJo

Lacanian Praxis Institute
https://www.lacanpi.com/

공중캠프

2020.01.22 16:13:20
*.223.27.28

3장. 확실성의 주체에 관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욕망의 유한성
달아나는 것
무의식의 위상은 윤리적인 것이다
이론 속의 모든 것은 재구성되어야 한다
데카르트주의자로서의 프로이트
히스테리증자의 욕망


무의식 기능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간극이기 때문에, 저는 그 간극을 통해 무의식 기능을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간극의 핵심이란 바로 어떤 존재론적인 기능이라는 점에서, 그의 질문은 특히나 시기적절한 것이었습니다. (52)


1

무의식의 간극, 우리는 그것을 ‘전前존재론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 무의식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실현되지 않은 것 / “천상의 힘들을 꺽을 수 없다면 저승을 움직이련다(Flectere si nequeo superos Acheronta movebo).” ... 지옥을 여는 것이라 선포되었던 것이 이후 그토록 보란 듯이 무균처리 되어버렸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52-53)

무의식에 대한 우리의 연구 성과는 일종의 건조 과정 쪽으로, 식물 도감 - 오로지 이미 체계적으로 목록화된 영역이나 자연 그대로를 표방했던 어떤 분류법 안에서만 표본을 수집한 식물 도감 - 으로의 환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전통 심리학의 영역에서는 신이 인간의 욕망에 남긴 것이라 생각되는 그 뭔지 모를 자취를 보면서 인간 욕망이 통제 불가능하며 무한한 것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분석 경험이 확인시켜주는 것은 오히려 욕망의 유한한 기능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가능성보다도 더 어딘가에서 한계지어져 있는 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53-54)

쾌락이란 인간의 가능성을 제한합니다. 다시 말해 쾌락원칙은 항상성의 원리이지요. 반면 욕망은 자신의 경계선, 자신의 고정된 간계, 자신의 한계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욕망은 바로 그러한 한계와의 관계 속에서, 쾌락원칙에 의해 부과된 문턱을 넘으면서 욕망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54)

무의식의 기능에서 존재적인 것은 틈새(fente)입니다. 이 틈새 사이로 무엇인가가 순간적으로 환하게 드러나지요. / 무의식을 정의하는 수준 자체에서 우리는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순이나 시공간적 배치뿐 아니라 시간의 작용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54-55)

그런데 욕망은 그것이 과거의 이미지를 통해 지탱하고 있는 것을 항상 일순간의 한정된 미래로 실어나르기만 할 뿐인데도, 프로이트는 그런 욕망을 ‘불멸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 만약 불멸하는 욕망이 시간을 벗어난다면, 그것은 사물들의 질서 중에서 어떤 영역에 속하는 것일까요? ... 우리는 여기서 지속(durée)이라고 하는 사물의 실질적 시간 이외에 또다른 양태의 시간을, 즉 논리적 시간을 구별해낼 수 있을까요? (55)

바로 그 틈새가 일으키는 맥동脈動 운동의 절분된(scandé) 구조를 여기서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사라지면서 출현하는 것(apparition évanouissante)은 논리적 시간의 시작과 끝이라는 두 지점 사이에서, 즉 직관 자체로부터 무언가가 항상 생략되고 상실되기까지 하는 순간인 보는 순간과, 무의식이 완전히 손에 붙잡히지 않고 항상 미끼에 속았다는 듯이 되돌아서 빠져 나가버리는 순간 사이에서 이뤄지지요. / 따라서 존재의 수준에서 볼 때 무의식은 달아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의식을 하나의 구조, 그것도 시간적인 구조 속에서 파악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러한 구조는 지금껏 한 번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조로서 해명된 적이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겁니다. (55-56)

2

프로이트 이후의 분석 경험이 간극 속에서 출현하는 것에 대해 보여주었던 것은 그것을 경시하는 태도였습니다.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의 한 전환부에서 사용한 비유를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그 간극에서 나온 악령에게 “피를 공급해주지” 않았던 것이지요. (56)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반복 개념은 전이 개념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점입니다. / 무의식이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견고하지 못한(inconsistant) 존재라는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행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제가 존재의 수준에서는 매우 취약하다고 지적한 무의식의 위상, 그것은 윤리적인 것입니다. (57)

프로이트는 ... 무의식의 일렁이는 무늬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 보이세요?” ... 아들은 무엇에 의해 불타고 있는 것일까요?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결부시킨 햄릿 신화 속에서 망령이 짊어진 아버지의 죄악의 무게[가책]에 의해서가 아닐까요? 아버지, 아버지의-이름은 법의 구조를 가지고 욕망의 구조를 지탱하지요. 하지만 키에르케고르가 지적했듯이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은 곧 아버지의 죄악입니다. (58-59)

햄릿의 망령이 등장하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아버지가 자신의 죄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불의에 목숨을 잃게 되었음을 스스로 밝히는 곳, 그리고 아들의 욕망을 존속케 할 법의 금지들을 햄릿에게 제공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버지 자신이 그렇게 지나치게 이상적인 아버지[라는 역할]에 대해 마 순간 깊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 스스로 드러내는 곳이 아닐까요? / 사실 거기서 중심 용어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Gewißheit, 즉 확실성입니다. 프로이트의 행보는 확실성의 주체를 토대로 해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적입니다. (59-60)

실제로 겪었던 것과 이야기되는 것 사이에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면 어느 누가 주체가 하는 꿈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 그런데 의심은 바로 프로이트에게 확실성의 근거입니다. / 즉 의심 자체는 무언가 지켜야[숨겨야] 할 것이 있음을 뜻하는 기호라는 것입니다. 의심은 저항의 기호인 셈이지요. (60-61)

프로이트는 자신이 의심하는 바로 그곳에 - 왜냐하면 결국 그것은 ‘그의’ 꿈이며, 처음에 의심을 품었던 것도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 무의식적이라 할 어떤 생각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했지요. 무의식적이라 함은 그 생각이 부재자로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 프로이트는 조금이라도 누군가가 자기 대신 [자기 자리에서] 사유를 하고 있다면 - 바로 여기에 도약이 있는 것이지요 - 그러한 사유가 이를테면 그것 자체만의 “나는 존재한다”와 함께 그곳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61-62)

바로 여기서 프로이트와 데카르트 사이의 비대칭성이 드러납니다. ... 비대칭은 프로이트에게선 주체가 거처하는 곳이 바로 그 무의식의 장이라는 데 있지요. 프로이트가 세상을 변혁시킬 만큼의 진보를 완수해낸 것은 그가 [주체가 거처하는 곳으로서의] 그 무의식의 장의 확실성을 단언했기 때문입니다. / 데카르트의 경우 ... 기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진리의 토대를 보증해줄 수 있는 어떤 타자, ... 완전한 신이라고 할 타자의 손에 진리를 되돌려줌으로써... 진리는 타자의 소관이 되는데, 왜냐하면 타자가 무엇을 말하려 했건 그것은 언제나 진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2+2는 5라고 해도 그것은 진리인 겁니다. /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기하학을 해석학으로 변형시키는 대수학의 소문자들을 가지고 놀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이제 우리에게 집합론으로의 문이 열린 것이며 모든 것이 진리의 가설로서 허용된다는 겁니다. (62-63)

데카르트는 ... 주체가 이전의 모든 지식을 폐기한 확실성의 주체라는 것밖에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프로이트 덕분에 우리는 무의식의 주체가 자신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그가 확실성을 얻기 이전부터 사유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63)

3

제가 지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부터 주체의 상관항은 더 이상 속이는 타자가 아니라 속는 타자라는 사실입니다. ... 주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우리[분석가]를 속일 수 있으며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분석가]가 속을 수 있다[틀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 “하지만 우리를 지고의 진실로, 신적인 진리로 이끌어준다고 하는 그 잘난 무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보라. 당신의 환자는 당신을 비웃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가 주위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당신이 생각하게 하기 위해 분석 중에 고의적으로 만든 꿈이기 때문이다.” (63-64)

프로이트는 제가 여러분에게 도출해 보여드리고자 하는 구조적 지표들을 미처 알지 못했기에 히스테리증자의 욕망...이 아버지의 욕망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도라의 경우에도 그녀의 욕망은 대리를 통해 아버지의 욕망을 유지하는 것이었음을 간파하지 못했던 겁니다. / 마찬가지로 여성 동성애자의 욕망이 또 하나의 해결책을 발견한 것도 아버지의 욕망에서입니다. ...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66)

다음 시간에는 ... 기만의 반복으로서의 반복 개념을 통해 프로이트가 어떻게 속이는 것으로서의 분석 경험을 어떤 실재와, 즉 과학의 장 속에서는 주체가 놓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그러한 놓침 자체를 통해 계시되는 것으로서 규정되는 어떤 실재와 조화시키는지를 확인하시게 될 겁니다. (66-67)

공중캠프

2020.01.29 14:59:02
*.223.22.36

4장. 시니피앙의 그물망에 관하여

무의식의 사유
의심의 콜로폰
주체의 전복
반복에의 입문
실재는 항상 동일한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밝혀두건대, 이 일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면서 기분이 좋은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선행, 복음서에서 말하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식의 선행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 [프랑스정신분석학회의] 교육 분과에 속한 간부급 회원 여덟 명은 제 수업의 효과를 막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현재 런던에 모여 있습니다. ... / 제가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도 이번 파견과 결부된 것처럼 보이는 몇 가지 사소한 신경과민의 징후들을 감사의 노래로 일축하기 위해서입니다. (71-72)


1

지난 시간에는 무의식 개념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무의식의 진정한 기능은 Unbegriff 개념, 혹은 본원적인 Un의 Begriff 기능, 즉 절단[단절] 기능과 시원적이고 창시적으로 깊이 연관을 맺는다는 데 있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 저는 그 절단[단절]을 시니피앙 자체와 구성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주체의 기능과 긴밀히 연결시켰습니다. (72)

저는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줄곧 이른바 무의식의 ‘박동적’ 기능을,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식에 내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라짐의 필연성을 강조해왔습니다. ... 일순간의 간극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은 일종의 선매에 의해 다시 닫힐 운명, 달아나버릴 운명, 사라져버릴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지요. / 그[프로이트]는 무의식이란 의식이 잠재의식적인 것으로부터 불러내고 펼쳐놓고 판별해내고 꺼내놓은 어떤 것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거부된 것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합니다. ... 그것은 바로 제가 방금 전에 받침점이라고 부른 것을 가리키기 위해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용어인 Gedanken, 즉 사유입니다. (73)

의식 너머의 장에 사유가 있습니다. /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를 포착한 것은 ‘나는 의심한다’라는 언표 행위를 통해서이지 그것의 언표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 프로이트는 제가 ‘의심의 콜로폰(colophon)’이라 부를 어떤 것을 꿈의 텍스트 속에 통합시키길 권유하면서 한 걸은 더 진일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의심의 콜로폰은 텍스트의 일부를 이룹니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Gewißheit(확실성)의 근거로 삼았던 것은 오로지 이야기, 주석, 연상 등으로부터 유래한 시니피앙의 배치뿐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73-74)

“여기 꿈의 장이야 말로 네가 있는 너의 집이다. Wo es war, soll Ich werden.” / 프로이트의 전 저작에서 Ich는 시니피앙 그물망의 충만하고 완전한 장소, 다시 말해 주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있던 곳”은 언제나 그랬듯이 바로 꿈입니다. 고대인들은 꿈속에서 온갖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때로는 신들의 메시지도 꿈속에서 찾아냈지요. ... 우리의 관심사는 이러한 메시지들을 총괄하는 조직, 종종 무엇인가가 걸려드는 그물망에 있습니다. / 주체는 “그것이 있던 곳”(실재)에 자신을 자리매김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겁니다. (74-75)

“그것이 있던 곳”에 Ich - 심리가 아니라 주체 - 가 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물망을 식별해내는 것입니다. ... 우리가 그것을 식별할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맴돌면서 되돌아오고 지나온 길을 다시 지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교차하기 때문이지요. (75-76)

프로이트가 플리스에게 보낸 52번째 편지 ... 『꿈의 해석』에서 광학적이라 불리게 될 도식 ... 이 모델에는 여러 층들이 그려져 있고, 이 층들은 각각의 층마다 다르게 굴절되는 빛과 비슷한 어떤 것을 투과시키고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무의식의 주체가 작용하는 곳이지요. 프로이트는 그곳은 공간적이거나 해부학적 장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 무의식 - 살과 피부 사이라는 표현처럼 의식과 지각 사이에 방대하게 펼쳐져 있는 특수한 스펙트럼 ... 지각-의식 Wahrnehmung-bewußtsein 체계... 그 두 요소를 가르는 간극 ... 그 간극이 바로 타자가 위치하는 곳이며 주체가 구성되는 곳입니다. (76)

Wahrnehmungszeichen, 지각의 흔적들이 기억 속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그것들이 먼저 지각 속에서 지워져야 하며, 또 반대로 기억이 지각의 흔적 속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기억이 지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Wahrnehmungszeichen이 동시적으로 구성되었음에 틀림없는 어떤 시간을 지적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니피앙적인 공시태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 유비를 통해 흔적들이 구성되는 층들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 통시태를 통해 도입되는 은유를 구성하는 데서 핵심적인 기능을 하는 대비와 유사의 기능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지요. (76-77)

무의식 구조의 중심에 원인이라는 간극을 위치시키게 된 것은 분명 우리의 분석 경험에 고유한 필연성 때문입니다. ... 왜냐하면 확실성의 주체는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78)


2

정신분석을 지금 당장 하나의 과학으로서 제시할 수 있을까요? / 그[프로이트]의 확실성 반대편에는 데카르트 이후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방금 설명한 바로 그 주체가 있습니다. (78)

기억하기remémoration는 플라톤적 의미에서의 상기réminiscence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 너머의 최상의 진리에서 유래한 선과 미의 에이도스, 흔적, 형상 등이 회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저속한 만남과 우리보다 앞서 떠들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탄생한 하찮은 무언가의 구조적인 필연성들, 그리고 우물거리며 더듬더듬거리면서도 어떤 제약들 - 오늘날 수학 속에서 그러한 제약들의 반향, 모델, 스타일 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 을 벗어나진 않는 구어적인 언어들의 시니피앙적 구조들로부터 유래합니다. ... 단지 억압되었던 것이 되돌아온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장의 구성 자체가 Wiederkehr 회귀에 근거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확실성을 확보한 것도 바로 거기에서입니다. / 프로이트의 자가 분석이란 아버지의-이름에 매달려 있는 욕망의 법칙을 천재적으로 간파해낸 것 (79-80)

지각에 대한 퇴행적 투자 과정이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의 환각 개념에는 주체가 그 속에서 완전히 전복되어야 한다는 - 사실상 주체는 극히 짧은 순간 동안만 존재한다는 - 점이 필연적으로 함축되어 있다는 것 ... 사실은 그가 어느 정도까지 주체를 시니피앙의 체계에 의해 본원적으로 전복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80-81)


3

제가 반복의 기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 1914년 논문 「기억하기, 반복하기, 돌파하기(Erinnern, Wiederholen und Durcharbeiten)」에서 그 개념을 명확히 분절, 「쾌락원칙을 넘어서」 5절에서 완성 (81)

Trieb(충동)와 instinct(본능)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기 때문에 결국 이 영어판은 전체적으로 완전히 오역에 빠지게 됩니다. ... 정신분석 교육의 현주소 (82)

Wiederholen(반복하기)은 Erinnernung, 즉 기억하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체가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 자신의 전력을 회상해내는 것, 이 모든 것은 실재라 불리는 어떤 일정한 한계에 도달하기 직전까지만 진행됩니다. cogitatio adaequata semper vitat eamdem rem. (스피노자) 우리가 존재하는 수준에서 사유로서 적합한 어떤 사유는 - 비록 나중에 완전히 되돌아가기 위해서일지라도 - 항상 동일한 어떤 것을 비켜간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실재란 동일한 장소 - 사유하는 자로서의 주체, 즉 res cogitans가 그것[실재]과 만나지 못한 장소 - 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82)

프로이트의 텍스트에서 반복은 재생(reproduction)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 카타르시스에 큰 희망을 걸었던 시대에는 재생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9프랑 50센트만 주면 거장들의 복제화를 살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에게는 재생된 원장면이 있었습니다. ... 상징적 방식으로서가 아니라면 in effigie, in absentia(그림으로나 부재중일 때는) 어느 것 하나도 잡히지 않거니와 파괴하거나 불태울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 반복은 처음에는 명확하지도 자명하지도 않은 형태로 나타나면서 재생산처럼 보이기도 했고 ‘행위로서(en acte)’ 현전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 왜 행위는 행동(comportement)이 아닐까요? / 행위, 진정한 행위는 분명하게 포착되지 않는 실재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항상 구조적인 부분을 갖고 있습니다. (83-84)

Wiederholen은 ... 주체의 ‘끌어당김’과 아주 흡사합니다. 주체는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길 안으로 항상 자신만의 무언가를 끌어들입니다. / 가령 신경증을 초래한 폭격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꿈속에서 재생된다면 주체에게 문제가 되겠지만, 그것이 주체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재생된다면 별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겁니다. / 우리는 여기서 주체가 스스로 여러 개의 심급으로 분열됨으로써만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 즉 거기서는 의식을 향해 상승하는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이른바 정신 현상의 통일성이라는 관념 전체가 소멸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결국 분석 경험의 초기 단계에서 기억하기가 점차 되풀이되고 모든 사건들이 드러날 것 같은 일종의 초점, 중심점에 점점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되는 순간에, 정확히 바로 그 순간에 제가 ‘주체의 저항’ - 이 말을 따옴표 안에 넣어야 할 텐데, 왜냐하면 이 두 단어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의미를 완전히 바꿔야 하기 때문이지요 - 이라 부른 것이 나타나 그 순간 행위로 반복됨을 볼 수 있습니다. (84-85)

다음 시간에는 이 논의와 관련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중에서도 특히 빼어난 4장과 5장을 어떻게 우리 식대로 적용해볼 수 잇는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원인의 기능에 관해 당시까지 가장 정교한 이론을 보여주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이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용어를 - 이들 두 용어는 우연(hasard)과 요행(fortune)이라고 잘못 번역되고 있지요 - 이리저리 굴리면서 가다듬은 바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용어란 현대 수학을 통해 우리가 시니피앙의 그물망이라고 알고 있는 ‘오토마톤(automaton)’과 우리에게 실재와의 조우를 의미하는 ‘투케(tuché)’를 말합니다. (86)

공중캠프

2020.01.29 14:59:46
*.223.22.36

5장. 투케와 오토마톤

정신분석은 관념론이 아니다
트라우마로서의 실재
꿈과 깨어남의 이론
의식과 표상
신은 무의식이다
‘포르트-다’ 놀이에서의 대상 a


정신분석은 언뜻 우리를 어떤 관념론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그들은 정신분석이 주체의 조건에 의해 이미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원초적이고 내적인 어떤 욕구들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를 그러한 욕구들의 존재론으로 몰고 가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 그러나 분석 경험이 처음부터 걸어온 길을 돌이켜본다면, 정신분석은 오히려 우리를 ‘삶은 한 편의 꿈이다’라는 식의 격언으로 귀착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정신분석만큼 경험의 중심에서 실재의 중핵을 향하고 있는 실천도 없지요. (87-88)


1

정신분석이 발견한 것 속에서 문제의 핵심은 실제로 만남 마주침, 어떤 본질적인 마주침입니다. 즉 우리는 달아나는 어떤 실재와의 마주침에 항상 불려나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 우선 ‘투케’ ... 우리는 그것을 ‘실재(와)의 마주침’이라 번역했지요. ‘오토마톤’, 즉 기호들의 회귀, 재귀, 되풀이가 우리 자신의 쾌락원칙의 명령 아래에 있음을 보여준다면, 실재는 바로 그런 것들 저 너머에 위치합니다. 실재는 항상 오토마톤 뒤편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88)

프로이트가 거의 불안에 사로잡힐 정도로 골몰했던 문제는 첫 만남이란 무엇인가, 환상 뒤에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실재는 무엇인가라는 것이었지요. / 따라서 반복을 기호들의 회귀나 재생산, 일종의 행위화된 기억에 의해 주도된 변조 등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 전이와 관련된 현실의 이 모호함은 반복에서 실재가 담당하는 기능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해명할 수 있을 겁니다. (88-89)

실제로 반복되는 것은 항상 ‘우연인 것처럼’ - 이러한 표현은 반복되는 것이 ‘투케’와 맺는 관련성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 일어납니다. 원칙적으로 우리 분석가들은 이것에 절대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저는 분석을 받으러 오려 했지만 그날 갑자기 사정이 생겨 오지 못했다는 주체의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늘 강조하고 있지요. 우리에게 정확히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매 순간 재발견하는 이 헛디딤, 흠집인 한, 주체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89)

분석 경험의 기원에서 실재가 그 내부에 있는 ‘동화 불가능한 것’의 형태로 - 우발적인 것처럼 보이는 기원으로 기능하면서 그 뒤의 모든 사건들을 결정짓는 트라우마라는 형태로 - 나타났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트라우마는 쾌락원칙에 의해 규정되는 활동 전반을 방향 짓는 주체화하는(subjectivant) 항상성에 의해 완충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 트라우마는 실제로 자신의 모습을, 그것도 아주 빈번히 베일을 벗은 얼굴로 다시 드러냅니다. 주체의 욕망을 담지하는 꿈이 어떻게 트라우마를 반복적으로 다시 등장시킬 수 있을까요? / 결론을 말하자면, 현실 체계는 그것이 아무리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여전히 실재에 속해 있는 것의 핵심적인 한 부분이 쾌락원칙의 올가미에 사로잡히게 놔둔다는 겁니다. (90)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제가 마주침이라 부른 실재 내의 근본적인 지점들인데, 이들은 우리가 현실을 unterlegt, untertragen한 것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 우리는 제가 최근 강의들에서 무의식이라는 형태로 정의하고자 애썼던 것에 다름 아닌 1차 과정을 다시 한 번 그 결렬의 경험 속에서, 지각과 의식 사이에서, 즉 앞서 제가 무시간적이라고 말했던 장소 - 이는 프로이트가 페히너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die Idee einer anderer lokalität라 불렀던 것, 또 다른 장소, 또 다른 공간, 또 다른 무대, “지각과 의식 사이”를 상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곳이지요 - 속에서 포착해야 합니다. (91)


2

어느 날 저는 휴식을 취하려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때 잠이 아직 깨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결국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이미 제가 그 다급한 노크 소리를 가지고 꿈을 만들어낸 다음이었기 때문인데, 물론 꿈의 내용은 노크 소리와는 상관없는 것이지요. 잠에서 깼을 때 제가 그 노크 소리 - 그러한 지각 - 를 의식한 것은 제가 그 소리를 중심으로 저의 표상 전체를 재구축하는 한에서입니다. 저는 제가 거기에 있다는 것과 몇 시에 잠이 들었는지, 왜 잠이 들었는지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 노크 소리가 제 지각이 아닌 의식에 전달되었다면 이는 제 의식이 그러한 표상을 중심으로 재구축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제가 잠을 깨우는 노크 소리 아래 있다는 사실을, 제가 ‘노크당했다(knocked)’는 사실을 저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91-92)

하지만 여기서 저는 그 순간에 제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 저를 깨우는 것처럼 보이는 노크 소리 아래서 꿈을 꾸기 시작한 순간의 제가 무엇이었는지 말입니다. 가정하건대, 저는 ‘제가 깨어나기 전에(avant que je ne me réveille)’ 존재하고 있습니다. ... 이 ‘ne’라는 허사(explétif, 문법적인 구성을 위해 드러나 있으면서도 의미는 없는 어휘)는 잠을 깨기 이전의 ‘제가 존재하는’ 현존 양식이지요. 그것은 단순한 허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제 실질성(impléance, 허사를 통해 표현되는 내밀한 존재감, 현존)이 표출되어야 할 때마다 나타나는 표현이지요. (92)

『꿈의 해석』에 나오는 ... 비운의 아버지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깹니다. 그를 깨운 것은 무엇일가요? 그것은 단지 그를 실재로 불러들이기 위한 어떤 소리의 현실, 쇼크, ‘노크’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 즉 촛불이 넘어져 아들이 누워 있는 침대를 불태우고 있는 현실 그 자체와 거의 흡사한 것을 그의 꿈속에서 나타내주는 어떤 것입니다. / 여기에는 『꿈의 해석』에서 제시도니 프로이트의 테제, 즉 꿈은 곧 욕망의 실현이라는 테제를 뒷받침해주기 적당치 않아 보이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 이 경우 꿈은 잠을 연장시키려는 욕구만을 충족시킨다는 것이지요. / 만약 꿈의 기능이 잠을 연장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어쨌거나 꿈이 그 꿈을 꾸게 만든 현실에 그처럼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면 잠에서 깨지 않고도 꿈이 그러한 현실에 응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여기에는 몽유병적인 활동이 있는 겁니다. ... “잠을 깨우는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꿈‘속에 있는’ 또 다른 현실이 아닐까요? 즉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 현실 말입니다. “아이가 침대 옆에서 아버지의 팔을 잡고 비난하는 듯한 어조로 속삭인다.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 보이세요?’” (93-94)

이어지는 꿈은 본질적으로 어긋난[상실된] 현실, 즉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깨어남 속에서 무한히 반복됨으로써만 이뤄질 수 있는 현실에 바치는 오마주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고에 의해 마치 우연처럼 일어난 불길이 그에게 옮겨붙는 바로 그 순간에 이뤄지는 마주침이 아니라면 불꽃에 타들어가는데도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비활성의] 존재를 달리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 결국 보다 운명적이라 할 무언가가 아버지가 잠이 깨서 올 때까지도 시신을 지켜볼 임무를 맡은 사람이 잠들어 있던 현실, 바로 그 현실을 ‘수단으로’ 해서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요? / 이렇게 꿈과 깨어남 사이에서, 뭔지 모를 꿈을 꾸며 계속 잠을 자고 있는 사람과 오로지 깨어나지 않으려는 이유만으로 꿈을 꾼 사람 사이에서 영원히 어긋난[상실된] 마주침이 스쳐 지나갑니다. (95)

꿈은 대상의 상실을 더없이 잔인한 부분까지 그려냄으로써 욕망을 현전화합니다. 진정 단 한 번의 마주침이라 할 수 있는 이 마주침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꿈속에서만입니다. 오직 의례로써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위로써만 이 태고의 마주침을 기념할 수 있지요. 아버지 중의 아버지[신 진짜 아버지](father as father)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어떤 의식적인 존재도 아이의 죽음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모든 이가 잠이 들어 있는 세계 속에서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 보이세요?”라는 목소리만이 들려온다는 겁니다. 이 문장은 그 자체가 불쏘시개입니다. 그것이 떨어지는 곳마다 불이 붙습니다. (96)

본질적으로 무의식을 결정짓는 것, 즉 Vorstellungsrepräsentanz, 표상적 대표자 x, 표상의 대리자 (97)

이제 트라우마에서 환상 - 환상이 반복 기능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어떤 것을 숨기는 스크린에 다름 아닌 한에서 - 까지 이어지는 실재의 자리, 바로 그것을 짚고 넘어가 봅시다. / 왜냐하면 우리를 깨우는 것은 표상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 무언가를 실패하게 만드는, 배후에 숨겨진 또 다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또 다른 현실이 바로 Trieb입니다. (97-98)

우리가 실재를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꿈의 저편, 즉 하나의 대리자만을 갖는 표상의 결여 뒤에서 꿈이 우리에게 감싸 숨기고 있는 어떤 것 속에서입니다. 우리의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더 많은 것을 지배하고 있는 실재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98)


3

키에르케고르의 『반복』 ... 사랑의 마법에 걸려든 그 젊은이에게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기만에 의해 시작되지 않았나요? / 욕구의 회귀는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소비를 지향합니다. 반면 반복은 ... 새로운 것을 자신의 차원으로 하는 유희적인 것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 이러한 변주는 시니피앙스의 행위를 놀이로 변형시키고, 쾌락원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행복한 방출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거기에 부여하면서 시니피앙스의 목표물을 망각시킵니다. (99-100)

프로이트는 손자가 되풀이하는 ‘포르트-다(fort-da)’ 놀이 속에서 반복을 포착해내고는, 아이가 스스로 엄마의 부재의 작인이 됨으로써 그 부재의 효과를 지우려 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런 현상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 윤곽이 드러난 부재에 의해 도입되어 항상 열린 채로 있는 간극은 원심적인 궤적의 원인으로 남습니다. 이 원심적인 궤적에서 떨어져나오는 것은 주체가 자신을 투사하는 인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아이가 쥐고 있는 실 가닥을 통해 아이 자신과 연결된 실패꾸러미이지요. 다시 말해, 앞으로 시니피앙스가 도입되는 기점이 될 자기 절단이라는 시련을 통해 아이로부터 분리되어버린 무언가가 그 원심적인 궤적을 통해 표현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실패꾸러미 놀이는 엄마의 부재가 아이의 영토의 경계선이라 할 수 있는 요람의 가두리 위에 파놓은 깊은 ‘구렁’에 대한 주체의 응답이기 때문이지요. 아이는 그 구렁의 주변에서 뛰어넘기 놀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100-101)

그 실패꾸러미는 지바로 부족이나 가지고 놀 법한 작은 공처럼 축소된 엄마가 아니라, 주체로부터 떨어져나왔지만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는 주체의 일부분이지요. ... 우리는 이후에 그 대상을 라캉의 대수학 용어로 소문자 a라 부르게 될 겁니다. (101)

이 놀이 활동 전체는 반복을 상징합니다. ... 그것은 주체의 Spaltung(분할)의 원인이 된 엄마의 떠남을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주체의 Spaltung은 ‘여기’ 혹은 ‘저기’라는, 교대로 ‘여기’의 ‘저기’나 ‘저기’의 ‘여기’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포르트-다’의 교차 놀이를 통해 극복됩니다. (101)

저 역시, 어떤 아이가 칭얼거리면서 일찍부터 저를 부르는데도 제가 몇 달 동안이나 자리를 뜨는 일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입은 것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제가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아이는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는데, 이 잠이야말로 트라우마가 생긴 그날 이후로 아이가 살아 있는 시니피앙이 된 저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지요. (101-102)

여러분은 오늘 제가 ‘투케’의 기능에 대해 제시한 이 시론이 전이를 해석할 때 분석가의 직무가 되는 것을 바로잡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시게 될 겁니다. / 오늘은 오래전부터 인식(connaissance)이라 간주되어온, 세계와 인간의 관계가 분석을 통해 보다 근본적으로 조정될 수 있다는 것이 헛된 말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봅니다. / 이론적인 문헌들은 종종 인식을 개체발생과 계통발생 간의 관계와 유사한 어떤 것과 연관시키곤 합니다. 이는 혼동의 결과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정신분석의 독창성은 심리적인 개체발생을 이른바 ‘단계들(stades)’에 근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데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겁니다. (102)

“아마도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아마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 것이리라” (103)

공중캠프

2020.02.13 16: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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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a로서의 응시에 관하여


6장. 눈과 응시의 분열

주체의 분열
트라우마의 작위성
모리스 메를로퐁티
철학적 전통
의태
모든 것을 훔쳐보는 관음증자
꿈속에서 그것이 보여준다


Wiederholung(반복), ‘끌어당기다(haler)’, 끈질김[진절머리가 남], 끌어내다(tirer), 제비 뽑기(tirer au sort), Zwang(강박), 어쩔 수 없이 뽑을 수밖에 없는 카드. 게임에 카드가 딱 한 장밖에 없다면 그것을 뽑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107)

주체가 시니피앙의 주체라면 - 즉 시니피앙에 의해 결정된다면 - 통시성 속에서 선택적 효과들을 발휘하는 공시적 그물망을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관건은 예측할 수 없는 통계적 효과가 아니라 회귀를 함축하고 있는 그물망의 구조 자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토마톤’이 우리가 [게임의] 전략들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해명을 통해 형상화해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반복강박을 뜻하는 Wiederholungzwang에서 Zwang을 바로 ‘자동운동(automatisme)’이라 번역합니다. (108)

1

주체가 자기 이야기를 할 때 그 통사적 구성을 통제하고 점점 더 조이는 무언가가 잠재적으로 작용합니다. 무엇에 대해[대항해] 조이는 것일까요? 바로 프로이트가 심리적 저항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중핵(noyau)이라 부른 것에 대해서입니다. / 이 중핵은 실재적인 것 - 지각의 동일성을 원칙으로 하는 한에서의 실재적인 것 - 이라고 지칭되어야 합니다. 일종의 [표본] 채취, 깨어남 (108-109)

잠을 깨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현실이란 꿈과 욕망의 제국이 맞서 버티고 있던 그 가벼운 소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 현실이란 혹시 이 꿈에 깃들인 불안의 밑바닥에서 표현되고 있는, 부자 관계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 아닐까요? ... 즉 죽음이 갖는 숙명이란 의미 속에서 불쑥 나타난 가장 내밀한 부분이 아닐까요? / 모두가 잠든 사이 마치 우연처럼 일어난 일 - 촛불이 넘어져 시트에 불이 붙은 터무니없는 사건, 사고, 불운 - 과 아무리 감춰져 있더라도,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 보이세요?”라는 말에 담겨있는 가슴을 아리는 무엇 사이에 반복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동일한 관계가 존재합니다. (109-110)

우리는 보다 심층적인 분열을 한편으로는 꿈이라는 무대 장치 속에서 주체 탓을 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아이의 이미지, 원망이 가득한 그 응시와,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의 원인이 되면서 주체를 추락시키는 것, “아버지 ... 안보이세요?”라고 하면서 바라봐주길 간청하는 아이의 애원, 아이의 목소리 사이에 위치시켜야 할 겁니다. (112)

2
모리스 메를로퐁티,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눈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점에 의존한다. 응시의 선재성. 나는 단 한 지점에서 볼 뿐이지만, 나의 실존 속에서 나는 사방에서 응시되고 있다. (114)

제가 주목하는 분열은 우리가 현상학적 경험의 지향성을 따라 세계로 향할 때 그 세계로부터 어떤 형태들이 부과된다는 데서 비롯되는 거리(distance)가 아닙니다. 응시는 우리의 지평에 나타난 경험의 막다른 골목, 즉 거세불안의 구성적인 결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기묘한 우발성이라는 형태로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 눈과 응시의 분열, 바로 이것이 시관적 장의 수준에서 충동이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입니다. (115)

3

시각을 통해 구성되고 표상의 형체들 속에 정돈되는 것과 같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계 속에서는 무언가가 층에서 층으로 미끄러지고 통과되고 전달되면서 결국 항상 어느 정도는 빠져나가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응시라 불리는 것입니다. (116)

의태. 적응/적자생존적 효과 x, 눈 모양의 반점(ocelle). 반점이 눈과 닮았기 때문에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눈이 매혹적인 까닭이 그것이 반점의 형태와 닮아서인지를 밝혀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이와 관련해선 눈의 기능과 응시의 기능을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요? (117)

우리는 얼룩과 응시의 기능이 그 시관적 장을 극도로 은밀하게 조종하는 것임을, 그러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의식이라고 상상하며 자족하는 시각 형태로 절대로 포착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겁니다. / 의식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면 - 발레리의 시에 등장하는 젊은 파르크처럼 스스로를 ‘자신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보는 자’라고 생각하는 것 - 이는 하나의 은폐술과 같은 것에 의해서입니다. 거기선 응시 기능에 대한 회피가 일어납니다. (117-118)

메를로퐁티의 지적처럼, 저는 우리가 세계의 광경 속에서 응시되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의식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동시에 우리를 speculum mundi(세계의 거울)로 위치시킵니다. 제가 조금 전에 메를로퐁티를 따라서 이야기한 우리를 에워싸는 응시,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엇보다 우리를 응시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응시, 바로 그러한 응시에 의해 우리는 응시되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 세계는 모든 것을 훔쳐보는 자[관음증자] 이지만 노출증자는 아닙니다. (118-119)

소위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응시가 생략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응시한다’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 보여준다’는 것 또한 생략되어 있습니다. 반면 꿈의 장 속에서 이미지의 특징은 바로 ‘그것이 보여준다’는 데 있지요. / 꿈속에서 우리는 결국 근본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의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주체는 그것이 어디로 이끄는지를 알지 못한 채 따라가지요. 경우에 따라선 거리를 두며 단지 꿈일 뿐이라고 중얼거릴 수도 있지만, 꿈속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데카르트의 코기토처럼 사유하는 존재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119-120)

자신이 나비가 되는 꿈을 생각해 봅시다. 주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그가, 실제로는 [그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나비를 본다는 뜻입니다. / 실제로 그가 자신의 정체성의 어떤 근원을 알게 된 것 - 본질적으로 그는 자기만의 색깔로 그려진 나비였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 은 바로 그가 나비였을 때입니다. 바로 그렇게 해서 그는 궁극적으로 장자인 것이지요. / 그는 포획된 나비이지만 그 나비를 포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나비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가 타자들에게 장자가 되는 것, 그가 타자들의 포충망에 걸려드는 것은 바로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입니다. (120-121)

응시는 그것이 거세 현상에서 표현되는 중심적인 결여를 상징화할 수 있는 대상 a인 한에서, 그리고 본성상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 무지한 자로 남게 만듭니다. 이 무지야말로 철학적 연구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사유가 진보하면서 줄곧 보여준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1)

<질의응답>

정신분석은 Weltanschauung(세계관)이 아니며 우주의 열쇠를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철학도 아닙니다. 정신분석은, 역사적으로 주체 개념이 정교화됨에 따라 규정된 어떤 특별한 목적에 의거해 작동합니다. 정신분석은 주체를 시니피앙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새로운 방식의 주체 개념을 제시하지요. (122)

공중캠프

2020.02.14 15: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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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왜상

의식의 토대에 관하여
대상 a로서의 응시의 특권
맹인의 광학
그림 속의 남근


의식을 무의식의 관점에서 어떻게 위치시킬 수 있는지. 주지하다시피 프로이트의 담화 자체에서 의식의 사태는 어느 정도의 음영, 혹은 우리에게 유용하게 쓰일 용어로 말하자면 어느 정도의 무착색 부분 - 천을 염색할 때 물들지 않고 남는 부분이란 의미에서 - 에 의해 각인됩니다. (126)

1

어디선가 젊은 파르크는 “나는 내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한 바 있지요. ... 우리가 이 진술에서 주목하는 것은 표상과의 관계 속에서 의식의 본질적인 대응물 중의 하나로서, ‘나는 내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본다’로 지칭되는 무언가를 포착해낸 철학자의 모습입니다. (127)

현상학자들은 나는 ‘밖에서’ 보고 있으며, 지각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각에 의해 파악된 대상들 쪽에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엄밀하게, 그러나 더없이 곤혼스런 방식으로 명시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본다’의 내재성에 속한 듯이 보이는 지각을 통해 세계를 파악합니다. 여기서 주체의 특권은 내가 지각한 그 표상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주는 양극적인 반영 관계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128)

내게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표상으로만 나타난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습니다. 버클리 주교. 이러한 성찰 과정, 내성적 반성 과정은 데카르트적 성찰을 통해 파악된 주체를 하나의 무화하는 힘으로 환원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절정에 달한 존재에 관한 성찰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존재 자체에 이처럼 무화의 힘을 되돌려줍니다. (128-129)

메를로퐁티, 세계의 살(chair), 시각의 원점이 출현하게 되는 과정을 복구하고 재구성하는 것. ... 처음에 내가 그 일부로 속해 있었던 어떤 영롱한 광채의 그물, 이를테면 빛줄기로부터 나는 ‘봄’ 기능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을 출현시키면서 하나의 눈으로서 등장합니다. / 이로부터 어떤 야생의 향기가 풍겨져 나와 멀리 아르테미스 여신이 사냥하는 모습 - 그 형국은 우리가 이 저자를 떠나보낸 비극적인 상실의 순간과 잘 어울리는 듯 보입니다 - 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129)

털장갑에서 가죽이 털을 감싸고 있는 방식을 보시면 알 수 있겠지만 이는 의식, ‘자신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보는’ 환영 속에 있는 의식이 응시의 뒤집힌 구조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30)

2

정신분석은 의식을 철저하게 한계지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이상화[관념화]의 원리만이 아니라 몰인식의 원리로 규정합니다. 암점(scotome). 말하는 자로서의 주체를, 처음에 그가 말하는 자로서 자신을 드러냈던 텍스트의 바로 그 공란들 속에 다시 위치시키는 것. 그러나 이는 전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만을 이야기해줄 뿐입니다. 의식 자체와 결부된 동력학, 즉 주체가 자기 자신의 텍스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프로이트가 강조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는 이론 밖의 문제로 치부되어 말 그대로 제대로 논의되고 있지 않는 실정이지요. (130-131)

주체가 자기 자신의 분열로부터 얻는 이익이 그 분열을 결정짓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 실재가 근접함에 따라 이뤄진 자기절단, 그 최초의 분리로부터 출현한 어떤 특권적인 대상과 연결되어 있다. 대상 a. (131)

주체가 어떤 본질적인 흔들림 속에서 환상에 매달려 있다면, 시관적 관계에서 그 환상이 의존하는 대상은 바로 응시입니다. / 주체가 응시에 적응하고자 하는 순간 응시는 점 형태의 대상, 즉 사라지고 있는 점이 되고 주체는 그 점을 자기 자신의 소멸과 혼동합니다. 포착 불가능, 몰인식, 의식의 환영 (132)

사르트르 『존재와 무』. 응시 - 타인(autrui)의 실존이라는 차원에서 작동, 불시에 나를 엄습, 나의 세계의 모든 관점들과 역선들을 변화시키고, 내가 자리 잡고 있는 무의 지점으로부터 유기체들의 방사형 그물망을 통해 나의 세계를 질서 짓기 때문. 무화의 주체인 내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 관계를 맺는 곳인 응시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특권 때문에, 바라보는 주체인 나는 나를 대상으로 응시하는 자의 눈을 암점화하게[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인의] 응시 아래 있게 되면 나는 나를 응시하는 눈을 볼 수 없게 되고, 만일 내가 그 눈을 본다면 응시는 사라집니다. (312-133)

이러한 현상학적 분석은 정확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응시 아래 있을 때, 내가 누군가의 응시를 요구하고 획득할게 될 때, 나는 결코 그것을 응시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고야. (133)

응시의 가시화. 불시에 나를 기습해 수치심에 빠뜨리는 응시. 내가 보고 있는 응시(regard vu)가 아니라 내가 타자의 장에서 상상해낸 응시(regard imaginé). 시각 기관과 연관시키지 않고 사냥 도중 갑자기 들려오는 나뭇잎 소리나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열쇠 구멍을 통해 [방안을] 응시하다가 들켰을 때. 응시는 관음증자인 그를 불시에 기습해 당황케 하며 동요시키고 수치심에 빠뜨립니다. 문제의 응시는 바로 타인의 현존 그 자체입니다. (133)

그렇다면 이는 응시의 핵심이 본래 주체와 주체의 관계 속에, 즉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실존이라는 기능 속에 있다는 뜻일까요? 여기에 응시가 개입하는 것은 자신이 [응시하다] 들켰다고 느끼는 주체가 대상성의 세계의 상관항인 무화의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기능 속에서 유지되는 주체이기 때문임이 분명하지 않나요? / 우리가 [눈속임으로] 욕망을 슬쩍 감춰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욕망이 여기 시각의 영역 속에 자리 잡기 때문이 아닐까요? (133-134)

3

우리는 시각의 영역이 어떤 연결 통로를 따라 욕망의 장에 통합되었는지를 따라가 봄으로써, 욕망의 기능 속에서 응시가 갖는 특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 데카르트의 성찰이 주체의 기능을 순수한 형태로 출범시킨 바로 그 시대에 오늘 제가 기하광학적이라는 이름을 붙여 구별하게 될 광학의 차원이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34)

발트루사이티스, 『왜상』. 한스 홀바인, <대사들>(1533).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굴절광학적인 구조물들. 비트루비우스의 건축학 개론. 비뇰라와 알베르티, 원근법의 기하광학적 법칙. 디드로의 「눈이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쓴 맹인에 대한 서한」. 기하광학적 원근법에서 관건은 시각이 아니라 공간의 좌표화일 뿐입니다. 뒤러의 쪽문, 미님회 수도원, 아르침 볼도, 달리, 발기의 효과, 휴식 상태에 있던 임시 기관에 새겨진 문신이 어떤 특별한 상태 속에서 펼쳐지는 모습, 남근적 유령의 출몰을 상징화, ‘바니타스’, 방을 나가면서 뒤돌아보는 순간, 해골 (134-139)

주체는 엄밀히 말해 거세라는 ‘마이너스-파이[(-φ)]’를 이미지로 구현하는 어떤 형태 속에서 무화된 주체이지요. 이때 거세는 우리에게 욕망들이 근본적인 충동들의 틀을 통해 조직되는 전 과정의 중심축을 이룹니다. / 그러나 시각의 기능은 좀더 먼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한 기능으로부터 남근적인 상징인 왜상적인 유령이 아니라 응시 그 자체가 이 그림에서처럼 훤히 펼쳐진 박동 기능을 수행하면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 이 그림은 모든 그림이 그렇듯이 응시를 잡기 위한 덫에 다름 아닙니다. (139)

<질의응답>

욕망의 변증법을 강조하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타인의 응시가 지각의 장을 교란시키는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문제의 주체가 반성적 의식의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주체이기 때문이지요. (140)

공중캠프

2020.02.20 17:4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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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선과 빛

욕망과 그림
정어리 통조림 이야기
스크린
의태
기관
너는 결코 내가 너를 보는 곳에서 나를 응시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고 무심코 드셨겠지만, 동물계에선 굴 정도의 수준에서 이미 눈이 나타납니다. (143)

대상 - 이미지(표상) - 기하광학적 조망점(주체)
광점(응시의 지점) - 스크린 - 그림

이러한 기하광학적 차원은 우리의 관심사인 주체가 어떻게 시각의 장 속에 사로잡히며 그것에 의해 조종되고 매혹되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 응시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그 물체는 응시하는 자, 즉 우리를 잡기 위해 ‘덫을 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홀바인의 그림, 해골 / 그렇다면 이 그림에 걸려들어 붙박여버린 욕망, 나아가 예술가로 하여금 무언가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도록 부추긴 그 욕망은 과연 어떤 욕망일까요? (145)

1

가시적인 것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덫이며, ... ‘뒤엉킴(entrelacs)’[포갬, 교차]이지요. 하지만 ... 실은 빛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146, 148)

지각의 기만성, 플라톤 칸트 / 철학자는 시각의 장을 정복하며 외양과 존재의 관계에 대해 쉽사리 대가 행세를 하지만 이러한 관계의 본질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직선이 아니라 광점 - 방사의 원점, 빛줄기, 불빛, 반사광이 발산되는 원천 - 에 있지요. 빛은 물론 직선으로 전파되지만, 굴절되며 확산되고 [우리의 눈을] 가득 채우거나 넘치기도 합니다. (147)

꼬마장은 “보이나? 저 깡통 보여? 그런데 깡통은 자네를 보고 있지 않아!”라고 제게 말했습니다. / 깡통은 광점에서 저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149)

제가 그 당시 거친 자연에 맞서 싸우며 힘겹게 생계를 꾸려나가던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아주 우스꽝스런 그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지요. 한마디로, 저는 아주 작게나마 그림 속의 얼룩이 되었던 겁니다. 저 자신이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 유머러스하고 아이러니한 이야기에서 저를 불러 세우는 소리만 들었을 뿐 그것이 그렇게 재미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150)

나는 단순히 원근법이 형성되는 기하광학적 조망점에서 나타나는 점 형태의 존재가 아닙니다. 물론 내 눈 깊은 곳에서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림은 분명히 내 눈 속에 있지요. 하지만 나는 그림 속에 있습니다. (150)

빛이 나를 응시합니다. 그리고 그 빛 덕분에 내 눈 깊은 곳에 무엇인가가 그려집니다. ... 그것은 내게서 떨어져 미리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 어떤 표면의 반짝임이자 인상이지요. 그것은 기하광학적 관계 속에서 삭제되어버린 것 - 나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는 온갖 애매모호함과 변화무쌍함을 가지 그 장의 깊이[심도] - 을 개입시킵니다. 오히려 그것이 나를 사로잡고, 매 순간 나를 유혹하며, 풍경을 하나의 원근법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제가 그림tableau이라 부른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 만일 내가 그림 속의 어떤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제가 방금 얼룩이라 부른 스크린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150-151)

2

망막 뒤에서 이뤄지는 종합 기능 (151)

색이라는 것은 모두 주관적인 것일 뿐이지요 - 스펙트럼 상에 색채의 질에 대응하는 객관적인 지표가 있어 그 질을 파동으로서의 빛의 주파수나 파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52)

현상적인 차원에서 조망을 통해 내가 나 자신을 그림 속에 얼룩으로 위치시키게 되는 경우라고밖에 설명될 수 없는 사태들이 있습니다. 의태라는 사태가 바로 그것입니다. (153)

바다대벌레, 이끼벌레의 얼룩을 모방. 그것은 스스로 반점이 되고 그림이 되어 자신을 그림 속에 기입해 넣습니다. (154)

카이유와, 『메두사와 그 일당』. 의태 활동이 펼쳐지는 주요 차원 - 변장(성적 목적, 가면무도회), 위장(방어), 위협(과대평가, 모방하기) (155)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의식적인 기능, 즉 주체에게 정복되기 위해 마련된 장으로서의 무의식의 기능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156)

3

회화란 무엇일까요? 주체가 자신을 주체로 파악하도록 만드는 기능 / 그림 속에는 언제나 응시와 같은 무언인가가 나타난다 ... 화가는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 어떤 일정한 양식의 응시를 선택하는 것 / 화가는 자신의 그림 앞에 서게 될 사람에게 적어도 그림의 한 부분에선 “보고 싶니? 그럼 이걸 보렴!”이라고 요약될 수 있을 무언가를 제공합니다. 화가는 눈에 양식거리를 주면서도 그림을 보는 이에게 마치 무기를 버리듯이 응시를 포기하도록 권유합니다. 바로 여기에 회화가 발휘하는 아폴로적 진정 효과가 있습니다. (156-157)

표현주의 회화, 기관으로서의 눈이란 무엇인가, 유기체와 기관의 관계, 경이로운 것은 유기체가 자신의 기관을 가지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158-159)

우리가 무의식을 언급할 때 중요한 것은 바로 기관과의 관계입니다. ... 문제는 성기[섹스]의 목표 속에서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실재적인 것에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남근(phallus)과의 관계입니다. / 우리가 무의식 경험의 중심부에서 이 기관 - 이 기관은 주체에게 거세 콤플렉스를 통해 조직된 불완전함에 의해 특징지어지는데 - 과 관계하는 한, 우리는 우리의 눈이 얼마나 이와 유사한 변증법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59)

눈과 응시의 변증법에 어떠한 일치도 없으며 근본적으로 미혹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첫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내가 응시를 요구할 때 근본적으로 충족되지 않고 항상 결여되는 것이 있다면, 이는 “너는 절대로 내가 너를 보고 있는 곳에서 나를 응시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 역으로, “내가 바라보는 것은 결코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 화가와 미술 애호가의 관계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하나의 놀이, 일종의 눈속임 놀이입니다. (159-160)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에 관한 고대의 일화, “자, 이제 자네가 그 뒤에 무엇을 그렸는지 보여주게.” 여기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중요한 것은 바로 눈을 속이는 것입니다. 눈에 대한 응시의 승리인 것이지요. (160)

<질의응답>

대상 a란 주체가 자신을 주체로 구성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분리해낸 기관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결여의 상징, 말하자면 남근이라는 상징에 비길 만한 것이지요. (161)

공중캠프

2020.02.20 17:4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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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그림이란 무엇인가?

존재와 존재의 허울
스크린의 미혹
응시-길들이기와 눈속임
배후의 응시
제스처와 붓터치
볼거리를-주기와 invidia


대상 a가 제가 시종일관 결여(-φ)라는 알고리즘으로 표기해온 욕망의 중추적 결여를 상징화하면서 가장 완벽하게 자취를 감춰버리는 장[시각의 장] 속으로 뛰어들며 벌였던 이 무모한 도박을 오늘도 계속해야겠습니다. (163)

“가시적인 것의 장에서 대상 a는 응시이다.”
자연속에서 = (-φ)로서

응시(대상 a) - 이미지|스크린 - 표상의 주체(그림)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저는 시관적 장에서는 응시가 바깥에 있으며 나는 응시된다는 것을, 즉 나는 그림이 된다는 것을 강조해야겠습니다. / 이러한 장에서 나를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바깥에 있는 응시입니다. 응시를 통해 나는 빛 속으로 들어가며, 응시로부터 빛의 효과를 입게 됩니다. 그리하여 응시는 빛을 구현하는 도구가 되며, 그 도구를 통해 나는 ‘사진-찍히게[빛에-의해-그려지게](photo-graphié)’됩니다. (164-165)

여기서 관건은 표상에 대한 철학적 문제(현상 이면에는 본체가 있다)가 아닙니다. / 저는 사물의 균형은 표면과 그 너머의 것 사이의 변증법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자연상태에서부터 존재의 균열, 이분화, 분열을 초래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존재는 결국 그러한 분열에 적응하는 것이지요. (165)

우리는 생식을 통해 존재를 연장할 수 있게 해주는 결합은 이 같은 상태의 대역이나 자기 자신의 대역 덕분에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혹, 이성에 대한 끌림, 변장, 가면 / 그러나 주체는 동물과 달리 이러한 상상적 포획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주체는 거기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주체가 스크린의 기능을 분별해 그 기능을 가지고 유희하는 한에서 가능합니다. 실제로 인간은 그 너머에 응시가 존재한다는 듯이 가면 놀이를 할 줄 압니다. 여기서 스크린은 매개의 장소입니다. (166)

스크린(가운데 원)
현실은 가장자리에 있다

틀(bâtis), 골조(charpentes)

실제로 지각의 경우와는 반대로 그림 속에는 언제나 부재한다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시각에서 눈의 식별 능력이 최대로 발휘되는 곳은 바로 중앙 부분입니다. [반면] 어떠한 그림에서도 중앙은 부재할 뿐이고 구명으로 - 요컨대, 뒤에 응시를 감추고 있는 눈동자의 반영으로 - 대체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림이 욕망과 관계를 맺게 되는 한 항상 중앙에는 스크린의 자리가 각인되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그림 앞에서 기하광학적 차원의 주체로서 삭제되어버립니다. (168)

2

시관적 장에서는 모든 것이 이율배반적으로 작용하는 두 개의 항 사이에서 분절됩니다. 사물들 쪽에는 응시가 있지요 다시 말해, 사물이 나를 응시합니다. 반면에 나는 사물을 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니” 사물들이 우리를 응시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의태 기능과 회회가 수행하는 기능이 등가적 (168)

비평이란 어느 화가건 어느 시대건 주어진 한 시점에 회화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파악하려 합니다. [반면] 저는 그 아름다운 예술의 기능의 근본 원리를 묻고자 하는 겁니다. (169-170)

메를로퐁티, 세잔을 따라 “이 작은 파란색들, 이 작은 갈색들, 이 작은 흰색들”, 화가의 붓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터치들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 프로이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근원적 환상 / 예술 창작이 표상의 대리자를 추출해낸다? 승화로서의 창조와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 장 속에서 갖는 가치 (170-171)

작품은 흔히들 말하듯이 사람들의 영혼을 고양시킵니다. 다시 말해, 포기를 부추긴다는 겁니다. ‘응시-길들이기’, 눈속임 / 파라시오스의 예를 통해 우리는 사람을 속이려면 베일을, 말하자면 그 뒤를 보여달라고 요구하게 만드는 어떤 것을 그려 보여주면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 플라톤이 왜 회화의 환영에 대해 반박했는지, 문제의 핵심은 회화가 대상에 대한 환영적인 등가물을 제공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바로 회화의 눈속임은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자처한다는 것입니다. / 그림이 경쟁하는 것은 외양이 아니라 플라톤이 외양 너머에 있는 이데아라고 지칭한 것입니다. (172-173)

대상 a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반향되는지를 살펴보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성화상의 가치는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신 또한 그것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성화상은 신을 기쁘게 한다고 여겨지지요. / ‘코뮌’ 단계, 레판토 해전 / 그들(시민)이 보는 것은 자신이 없을 때 그 홀에서 토의하던 사람들의 응시입니다. 그림 뒤에는 바로 그들의 응시가 존재합니다. (174-175)

3

그림을 그리고 있는 마티스의 모습을 슬로 모션으로 촬영한 필름의 기묘함, 제스처, 만일 새가 그림을 그린다면, 그림을 그리면서 깃털을 떨어뜨리지 않을까요? 뱀이라면 허물이 벗겨질 테고, 나무라면 송충이들과 이파리들을 비처럼 떨어뜨리겠지요. 회화의 경우 떨어뜨리는 것은 응시를 내려놓는 제1의 행위입니다. (176)

퇴행, 시간을 거슬러서 자신을 촉발하는 고유한 자극을 산출해내는 한에서, 반응이라는 의미에서의 동인(動因)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 이에 따라 타자와의 관계가 분별되는 시초의 시간성이 여기 시관적 장에서는 최종적인 순간의 시간성이 됩니다. / 이 최종적 순간 덕분에 우리는 행위로부터 제스처를 구별해낼 수 있습니다. (176-177)

주체는 이러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원격 조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욕망에 부여했던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공식을 변형시켜 말하자면,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를테면 타자 ‘쪽의’ 욕망이며 그러한 욕망의 끝에는 ‘볼거리를-주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77-178)

충족시켜야[먹여살려야] 할 이 눈의 욕심이 바로 회화의 매혹적 가치를 만듭니다. ... 그것은 눈이라는 기관의 진정한 기능인 사악한 눈, 탐욕으로 가득 찬 눈에서 찾아야 합니다. / 사악한 눈의 기능이 보편적인 반면 선한 눈, 은혜를 베푸는 눈에 대한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놀랄 만한 사실입니다. (178)

엄마의 젖을 물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는 아이의 질시(invidia)에 대한 이야기, 여기서 아이는 동생을 산산조각내고 그 독성이 본인에게까지 미칠 만큼 표독스런 시선으로, amare conspectu, 동생을 응시합니다. / 주체가 이렇듯 질시로 하얗게 질리게 된다면 이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앞에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는 충만함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매달려 있는 분리된 소문자 a가 어떤 타자에게는 그 타자를 만족시키는 소유물, Befriedigung(만족)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지요. (178-179)

위안, 문명화, 매혹 등을 초래하는 그림 기능의 원천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이렇듯 응시에 의해 절망에 빠진 눈이라는 영역입니다. a와 욕망의 근본적 관계는 제가 전이와 관련해 이제부터 도입하려는 것의 본보기로 사용될 겁니다. (179)

<질의응답>

제스처란 무엇일까요? 가령 위협의 제스처를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하다 만 공격이 아닙니다. 그것은 [애초에] 정지되고 유예되기 위해 행해진 것이지요. / 경극의 싸우는 방식 ... 우리의 신무기 또한 일종의 제스처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 무기들이 그 정도에서 그치길 바랄 뿐입니다. (180)

보는 순간은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의 접합 내지 봉합으로서만 개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은 어떤 변증법으로 이어지는데, 서두름, 도약, 전진 등으로 불리는 시간적인 진보라 할 이 변증법은 fascinum으로 종결됩니다. / 제가 강조하려는 것은 시관적 영역은 애원, 발성, 부름의 장과 완전하게 구분된다는 사실입니다. 후자와는 대조적으로 시관적 장에서는 주체가 본질적으로 미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182)

수정할 게 전혀 없습니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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