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학생들은 반드시 노동자, 농민, 군인, 소규모 자영업자 등 다수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어떻게 이들의 지지를 얻을 것인가? 우선 지식인들의 처우개선과 교육재정 확보만을 강조해서는 안 되며, 단순히 공허한 민주의 구호만 외쳐서는 안 된다. 이는 학생들과 노동자, 농민의 단결에 안좋은 영향만 미치게 된다. 우리는 노동자, 농민, 군인들에게 “전인민 소유제”가 실제로는 소수 권력자의 소유일 뿐이라고 얘기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점점 더 급진적으로 변화해 나가는 반면, 학생들은 여전히 노동자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봤고 노동자들의 개입이 자신들의 순수성에 해를 끼칠 것으로 봤다.

 

"이 나라는 우리 노동자들의 모든 정신적·육체적 노동으로 건설되었다. 우리는 이 집의 주인이고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나라가 어느 길로 갈지는 반드시 우리와 상의해야 한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질시키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한 줌의 쓰레기 집단이 우리의 명의로 학생들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인권을 짓밟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 개혁의 길을 위해서, 민주적 애국운동을 위해서, 우리의 후손들이 스탈린주의 독재를 제거한 후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해외 동포들이 우리의 민주적 애국운동을 즉시 지지해주길 바란다!"

 

"부패한 관료의 폭정은 극에 달했다! ... 중국 인민들의 분노의 물결을 막을 수 있는 반동세력은 없다. 인민들은 더 이상 관방의 거짓말을 믿지 않는다. 우리의 깃발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써있다. 과학, 민주, 자유, 인권, 법치...우리는 성을 다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증언할 수 있다. 우리가 착취를 이해하는 방법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우리에게 알려준 분석방법이다....우리는 ‘인민의 공복’이 인민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낸 잉여가치를 모두 빨아먹은 것을 알아내고는 경악했다. 이 착취의 총 가치는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이 ‘중국 특색’의 잔혹함이란! 이 ‘인민의 공복’들은 인민들의 피와 땀으로 중국 전역에 (‘군사제한구역’이란 딱지를 붙이고 군인들이 경비를 서는) 으리으리한 별장을 지었고, 사치스런 외제차를 구입하고, 아이들과 심지어는 유모들까지 데리고 해외로 외유를 다녔다! ... 물적 소비와 별장 소유로 조사받아야할 첫 번째 집단은 다음과 같다. 덩샤오핑, 자오쯔양, 리펑, 천윈, 리센녠, 양상쿤, 평전, 완리, 장쩌민, 예쉬엔핑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다. 그들의 자산은 동결되어야 하고 보통 선거로 뽑힌 ‘전국인민조사단’을 통해 엄정한 감사를 받아야 한다... 인민들은 각성했다. 우리는 어떤 사회든 어떤 역사적 단계이든 두 계급 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바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지난 40년간 정치운동은 인민들을 억압하는 정치적 수단일 뿐이었다.”

 

 

공자련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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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도시 지역 노동자들은 어떻게 항쟁에 참여했는지에 관해 작년에 역사비평 131호에 실었던 논문 <1989년 천안문 사건과 그 이후 - 역사의 중첩과 트라우마의 재생산> 중 일부 부분을 옮겨본다. (각주와 출처는 생략한다. 논문의 다른 부분은 문화대혁명의 트라우마는 또 어떻게 천안문항쟁과 관련이 있는가에 대한 내용인데 이것은 다음 기회에 올려보도록 하겠다) 

 

1. 들어가며

 

“이거 한국 사진이지요?”

1989년 천안문 사건에 관한 책 『망각인민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Amnesia)』을 집필한 루이자 림(Luisa Lim)이 이 사건을 대표하는 이미지인 일명 ‘탱크맨’ 사진을 한 중국 대학원생에게 보여줬을 때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대학원생은 광장에 진입하는 탱크를 보고 국가의 잔인한 폭력진압과 연관지어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연상했던 모양이다. 루이자 림은 일종의 실험으로 100명의 대학생들에게 사진을 보여줬는데, 그 사진이 천안문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정확히 대답한 학생은 15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 사진의 역사적 의미를 아는 이들도 이에 관해서 감히 얘기하기를 꺼린다. 루이자 림이 이웃에 사는 한 학교 선생님에게 천안문 사건 얘기를 꺼내자 “이 문제는 너무 민감해요. 지금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지 맙시다. 과거에 머무르지 말고 지금 사는 얘기를 하자구요”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중략) 

 

3. 저항과 분열

 

1989년 천안문 사건을 한국의 역사적 사건과 비교한다면, 국가의 폭력적인 무력진압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면에서는 1980년 광주민주항쟁과 비교할 수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각계각층의 사회 세력이 대거 시위에 참여하여 민주주의를 요구했다는 면에서는 1987년 6월항쟁과도 비교가 가능하다. 6월항쟁에서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대학생들이 먼저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에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을 비롯해 도시주민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시위에 대거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6·29선언으로 직선제라는 성과를 얻어냈으며, 이는 바로 뒤이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진다. 1989년 천안문 사건도 마찬가지로 후야오방의 죽음을 계기로 대학생들이 먼저 시위에 나섰고, 이에 지식인, 노동자, 개인 상공업자, 공무원, 하층민 등 광범위한 사회계층이 시위에 참여했다. 하지만 천안문 사건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무력진압의 비극으로 결말을 맞이했으며, 이후로도 한동안 의미를 가진 사회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6월항쟁이 ‘직선제 쟁취’라는 제도적 목표가 명확했으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시위가 비교적 조직적으로 이뤄진 반면, 천안문 사건에서는 항쟁의 주체들 간의 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혼종적이고 추상적이었으며, 항쟁의 조직도 매우 어수선했다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학생 시위에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다는 점을 크게 우려했지만, 실제로 학생들과 노동자들 저항의 화학적 결합은 이뤄지지 못했다. 왜 저항의 주체들이 명확한 투쟁의 목표로 단결하지 못했는지 주로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학생들이 처음에 베이징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광장에서 학생들의 연설을 듣는 편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대부분 학생들을 지지하기 위해 광장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곧 노동자들은 학생들이 벌이는 논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들은 언론의 자유, 부패 종식, 당국과의 대화, 후야오방의 복권 등을 주로 요구했지만, 노동자들은 점차 계급적인 요구에 대해서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4월 28일 베이징사범대에 한 노동자가 학생들에게 공개서신의 형식으로 쓴 대자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학생들은 반드시 노동자, 농민, 군인, 소규모 자영업자 등 다수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어떻게 이들의 지지를 얻을 것인가? 우선 지식인들의 처우개선과 교육재정 확보만을 강조해서는 안 되며, 단순히 공허한 민주의 구호만 외쳐서는 안 된다. 이는 학생들과 노동자, 농민의 단결에 안좋은 영향만 미치게 된다. 우리는 노동자, 농민, 군인들에게 “전인민 소유제”가 실제로는 소수 권력자의 소유일 뿐이라고 얘기해야 한다."

 

이렇게 1989년 5월 도시 노동자들은 중국의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비록 조직적인 파업은 적었지만 노동자들은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조직을 건설하려고 했다. 이 현상은 당시 항쟁의 중심인 베이징뿐만 아니라 상하이, 시안, 광저우, 내몽고, 창사, 난징 등 중국 전역에서 나타난 것이기도 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미 4월 중순경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베이징 노동자자치연합회(北京工人自治聯合會, 이하 ‘공자련’)이다. 5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학생들이 위축되었을 때, 공자련의 본격적인 지지와 활동은 학생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이 공자련의 역할이 과장되었다고 지적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자오딩신(趙鼎新)은 당시 학생들의 증언을 근거로 노동자들이 전체 운동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본다. 그는 당시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리진진(李進進)이 공자련의 법률고문을 맡았고, 저우용쥔(周勇軍)이 조직부장이었으며, 공자련의 대부분의 문건은 리진진과 다른 학생들이 초안을 쓴 것이었다고 파악한다. 그렇기에 현재 남겨진 공자련의 문건을 바탕으로 당시 노동자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학생운동 세력이 이들을 지도했다는 것을 몰랐기에 생겨난 오류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리스 마이스너(Maurice Meisner)나 왕샤오광(王紹光) 등은 계급의식을 각성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이야말로 중국공산당이 가장 위협을 느끼는 존재였으며, 당시 당 지도부들은 문화대혁명 초기 3년 동안 노동자들의 참여가 야기한 사회적 혼란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고, 폴란드에서 독립노조가 공산당 정권을 몰락시키는 것을 목격했기에 당시 대중 시위를 강력하게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한다. 

 

이렇듯 노동자들은 점점 더 급진적으로 변화해 나가는 반면, 학생들은 여전히 노동자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봤고 노동자들의 개입이 자신들의 순수성에 해를 끼칠 것으로 봤다. 실례로 4월 17일 공자련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 천안문 광장에 자신들도 함께 조직의 명의로 주둔 캠프를 만들겠다고 요청했지만 학생들에게 거부되었으며, 그 순수성은 의심을 받았다. 5월 19일에 공자련이 총파업을 준비하려 하자 베이징대학생자치연합회는 노동자들이 파업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5월 말 당국의 폭력 진압이 임박했을 때에야 학생들은 공자련이 광장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했다. 진압에 대한 공포가 학생들로 하여금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가능케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두 사회 세력은 학생들의 망설임과 의심의 눈초리로 인해 굳건한 동맹을 형성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6월 4일 학살의 밤 이후에도 노동자 활동가들은 학생 활동가들에 비해 더 많은 탄압을 받았다.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감옥에 보내졌지만, 적어도 6월에만 27명의 노동자 활동가들이 처형당했고 그중 14명이 공자련 구성원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운동은 중국공산당이 주장하듯이 자본주의 지향의 반혁명동란이 아니었으며, 국유자산을 지키고 관료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 익명의 노동자가 무력진압이 임박했을 때 해외동포들에게 남긴 대자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이 나라는 우리 노동자들의 모든 정신적·육체적 노동으로 건설되었다. 우리는 이 집의 주인이고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나라가 어느 길로 갈지는 반드시 우리와 상의해야 한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질시키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한 줌의 쓰레기 집단이 우리의 명의로 학생들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인권을 짓밟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 개혁의 길을 위해서, 민주적 애국운동을 위해서, 우리의 후손들이 스탈린주의 독재를 제거한 후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해외 동포들이 우리의 민주적 애국운동을 즉시 지지해주길 바란다!"

 

이렇듯 당시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저항이 화학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것은 국가의 폭력이 자행된 이후인 1990년대 들어서 더 확연히 드러난다.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와 지식인들 중 해외 망명객들은 이후 자유민주주의를 내면화하고 중국공산당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당장 중국대륙 내에서는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고, 1989년을 정점으로 많은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은 대거 보수화되었다. 노동자들도 거대한 국가의 폭력 앞에서 많은 역량을 상실하고 1990년대 중반부터 진행된 국유기업의 구조조정 속에서 대량의 정리해고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강력하게 저항하지 못하고 무기력해졌다.

 

(후략)

 

공자련2.jpg

 

 

출처 :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4234078739981623&id=100001386170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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