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옮김] 세네카의 도래

조회 수 235 추천 수 0 2019.07.02 13:17:30
세네카의 도래

세네카가 이 책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사회관계의 해체였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이 해체를 야기하는 가장 큰 원인을 배은망덕이 만연한 사회 풍조에서 찾았다. 배은망덕? 은혜를 입고도 안 갚는 행위 말이다. 세네카의 말에 따르면 배은망덕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다.

“배은망덕은 지지를 받기 어려운 끔찍한 잘못이며, 인간들 사이의 유대를 파괴한다. 모든 유대를 갈가리 찢어버리고는 인간 본성의 약한 면들을 지탱해 주던 그 조화의 잔해들마저 흩어버린다. 그것은 너무나 흔히 있는 일이어서 그에 대해 불평하던 사람들조차 먹잇감으로 삼켜버리고는 한다.”

세네카의 이 말이 결코 과장만이 아닌 것은, 배반당한 사람은 더는 은혜를 베풀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사회관계의 단절을 초래하고, 그다음 장면은 너무나 뻔하고 예외 없다. 멸망이다. 수많은 멸망의 역사를 통해 익히 보아왔듯이, 위험의 그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더라도 관계가 붕괴된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 누구도 희생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세네카의 이 책은 사회 해체의 원인인 배은망덕에 대한 진단과 치유를 위한 종합적인 탐색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세네카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역사학, 문학, 철학에 걸쳐 있어서 그 어느 것이라고 딱히 지목하기 어려울 만큼 매우 종합적이며, 고대 로마 사회에 대한 민족지를 방불케 하기 때문이다.

- 세네카, <베풂의 즐거움>, 옮긴이 해제 (ㅅㅇ 20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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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마 한국 사회에 대해 나처럼 비관적인 사람도 없을 것 같다. 페북에도 하도 암담한 이야기만 해서 사람들에게 미안할 정도. ㅎ 하지만 어쩌겠는가. 진짜 암담한 것을. 늘 한국사회는 사회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정말 갈수록 더 사회가 아닌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사회는 여러가지로 정의될 수 있지만 내 관점에서 보면 '신뢰'가 핵심이다. 여러번 말했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시스템에 대한, 매개하는 매체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돈. 법. 말. 가장 중요한 3대 매개 매체, 신뢰 매체다.

내가 갈수록 한국사회에 대해 비관적인 것은 신뢰가 무너지는 게 시스템에서 수준에서 개개인의 관계 수준에서 많이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서만 하더라도 신뢰를 받아야할 사람이 신뢰를 받기는 커녕 오히려 배신당하고 비난받고 공개 망신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 배신과 비난, 저주의 이유도 매우 비슷하다. 자기가 기대했던/원하는 것만큼 자기들을 아껴주지 않았다는 이유다. 그 이유로 원한을 품고 자기를 신뢰했고 지지했던 사람을, 그래서 그들이 반드시 돌려줘야만 하는 신뢰와 존경을 돌려주는 게 아니라 배신하고 저주하고 망가뜨리려고 한다.

기가 찬다. 오히려 일이 저 지경이 되면 "오죽 내가 못났으면/못했으면"이라고 생각해야할 대목에서 "어떻게 나를"이라고 생각한다. 유아론적인 만능감도 이런 만능감이 없다. 당신들을 아껴주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신들이 원하는 만큼 아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일들이 정말 많이 발생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 거나 믿은 내가 바보, 라고 말한다. 에바 일루즈가 말한 것처럼 세상은 점점 더 믿는 자가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고 있다.

페북보고 나보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고 비관적인 것 아니냐고. 세상이 그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은 것 아니냐고. 좀 더 희망이 있는 것 아니냐고.

그럴때마다 내가 되묻고는 한다. 사람 믿으세요? 점점 더 사람을 믿고, 길게 보고 좀 손해를 보더라도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것 같아요?

대부분 당황하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가?


- ㅇㄱ(20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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