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생태주의 뿌리에 파시즘이 있다?

이수경 2020. 09. 08
조회수 3802 추천수 1
스스로의 선의에 대해 의심을 거두는 순간, 파시스트가 된다 

GettyImages-1207069414-1.jpg» 지구와 생태계, 동물을 사랑하자는 생태주의에 민주주의가 빠지면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한 번만이라도 읽은 사람은 이 책을 마음 속에서 영원히 떨쳐버릴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뒤에는 이 세상을 두 번 다시 똑같은 시각으로 볼 수 없다.”는 책이 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대가 나올 때마다 어느 시기에 가서는 반드시 찾아내어 읽고 또 읽어야 할 보기 드문 책”이라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포레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2014)에 대한 평이다. 이 책은 1991년 전미 서점상 연합회가 서점이 판매에 가장 보람을 느낀 책에 수여하는 제1회 에비상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책은 1991년 ‘작은나무야 작은나무야'(포레스트 카터지음, 김훈 옮김,고려원미디어, 1991)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간됐다. 이 책은 환경문제와 자연에 관심을 갖는 많은 사람들이 자녀에게 권하고 싶은 책으로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포레스트 카터가 악명 높은 미국의 극우 비밀결사단체인 케이케이케이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과 저자에 대한 평가를 바꾸게 되었다. 자연과 함께 산다는 것의 중요성과 인디언 문화의 아름다움을 전했던 이 책이 자연의 질서를 내세워 인종학살을 합리화했던 저자의 철학이 녹아들어 있는 인종차별주의자의 거짓말이거나 자기변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다시 읽기를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Education_of_Little_Tree_cover-1.jpg» 포레스트 카터의 책 원본과 국내 번역본. 그의 본명은 아사 얼 카터(1925~1979) 로 1950년대 인종주의를 옹호하는 쿠클럭스클랜(KKK) 활동을 했다. 포리스트 카터란 필명으로 1976년 베스트셀러 `작은 나무의 교육'을 냈지만 뉴욕타임스의 폭로로 과거 행적이 드러났다.

“필요한 만큼만 갖는 것,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사슴 사냥을 할 때도 제일 훌륭한 놈을 잡아서는 안 된다. 그 중 작고 느린 놈을 잡아야지, 그러면 사슴들은 훨씬 더 강건해지고 늘 네게 고기를 마련해 주게 되지.”라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유대인과 같은 다른 인종,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학살한 나치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저자의 주장에 따른다면 자연의 질서를 가장 현명하게 따랐던 체로키족, 저자가 인디언의 피는 전혀 섞이지 않은 백인인 자신의 혈통을 속이고서까지 가장 닮고 싶고 닮고자 했던, 체로키 인디언이 “작고 느린 놈”이 되어 도태되었다는 점이다.

자연 사랑을 인류 증오로 바꾼 나치

물론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자연의 질서라는 저자의 주장은 파시스트의 주장일 뿐 사실도 아니다.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것이 적자이고, 적자는 환경에 따라 용감한 토끼가 아니라 겁쟁이 토끼이기도 하고, 개체의 생존과는 다르게 종의 생존은 강한 것이 아니라 협동하는 것이 더 적자라는 증거는 차고 넘치게 많다. 저자는 강한 것만이 살 권리가 있다는 자신의 철학을 과학적 진실에도 어긋나고 자신의 삶과도 괴리된, 거짓으로 뒤범벅된 자서전 형태의 소설로 남겼다.

생태주의 뒤에 숨은 파시스트는 포레스트 카터가 처음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생태주의의 뒤에 파시스트가 숨은 것이 아니라, 사회정의를 위해 모든 사회적 약자, 미래세대 뿐 아니라 다른 생물의 요구를 지원하는, 오늘날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하는 생태주의의 뿌리에 파시즘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AnimalRightsNaziGermany.jpg» 나치가 생체실험을 금지하자 실험동물들이 괴링에게 히틀러 식 경계를 하는 풍자화. 1933년 한 잡지에 실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유대인 학살과 전체주의적 광기로만 알려진 나치즘의 철학은 사실 19세기 자연 신비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치즘으로 가는 도로를 포장한 제3제국의 지적인 선도자”로 알려진 루드비히 클라제스(1872~1956)는 '인간과 지구'라는 글에서 오늘날 생태운동의 모든 주제를 제기했다. 이 글에서 그는 가속화되는 종의 멸종, 전 지구적 환경체계의 균형 교란, 산림의 남벌, 토착민과 야생 서식지의 파괴,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그리고 점증하는 자연으로부터의 민중의 소외를 비난했다. 심지어 만연하는 관광사업의 환경 파괴성과 고래 학살을 비난하고 자연 신비주의자답게 지구를 생태적 총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제기되는 모든 생태 환경적 문제를 한 세기 이전에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연에 대한 사랑을 인류에 대한 증오로 바꿔 나치독재를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생태주의가 생각만큼 참신하거나 진보적인 사상이 아니라는 것은 충격적이지 않지만 동물의 권리까지 주장하는 생태주의의 뿌리에 파시즘이 놓여있다는 주장은 꽤나 충격적이다. 물론 같은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그 해법이나 가치까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19세기의 문제의식과 해결방법이 21세기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고, 과학기술 지식만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사회문제를 다루는 방식 또한 진화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적자는 파시즘이 아니라 공론화와 민주주의다.

'좌도 우도 아닌 앞으로'의 위험성

생태주의가 나치즘에서 출발했다고 생태주의를 파시즘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생태주의자들이 그 뿌리가 나치즘이라는 것을 잊는 것 또한 온당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태론 자체로는 어떤 정치도 규정하지 않아 과거에도 현재에도 파시즘의 좋은 홍보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며 다만 앞쪽일 뿐이다”라는 독일 녹색당의 대표적 슬로건이 오늘날의 파시스트인 스킨헤드족을 포함하는 네오파시스트들에게는 자신을 파시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포섭하는 호소력 있는 구호로 사용된다.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는 생태주의는 그래서 반드시 스스로의 정치적 지형에 대한 검토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진화생물학이 그 어두운 역사 때문에 연구 단계마다 사회적 영향에 대해 자문해볼 것을 요구받듯이 생태주의도 사회적 의제 설정과 실천의 매 단계마다 폭 넓은 반론을 수용하는 민주적 의견 수렴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이론가라고 칭송받았던 루돌프 바로(1935~1997)가 공동체와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현재의 네오나치즘으로 이어진 것도 생태론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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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생태주의자들에게 이러한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바로 ‘에코파시즘:독일 경험으로부터의 교훈’(자넷 빌, 피터 스텐우드마이어 지음, 김상영 옮김, 책으로만나는세상, 2003)이다. 생태주의자이기도 한 저자들이 이 책에서 생태주의자가 빠질 수 있는 파시즘을 경고하고 나선 것은 나치의 어두운 역사적 교훈에도 불구하고 네오나치즘이 스킨헤드 뿐 아니라 선량한, 스스로를 진보적이라 믿는 시민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기후변화의 위기는 이제는 아무도 의심치 않는다. 기후위기의 대안이 지속가능한 에너지라는 것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기후변화 문제를 방치해둘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것도 이미 늦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조급함도 다 공감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장 지속가능한 에너지원을 확대할 수 있다면 지역주민의 민원쯤은 좀 건너뛰어도, 절차쯤은 좀 특별하게 대우받아도 된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시설의 설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기주의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옳지 않다. 무조건 많이, 무조건 빨리, 민주주의 과정쯤은 생략하는 그 과정 자체가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코파시즘’이 경고하는 건 바로 이와 같은 조급한 선의가 불러오는 파국이다. 스스로를 절대 선이라고 믿는 것, 그래서 민주적 절차 따위는 건너뛰어도 된다고 믿는 것 그것이 파시스트다.  

혐오 속에 자라나는 전체주의

06217191_P_0.jpg» 코로나19가 급속하게 확산하면서 서울시가 광화문광장 등에서 집회 개최를 금지한 가운데,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가 지난 2월 2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우리나라에서도 파시즘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뉴스에서 파시즘을 목도하고 있다. 광화문 광장을 메운 태극기의 물결과 이견이 조금도 용납되지 않는 갈등은 이미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는 파시즘이다. 한국의 미래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사회갈등”이라는 것은 굳이 전문가의 입을 빌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자부심을 갖고 조금씩 희생하며 지켜낸 코로나 방역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8·15태극기 집회는 이미 우리 사회의 골칫거리, 미운털이 된 지 오래다. 전광훈으로 대표되는 극우 파시스트 세력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어떤 합리적 대안에도 음모론으로만 대응하는 불만에 가득찬 태극기부대를 우리 사회의 혐오집단으로 여기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욕구와 불만을 갖고 있는 태극기부대를 하나의 혐오집단으로만 여기는 태도 또한 또 다른 파시즘이다.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를 무조건 적으로 여기는 태도는 꼴사나운 상대의 모습과 닮는 가장 빠른 길이다. 

06291635_P_0.jpg» 태풍 하이선의 영향으로 전국 대부분 지역에 많은 비가 내린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원각사 노인 무료 급식소에서 어르신들이 주먹밥을 받아가고 있다. 점심시간마다 비빔밥을 제공했던 급식소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주먹밥으로 바꿨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많은 헌신으로 오늘의 한국을 만들어낸 노인세대는 우리 사회의 가장 가난한 세대이며 노년에 가장 모욕과 혐오를 견뎌내야 하는 세대로 전락했다.우리의 노인 세대가 그들의 부모세대에게 보였던 존경은 고사하고 우리 사회는 노인의 육체적  정신적 쇠락과 자식들에게 다 퍼주고 남은 가난을 조롱하기에 바쁘다. 사회와 가정, 미디어 곳곳에서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 노인 세대의 분노를 받아낸 곳이 유일하게 태극기부대였다는 것을 우리 사회는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돈과 권력을 탐하는 파시스트의 먹이감이 되어 이리저리 휘둘리는 노인 세대의 분노를 사회가 온전히 이해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태극기부대의 막무가내는 사라지지 않는다. 

태극기부대로 대표되는 우리사회의 파시즘은 여러 가지 얼굴과 이해를 가진 다양한 집단이다. 파시즘을 다루는 방법은 또 다른 파시즘이 아니라 그 집단 안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이해하고 구별해내서 다르게 대처하는 일이다. 광화문에는 우리 사회가 노인 세대와 빈자, 탈북민을 다루는 불평등에 분노한 태극기가 있고 이를 이용하는 권력과 돈에 미친 태극기들이 있다. 그냥 싸잡아 비난하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적 절차는 건너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더라도 파시스트를 잡겠다고 파시스트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도 시민사회도 분노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가려듣는 노력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이수경/ 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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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캠프

2020.09.16 11: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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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장 지속가능한 에너지원을 확대할 수 있다면 지역주민의 민원쯤은 좀 건너뛰어도, 절차쯤은 좀 특별하게 대우받아도 된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시설의 설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기주의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옳지 않다. 무조건 많이, 무조건 빨리, 민주주의 과정쯤은 생략하는 그 과정 자체가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코파시즘’이 경고하는 건 바로 이와 같은 조급한 선의가 불러오는 파국이다. 스스로를 절대 선이라고 믿는 것, 그래서 민주적 절차 따위는 건너뛰어도 된다고 믿는 것 그것이 파시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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