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옮김] 나사와 검은 물

조회 수 107 추천 수 0 2022.08.16 21:12:41

< 역자 서문: 나사와 검은 물, 쓰게 요시하루를 읽는 몇 가지 말 >

 

환상과 실재

 

쓰게 요시하루(つげ義春)는 도금 공장에서 일하던 1955년부터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데즈카 우사무로 대표되는 전후 일본 대중 만화의 부흥 안에서 작업을 이어 갔다. 그러나 쓰게의 만화는 주류와 달랐다. 우주나 국제 무대 등에서 총을 들고 활약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만화, 소년이 고난을 통해 성장하는 스포츠 만화 등이 인기를 끌 때, 그는 자신의 노동, 가난, 불안한 심리 상태, 성적인 환상, 차가운 관계를 다루는 어두운 분위기의 만화를 그렸다.

 

흔히 근대에 형성된 시각 문화는 ‘보는 주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즉 시선의 주인은 유일한 자리에 서고, 그가 바라보는 세계가 ‘대상’으로서 드러나 주체와 분리된다. 그러나 쓰게는 만화와 현실에서 끊임없는 ‘증발’을 시도했는데, 즉 자아(주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기를 바라는 태도로 작품을 만들었다.

 

‘꿈’은 그런 점에서 현실의 자아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자아가 사라진 자리에는 전쟁 트라우마 및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신과 자신이 감각한 세계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따라서 「나사식」을 어떤 상징의 조합으로 해석하는 건 흥미롭지 않다. 오히려 「나사식」은 실재하는 존재, 사물, 사건들이, 하나의 주체가 편집하여 구성한 단단한 세계로 조합되지 않고 비누처럼 풀어진 존재론적 세계이다. 그가 드러낸 세계는 전후 일본의 경제 성장, 도쿄올림픽 이후 문화 부흥이라는 주류 사회 흐름의 이면이다. 성장의 시간을 따라오지 못하거나 소외된 사람들, 나아가 근대화의 세계에서 탈락된 이들이 담겨 있다.

 

그는 일부러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의 여러 온천,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마을, 싸구려 료칸들을 찾아 다녔다. 그에게는 여행 자체가 증발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민족지적인 발견이며 리얼리스트의 기록 행위였다. ... 그의 여행은 정돈된 아름다움으로 포장한 일본 미학의 겉껍질을 보지 않고, 전근대적인 더러움, 촌스러움, 습한 냄새가 나는 축축한 공기를 보고자 했다. 

 

“희끄무레한 움막”

 

쓰게는 어린 시절, 1944년 도쿄 공습을 피해 어린이들을 피난시키는 정책에 따라 부모와 떨어져 집단생활을 했는데, 이때 대인기피증과 적면공포증을 얻게 되었다. ... 고딕 소설과 같은 환상 문학은 비이성과 광기를 담고 있고, 이는 주체가 이성과 언어로 질서 있게 구성한 재현 세계 바깥에 있는 실재의 침범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준다. 

 

「바깥의 팽창」, 「밤이 움켜쥔다」, 두 작품 모두 ‘바깥’ 혹은 ‘밤’이라고 하는 물렁물렁한 물질이 자신을 감싼 채 옥죄어 오는 악몽을 그린다. ... ‘바깥’은 마치 그의 생사여탈권을 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러한 죽음을 통해 다시 태어날 수도 있는 잠재적인 기능태로 결론을 열어 놓는다.

 

빛이 적어 들어와 있는 ‘희끄무레한 움막’ 같은 공간 이미지가 반복된다. 움막은 갇힌 공간이지만 작음 빛이 들어옴으로서 답답하지만 동시에 조금은 안락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어두움이 주는 심리적인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들어오는 빛 때문에 밖을 향한 의지를 감지할 가능성을 품게 된다.

 

쓰게 요시하루와 고인 물, 혹은 움막의 이미지는 저자의 표현대로 극도의 고립감과 연결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비유적으로 말하면 증발하며 세계를 재현하고, 움막의 희미한 빛을 따라가며 그 ‘검은 물’을 자신의 만화 창작의 도구인 잉크로 사용했다. 나사는 찢어지 살을 이어 붙이고, 검은 물은 그것을 재현하는 수단이 되어 만화가로서 살아나갔다. 그래서 본서의 제목을 “나사와 검은 물”로 지었다.

 

 

< 대화 : 꿈, 리얼리즘, 무의미를 찾아서 >

 

쓰게 : 나는 만화는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떤 예술에서도 최종적으로는 의미를 배제하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의미 없는 꿈을 바탕으로 일련의 꿈 작업을 그리거나 꿈 일기를 쓰거나 했습니다. 꿈은 누구라도 경험하는 것처럼 강렬한 현실감,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

 

리얼리즘은 현실의 사실에 이상, 환상, 주관 등을 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으로 거기에 무슨 의미를 추구하는 건 아닙니다. ... 의미가 없다는 건 사물이 연관성을 잃고, 모든 것은 맥락이 없어져 파편화되고, 시간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바야흐로 꿈의 세계입니다.

 

......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서양 철학은 주장합니다. 암만해도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래도 내가 ‘무아’가 되어 주관이 사라지면, 있는 그대로를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불교의 사상이 그러니까요.

 

......

 

꿈은 잠들어야 꾸니까 깨어 있을 때의 자신이 사라진 무아의 상태지요. 그러면 글자 그대로 ‘무아몽중’이 되어 꿈속의 상황을 대상화하거나 의미나 해석을 부여할 여유가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강렬한 현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대상화할 수 없으면 모든 것은 의미없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무의미성에 직면하여 감응함으로써 리얼리티가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야마시타 : 불교는 “자기 찾기”가 아니라 “자기 잃어버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쓰게 : “어딘가에서 학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안개일까”

 

profile

"내 마음의 리듬을 믿고(この胸のリズムを信じて)", "우리는 걷는다 단지 그뿐(ぼくらは步く ただそんだけ)"

엮인글 :
http://kuchu-camp.net/xe/86681/c47/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글쓴이 제목 날짜
공지 공중캠프 ☆ (3/7, 14, 21, 28)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38 - < D.I.Y Programming with Game & AI> 101 file [4] 2024-02-03
공지 공중캠프 [노트]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서의 데이터 유물론, AI fetishism, Digital Ecology-Marxism [3] 2018-05-05
공지 공중캠프 (미정) 카레토 사카나 번역세미나 #020 [10] 2012-10-02
269 공중캠프 ☆ (3/9)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39 :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 file [1] 2023-12-27
268 공중캠프 R.I.P 서경식(徐京植, 1951 ~ 2023.12.18) [1] 2023-12-19
267 공중캠프 R.I.P Antonio Negri (1933.8.1 ~ 2023.12.16) 2023-12-19
266 공중캠프 (12/19~2/6) [북토크] 브뤼노 라투르와 함께 탐구하기 file 2023-12-09
265 공중캠프 [캣츠랩 2023 여름 강좌] 인공지능을 여행하는 인문사회 연구자를 위한 안내서 file 2023-07-05
264 공중캠프 [밑줄] <천개의 뇌> 2023-03-13
263 공중캠프 ☆ (3/11)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37 : <드라이브 마이 카> 2023-03-03
262 G [밑줄] <AI 지도책 - 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2023-01-10
261 G [밑줄] <에일리언 현상학 혹은 사물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 [1] 2023-01-09
260 공중캠프 [밑줄] 혁명을 위한 수학 2022-12-28
» 공중캠프 [옮김] 나사와 검은 물 2022-08-16
258 공중캠프 [옮김] 인공지능 혹은 ‘물질적 정신’ — 새로운 철학적 과제 (1) 2022-08-02
257 공중캠프 ☆ (4/16)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36 : <당신의 사월> file 2022-04-15
256 공중캠프 ☆ (3/12)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35 : <아사코 I&II> file 2022-03-11
255 공중캠프 ☆ (11/20~2/26)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34 :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서의 AI as a Ensemble-of-Social-Relations> 101 file [5] 2021-11-15
254 공중캠프 [옮김] 발리바르의 인터뷰: 공산주의는 능동적이고 다양한 집단적 주체성이다 2021-09-25
253 공중캠프 [옮김] 1989년 천안문 사건과 그 이후 - 역사의 중첩과 트라우마의 재생산 file 2021-09-25
252 공중캠프 [옮김] ‘문화혁명’인가, ‘문화대혁명’인가 2021-09-25
251 공중캠프 (1973.9.11) Salvador Allende : last speech file 2021-09-1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