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에일리언 현상학 혹은 사물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

Alien Phenomenology, or What It’s Like to Be a Thing

 

이언 보고스트 / 김효진

2012년 3월 / 2022-09-22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7

 

1장 에일리언 현상학 Alien Phenomenology 13

 

사물의 상태 18

프롬프트로서의 컴퓨터 30

평평한 존재론 34

압축적 존재론 51

단위조작 57

사변 71

에일리언 현상학 78

 

2장 존재도학 : 존재의 풍성한 다양성을 밝히기 Ontography 82

 

시각적 존재도 103

분해도 113

존재도학적 기계 116

낱말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123

 

3장 비유주의 : 단위체들의 알 수 없는 내면생활에 관해 사변하기 Metaphorism 131

 

왜곡의 선명성 137

센서가 보는 방식 145

비유와 의무 154

데이지 체인 177

 

4장 공작 : 철학을 하는 인공물을 구성하기 Carpentry 186

 

사물 만들기 202

철학적 실험 장비 215

에일리언 탐사기 226

새로운 급진주의 233

 

5장 놀라움 Wonder 238

 

경쟁하는 리얼리즘들 242

경이감 253

분해하기 262

에일리언 일상 275

 

감사의 글 281

참고문헌 283

인명 찾아보기 291

용어 찾아보기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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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에일리언 현상학 Alien Phenomenology

 

 

사물의 상태

 

 

화산암 찌꺼기로 이루어진 봉우리, 흑요석 조각, 석고 결정, 고추 그리고 프로판 불꽃보다 남북전쟁 때 죽은 병사, 죄책감을 느끼는 맨해튼 계획의 물리학자, 머리가 타원형인 인간 형상의 에일리언 그리고 지적인 천상의 종족에 우리가 훨씬 더 큰 신빙성을 두어야 할 까닭이 있는가? 우리가 이들 사물을 학문과 시, 과학, 사업에 기꺼이 맞아들이는 경우는 단지 그것들이 인간의 생산성과 문화, 정치와 어떻게 관련되는지 물을 때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스스로 고안한 작은 감옥 속에서 줄곧 살았다. 그곳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로지 우리와 비슷한 종류의 살이 풍부한 존재자들과 우리가 먹는 재료뿐이다. 문화, 요리, 경험, 표현, 정치, 논쟁에서 그렇듯이 현존하는 모든 것은 인류라는 체를 통해 걸러지고, 그리하여 풍성한 사물 세계는 쓰레기처럼 매우 철저하게, 매우 즉각적으로, 매우 효율적으로 폐기되어 우리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가? '사물'이 아주 흔히 관념을 뜻하고 아주 드물게 물질을 뜻하는 시대가 되었는가? (18-19)

 

임마누엘 칸트의 초험적 관념론...의 입장에 따르면, 존재는 주체에 대해서만 현존할 따름이다. 조지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에서 객체는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 마음속 감각 자료의 다발일 뿐이다. G.W.F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에서 세계는 그것이 자기의식적인 마음에 나타나는 방식에 의해 가장 잘 특징지어진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경우에 객체는 인간 의식의 외부에 있지만 그 존재는 인간의 오성 속에서만 현존할 따름이다. 자크 데리다의 경우에 사물은 우리에게 결코 완전히 현시되지는 않고 오히려 특정한 맥락에 처해 있는 개인에의 접근을 달리하고 무기한으로 유예할 뿐이다. (19)

 

그런 조치들은 모두 존재를 접근의 문제로, 그것도 존재에 대한 인간 접근의 문제로 여긴다. 이런 견해를 서술하기 위해 퀑탱 메이야수는 상관주의(Correlationism)라는 용어를 고안했는데, 그것은 존재가 마음과 세계 사이의 상관물로서만 현존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물이 현존한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에 대해서 그럴 따름이다. (20)

 

상관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과 세계는 떼어 놓을 수 없게 함께 묶여 있으며, 그리하여 한쪽은 나머지 한쪽이 없다면 결코 현존하지 못한다. 메이야수는 브뤼노 라투르의 근대성 비판 - 지금까지 이론은 세계를 두 부분, 즉 인간과 자연으로 분할하려고 시도했다는 비판 - 과 유사한 비난을 표명한다. 인간 문화는 다면적이고 복잡할 수 있지만, 자연 세계 혹은 물질적 세계는 언제나 단일할 수밖에 없다. (20-21)

 

2007년에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개최된 학술회의의 명칭 덕분에 메이야수는 레이 브라지에,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 그리고 그레이엄 하먼과 함께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이라는 철학적 지붕 아래 잠정적으로 거주하게 된다. ...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공동의 입장보다 공동의 적 - 칸트의 부패물에서 새어 나오는 인간 접근의 전통 - 을 공유한다. ... 두 세기 이상 동안 철학은 여전히 내성적이고 과묵하며 은둔적이다. (21)

 

마음의 감옥의 축축한 방에서 물질적 세계의 초원으로 탈출하는 사변적 실재론은 그 통칭의 첫 번째 용어, 즉 사변 역시 실행해야 한다. 형이상학은 경험으로부터든 수학으로부터든 형식논리학으로부터든 혹은 심지어 이성으로부터든 간에 검증을 구할 필요가 없다(speculative realism must also make good on the first term of its epithet: metaphysics need not seek verification, whether from experience, physics, mathematics, formal logic, or even reason). 실재론적 사변이 성공적으로 침입하면 초월적 통찰과 주관적 유폐 둘 다의 지배가 끝나게 된다.

 

이것 - 오늘날 철학자로서 작업을 계속하려면 상관주의를 거부해야 한다는 점 - 은 출발점, 첫 판돈일 뿐이다. 사변적 실재론자가 되려면 인간 접근이 존재의 중심에 자리하고서 존재론적 시계공처럼 세계를 조직하고 통제한다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 비유적 의미에서도 직서적 의미에서도 사변적 실재론은 철학적 입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사건이다. 그것은 인식론적 조수가 밀려 나감으로써 매우 오랫동안 차단당했던 실재론의 무지갯빛 조개들이 드러나는 순간을 지칭한다. (21-22)

 

여타의 인물과는 달리 하먼은 모든 사물 사이에서 존재하는 사태의 다면적인 복잡성을 가장 명시적으로 옹호한다. 실재가 재확인되고, 인간은 그 속에서 성게, 칡, 엔칠라다, 퀘이사 그리고 테슬라 코일과 더불어 살 수 잇게 된다. (22-23)

 

하먼은 하이데거의 도구 분석을 자신의 원료로 삼음으로써 스스로 객체지향 철학이라고 일컫는 것을 구축한다. 요컨대 하이데거는 사물은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다고 넌지시 주장한다. 오히려 사물은 목적, 즉 하모니카 혹은 타코를 문제적인 것으로서 언급하게 만드는 환경과 관련되어 있다. 물건은 맥락화될 때는 손-안에-있는-것(zuhanden)이 되고 그런 맥락에서 분리될 때는 눈-앞에-있는-것(vorhanden)이 된다. 하이데거가 선호한 일례는 못박기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망치로, 망치가 부러져서 분리되지 않는다면 망치는 우리가 더 큰 프로젝트 - 이를테면 집짓기 - 를 추구할 때는 간과하는 것이다.

 

하먼은 이런 '도구-존재'가 현존재의 진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모든 객체의 진리라고 주장한다. 망치, 인간, 하이쿠, 그리고 핫도그는 모두 우리에 대해서 그런 만큼이나 서로에 대해서도 손-안에-있는-것이고 눈-앞에-있는-것이다. 물러서 있는 것 - 언제나 은폐되어 있고 내부에 있으며 접근할 수 없는 것 - 이 존재한다. 객체들은 인간의 용도뿐만 아니라 한 객체와 여타 객체 사이의 모든 관계를 비롯하여 어떤 용도를 통해서도 관련된다고 하먼은 넌지시 주장한다. 하먼의 입장은 과학적 자연주의에 대한 암묵적인 반론도 제시한다. 사물(thing)은 그저 자신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 - 쿼크든 중성자든 간에 - 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크기, 규모 혹은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물건(stuff)들은 동등한 존재성을 향유한다. (23-24)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줄여서 OOO라고 적고, 멋을 내기 위해 'triple O'라고 일컫는다)은 사물을 존재의 중심에 둔다. 우리 인간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요소이지만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OOO는, 아무것도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모든 것 - 예를 들면 배관공, 솜, 보노보, DVD 플레이어 그리고 사암 - 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현대 사상에서 일반적으로 사물은 훨씬 더 작은 조각들의 집합체(과학적 자연주의)이거나 혹은 인간 행동과 사회의 구성물(사회적 상대주의)로 여겨진다. OOO는 그 둘 사이에 난 길을 따라 나아가면서 모든 규모의 사물(원자에서 알파카까지, 비트에서 블리나까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들 사물의 특질들과 더불어 그것들이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들만큼이나 서로 간에 맺는 관계들도 곰곰이 생각한다. (24-25)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제시된 계기 혹은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서 제시된 행위자 같은 다른 철학적 개념들과 OOO의 객체 개념 사이의 유사점들을 여러분은 어쩌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세계 간계는 무엇이든 두 존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특수한 사례일 따름이다" (Graham Harman, "Realism without Materialism")

 

그런데 OOO는 과정철학도,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도 같지 않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존재자는 지속하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교체되며, 그리하여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변화와 역동성, 흐름 - 앙리 베르그손 혹은 질 들뢰즈를 통해서 어쩌면 대륙철학에서 더 잘 알려져 있을 특성들 - 에 해당한다. 경험의 연속적인 현실적 계기들은 객체를 즉시 소멸하는 더 기본적인 구성요소들로 아래로 환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것은 내가 회피하고 싶은 접근법이다. 화이트헤드와는 달리 라투르는 모든 규모에서 사물의 명확한 현존을 고려한다. 그런데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네트워크에서 사물은 정지 상태에 머무르기보다는 오히려 운동 상태에 있다. 그리하여 존재자들의 결합과 분리가 우선시되기에 존재자들은 경시된다. 동맹이 무대 중심을 차지하고, 따라서 사물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라투르가 말하는 대로 "행위자들은 단체 사진을 찍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지 않는다." 그런데도 행위자들은 가만히 서 있는데, 그것들이 네트워크를 회집하고 네트워크에서 이탈할 때에도 그러하다. 화산암 찌꺼기로 이루어진 봉우리와 풋고추는 판구조 운동, 엔칠라다, 여행 혹은 소화 체계들에 참여할 때에도 여전히 잔존한다. (24-26)

 

철학 대신에 문화 이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사변적 실재론의 OOO 계통은 인간중심주의에 반대하는 (포스트휴머니즘 같은) 더 친숙한 논변들과 약간 유사할 것이다. 예를 들어 환경철학은 생태에 대한 인류의 관계가 페미니즘에 대한 남자의 관계나 인종에 대한 앵글로색슨주의의 관계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데이브 포먼 같은 활동가들은 숲과 야생 생명이 그 지위에 있어서 인간과 동등하다는 주장의 타장성을 옹호하는 논변을 펼쳤다.

 

그런데 포스트휴먼 접근법은 여전히 인류를 주요한 행위자로서 유지한다. ... 존 뮤어로부터 제임스 러브록에 이르기까지 환경 전체론에 관한 모든 구상에서는 모든 존재자에게 동등한 절대적 가치와 행성에 대한 도덕적 권리가 부여되는데, 그것들이 사실상 살아 있는 생명체인 한에서 그러하다. 한 가지 존재 유형 - 생명 - 이 여전히 사유와 행위에 대한 준거점이 된다. 라투르의 표현에 따르면 정치 생태학은 "자연을 위해 자연을 옹호한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경우에 그것이 스스로 떠맡은 과업은 인간에 의해 수행되며 신중하게 선택된 소수 인간의 복지, 쾌락 혹은 양심에 의해 정당화된다." 라투르는 하나의 자연이 아니라 다수의 자연을 포착하며, 각각의 자연은 하나의 집단적 전체 속에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는다. 그런데 라투르의 경우에도 그의 분석은 여전히 인간정치의 이해관계에 봉사한다(즉, 위의 인용문이 실린 그 책의 부제는 「과학을 민주화하는 방법」이다). (26-28)

 

생태적 담론에서 하나의 대안적 시각은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이 『인간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시각과 더 비슷할 것이다. 와이즈먼은 지구에서 인간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일어날 사태를 서술한다. 지하철은 물에 잠기고, 도관은 얼어서 깨지고, 곤충과 폭풍우는 집의 목조를 서서히 집어삼키며, 다리와 마천루의 강철 기둥은 녹이 슬어 뒤틀린다. 객체지향 입장은 플라스틱과 목재와 강철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 인류의 황홀한 소멸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28)

 

환경철학과 마찬가지로 동물 연구도 우리의 탐구 영역을 확대하지만 그것 역시 '친숙한' 행위소들 - 개, 돼지, 새 등 - 의 단일한 영역, 즉 자신들의 형상과 행동이 인간과 유사한 덕분에 일상화된 존재자들의 영역에 집중하는 데 그친다. ... 다시 한번 우리는, 정말로 실재적인 것들의 기묘하고 어두컴컴한 안개로부터 생명체들에 집중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상호주관성 관점에서 생명체들에 집중하는 것을 보게 된다.

 

또한 우리는 동물 연구의 자의적인 특정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왜 광물 혹은 줄기와 잎 다즙 식물 대신에 나무와 바다거북인가? ... 하나의 대안으로서 마이클 폴란은 식물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의 풍경에 대한 묘사를 시도했는데, 그 관점은 감자와 대마초에 개나 까마귀에 못지않게 주체성을 부여한다. ... 그런 비판은 생물다양성과 관련된 협동 활동에 이바지하고 이들 활동을 권고한다. 생물다양성은 인간 생명을 연장하고 인간 복지를 확대하는 것을 명시적인 목적으로 삼는 가치다. 우리는 어쩌면 포스트휴머니즘이 충분히 포스트휴먼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28-29)

 

분명히 말해서 우리는 객체지향 입장을 채택하기 위해 인간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결국 우리 자신도 머스킷 총납산탄과 석고와 우주왕복선만큼이나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존이 현존으로서 특별하다고 더는 주장할 수 없다. 인간이 세계를, 혹은 적어도 우리가 거주하는 구석을 교란할 수 있는 외관상 독특한 능력 또한 보유하고 있을지라도(인간이 단지 우주의 작은 조각과 상호작용할 뿐이라는 점을 참작하면 이것 역시 특별히 거창한 가정이지만), 사정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모든 객체는 자신으로부터 물러서있다는 관념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인간 지각은 객체들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러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된다. 사물을 새로운 형이상학의 중심에 두려면 우리는 사물이 단지 우리 자신에 대해서만 현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29-30)

 

 

 

프롬프트로서의 컴퓨터

 

 

컴퓨터의 경험 혹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경험 혹은 리본 케이블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 ... / ... 그것들은 무엇을 경험하는가? 그것들의 고유한 현상학은 무엇인가? 요컨대 사물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가 마이크로프로세서 혹은 산맥 혹은 우주전파관측소 혹은 수소폭탄 혹은 캡사이시노이드를 그 자체의 견지에서 이해하기를 바란다면 어떤 접근법이 도움이 될 것인가? (31-32)

 

어쩌면 과학학이 하나의 대응책일 것이지만 그 분야는 여전히 어떤 인간 행위주체 - 일반적으로 과학자나 공학자 - 를 분석의 중심에 둔다. .. 더 중요한 점은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 감시와 비판이 필요한 인간의 자만으로서의 과학에 관한 연구를 고무하는 영감으로 주로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32)

 

생기론적 접근법과 범심론적 접근법도 유사한 문제에 시달린다. 물질의 다양한 행동이 인간 사유 및 느낌과 '유사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전망을 밝게 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과 객체 사이의 차이점보다 유사점에 너무나 많이 주목하게 만든다. 화이트헤드 - 파악과 의식을 구분, 존재자는 "경험의 맥박",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 범경험주의, 티머시 모턴, 생기론 - 생명의 본성을 만물에 부정확하게 투사하는 타협책, "모든 생명과 무생물의 상호연결성"을 서술하기 위해 자연 대신에 그물망이라는 용어를 제시한다. (32-33)

 

하먼의 대답은 "대리적 인과관계"다. 사물들은 사실상 결코 서로 직접 상호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의식과 관련되지 않은 어떤 개념적 방식으로 융합하거나 연계된다. 이들 상호작용 수단은 여전히 미지의 것이다. 우리는 단지 어떤 종류의 대리자가 그 간극을 메우고 객체들을 사실상 융합하지 않은 채로 융합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하먼은 조각 그림 맞추기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원래 이미지를 모방하는 대신에 [그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비추는 균열과 전략적 중첩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이들 균열을 추적함으로써 관계를 이해한다.

 

그런데 무엇 사이의 균열인가? 대리적 인과관계를 실제로 사용하기 전에 우리는 멈추고서 우선 존재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가능한 경험의 그물망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내는가? 사물이란 무엇이고, 어떤 사물들이 존재하는가? (34)

 

 

 

평평한 존재론

 

 

요컨대 모든 사물들은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등하지만 동등하게 존재하지는 않는다. (35)

 

 

 

압축적 존재론 51

단위조작 57

사변 71

에일리언 현상학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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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공작 : 철학을 하는 인공물을 구성하기 Carpentry : Constructing Artifacts That Do Philosophy 186

 

 

“당신은 왜 글을 씁니까?”

 

어느 무더운 7월 오후, 토니 콕스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NPR)’의 <토크 오브 더 네이션> - 「작가들이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히다」, 저자들이 자신의 기예(craft)에 관해 사색하는 『퍼블리셔스 위클리(Publishers Weekly)』의 연재물에 자극을 받아서 편성된 주제, 두 명의 초대손님 – 회고록 『길 끝에 있는 집』 저자 랠프 유뱅크스, 단편소설 『그 남자들이 언제 사라졌는지 알잖아』 작가 시오반 팔론, “당신은 왜 글을 씁니까?”, 진부한 이야기(bromide), 상투적 표현(Cliches)… (187-190)

 

진짜 문제는 글쓰기(writing)가 그 프로그램의 맥락에서는 하나의 임의적인 기입 방법이었다는 사실에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콕스는 “당신은 왜 그림을 그립니까?” 혹은 심지어 “당신은 왜 빵을 굽습니까?”라는 물음을 마찬가지로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대화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진짜 물음은 미묘하게 다르다. 당신은 왜 무언가 다른 것, 이를테면, 영화 제작, 매듭 공예, 수묵화, 용접, 종이 공예나 원예를 하는 대신에(instead of doing something) 글을 쓰는가? 특정한 재료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제한함이 확실하지만, 관념들을 기입하고 유포하는 또 다른 방식보다 글쓰기를 선택하는 것이 표준적인 행위, 혹은 심지어 바람직한 행위라는 점이 명백한 까닭은 무엇인가? (190-191)

 

타고난 재능은 물질적 형식과는 무관하며 우연한 창조적 행운, 시기의 요건, 우연히 살아가고 있는 환경의 산물, (재러드 다이아몬드) 물질적 역사, 인간 진보의 주요 사건들과 혁신들은 예리한 개인의 천재적 재능의 산물이 아니라 물질적 조건의 결과일 개연성이 높다. (191-192)

 

 

학자, 유일한 존재 형식(only one form)으로서의 글쓰기의 위험

 

그래도 글쓰기는 사실상 많은 사람 사이에서 인정받는 창작 활동이다. … 글쓰기가 창조적이라고 가정되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직업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학자다. / 철학자들과 온갖 종류의 비평가를 비롯한 인문학자들에게 글쓰기는 그야말로 학술적 생산성을 가늠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책, 논문, 학술회의, 강연, 출판, 읽히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글로 쓰였음을 알리기 위함(not to be read but merely to have been written), 테뉴어, 승진을 위해… / 그런데 글쓰기의 특권은 인문학에 한정되지 않는다. 과학과 공학에서도 글쓰기는 실험과 건설 위에 창백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논문집, 상위 저널, ‘글로 작성될’ 때까지는 여전히 유효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는다. 동료평가(peer review), 족벌주의, 상업주의, 계몽주의적 이상, 평등주의적 엄정성(egalitarian rectitude)… (192-195)

 

학술적 생산은 글쓰기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 글이 학술연구를 판단할 가장 효과적이고 적절한 자료인가? 관행, 임의적, 우연히, … 글쓰기에 대한 교정되어야 할 학자들의 강박(obsession)의 문제 : 첫째, 학자들은 훌륭한 저술가가 전혀 아니다. 애매한 표현과 단절된 문장, 전문용어, 전반적인 불가해성, 난삽한 산문, 서투른 글쓰기, “학술적 중얼거림(academic mumblespeak)”, 제대로 인용도 못함, 둘째, 유일한 존재 형식(only one form)으로서의 글쓰기의 위험, 우리는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는 오랫동안 존속되어온 가정 – 여전히 당황스럽게도 인기 있는 의견이더라도 – 이 특히 악취가 나는(fetid) 의견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언어에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여타의 것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보증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195-197)

 

“당신이 설정한 구분의 유표 공간(marked space)에 속하는 것이 기표라면, 당신은 언제나 단지 이야기에 관해서 이야기하고(talk about talk) 기호(signs)와 기표를 지시할 수 있을 뿐이다. 전구와 광섬유 케이블, 기후변화, 줄기 두꺼비가 만들어내는 차이는 당신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기에 당신은 텍스트에 사로잡혀서 이들 텍스트가 실제로 실재하는 것들을 망라한다(exhaust the really real)고 믿을 것이다.” - 레비 브라이언트(평평한 존재론, 객체들의 민주주의, …)

 

비기호적 세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것의 고유한 견지에서” 접근해야 한다(approach the nonsemiotic world), 거대한 야외를 방문할 기회(opportunities to visit the great outdoors), … (197-198)

 

기호학적 강박, 논변에의 과도한 집착, 현학 취미(pedantry, 지나치게 규칙을 찾음/세세한 것에 얽매임), “철학하기(doing philosophy) : 어떤 철학 서적이나 논문이 (사물들이 결합하는 방식에 대한 상상력과 이해하기 쉬운 명확한 설명이 담겨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논증의 약점/결함을 재빨리 찾아내서 능숙하게 폭로하는 것” - 리처드 로티

 

심슨, 코믹 북 가이, 괴짜 현학자(nerd-pedant), 인터넷 트집 잡기(nitpickery), 대다수 학자의 대리 비난자, 참을 수 없는 궤변가들(insufferable pettifogs), 일반 대중 중 누군가가 모든 관념과 교류, 행위가 언어라는 체로 걸러지는 인터넷(댓글)에서 학술적 경직성과 가장 유사한 태도를 찾아내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 (198-200)

 

 

다른 한 방식, 『손으로, 생각하기』, 철학적 실천, 공작

 

의사가 의술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형이상학자는 존재론을 실천하는 사람일 것이다. 누군가의 신체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이상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의학에 관한 저널 논문을 읽고 쓰기만 했을 뿐인 의사를 신뢰할 개연성이 없을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본성에 관한 책을 읽고 쓰기만 했을 뿐인 형이상학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면 현상학의 기본적인 추진력과 취지는 적게는 오해될 개연성이 있거나 심하게는 상실될 개연성이 있다.” 그런데 얄궂게도, 지금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디는 그런 정서를 글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어떤 다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200)

 

매슈 B. 크로퍼드, 『손으로, 생각하기』, 시카고대학 정치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워싱턴 싱크탱크에서의 화이트칼라 경력을 그만두고 모터사이클 기계공이 된 까닭을 설명한다.

 

“나는 실제 지식이 실제 사물들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노동이 철학에 대한 광범위하게 입수 가능한 징후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그것의 가치는 오로지 어떤 더 세련된 경험을 가리키는 데에만 자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최선의 경우에는 어쩌면 노동 자체가 철학에서 추구되며 삶의 방식(a way of life)으로 이해되는 좋음(the good)에 접근할 것이다.”

 

크로퍼드의 경우에 지식과 노동(labor)은 대립적이지 않고 오히려 동전의 양면, 즉 상보적인 것들이다. 크로퍼드는 우리에게 철학이 이론만큼이나 실천(practice)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요청한다. 기계공과 마찬가지로 철학자도 자신의 손을 더럽혀야 한다. 『수학 원리』에서 버트런드 러셀과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수학을 행함으로써 논리학적 수학관을 탐구하는 그런 식으로 논리학이나 수학으로 손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또한 기름과 판코 빵가루와 포름알데히드(formaldehyde)로 손을 더럽혀야 한다. 나는 하나의 철학적 실천으로서 인공물을 구성하는 이런 실천을 공작(carpentry)이라고 명명한다. (200-202)

 

 

사물 만들기 making things 202

 

사물 만들기는 힘든 일이다. 가구,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모터사이클, … 어쩌면 공작은 더 엄밀한 종류의 철학적 창의성을 제공할 것이다. 바로 그 이유는 공작이 본질적으로 상관주의적 의제를 물리침으로써 오로지 낱말들을 눈으로 따라가면서 그것들에 함축된 관념들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 독자의 능력만을 다루는 일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 글쓰기가 페이지, 인쇄기, 출판사 그리고 여타 관련된 것의 물질적 제약을 받음은 확실하지만, 이들 인자가 글로 쓰인 철학의 내용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철학적 작업은 일반적으로 그 철학적 입장을 책으로서의 형식에 침투시키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작은 선택한 재료의 물질적 저항과 씨름해야 하고, 따라서 그 객체 자체가 철학이 되게 한다. (202-203)

 

에일리언 현상학의 맥락에서 ‘공작’은 두 가지 원천으로부터 그 의미를 차용한다. 첫째, 그것은 목공예(woodcraft)의 통상적인 의미를 모든 재료로 확대한다. … 둘째, 그것은 ‘사물들의 공예(“the carpentry of things)’에 관한 그레이엄 하먼의 철학적 의미를 이런 구성(construction) 행위에 포개 넣는다. 링기스와 하먼은 그 어구를 사물들이 서로를 빚어내고 세계 전체를 만드는 방식(how things fashion one another and the world at large)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 공작은 이들 두 관념을 혼합함으로서, 사물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만드는 방식을 밝혀주는 사물 만들기(making things that explain how things make their world)를 수반한다. (203-204)

 

 

철학적 소프트웨어 공작(philosophical software carpentry) : <라투르 리터나이저>, 이미지 토이

 

나는 현행의 논의에 특히 적실한 철학적 소프트웨어 공작에 대한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존재의 다양성을 특징짓게 되어 있는 존재도학적 도구이기에 이 책에서 논의된 원리를 실행하기 때문이다. 라투르의 열거(Latour litany)

 

“다음과 같이 열거된 것들을 이해하려고 해보자. 태양 흑점, 골짜기길, 항체, 탄소 스펙트럼. 물고기, 장식을 단 울타리, 사막 풍경. “작은 노란색 벽,” 인도산 잉크로 그려진 산악 풍경, 익랑들의 숲. 밤에 인간으로 변신하는 사자, 상아로 빚은 어머니 여신, 흑단의 토템. 

 

알겠는가? 우리는 동맹자들의 수 혹은 이질성을 이런 식으로 환원(reduce)할 수 없다. 자연들(Natures)은 서로 그리고 우리와 매우 철저히 뒤섞이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분리하여 그것들이 발휘하는 역능들의 명료하고 고유한 기원을 찾아내기를 바랄 수 없다.”

 

이 특정한 열거는 서로 확증하는 것에 깊이 저항하는, 놀랍고 직관에 어긋나는 단위체들로 가득 찬 멋진 것이다. 그런데 라투르가 그것들로부터 끌어내는 교훈의 기반은 그 선택의 인공적 본성에 의해 얼마간 약화된다. 어쨌든 이 열거의 무의미한 양태는 한 인간이 그것을 회집했다는 사실에 의해 손상된다. 그리하여 어떤 단순한 환원도 객체를 빈틈없이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 약화되는 것은 사실이기에 비환원을 예증하는 대안적 방법이 철학적으로 바람직할 것이다. (204-205)

 

1. <라투르 리터나이저(Latour Litanizer`)>, 위키피디아, 미디어위키(위키 소프트웨어 플랫폼, general-purpose authoring and editing platform), ‘무작위(random) 아티클’,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API 덕분에 프로그래머는 어떤 소프트웨어 시스템의 일부 행동(기능, 컨텐츠/데이터)을 그 시스템 외부의 프로그램(appl, DB)에서 가져올 수 있게 된다. 어떤(some) API는 내부(local)에서 작동한다(예를 들어, Windows나 Mac OS 같은 운영체제의 API는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머가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처리(render)하거나 파일 관리 (서비스) 루틴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한다). 미디어위키 같은 다른(Others) API들은 멀리 외부(afar)에서 원격 프로시저 호출(remote procedure call)을 가능하게 한다. <라투르 리터나이저>는 이런 API를 이용한 쿼리를 실행하여 그 결과를 객체 이름들이 이어지는 목록, 즉 라투르의 저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종류와 유사한 목록으로 회집한다. (205-207)

 

http://en.wikipedia.org/wiki/Special:Random

 

현존하는 단위체들의 유형의 다양성과 그것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동맹의 다양성을 확대한다. … 압축적 존재론의 다양성과 밀도가 새어 나온다. … 주요한 미덕, 즉 그 결과의 신속성과 다양성을 인쇄물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각의 새로운 열거와 더불어 존재의 다양성과 초연함이 심화할 뿐만 아니라, … 해당 객체에 대한 상세한 논의로 데려가는 링크를 통해서 후속 탐구 역시 초래된다. … 디드로주의적인 보편 지식(『백과전서, 과학-예술-기술의 구조적인 사전(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raisonné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étiers)』(1751~1772, 35권, 71,818개 항목, 3,129개 일러스트레이션))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오히려 기꺼이 내부에 모든 것 – 그것의 외관상 타당성, 적실성, 혹은 심지어 진릿값이 무엇이든 간에 – 을 허용하는 특성에서 비롯된다(allow anything inside). (208-209)

 

2. `이미지 토이(image toy)’, 플리커, 특정한 태그 조회, 객체, 사물, 물건(object, thing, stuff), 개별 사례들을 한 번에 하나씩 보여줌으로써 객체들의 다양성을 예시, 다양한 존재의 한 작은 단면이 펼쳐짐, 토끼 옷을 입은 한 여성(Playboy bunnies), 그 학장은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이 전적으로 대상화(objectification)와 관련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바로 그 웹페이지에 등장한 명백히 대상화된 여성(Given the apparently objectified woman right there on the webpage), 89% 백인 남성이 조직하고 출연하는 어떤 존재론 학술회의에 관한 웹사이트의 성차별주의적인 ‘토이’, 그 기능을 폐쇄하거나 혹은 그것의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알맹이를 빼버리고 그것을 신중하게 선택된 수십 장의 스톡 이미지, 즉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보증된 견본 이미지로 대체하고 싶은 유혹,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그 기기의 존재도학적 역능을 파괴함으로써 그것을 단지 시각적 장식품으로 축소할 따름일 것이다. 처음에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저항했다. 그러나 … 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고서 플리커 데이터베이스에 실행했던 검색 쿼리를 다음과 같이 변경했다:

 

options.Tags = “(object OR thing OR stuff) AND NOT (sexy OR woman OR girl)”

 

여성 혹은 소녀 혹은 섹시함은 다람쥐와 등대, 고무 덧신에 못지않게 존재론적 지위를 가질 수 없는가? (210-214)

 

이미지 토이의 홍보적 심미적 성취는 매우 명확하다. 그러나 그것의 철학적 성취는 평평한 존재론과 페미니즘이 서로 제기하는 난제에 관하여 그것이 제기하는 물음에서 비롯된다. 한편으로 존재는 젠더, 퍼포먼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인간의 정치에 관한 쟁점들에 개의치 않는다. 사실상 압축적 존재론은 모든 존재자가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를 공유하도록 요청하며, 이것은 많은 이론가가 정체성 정치의 문제에 대하여 취할 입장과 정확히 동일한 입장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현세적 사물의 짐은 여전히 압축적 존재론의 단순한 주문으로 만족스럽게 물리칠 수 없는 정치적 압력을 인간의 경험에 행사한다. OOO 심포지엄 웹사이트의 이미지 토이는 이들 물음에 대답하려고 거의 시도하지 않지만 공작에 힘입어 어떤 독특한 방식으로 그런 물음들을 제기한다. (214)

 

사물 만들기가 하나의 새로운 관념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타운 하우스 설계, 철학적 건축의 실천 (215)

 

 

철학적 실험 장비 philosophical lab equipment 215

 

도구 및 예술품과는 달리 철학적 공작물은 철학을 염두에 두고서 구축된다(is built with philosophy in mind). … 그것은 우선 하나의 이론이나 실험, 혹은 물음 – 조작될 수 있는 것 – 으로서 구성된다. 공작물은 철학적 실험 장비다. / 어떤 사물의 경험은 오직 그 사물이 주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철저히 추적하여 흑색 잡음과 객체의 내재적 경험 사이의 결합에 관해 사변함(speculating about the coupling between that black noise and the experiences internal to an object)으로써 특징지어질 수 있을 따름이다. 언어는 우리가 이런 관계를 서술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도구지만, 그것은 단지(only) 하나의 도구이기에 우리는 자신이 그것에 한정되어 있다고 느끼지 말아야 한다. (215-216)

 

복제하는 기계, 우주로 보내진 탐사선, computation, 플랫폼 연구, 아타리 VCS, <I am TIA>, 디컨스트럭튜레이터, 파이어버그 

 

공작을 수행하는 현상학자는 다른 한 기계가 겪는 경험의 단위조작을 복제하고자 하는 어떤 기계를 만들어낸다. 정보를 기록하고 처리하며 보고하도록 우주로 보내진 탐사선과 마찬가지로 에일리언 현상학자의 공작물은 자신이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포착하여 특징짓고자 하며, 그리하여 그 인공물의 조작자가 이질적인 사물의 경험에 대한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게 할 만큼 충분히 만족스러운 묘사를 제공한다. 본보기로서 또다시 나는 전산(computation)을 다루겠다. (216)

 

‘(컴퓨터) 플랫폼 연구’, 물질적 제약과 창의성, 문화 사이의 결합, ex) 아타리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VCS)의 그래픽 레지스터들의 특질은 텍스트 기반 <거대한 동굴> 게임을 <어드벤처>라는 그래픽 어드벤처 게임으로 각색하는 작업을 제약함으로써 그 장르의 관행을 확립하게 되었다. 행위자(actors)로서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초점 / 사실, 주변 세계에 대한 컴퓨터의 지각은 인간의 안구 혹은 시각 신경은 말할 것도 없고 캔버스 혹은 셀룰로이드와도 전혀 유사하지 않다. (216-217)

 

오실로스코프(XY display, a vector display, or a random-scan display) vs 텔레비전raster-scan display, individual scan lines), 1977년 아타리 VCS에 장착된 TIA(television interface adapter) 그래픽 칩(128B)은 프레임 버퍼(모니터에 표시되는 그래픽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를 제공하지 않음. 실행중인 아타리 VCS 프로그램은 텔레비전 디스플레이의 라인을 그리는 모든 순간 동안 ROM 데이터, 프로세스 상태, 그리고 그래픽-사운드 인터페이스 사이의 인터페이스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 인간의 시각에서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예상하게 되었을 것과 같은 종류의 이미지, 영화 같은 동영상의 감각을 느끼지만, 아타리 VCS 자체(itself)는 전체 화면에 해당하는 그래픽 데이터를 일거에 절대 지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레지스터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엇박자 난 리듬(syncopations)만을 포착한다. 그것의 부품들(6502 processor, TIA, RF conversion box) 역시 상황을 다르게 본다. (217-220)

 

<I am TIA>, TIA가 표준적인 이차원 컴퓨터 디스플레이의 렌즈를 통해서 바라본 세계상, 어떤 주어진 시간에 TIA가 계산하여 RF 어댑터로 전송하는 변조된 색상만을 제공, 그 칩의 경험 중 일부를 부각, 감속된 비유적 렌즈를 통해서 경험되는 기묘한 정적의 순간, 그것은 명령, 데이터, 생각, 암흑의 기운만을 지각할 따름이다. (221-223)

 

<디컨스트럭튜레이터(Deconstructulator)>,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NES) 에뮬레이터를 수정한 프로그램. 그 기계/카트리지 ROM에 있는 스프라이트 메모리, 비디오 메모리에 있는 스프라이트 데이터, 그리고 현행 팔레트 레지스터들의 현재 상태. 전체 NES 메모리 구조, 특히 그것의 스프라이트와 팔레트 시스템에 대한 조작적 분해도를 제공한다. (224)

 

<파이어버그(Firebug)>, 소스 코드 자체가 에일리언 현상학에의 진입로를 제공하는데, 특히 물러서 있는 단위체들의 내적 경험을 드러내도록 제작될 때 그런 진입로를 제공한다. 웹 브라우저의 렌더링 및 행동 체계의 내부 상태를 관찰하고 표시할 수 있게 하는 파이어폭스 웹 브라우저 플러그인 (224-225)

 

 

에일리언 탐사기 alien probes 226

 

<타블로 머신(Tableau Machine)>, 비인간 사회적 행위자, ‘어웨어 홈(Aware Home)’, ”거주자들의 행방과 활동을 지각하는 주택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에일리언 존재자(alien presence)’, 주변 환경(집)의 상태를 감지하고 해석하여 자신의 경험을 추상미술의 형태로 보고하는 전산적 행위자, “인간 지각과 해석을 모방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이질적인 비인간 시각을 일상 활동에 개방하고자 한다”, 그 집 자체(itself)가 하나의 단위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 집의 암흑 잡음의 가장자리를 추적함으로써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어떤 형태로 그것이 겪는 경험에 대한 literally 캐리커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타블로 머신>은 집의 기능이나 거주자들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일상생활에 대한 이례적인 관점을 개방함으로써 매력적인 대화와 성찰을 고무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But 그건 그렇다 치고, 계산기 학회 컴퓨터-인간 상호작용(HCI) 분과 학술회의의 저명한 회보에 출판하기 위해 그 프로젝트를 문서화한다. 컴퓨터-컴퓨터(주택-컴퓨터) 관계가 아니라 인간(human)-컴퓨터 관계, 인간의 목적과 경험에 사로잡힌 상관주의적인 분야) (226-229)

 

우주의 로봇 탐지기가 전파 신호를 수집하여 복사 특성을 정리한 다음에 우주 속 생명에 대한 진지하지만 불가피하게 오류가 있는 설명을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를 에일리언으로 전환하는 에일리언 탐지기로서 기묘한 시야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하여 기이하고 가늠할 수 없는 내부 논리에 따라 분석한 다음에 우리 외계에 대한 나름의 왜곡된 인상을 보고한다. (229-230)

 

<라투르 리터나이저>, <I am TIA>, <디컨스트럭튜레이터>, <파이어버그>, <타블로 머신>은 모두 에일리언 현상학과 관련된 인공물이다. … 그것들은 에일리언 현상학자의 과업이 글쓰기 및 말하기(writing or speaking)와 관련된 것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실험 및 구성(experimentation and construction)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232)

 

 

새로운 급진주의 a new radicalism  233

 

화이트헤드, “실제 세계에서는 명제가 참이라는 것보다 명제가 흥미를 끝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 라투르,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 그 반대의 모든 주장에도 불구하고 공예(craft)가 지식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 / 우리는 팅커벨의 요정 가루의 학술적 판본인 ‘엄밀성(rigor)’을 적용하는데, 적절한 양은 죽음을 용케 모면하면서 관심을 억제한다. … 너무나 오랫동안 철학자들은 물레처럼 실을 잣기보다는 오히려 금붕어의 괄약근처럼 쓰레기를 만들어내었다. (234-235)

 

진짜(real) 급진주의자들은 사물을 만든다 – 우루스타(내 책들을 개작하여 게임하기에 적절한 픽셀 아트로 요약), 알렉산더 갤러웨어(기 드보르의 보드게임 <전쟁 게임>을 컴퓨터 버전으로 완성), 퍼거스 헨더슨(‘머리부터 발끝까지 먹기’), 휴 크로퍼드(『월든』 실물 크기의 목재 오두막을 건축) / 이들 사례는 이론을 실천하는 일 이상의 것을 행한다(do more than put theory into practice). 또한 그것들은 이론으로서의 실천(practice as theory)을 나타낸다, 글쓰기가 흥미를 유발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is not the only)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창의성을 구성으로(creativity as construction), 즉 알려진 부분들로부터 새로운 무언가를 조립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 어쩌면 미래에는 크로퍼드의 예를 좇아서 급진적 철학자들이 자신의 주먹이 아니라 망치를 들어 올릴 것이다. (23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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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0 12: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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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enated Phenomenology
/ Motionless Arrival

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on July 9, 2013

An entertaining rollercoaster of incoherence and contradiction. Don't pay too much attention. But then again; do. It's thoughtless, incoherent fun. Bogost admits as much himself: `..speculative realism must also make good on the first term of its epithet: metaphysics need not seek verification, whether from experience, physics, mathematics, formal logic, or even reason.' And so he doesn't concern himself with these. Like John Law, whom he quotes, Bogost promotes `mess to a methodological concept.' Stripping his text [as he does objects] of relationality even to itself, structure and coherence over a larger scale can be disavowed. He teases such pedants: `Among the consequences of semiotic obsession is an overabundant fixation on argumentation, such that pedantry replaces curiosity.' This is an in joke running through the book, to catch out anyone who imagines this might be other than a jaunting romp.

Bogost grants all objects the same ontological status - as objects! And so demonstrates the ridiculousness of presumptive, self serving definitions. The book is a deliberately profuse bricolage, a random pile of gewgaws like the lists of things he fetishizes and pretends have nothing to do with him or his particular social environment and political context or personality. He is rife and undisciplined in his own speculations, going wherever his objects [whatever they are] take him; one moment apparently siding with things, the next abusing them as dumb, but always as a winking paraphrase of someone else he has skimmed and taken on board perversely. He evidences philosophers like CP Snow in a parody of appealing to authority to justify what he's saying. What he's actually saying doesn't matter because, `Things are independent from their constitutive parts while remaining dependent on them.' He's an anarchist and this verbiage is his parodic aim; disruptive of coherence or anything beyond the singular. He complains about the zoo-centrism of animal studies. He asserts, `all things equally exist, yet they do not exist equally,' and describes this as a tautology. Very funny. He similarly miscategorises and deliberately wrongly understands other ontologies. But he is free to contradict himself because, as he says, `anthropocentrism is unavoidable.'

Bogocentrism seems pretty much unavoidable too. The book is humanly affected and inflected throughout, not just anthropocentric but circumscribed by its author's particular viewpoint, which finds a transcendent access to things inherently impossible and yet equally denies their relational constitution. Perhaps precisely because the author is not reflexively aware of its own conditioning as an object in a particular political environment. Surrounded by ontological individualism, the author has difficulty accessing shared, subjective experience. He repeatedly characterises people and things [objects and subjects and the subjectivity of objects] as mutually inaccessible.

Bogost gives a comic and key metaphor of the author's entertaining struggle with the head-bound-ness of his own ego, which separates him from the experience of others and the objects he finds so inaccessible yet simultaneously rambling: `The embroiderable shorthand for tiny ontology might simply read, `is,' but only because semantic coherence cannot be contained in the tittle atop the i alone.'

When he mentions the object's withdrawal from others, he's obviously talking about himself - in spite of his appeals to how `we' experience the world; `we never understand the alien experience, we only reach for it metaphorically,' his is a circumscribed experience - generally of course, it is this projected use of the `we' which, by avoiding relativizing experience, keeps folks contained in their absolute alienation. `Units are isolated entities... rubbing shoulders with one another uncomfortably, while never overlapping.' His own inversion into a black hole, which he often refers to as a metaphor of the world's inaccessibility to his constitution, becomes his ontology. `I arrived at my metaphysics by way of inanimacy rather than life... A tiny, private universe rattles behind its glass and aluminium exo-skeleton.'

The `being-with' of Heidegger is overlooked in the appropriations of object oriented ontology, which repeatedly enplaces the independent subjectivities it can neither escape nor access: `object encounters are caricatures,' `objects recede from one another, forever enclosed in the vacuum of their individual existences.' This is very much an American experience; `One can never entirely escape the recession into one's own centrism.' Yet, even so: not the experience of all Americans. This book is a comic psychological study and valediction, showing how the author is transparently obsessed with his own particular human viewpoint, trapped like the things around him in their [to him] apparent self-containment, recession and small headedness in an air-conditioned nightmare. In this exculpatory confession, he demonstrates the exact neurosis that must be overcome. It's a practical book about alienated subjectivity. Bogost demonstrates the trap of imagining an independent existence. `All objects recede interminably into themselves.' This is his experience as a computer scientist involved with the objectification of ideal objects. This is a book in which an individual's psychology is revealed as their ontology. He experiences himself as a thing, with a thing's interiority, hoarding its own independent existence, like a sufferer at a Buddhist convention. `Things [including people] never really interact with one another...'

But self-explanation or sustained interpretive understanding is not his purpose, or, perhaps, he has decided that his theory is carried out best by demonstrating projective description as the foundationally presumed objectivity of objects - and purported object-subject/ subject-world independence which underpins every digression of the book and his thinking. It's the exact demonstration of a gerbil in a wheel or a neurotic in a consulting room or refried beans at Taco Bell.

Ironically, those moments in which Bogost does seem to transcend his much touted isolation are those in which he speaks about the sorts of objects he is most familiar with - so familiar that he seems [mysteriously to him no doubt!] to have actual sympathetic access to them [as if knowledge were all!] Once explained, these things seem to offer themselves as accessible and not self-hoarding. His descriptions of the inner [therefore no longer inner] workings of the Foveon sensor or the Television Interface Adaptor are tours-de-force in which he demonstrates OOO instead of bemoaning its inaccessibility. Equally, the injunction that next time you watch TV, watch the objects in a show and not its characters, is salutary. Bogost has sympathy for neglected things. Yet: `To acknowledge the garbage truck as object is to acknowledge the real object that isolates, while refusing to hold that it must always connect to any other in a network of relations.' As Margaret Thatcher said, `There's no such thing as society, only individuals.' OOO is a reactionary ideology which misunderstands its own derivative nature.

In a further contradiction, which further demonstrates his anthropocentric humanity, at the other incoherent extreme of this dualist bi-polarity, his work is richly sensual and indulges in a poetic replication and fetishization of things, which is a pleasure to read, though slightly disturbing. The first three pages and his general love of things are so patently demonstrative of him that they undermine the decentering project.

So, in sum, it's a comic, clever and incoherent ride which demonstrates the diverse ways in which things have written themselves on him - in that way that they have without you knowing it. He demonstrates how too much self-obsession, interiorisation and western-socialised outlook inhibits actually reaching objects or other subjects in their subjectivity -and this is the primary contemporary western social experience stripped of the relationality of humanism. The assertion of ontological individualism demonstrates the experience of the society that authored the work and represents that society's attempt to individuate and confine objects while simultaneously spouting their equality.

The analysis patently comes from a contemporary American perspective. What Bogost is talking about is his own access to himself and to things, as an American. This is constructed and delimited entirely by the understanding that it is - and so that's how things appear to be. The delimitations advocate the correlationism of the social construction of all reality.

Bogost fails to see that what he most describes is patently himself. He claims to be writing about the world and yet, at every moment, what he most reveals is his own conditioned subjectivity - perhaps it is the objects of American society that are avowing themselves and their view through him. The book's a contemporary product - rather cheap paper for the thirteen quid. From the isolation of this subjectivity, he repeatedly does the opposite of what OOO espouses; the outlook is not just anthropocentric but confined to that of a citizen circumscribed by the perspective of just one human culture.

`A fundamental separation of things is fundamental to OOO,' yes, and to contemporary consumer capitalism in its diversification of products and purchasers. This re-objectification of things and people is an attempt to re-establish the right-wing ontology that Adorno and Horkheimer critiqued in the Dialectic of Enlightenment; ratiocination as the alienated subject. In re-instating the inaccessibility of things-in-themselves, object oriented ontologists demonstrate a failure of sympathetic imagination [demonstrative of their position] which they flail in - drowning with lack of communion and fellow feeling; alienated by the consumer capitalism they simultaneously fetishize appealingly in their lists of commodities. Even after so may years of deconstruction of such a presumption, Bogost hangs on to the ideal that objectivity is a non-anthropocentric way of looking rather than a man-made thing.

A pity, because, if they were able to get out of this scopic fetishism, the fundamental project of OOO [the equality of all beings and the ground of being, taking up the relativity of all perspectives] could be a fruitful one. But they are condemned to consider this an outside and inaccessible world which they merely speculate about, with no access to its reality. `Speculative realism names speculative philosophy... that takes existence to be separate from thought...' and thought from existence. Poor things.

https://www.amazon.com/Alien-Phenomenology-What-Thing-Posthumanities/dp/0816678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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