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18
: 라캉, 알튀세르,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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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16년 10월 29일(토) door open 18:00 / alcohol talk 19:00

* 장소: 공중캠프
* 참가비: 무료 (알콜/음료 별도 구매, 안주/음식 반입 환영)

* 프로그램:
- (18:00~19:00) 충분한 알콜 섭취
- (19:00~20:00) 최원 - <라캉, 알튀세르, 페미니즘> 발제
- (20:00~21:00) 알콜 토크
- (21:00~24:00) 못다한 알콜 섭취


* <라캉, 알튀세르, 페미니즘> 개요 (최원)

프랑스의 대표적인 구조주의 이론가인 자크 라캉과 루이 알튀세르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 라캉은 정신분석가로 그의 나이가 71세가 될 때까지 부성적 상징 법칙의 수립이 갖는 지고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강조했었다. 또한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의 최후의 발전을 대표하는 철학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에 집중했으며 여성운동에 대한 언급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게다가 알튀세르는 62세가 되었을 때 그의 아내(엘렌느)를 비극적으로 교살했다. 비록 알튀세르가 가졌던 극심한 조울증에서 비롯된 정신착란 속에서 저지른 일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 사건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문제적이라고 의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두 사람의 이론과 페미니즘을 접근시키는 것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이론은 여전히 페미니즘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진전시켜줄 수 있는 중요한 원천이 되어줄 수 있다. 이들의 이론이 여성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에 의해 빈번하게 인용되거나 논의되어 왔다는 사실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현재 생존해 있는 가장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퀴어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는 라캉과 알튀세르에 준거하여 자신의 이론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그녀의 입장이 라캉과 알튀세르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과는 거리가 멀지만 여전히 그들의 이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요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책으로 한국에서도 이름을 널리 알린 우에노 치즈코도 저 책에서 라캉과 알튀세르에 대한 매우 우호적인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이론이 페미니즘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일까?

우리는 우선 라캉이 1972~73년에 여성의 성에 대한 『세미나 20: 앙코르』를 전후해서 그의 이론이 어떤 큰 변화를 보이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특히 이 세미나는 1968년 혁명을 계기로 터져나온 라캉학파 내의 여성 정신분석가들의 비판에 대한 답변이라는 성격을 갖는데, 라캉은 여기서 페미니즘에 대해 완전한 양보가 아닌 반발자국의 양보를 하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의 이론은 큰 변화를 보였을까? 이후 라캉은 『세미나 23』에서 ‘생톰’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여성 일반’을 상정했던 프로이트의 생각을 비판하고 ‘한 사람의 여성’에 초점을 맞출 때에만 어떤 모종의 사랑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한다. 이것의 함의는 무엇일까?

알튀세르와 관련해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대한 그의 논의가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의 실천 방향을 사유함에 있어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그의 주장은 비록 여성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지만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것을 역사적으로 분석해야만 여성의 문제 또한 온전히 사유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문제설정의 강점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단지 재생산의 관점이라기보다는 생산과 재생산의 접합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알튀세르의 작업을 실비아 페데리치의 작업과 연결시켜볼 것이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이 모든 문제를 충분히 다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간략하게 핵심적인 지점을 짚어 봄으로써 함께 고민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

 

* 진행: 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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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연구자.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캠퍼스 철학과를 졸업한 뒤에 뉴욕의 뉴스쿨대학교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시카고의 로욜라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현대 정치철학과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와 번역 활동을 하고 있다.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2016), 『알튀세르 효과』(2011), 『무엇이 정의인가?』(2011) 등을 공저했고, 워런 몬탁의 『알튀세르와 그의 동시대인들: 철학의 영속적인 전쟁』(근간),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 맑스 전과 후의 정치와 철학』(공역/2007)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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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Vino Veritas! (술 속에 진리가!)"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는 맥주 한잔 하면서, 느슨하고 흐릿한 기분으로 특정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비정기 프리 토크 이벤트입니다. 입과 귀, 앎과 삶이 분리된 강의/세미나,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내용과 과정, 학연/가방끈주의자들의 허세와 먹물질 등을 지양합니다. 쉽게 바뀌지 않는 익숙하고 오래된 습관을 목도하거나 다시 한 번 절망하면서, 새로운 형식과 모랄/리추얼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입니다.

 

[Brief History of 공캠x자캠 present "알콜토크"]

- vol.1 2013.03.09 - 후쿠시마와 우리
- vol.3 2013.11.15 - 맑스 재장전(Marx Reloaded)
- vol.4 2014.03.08 - 후쿠시마와 밀양
- vol.5 2015.05.02 - 세월호와 우리
- vol.8 2016.01.31 - <옥상자국>
- vol.12 2016.03.11 - <맨발의 겐>


공중캠프

2016.10.05 17:01:26
*.7.50.154

[참고]

라캉 또는 알튀세르: 『문화/과학』 제16회 북클럽 후기
http://blog.naver.com/virilio73/220776502756

“성적 관계란 없다”: 대문자 여자 대 하나의 여자(알라딘 인문학 스터디 ①)
http://blog.naver.com/virilio73/220801153483

재생산이라는 토픽으로 본 성적 관계(알라딘 인문학 스터디 ②)
http://blog.naver.com/virilio73/220803132365

공중캠프

2016.10.29 16:51:35
*.1.197.192

1. “성적 관계란 없다”: 대문자 여자 대 하나의 여자

<세미나 20>에서 라캉은 ‘여성적 주이상스’(jouissance féminine)를 인정

‘제2의 페미니즘’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1930~ ), 앙투아네트 푸크(Antoinette Fouque, 1936~ 2014), 미셸 몽틀레(Michèle Montrelay, 1937~ ) 등의 비판에 대한 대응

라캉의 이론 체계가 팔루스-로고스중심주의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라캉의 사유는 가부장적 질서에 해당한다는 것이죠.

욕망 그래프의 ‘기본 세포’(본문 20쪽)와 확장형 도식(‘케 보이’[Che vuoi?]/본문 84쪽)에 대한 자세한 설명

→ 라캉에게서의 은유와 환유
→ 누빔점
→ 대타자(여기서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는 아이
→ 아이의 ‘공격성’에 대한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
→ 영화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와 폭력
→ 폭력의 감축으로서의 ‘아버지-의-이름’
→ 농담과 거세
→ 안티고네와 성 테레사 조각상에 대한 해석
→ “성적 관계란 없다”라는 라캉의 테제에 대한 설명(<세미나 20>에서의 ‘사랑’과 ‘글쓰기’라는 토픽)
→ “편지는 항상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한다”라는 전기 라캉의 테제에 대한 설명
→ 성차 공식 등을 거쳐

뤼스 이리가레 - <반사경: 여성에 대하여>(Speculum: De l’autre femme, 1974), 특히 3부(“플라톤의 히스테리아”[L’ύστέρα de Platon])를 중심으로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해체

동굴의 ‘벽(면)’에 주목

여성(성)은 남성(성)을 비추는 반사경으로서, 그 자체로는 존재 의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오직 남성(성)의 자기 반성/깨달음의 계기가 될 뿐이죠(오로지 남성[성]에게 복무할 때에만 그 존재 의의/가치를 인정받은 무엇-!).

남성/여성, 양/음, 정신/육체, 이성/감성……. 여기서 빗금( / )이 이리가레가 말하는 동굴의 벽

남성(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여성(성) 고유의 상징질서, 혹은 남성(성)과 극복될 수 없는 차이를 지닌 여성(성) 자체를 찾아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즉, ‘성적 차이’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죠.

흔히들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평등’을 ‘남성[의 권리]과의 평등’으로 이해합니다. 요컨대 남성이 누리는 권리를 여성도 누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리가레는 남성(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성적 차이를 지닌 여성(성)에 근거해 여성만의 독자적 권리, 즉 여성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리가레 식의 본질주의적 주장 - ‘정체성[동일성]의 정치’로 환원
“(모든) 남성은 틀리고, (모든) 여성은 옳다”

“대문자 여자[Woman] 같은 것은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세미나 23: 생톰>(1975~76년 세미나/출판은 2005년)에서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질문인 “Was will das Weib?”(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를 “Was will ein Weib?”(어떤 하나의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대문자=유일한) 여성이 아니라 (복수적) 여성들의 존재(가난한 여성, 유색 인종 혹은 제3세계의 여성, 퀴어 등)에 대해 사유


2. 재생산이라는 토픽으로 본 성적 관계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혐오 발언>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1942~ ) <캘리번과 마녀: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

‘필요의 심리학적 주체’(에티엔 보노 드 콩디악)에 대한 설명(<라캉 또는 알튀세르>의 제3장[“알튀세르의 ‘실재’와 토픽이라는 질문”] 앞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알튀세르가 <정신분석학과 인문과학: 두 번의 강의>(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Deux conférences, 1996)에서 시도한 콩디악 비판을 설명
→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 대한 설명
→ 소쉬르의 언어학과 구조조의의 연관성
→ 구조주의 핵심 테제로서의 “요소들 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
→ 주체의 ‘영원성’이라는 환상
→ ‘발생(론)’과 ‘돌발’의 차이점
→ <자본을 읽자>에서 알튀세르가 제시한, 칼 맑스의 <자본>에 대한 설명(앞의 설명에 대한 예시)
→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호명’ 테제
→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에 대한 주디스 버틀러의 이해 방식(공통점과 차이점)
→ 알튀세르에 대한 버틀러의 문제제기(특히 ‘나쁜 주체’)
→ 미셸 페쇠(Michel Pêcheux, 1938~1983)가 제시한 ‘언어’와 ‘담론’의 구별에 대한 설명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가능성
‘여성 혐오’를, 혹은 ‘가부장적 질서’를 어떻게 전복할 것인가?

<혐오 발언>의 놀라운(!?) 주장 중 하나는 “혐오 발언에 대한 어떤 (국가적) 규제도 제정하지 말라”는 것
- 혐오 발언의 피해자들이 혐오 발언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혹은 ‘담론적 수행성’)을 법이 미리 제약해버림으로써 대항운동을 법적 문제로 축소시킨다.
- 국가는 자의적이고 편파적으로 혐오 발언을 정의하고 처벌함으로써 오히려 소수자 운동에 역효과를 낳는다.

혐오 발언(혹은 혐오발화자)의 힘/권력은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저항이 가능

혐오 발언이 그 피해자들을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하고 불구로 만든다는 견해(마리 J. 마츠다, 캐서린 매키넌, 레이 랭턴 등)는 혐오 발언의 힘/권력을 과대평가하는 것

알튀세르 역시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힘/권력이 전능하지 않다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지배 이데올로기(=1차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필연적으로 ‘오작동’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자체가 작동하려면 지배 이데올로기와는 그 성격이 다른 ‘외래적인 재료들과 이질적인 연료들’(=피지배 이데올로기/발리바르)을 그 자체 안에 통합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버틀러의 설명방식도 비슷합니다.

발화자와 수신자 사이에는, 혹은 (더 근본적으로는) 발화자의 의도와 발화 내용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혐오 발언의 피해자는 이 간극을 파고 들어가 혐오 발언의 힘/권력을 전복할 수 있다

혐오 발언자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혐오 발언을 되받아칠 수 있으며, 혐오 발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그 발언의 효과 자체를 교란할 수 있습니다(최원 선생님은 ‘깜둥이’[nigger], ‘게이’[gay]라는 말의 재전유를 예로 듭니다).

‘혐오(혹은 혐오 발언)’를 (발화)가능케 하는 물질적 기반에 대한 분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마녀사냥은 여성들로부터 신체를 박탈했다”라고 말합니다. 누가? 인구 규모가 국부를 좌우한다고 생각했던 중상주의 (남성)국가가. 왜? 여성들이 출산(재생산)을 통제하는 데 사용해왔던 수단을 악마적인 방법이라 몰아붙임으로써 여성의 신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제도화하고, 여성의 신체를 노동력 재생산에 종속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서. 페데리치의 설명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마녀의 이미지, 즉 색을 밝히거나(출산을 위해서가 아니라 욕정을 위해서 자신의 성을 이용하고), 이와 관련해 빗자루(=남성 성기)를 타거나, 출산을 못하는 추하고 늙은 여자로서의 이미지가 대중화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요컨대 마녀사냥은 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생산양식의 이행기에, 자본주의 사회에 필요한 (노동력) 재생산을 안정적으로 통제하려는 국가의 ‘(정치적) 기획’으로 번성했고, 이런 기획에 적합한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의 구축 과정 속에서 진행된 여성 길들이기(=착취)였다는 겁니다.

알튀세르의 사유가 (당대의) 페미니즘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호명’이라는 테제는 어떤 지배적 이데올로기(지금의 논의 맥락에서는 반-페미니즘 혹은 여성에 대한 혐오)가 결코 전능하거나 매끈하게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 지배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저항이나 반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 또한(그리고 특히) 알튀세르의 ‘생산과 재생산의 접합’이라는 테제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착취가, 혹은 여성 혐오가 단순한 관습이나 전통 혹은 문화(=가부장제)에 의해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재/생산관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초역사적) 가부장제냐 (자본주의적) 계급이냐?” 식의 (낡은? 오래된?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이분법을 뛰어넘어, 성차에 근거한 지배 체제를 생산-재생산과 관련지어 분석할 수 있게 해줍니다.

‘착취’를 위한 노동력의 재생산, 인구의 재생산의 조직화에 (이성애적) 성의 체제가 접합되는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그런 특정한 성(=남성)의 체제가 지배적이 되는 원인을 분석할 수도 있다

공중캠프

2016.10.10 19:15:25
*.1.197.192

[페이스북 이벤트]
https://www.facebook.com/events/1794120007467276/

공중캠프

2016.10.26 09:4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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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또.알 서평1] 이성민: 라캉과 알튀세르 다시 읽기
http://blog.naver.com/virilio73/220792163774

[라.또.알 서평2] 최진석: 논쟁의 재구성과 이론의 정치학
http://blog.naver.com/virilio73/220842737843

공중캠프

2016.10.26 09:51:37
*.223.3.203

[난장] 최원 지음, <라캉 또는 알튀세르> 서문(발췌)

도서출판 난장이 간만에(!) 국내 저자의 책을 발간했습니다. ^^;; 최원의 <라캉 또는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반폭력의 정치를 위하여>입니다-! 이번의 미리보기는 <라캉 또는 알튀세르>의 서문입니다. 제법 길기 때문에 각주 제외하고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포스팅하고(그런데 발췌한다고 해보니 사실상 거의 전문이 들어가버렸다는……쿠쿨럭), 전문은 pdf.파일로 만들어서 첨부파일에 붙여놨습니다. 책 전체의 윤곽이 궁금하신 분들은 첨부파일을 다운받으시면 됩니다. *^^*!


서  문

이 책은 2008~2011년 시카고 로욜라대학교 철학과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와 라캉의 구조주의 논쟁』을 번역·보완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루이 알튀세르와 자크 라캉의 논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핵심 메커니즘을 고찰한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뛰어난 프랑스 이론가들 사이에서 서로 어깨를 겨룬 이 두 사람의 이론적 수렴과 발산은 말 그대로 프로이트-맑스주의 역사의 중요한 한 국면을 규정했다. 1960년대 초 서로 동맹을 맺었을 때, 이들은 구조와 주체라는 질문을 공유하면서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 사이에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드는 결정적인 일보를 내딛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동맹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라캉은 곧 자신의 세미나(1968~69년)에서 알튀세르를 공개적으로 실명 비판하고, 알튀세르는 1976년의 에세이(「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 라캉의 이론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라캉의 전기를 쓴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는 알튀세르와 라캉의 입장 차이를 이렇게 묘사한다.

라캉은 알튀세르와 정반대로 나아갔다. 라캉이 상징적 기능이라는 레비-스트로스의 관념에 항상 새로운 애착을 보였다면, 알튀세르는 모든 친족적 상징성에서 탈출함으로써만 정초적 행위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라캉은 반대로 이런 탈출이 진정 논리적 담론을 생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담론은 정신증에 의해 침범당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많은 독자들은 이 구절 앞에서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제시된 두 이론가의 이미지는 독자들이 보통 옳다고 믿는 것과 정반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알튀세르는 주체가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어떤 기회도 불허한 고집스러운 구조주의자로 비쳐지는 반면, 라캉은 이런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진정한 비판가, 곧 ‘실재’의 환원 불가능한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어떻게 주체가 상징적 질서 전체를 전복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준 이론가로 비쳐진다.

물론 이런 독자들의 이해를 일반인들의 아무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1970)을출판하자마자 곧바로 구조주의자 또는 기능주의자라고 비판받기 시작했다. 이런 비판이 마침내 그 이론적 무게와 토대를 확보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슬라보예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발표해 그 타당성을 나름대로 논증해보였을 때였는데, 지젝은 정확히 알튀세르와 라캉의 비교를 통해 이를 달성했다. 출판된 지 20년이 훨씬 넘었지만, 지젝의 저 책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학문 공동체들이 알튀세르와 라캉을 이해하는 방식을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이안 파커 같이 지젝에 동조하지 않는 비판가조차 알튀세르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타당하며 라캉 자신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한다는 생각을 기꺼이 수용한다.

[……] 나는 정통 구조주의의 입장을 좀 더 완강하게 견지했던 것은 알튀세르가 아니라 라캉이라는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이 두 이론가의 이견 뿐만 아니라 동의의 지점 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바꿔 말해서, 구조주의라는 것 자체는 하나의 통일된 학파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알튀세르와 라캉이 구조주의와 맺었던 관계도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주체라는 범주를 ‘구성하는 위치’에서 ‘구성되는 위치’로 옮겨 놓으려 했던 한에서 그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구조주의자였다. 그들은 (주체의 능동성과 자율성까지 포함해) 주체의 범주를 단순하게 무효화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설명’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서 주체가 어떤 과정과 메커니즘을 통해, 구조에 특정한 방식으로 의존하면서도 여전히 스스로를 자율적이라고 인지하는 존재로 구성되는지 검토했다. 이렇게 그들의 공통 관심사를 분명히 윤곽 지은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알튀세르와 라캉이 각자의 이론화 작업에서 감행했던 상이한 선택지들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제1장에서는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제시한 알튀세르-라캉 논쟁 해석을 재검토할 것이다. 지젝은 주로 라캉의 욕망 그래프 안에 설치된 두 층(수준) 사이의 차이에 준거해 알튀세르-라캉 논쟁을 분석한다. 요컨대 지젝은 욕망 그래프의 아래층(1층)이 상징계의 확립을 설명한다면, 위층(2층)은 그런 상징계가 어떻게 실재에 의해 관통되는지, 구멍 뚫리게 되는지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르가 상징계 안에서 주체의 ‘소외’가 일어나는 아래층에 논의를 한정하는 반면, 라캉은 그 위에 한층을 더 추가해 실재(주이상스)의 차원을 도입하고 상징 그 자체로부터 주체의 ‘분리’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보여준다는 식이다.

나는 지젝의 이런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욕망 그래프의 아래층이 (상징계가 아닌) 상상계를 도식화하고 위층이야말로 상징계를 도식화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지젝의 오해는 라캉이 모든 주의를 기울여 구분한 두 종류의 상징을 혼동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곧 상상적 시기에 ‘미리 도착해 있는 상징’(아래층에 도입되는 모성적인 상징적 질서)과 ‘고유한 의미의 상징’(위층에서 상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는 순수 상징으로서의 부성적인 상징적 질서)이 그것이다. 이 둘을 혼동함으로써 지젝은, 라캉의 ‘분리’라는 개념이 단지 대타자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며 이런 분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아버지의 은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놓치게 되는데, 결국 지젝의 이런 체계적인 오해야말로 상징의 절대적 필연성을 주장했던 라캉의 구조주의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을 인지불가능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제2장에서는 라캉의 이론적 발전의 시기 구분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이 시기 구분이 중요한 까닭은, 라캉이 ‘아버지-의-이름’이라는 개념을 이론화하면서 상징의 절대적 중요성을 주장했던 초기(또는 초·중기)와 달리 후기에는 실재의 차원에 초점을 맞춘다는 지젝과 또 다른 이들의 주장 때문이다. [……] 나는 ‘후기 라캉’의 시기가 이들의 주장처럼 1950년대 말(『세미나 7: 정신분석학의 윤리』) 또는 늦어도 1960년대 초(『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인 1970년대 초(『세미나 20: 앙코르』)에 이르러서야 시작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

제3장에서는 알튀세르와 라캉이 1960년대 후반에 서로를 비판했던 텍스트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논쟁의 요점이 지젝이 이해한 것과는 크게 달랐다는 점을 밝혀낼 것이다. 실제 쟁점은 주체가 구조에서 분리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형성이 경제나 정치 같은 다른 사회적 실천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였다. 곧 그들은 주체와 구조 중 어디에 우위(또는 강조점)를 둘 것인가 하는 이론적으로 불모적인 질문 대신, 상이한 사회적 심급 간의 접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
다. [……] 

알튀세르의 제자인 미셸 페쇠가 나중에 보여주듯이, 일반 이론들(특히 담론 이론)을 구축하려는 알튀세르의 시도는 이데올로기적 투쟁과 반역이라는 질문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언어’(그 자체로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기표들의 집합)의 수준과 ‘담론’(똑같은 기표들로 구성되지만 매우 정치적이 되는 기표들의 상호결합·접합들의 집합)의 수준을 개념적으로 구분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언어의 수준에 갇힌 관념적 이항대립들(랑그/파롤, 구조/주체, 필연/우연)로 퇴행하지 않으면서 이데올로기적 반역을 이론화할 수 있는 길을 준비했다.

제4장은 이 책의 결론을 이루는 장으로 나는, 알튀세르가 저항과 해방의 정치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라캉보다 좀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가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알튀세르는 주체라는 아르키메데스의 점, 형이상학적 외부를 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데올로기 자체에 내재해 있는 반역의 가능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던 이론가였다. 물론 나는 알튀세르가 이 문제를 사고하는 데서 곤란에 부딪혔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젝의 해석처럼 ‘호명 너머’에 위치해 있는 라캉적 ‘무의식의 주체’라는 관념을 거부했기 때문에 알튀세르가 이런 곤란에 부딪혔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알튀세르의 곤란은 고전적 맑스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 가졌던 너무나 자명한 생각, 곧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라는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데서 비롯됐다. 이 동어반복적 정식화는 지배 이데올로기 자체에 내적으로 기입되어 있는 갈등과 모순을 충분히 분석하는 것을 …… 곤란하게 만들었다. 나는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인 에티엔 발리바르가 1978년에 벌인 논쟁을 검토함으로써 알튀세르의 전반적인 노선에 충실하면서도 반역의 문제에 관련된 알튀세르의 곤란(이것은 곧 맑스주의적 이데올로기론 그 자체의 아포리아이다)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사유해보고자 한다.

그렇지만 라캉과 알튀세르의 차이에 대한 이 모든 지적에도 불구하고 나의 입장은 라캉의 문제설정을 기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정반대로 나는 라캉에 대한 주류적 해석들과 거리를 두면서 라캉을 극단적 폭력의 쟁점과 대결한 시민공존(civilité)의 이론가로 보자고 제안할 것이다. ‘아버지-의-이름’에 대한 라캉의 유명한 정식화는 극단적 폭력을 감축하는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의 긍정적 차원을 인식하려는 이론적 노력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런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혁명 정치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튀세르가 말년에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해 쓴 유고작을 읽으면서 나는, 알튀세르가 실제로 이런 라캉의 이론적 근본 구상에 이끌렸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시민공존은 1990년대 후반부터 발리바르가 사고의 중심축으로 삼아온 정치의 세 개념 중 하나를 이루는 것으로 라캉의 논의는 여기에서 중요한 이론적 준거 가운데 하나로 전유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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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6 09:5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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