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 공중캠프 presents 알콜토크 vol.29
: <알랭 바디우의 연극론>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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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20년 6월 30일 ~ 9월 8일 (매주 화요일) door open 19:00 / alcohol talk 19:30 ~ 21:30
(8/11 휴강, 세미나 진행 상황에 따라 일정이 조정될 수 있습니다.)

* 장소: 공중캠프 (마포구 와우산로 150 2층) & zoom (451 448 0591)
* 진행: 고해종 (단국대 공연영화학부 강사, 철학극장 연출)
* 교재: 알랭 바디우, <베케트에 대하여> (민음사)
* 회비: 무료 (공중캠프 술/음료 주문)


[참가신청 방법] 

고해종 님께 이메일( zeitgeist523@gmail.com ) 혹은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주세요.

(https://blog.naver.com/nachtzug523/221998017840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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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는 그 철학적 명성에 비하자면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극작가이다. 하지만 연극은 그의 사유와 삶을 연결하는 통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에게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연극론은 바디우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그는, 마치 그가 모든 ‘포스트모던’한 철학에 대해서 진리와 주체라는 범주를 포기하지 않듯이, 그가 ‘민주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현대 연극 담론의 헤게모니에 대해서도 연극 자체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며 “연극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그리고 “오늘날 연극은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변할 수 있는 고유한 경로를 세공해낸다.

본 세미나에서 주 교재로 다루고자 하는 『베케트를 위하여』는 바디우의 연극론을 살펴볼 수 있는 소수의 국역서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 책을 중심으로 알랭 바디우의 연극론을 그의 철학과의 연관 속에서 읽어보고자 한다. 이로써 바디우에게 있어서 연극 그 자체가 갖는 사유로서의 지위, 즉 연극이 진리를 향한 주체의 시간성 자체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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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별 계획]

1주차 (6/30)
  1) “연극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바디우의 대답
  2) 연극의 현재에 대한 바디우의 진단

2주차 (7/7)
  1) 실재에 대한 열정과 20세기의 주체성
  2) 실재에 대한 열정의 예술사로서 아방가르드

3주차 (7/14) (pp.1~25)
  1) 랩소디: 바디우의 연극론
  2) 주체라는 특이점과 연출-기능

4주차~5주차 (7/21, 28) : 『베케트에 대하여』라는 텍스트의 구축 
  1) 유적인 것의 글쓰기 (pp.26~48)
  2) 유적인 것의 글쓰기 (pp.49~73)

6주차 (8/4) : 존재의 장소와 진리에 대한 물음 (pp.75~97 외)
  1) 닫힌 장소/열린 장소
  2) 경계로서의 회색 암흑

7주차 (8/18) : 주체와 사건에 대한 물음 (pp.98~120 외)
  1) 회색 암흑으로부터 주체 물음의 소환
  2) 멋진 3인조
  3) 『잘못 보이고 잘못 말해진』
  4) 사건의 사건성/시간성

8주차 (8/25) : 사랑에 대한 물음 (pp.121~154 외)
  1) 베케트의 강한 정신(esprit fort)
  2) 0, 1, 다수/다자/무한

9주차 (9/1) : 진리를 향한 주체의 시간성 (pp.155~196 외)
  1) 진리를 향한 주체의 시간성으로서 연극

10주차 (9/8) : 사랑과 공물의 정치 (pp.197~243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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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Vino Veritas! (술 속에 진리가!)" [알콜토크]는 맥주 한 잔 하면서, 느슨하고 흐릿한 기분으로 특정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비정기 프리 토크 이벤트입니다. 입과 귀, 앎과 삶이 분리된 강의/세미나,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내용과 과정, 학연/가방끈주의자들의 허세와 먹물질 등을 지양합니다. 쉽게 바뀌지 않는 오래된 습관에 절망하면서, 새로운 리추얼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입니다. (물론, 술을 원하지 않는 분은 소프트 드링크(Non-Alcoholic Drinks)를 마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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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ef History of "알콜토크"]

vol.1 2013.03.09 - 후쿠시마와 우리
vol.4 2014.03.08 - 후쿠시마와 밀양
vol.5 2015.05.02 - 세월호와 우리
vol.8 2016.01.31 - <옥상자국>
vol.12 2016.03.11 - <맨발의 겐>
vol.20 2017.03.11 - <핵의 나라 2>
vol.21 2017.07.28 - <전공투>
vol.27 2020.03.07 - <실록 연합적군>
vol.28 2020.03.26 - 사르트르, <닫힌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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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리듬을 믿고(この胸のリズムを信じて)", "우리는 걷는다 단지 그뿐(ぼくらは步く ただそんだ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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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10: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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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1 16: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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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유적인 것에 대한 글쓰기: 사뮈엘 베케트

명령과 명령의 운명/ 존재의 장소로서 회색 암흑/ 고문으로서의 유아론적 주체에 대해/ 1960년 이후 베케트 작품들의 변동/ 사건, 의미, 명명/ 주체의 형상들과 성을 구분하는 방식들/ 사랑과 그 수적 성격: 하나, 둘, 무한

2장 베케트: 지칠 줄 모르는 욕망

어떤 ‘젊은 멍청이’/ 아름다움/ 방법적 고행/ 존재와 언어/ 고독한 주체/ 사건과 그 이름/ 타자들/ 사랑/ 향수/ 연극/ 다시 아름다움……

3장 도래하는 것

도래하는 것

4장 존재, 실존, 사유: 산문과 개념

언어들 사이와 존재의 속기록/ 말하기, 존재, 사유/ 필수적인 사유-셋/ 질문, 혹은 질문의 조건들/ 존재와 실존/ 말하기의 공리/ 유혹/ 악화시키기의 법칙들/ 악화시키기의 실행들/ 방향을 유지하기/ 더 나빠질 수 없는 공백/ 나타나기와 사라지기. 움직임/ 사랑/ 나타나기와 사라지기. 변화. 두개골/ 두개골로서의 주체. 의지, 고통, 기쁨/ 주체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사건

공중캠프

2020.07.21 16:22:36
*.70.50.243

1장 유적인 것에 대한 글쓰기: 사뮈엘 베케트

명령과 명령의 운명

「나쁜 시구들」(1976)

흐름으로 인해
모든 것은
존재하면서도,
모든 것,
따라서 그것은
심지어 그것조차,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자.


말하는 것, 명령, 글쓰기, 이야기, ... 사물이 자신이 존재하는 자리와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은 흐름의 이미지 속에서 주어진다. (10)

글쓰기는 사물이 그 흐름의 비-존재로 인해 요구되는 소멸의 순간에 자신의 안정성에 대한 결정 불가능의 질문에 노출되는 지점에서 형성될 것이다. / 만약 그 명령이 극히 일반적으로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사물의 균형과 쏠림 사이의 동요를 재는 저울이라면, 이 끝없는 명령이 다루어야만 하는 것은 결국 많은 질문들로 탈바꿈된다. (10)

『아무것도 아닌 텍스트들』(1946-1950), “내가 갈 수 있다면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존재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일 것인가? 내게 목소리가 있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질문을 관통하는 나의 세 가지 층위(instance), 여정(가는 것)의 인간, 부동성(있는 것)의 인간, 독백(말하는 것)의 인간

유적인 것(le générique)을 향하는 베케트의 근본적인 경향, ... 이 ‘유적인’ 욕망은 경험의 복잡성을 몇몇 주요한 기능들로 축소하는 것, 글쓰기를 통하여 본질적 규정을 구성하는 것만을 다루는 것, 장식들의 감산, 유적인 글쓰기의 픽션을 실재화하는 등장인물들, 잃어야만 하는 것의 목록, ‘재앙들’, 비극적인 황폐함, 부조리한 포기 상태, 소유물들을 존재와 의미의 유일한 증거로 간주하는 소유주의 관점, 초라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주체, 모든 장식들을 어쩔 도리 없이 잃어버리는 데 성공한 주체, 형이상학적 거지라는 ‘허무주의적’ 세속성에 비추어 베케트를 해석하는 경향은 거부되어야 한다. / 초라함이라는 픽션의 장치는 ‘등장인물’들의 현시를 점진적으로 정화시키는 작동인이다. ... 산문을 은폐된 시에 종속시키는 일종의 균열 (11-13)

운동, 정지, 로고스, 동일자와 타자의 문제, 특히 타자의 실재적 또는 잠재적 실존의 문제, 플라톤, 『소피스테스』, 다섯 가제 최고류, 인류 그 자체의 공리계를 위한 지표들, 네 가지 질문 (14-15)

1) 존재의 장소 또는 더 정확하게는 존재의 진리의 픽션에 대한 질문. 존재의 진리는, 어떻게 해서 그의 장소에 대한 픽션 속으로 들어가는가?

2) 베케트에게는 본질적으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인, 주체에 대한 질문. 주체는 어떤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의 정체성 확인에 도달하기를 희망할 수 있는가?

3) 일어나는 것, 도래하는 것에 대한 질문. 부동의 존재에 대한 보충, 즉 사건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이 질문은 베케트에게 언어 능력에 대한 질문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일어나는 것 또는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는 것으로서 명명하는 것은 가능한가?

4) 둘의 실존 또는 타자의 잠재성에 대한 질문. 이것은 모든 베케트의 저작들을 궁극적으로 이어 주는 질문이다. 유아론(唯我論)의 초과분이라 할 수 있는, 실제적 둘(Deux)은 가능한가? 또한 이것은 사랑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공중캠프

2020.07.21 16: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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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장소로서의 회색 암흑

첫 번째 장소 설정은 닫힘이다. ... 그 목적은 닫힘의 기호 아래 ‘보이는 것’이 ‘말해진 것’과 같은 외연을 갖는 것이다. (16-17)

닫힌 장소, 말하기 위해 알아야만 하는 모든 것이 알려진. - 「스스로를 보기」

또한 전혀 다른 장치도 있다. 이는 정반대로, 열려 있는 지리학적 공간, 여정의 공간, 다채로운 여정의 공간이다. 방황의 공간, 정화, ‘회색 암흑’ (17-18)

존재에 대한 사유를 위치 짓는 이 회색 암흑 속에서 작동하는 것은, 열린 또는 방황하는 공간과 닫힘 사이의 점진적인 융합이다. 반변증법적, 반데카르트적 진술 (19)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내 생각에 모든 거짓된 것은 한층 더, 다른 모든 개념들과 구분되는 명석판명한 개념들로 환원된다. - 『몰로이』

만약 회색 암흑이 존재의 위치를 정한다면, 존재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 것, 구분되지 않는 것에 대한 사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분리하고 구별하는 것, 예를 들어 어둠과 빛을 분리시키는 것은 오히려 비-존재와 거짓의 장소를 구성한다. / 회색 암흑을 통한 장소 설정은 결국 존재의 존재를 분리 가능한 독특성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공백으로서 말하게 한다. (20)

“더 나쁜 곳을 위하여”(Worstward Ho), 공백으로서의 존재는 언어의 수준에서 실존하지 않고, 모든 층위(degré)를 벗어나 있다. / ‘말해진 것’과 ‘잘못 말해진 것’, said와 missaid 사이의 언제나 가능한 동치, 잘 말하기와 잘못 말하기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말하기의 본질로서의 잘못 말하기, “모든 언어는 언어로부터의 괴리”(몰로이) / 실존은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존의 존재는 의미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있고, 언어의 수준에서 실존하지 않는다. (21)

‘그것을 이야기하자’는 존재의 장소에서, 실존과 실존의 존재 사이의 결정 불가능한 구별을 견지하는 회색 암흑의 장소에서 작동해야 한다. / 만약 실존이 구별되지 않는 회색 암흑의 장소에서 존재가 현시된다면, 이 현전은 환상(회의론적 테제)도 아니고, 말할 수 있는 이해, 진정한 이해(독단론적 테제)도 아닌 개념 없는 확신이라고 규정될 것이다. (22-23)

공백에서 코기토로 나아가는 운동, 추적하는 자와 추적당하는 자의 동일성, 눈과 사람의 동일성,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24-25)

모든 낯설고 동물적인, 인간적이고 신적인 지각에서 벗어난 존재는 스스로 지각된 채 유지된다.
모든 낯선 지각을 제거함으로써 비-존재를 구함은 없앨 수 없는 자기 지각에 부딪힌다.

공중캠프

2020.07.21 16: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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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으로서의 유아론적 주체에 대해

코기토의 닫힘을 다루는 허구적 장치, 부동의 목소리라는 장치, 몸이 거주지를 지정해 주는 목소리라는 장치, 완전히 고정된 몸속에, 메아리도 없고 대답도 없이 끈질긴 목소리 속에 이중으로 에워싸인 ‘나’는, 정체성 확인의 길을 찾는 데 끝없이 열중한다. (26)

유아론(唯我論)적 목소리, 본원적 침묵, 산 채로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 희망 없는 반복, 코기토의 조건들 또는 사유의 사유의 조건들, 자신의 침묵에 대한 고백이 그에게 강요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나는 생각한다.’가 자기 자신의 사유하는 존재를 표시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사유가 스스로를 사유의 사유로 포착하고자 한다면, 그때 공포의 지배가 시작된다고 베케트는 강조한다. “나의 사유는 사유되었고, 나는 완벽하게 죽었다.” (말라르메) (27-29)

모든 공포가 그런 것처럼, 이러한 공포 또한 개념 없는 명령으로 주어지고, 중단 없고 출구 없는 반복을 강제한다. “계속 해야 한다, 난 계속 할 수 없다, 난 계속할 것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29)

코기토의 삼원성, 언술 행위의 주체, 수동성의 주체, 정체성 확인의 질문을 지탱하는 (질문하기의) 주체, 멋진 삼인조(언술 행위, 수동적인 수용, 질문), 존재의 공백, 아무 가치 없는 무(無), ... 모든 질문은 가치 제체를 끌어내고, (대답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만약 마침내 우리가 모든 질문 이전에 있었던 것, 다시 말해 회색 암흑 같은 존재를 되찾을 뿐이라면, 얻어 낸 가치란 없다. (30-32)

질문이 폐지된 장소 또는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 아무것도 아닌 텍스트들, 글쓰기가 내세울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케트는 계속했다. ... 확신하건대, 이 지속은 진정으로 예술적이고 지적인 변동을, 더 정확하게는 사유 안에서의 방향의 수정을 거쳐 갔다. (33-34)

공중캠프

2020.07.21 16: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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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이후의 베케트 작품들의 변동

속견에 빠진 평론이 말하는 것처럼, 베케트의 기획이 항상 ‘절망’, ‘허무주의’, 의미의 패배 속으로 더 깊이 빠져 버렸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틀렸다. / 베케트는 산문을 매개로 하여 문제들을 다룬다. (35)

『그것이 어떻게』, 이 텍스트는 고문하는 코기토와의 대면 그리고 존재의 회색 암흑의 중립성과의 대면과 절연한다. 이 텍스트는 전혀 다른 범주들에 의존하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있었지만 이 작품에서 새롭게 다뤄진 ‘일어나는-것’의 범주,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아론적 유폐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것을 이동시키는 타자성, 만남, 타자(Autre)의 형상이라는 범주이다. (36)

주체의 입장들에 대한 형상적 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체성 확인의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의 출현, 주체의 가능한 위치, 주체의 형상들에 대한 열거일 것이다. 주체는, 스스로에 대한 무궁무진하고 헛된 허구적 성찰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만남들과 마주한, ‘일어나는 것’과 마주한, 타자라는 갑작스러운 놀라움 속에서 존재를 보충해 주는 모든 것과 마주한, 그 배치의 다채로움 속에서 나타날 것이다. (36-37)

유적인 것에 대한 글쓰기, 인류의 유적 진리, ‘잠재적인 시’, 텍스트가 시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시에 의한 산문의 전복, 픽션이라는 운명의 전복, 위반 없는 전복 (37-38)

더 추상적 관점에서, 베케트의 진전은 ‘하나’의 프로그램(결렬한 도정 또는 끝날 수 없는 독백)과 무한으로 열린 둘이라는 테마의 함축성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38)

타자의 문제에 대해, 이 새로운 기획은 실패의 확인과 성공적인 일시적 호전들 사이에서 동요한다. ‘행복’, 긍정, 열림 / 사실상 두 번째 시기 베케트의 저작들은 성공과 비성공, 만남과 비만남, 타자성과 고독을 무심히 지탱하는 우연을 향해 열린다. 숙명이라는 은밀한 도식으로부터 치유, 결별로부터 있는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우연적 가능성으로의 열림, “우리는 있는 그대로야.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말야.”, “불모의 땅, 그러나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 (39-40)

존재와 자기의 전체 안에 있는, 이러한 손상된 틈은 무엇인가? 그곳에 무엇이 버티고 있으며, 주체의 비-전체인 동시에 존재의 단조로움을 보충하는 은총은 무엇인가? 이것은 사건에 대한 질문, ‘일어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는 어떠한가?’ 또는 ‘말에 사로잡힌 주체는 자신의 침묵하는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이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무엇인가가 일어나는가?’ 더 정확하게는 ‘존재를 탈전체화하고, 주체를 그 동일성의 숙명에서 뿌리 뽑는, 계산 불가능한 도래, 돌발을 명명할 수 있는가? (40)

공중캠프

2020.07.21 16:29:21
*.70.50.243

사건, 의미, 명명

일어나는 것에 대한 질문, 돌발하는 것으로서의 사건을 사유하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베케트의 아주 오랜 텍스트들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41)

『와트』, 노트 씨의 집, 매듭과 엮임에 대한 알레고리적인 구조적 장소, 불변의 장소, 전체 또는 법과도 같은 존재, 현전과 의미를 아주 촘촘한 방식으로 매듭짓기에, 보충이나 감산을 통한 그 존재의 어떠한 손상도 생각할 수 없다. / 에피소드(incident), 실재적인 것, “형식적 명확성으로 빛나고, 그 내용은 가늠할 수 없다.”, 피아노 조율사와 그의 아들의 방문, 개들을 위해 음식 찌꺼기가 담긴 냄비를 문 앞에 놓는 것 등 ... 와트는 그러한 내용에 대해 여러 가설을 세우려고 몹시 고심하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사유는 깨어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목소리의 고문과도 같은 강제 아래 있는 코기토가 아니라, 에피소드들의 내용을 그 빛나는 형식의 수준으로 가져가기 위해 동원되는 계산과 예측이다. (42-43)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문제틀에 사로잡힌 채로 남아 있다는 한계, 해석을 잘 이끌고 가서 에피소드를 의미로 이루어진 우주에 연결시키는 것, 에피소드의 통역사 또는 해석학자, 통역사가 의미의 부여자라면, 우리는 법으로서의, 명령으로서의 의미의 포로로 남는다. 통역사는 처음에는 자신과 분리되어 있던 것, 다시 말해 노트 씨의 집이라는 의미로 이루어진 우주와 에피소드의 연결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43-44)

『게임의 끝』, 일어나는-것을 의미에 속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 의미의 망 안에서 사건을 고정시키려 했던 최초의 해석학을 명명이라는 전혀 다른 작용으로 대체한다. ... 명명은 도래하는 것의 공백 자체로부터 창안된 이름을 끌어낼 것을 제안한다. (45)

『잘못 보이고 잘못 말해진』, ‘잘못 보이고’가 말하는 것은, 도래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의 장소의 가시성 법칙 외부에 있다는 점이다. 진정 일어나는 것은 (이 표현이 갖는 도덕적 의미를 포함하여) 잘 보일 수 없다, 왜냐하면, 잘-보이는-것은 항상 존재의 회색 암흑 속에 배치되는 것이고, 따라서 에피소드-사건이 갖는 고립과 놀라움의 능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못 말해진’은 무엇을 뜻하는가? 잘-말하는-것은 바로 확립된 의미의 질서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일어나는 것 자체로서의 일어난 것의 이름, 잘못 보이는 것의 이름을 생산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 이름은 장소의 단조로움에 부여된 의미들에 매여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따라서 잘못 말해진 것의 등재에 속한다. ‘잘못 보이고 잘못 말해진’은, 보이는 것에서 벗어난 ‘잘못 보이는 것’과 의미에서 벗어난 ‘잘못 말해진 것’ 사이의 가능한 일치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사건과 그 이름의 시학 사이의 일치가 문제인 것이다. (45-46)

“조사하는 동안 갑자기 들리는 소음, 쇠약한 쓰러짐, 고문, 희망의 미광, 겸허한 시작의 은총” (46)

진리의 장은 이렇게 열린다. ... 그 지점에서 주체는 폐쇄성의 울타리를 허물고 타자의 위협, 타자가 출현하는 위협, 타자의 형상의 위협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론적 타자성에 의해, 사건의 급작스러움을 명확하게 하는 존재 안의 균열에 의해, 잘못 보이는 것의 빛남에 의해 열린 희망의 신호 아래서 이루어진다. (48)

공중캠프

2020.07.28 14:32:46
*.70.50.243

주체의 형상들과 성을 구분하는 방식들

『박탈자』에서 장소는 큰 고무 원기둥인데, 그 안에는 경험적으로는 관찰할 수 있지만 개념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엄격한 법칙들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빛과 소리, 온도를 조절한다. 폐쇄성과 합법성의 조합으로 축소된, 정화되고 단순한 우주인 것이다. 그 안에는 자신의 박탈자를 찾으라는 유일한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다. ... 명령이란 타자를 찾는 것, 더 정확히 말해 자신의 타자를 찾는 것이다. (49-50)

네 종류의 주체들, 1)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추적자들 2) 이따금 멈추는, ‘쉬는’ 추적자들 3) 완전히 정지해 있거나 아주 오랫동안 정지해 있는 추적자들 4) 추적하지 않는 자들, 패배자들 (51-52)

주체의 네 가지 형상적 태도, 1) 자기 가방을 가지고 어둠 속에서 방황한다. 2) 능동적인 입장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암흑 속에서 그의 앞에 떨어진다. ‘집행자’의 입장 3) 만난 사람에 의해 암흑 속에 꼼짝없이 버려진다. 4) 수동적인 입장에서 누군가와 만난다. ‘희생자’의 입장, 목소리가 끝내 말하지 못함, 진리의 4분의 3 (54-55)

첫 번째 정리: 오로지 여성만이 여행한다.
두 번째 정리: 암흑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이는 남성이다. (57)

공중캠프

2020.07.28 14:32:55
*.70.50.243

사랑과 그 수적 성격 - 하나, 둘, 무한

... 내가 이해하기로 서로 만난다는 것, 그것은 아무리 강한 감정이라도, 그것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고, 어떤 과학이라 하더라도, 몸이 아는 모든 것을 넘어선다. - 『머피』

만남을 통해 개시된 둘, 사랑이 그 진리를 실행하는 둘은 그 자신에게 닫힌 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둘은 통로이고 중심점이며, 최초의 수적 성격이다. ... 사랑의 둘은 타자성 일반에 대한 우연적 매개이다. 그것은 코기토적인 일자의 단절과 침입을 유도하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 만족하지 못한 채, 존재의 한계 없는 다수를 향해 열린다. (60)

네 가지 기능들, 사랑 속에서 주체의 네 가지 형상들, 유적 절차 모두를 조직화하는 기능들, 1) 방황, 여행 2) 부동성 3) 명령 4) 이야기 (65-66)

남성적 극성, 부동성의 기능과 명령의 기능의 조합, 이름의 말없는 수호자
여성적 극성, 방랑과 이야기의 조합, 이름의 무한한 펼쳐짐 (67)

사랑 안에는 우선 유아론의 하나(일자)가 있다. 이는 말의 무한한 반복 속에서 코기토와 존재의 회색 어둠이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만남이라는 사건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명명하는 계산 불가능한 시 속에서 도래하는 둘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둘이 가로지르고 펼쳐내는 감각적인 것의 무한이 있다. (68)

예술 안에는 쾌락(plaisir)이, 과학 안에는 기쁨(joie)이, 정치 안에는 열정(enthousiasme)이 있고, 사랑 안에는 행복(bonheur)이 있다. (69)

유적인 것의 글쓰기, 삶과 가시적인 것의 불행에서 공백을 옳은 것으로 부추기는 행복으로의 이행을 예술 안에서 보여 주는 것이다. 거기서 필요한 것은 만남의 측정 불가능한 힘, 명명의 도박, 방황과 고정성의 조합, 명령과 이야기의 조합이다. (73)

공중캠프

2020.08.25 17:5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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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베케트: 지칠 줄 모르는 욕망

어떤 ‘젊은 멍청이’

나는 1950년대 중반에 베케트의 작품을 만났다. 그것은 진정한 만남이었으며,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일종의 주관적인 충격이었던 탓에, 40년이 지난 후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는 아직도, 항상 거기에 있노라고. 젊은 시절의 주된 모토는 이러한 것이었다. 계산 불가능한 것을 만나기, 그래서 환멸에 빠진 자들과 맞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가치가 없다.’라는 명제가 그릇되고 압제적인 것임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77)

사유는 지속적이고 섬세한 노력에 의해서만 시대정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기는 쉽다. 그 시대의 우리에게 그것은 최소한의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의미 자체가 그 시대의 혼란스러운 형태들의 재료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알아차리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젊음이란, 그 약속이 아무리 열광적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젊은 멍청이’의 약속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성찰은, 훗날 우리를 향수로부터 보호해 준다. (78)

“내가 자기들 종족임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사용할 수 없으리라 상상하며 그들이 내게 억지로 붙여 놓은 언어, 참으로 교활한 생각. 나는 그들의 이 종잡을 수 없는 말들로 그들을 만족시킬 것이다. 그 말이 마치 죽은 개들처럼 전하는 이야기들조차, 나는 결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 나는 예전에 입을 다물었어야 했으며, 여전히 살아 있는 채로 침묵 속에 들어가 그걸 즐길 수 있는 것이야말로, 아니,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침묵하고 있었다고 느끼는 것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용감하게 떠들어 댔던 것에 대한 나의 보상일 거라고 때로 생각하곤 했다.” -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80)

모든 말이 내재한 이 ‘용기’에 대해, 그리고 그 종족의 언어가 담고 있는 그 ‘이야기들’이 정확히 전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쩌면 진작 주목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베케트에 있어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은 사실 막다른 골목이었으며 그가 거기서 벗어나는 데 거의 10년이 걸릴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좀 더 현명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허무주의와 언어의 절대명령 사이의, 생기론적인 실존주의와 언어의 형이상학 사이의, 사르트르와 블랑쇼 사이의 실로 비일관적인 이 결합은, 당시 젊은 멍청이에게 적합한 것이었다.

진정한 검토도 해 보지 않고 당시에 공인된,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베케트의 다음과 같은 면모를 받아들인 것은 결국 어리석은 일이었다. 점점 더 죄어들고 점점 더 농밀해지는, 그래서 모든 서사적 원칙을 포기하는 산문들을 통해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듯한, 예술의 원천을 모두 동원해 광범위하게 글쓰기의 무화를 보여 주는, 의미의 무화에 대한 냉혹한 인식. 죽음과 유한성, 병들고 버려진 육체들, 신성한 것에 대한 헛된 기다림, 그리고 타인들을 향한 모든 시도에 대한 조롱을 성찰하는 베케트. 말에 대한 끈질긴 집착을 제외하곤 어둠과 공허만이 있다고 확신하는 베케트.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러한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베케트를 마침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니다, 그가 자신의 예술, 연극과 산문과 시와 영화와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비평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버려진 실존 속으로의, 희망 없는 포기 상태 속으로의 그런 어둡고 육체적인 함몰이 아니다. 게다가 그 반대 또한, (소극, 조롱, 구체적인 풍미, 까칠한 라블레) 사람들이 부각시키려 애쓰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이 아니다. 실존주의도, 현대적인 바로크도 아닌 것이다. 베케트가 주는 교훈은 절도와 엄밀함과 용기의 교훈이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이다.

내가 젊은 시절 매혹됐던 언어에 대한 판단들이 아니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읽으면서 이 작가에 대한 나의 40년 열정이 생겨나게 되었던 까닭에, 나는 오늘날까지도 나를 흔들어 놓는 격언과도 같은 한 문장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말하는 자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며, 이렇게 선언한다.

“오직 나만이 인간이며 나머지 모두는 신성하다.” (81-82)

공중캠프

2020.08.25 17: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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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두 개의 축, 즉 한쪽을 이루는(『최악을 향하여』를 통해 완전히 정화된) 철학적인 추상과, 다른 한쪽을 이루는, 같은 그룹에 속하는 말들의 끝없는 반복과 조금씩 의미를 바꾸는(이 기법은 「없이」에서 절정에 이른다.) 미세한 변화들을 통해 일종의 그림처럼 묘사되는 시 구절들 사이를 오가는 중심적인 진동을 식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83)

또한 베케트의 작품 안에는 두 개의 커다란 시기가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아무것도 아닌 텍스트들』(1950) 이후, 작가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쳐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그는 『그것이 어떻게』(1960)와 더불어 거기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 작품은 주제 면에서뿐 아니라 산문의 전개에 있어서도 분명한 단절을 가져왔다.

이러한 동요와 두 시기 사이의 휴지기가 초래한 결과는, 어떠한 문학 장르도 베케트 문학의 전체 구도를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몰로이』가 아직 소설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에 비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이후 그것은 고갈되어 버려, 거의 시가 소설을 장악해 버리는 단계에 이른다. 즉 리듬은 물론 단락들의 배치와 장면들의 내재적인 가치들 또한 이 텍스트가 ‘잠재적인 시’라고 불릴 법한 그 무엇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베케트가 꾸며낸 픽션 또는 스펙터클의 조각들은 (칸트적 의미의) 비판적 질문들을 아름다움의 시험대에 올리고자 한다. 이런 질문들은 수적으로 매우 적다. 칸트의 그 유명한 질문들, 즉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텍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삼중창으로 화답한다. ‘내가 갈 수 있다면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존재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일 것인가? 내게 목소리가 있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1960년 이후, 거기에 이 질문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타자가 존재한다면 나는 누구일 것인가? 베케트의 작품은 이 네 가지 질문들을 언어의 속살을 통해 다룬 것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규정할 수 없는 실존의 조각들을 아름다움을 통해 탐색하는, 그리고 시를 통해 반쯤은 성취된, 성찰적인 사유를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83-85)

베케트의 모든 재능은 거의 과격할 정도의 긍정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 수많은 잠언들 중 하나, 그리고 결론. 불모의 땅, 그러나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 (85)

플로베르 이후 많은 작가들이 그랬듯이, 베케트는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뿐이며, 자신이 여러 리듬과 구두법들의 창시자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모든 예술가들에게 온갖 폼을 잡고 이 시대에 정신의 양식을 내려 줄 것을 요청하는, ‘작가의 신비’에 대한 정기적인 설문들의 일환으로 사람들이 그에게 왜 글을 쓰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뭐 그것밖에 없으니까. (85)

이토록 세상에 거의 노출되지 않고 또 거의 타협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이 정도의 중요성을 지닌 작가를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 아름다움에 대한 확고하고 주의 깊은 봉사자였으며, 그것이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둔 채(본성과의 거리, ‘자연스러운’ 언어와의 거리, 어머니와의, 모국어와의 거리) 이차적으로 습득된 관용어, 즉 프랑스어라는 ‘낯선’ 언어를 통해 글을 쓰게 만들었다. 그는 그 언어에 조금씩 놀라운 울림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특히 문장 안에서 단어들을 고립시켜 그것의 정확성을 바로잡게 만드는 일종의 은밀한 틈을 통해서, 그리고 수식어 또는 수정들을 추가함으로써, 『잘못 보이고 잘못 말해진』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처럼.

“문제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던 때가 과연 있었을까? 마지막 질문까지 사산된. 이미. 파악되자마자. 이미. 대다하는 게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던 때. 그럴 수 없다는 것. 알기를 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럴 수 없다는 것. 아니. 결코. 꿈. 이것이 대답.” (85-86)

그렇기 때문에 산문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베케트에게 있어서 구원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모든 아름다움은, 특히 그가 추구했던 아름다움은, 분리하는 것을 운명으로 삼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되살리고 또 희미하게 만든 겉모습을, 경험의 보편적인 핵심으로부터 분리하기, 베케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필수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 이러한 분리 기능을 통해 문자는,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 할지 우리에게 알려 준다. (90)

공중캠프

2020.08.29 17: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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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9월 1일 세미나는 zoom으로만 진행합니다.

공중캠프

2020.09.16 10: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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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주도했던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셨던 최원 선생님, 은영 누나, 고엄마 모두에게 빚을 졌습니다. 이제 실천으로 갚아야겠지요. 꾸준히 들어주시고 의견주신 친우 김민호 선생, 엄태연 선생님, 박재문 학생 모두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고해종, 2020.9)

공중캠프

2020.10.08 12: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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