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 공캠x자캠 present 알콜토크 vol.8
: <옥상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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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16년 1월 31일(일) open 18:00 / start 19:00
* 장소: 공중캠프
* 참가비: 영화 관람료 자율모금 (알콜/음료 별도 구매)
* 프로그램: 
18:00 – 19:00 알콜 섭취
19:00 – 19:30 다큐멘터리 <옥상자국> 상영 
19:30 – 20:30 알콜토크 “기억과 기념” with 양주연(감독), 김민환(중앙대 사회학과 강사)
20:30 – 24:00 못다한 알콜+토크


* 오늘날 수많은 역사적 고통은, 국가에 의해 박제화되거나 극우 미디어가 퍼뜨린 흑색선전에 폄하되고 있습니다. ‘기념’과 ‘폄훼’의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8번째 알콜토크로 단편 다큐멘터리 <옥상자국>을 보려합니다. 다큐멘터리 상영 후 양주연 감독, 김민환 선생님과 함께 “기억과 기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가집니다. 


* <옥상자국> (2015, 29min)

가족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나는, 외가집에서 우연히 오래된 자국을 발견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자국에 대해 물었다. 할머니의 대답은 무심하게 이어졌다. 처음으로 나는 할머니의 과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In Vino Veritas! (술 속에 진리가!)’ [(가칭) 공캠x자캠 present "알콜토크"]는 맥주 한잔 하면서, 느슨하고 흐릿한 기분으로 특정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비정기 프리 토크 이벤트입니다. 기본적으로 입과 귀가 분리된 강의/세미나, 형식적 일방적 토론, 학연/가방끈주의자들의 허세와 먹물질 등을 지양합니다.

 

[Brief History of 공캠x자캠 present "알콜토크"]

- vol.1 2013.03.09 - 후쿠시마와 우리
- vol.3 2013.11.15 - 맑스 재장전(Marx Reloaded)
- vol.4 2014.03.08 - 후쿠시마와 밀양
- vol.5 2015.05.02 - 세월호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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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리듬을 믿고(この胸のリズムを信じて)", "우리는 걷는다 단지 그뿐(ぼくらは步く ただそんだ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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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

2016.01.11 18:42:33
*.172.142.222

공중캠프

2016.09.21 10:45:36
*.7.50.163

공캠X자캠 알콜토크 vol.8 <옥상자국> 대화록
2016.01.31

속기 : 짱큰콩(기획단)

*
양주연(감독) : ‘양’으로 표기
김민환(패널) : ‘김’으로 표기
고두현(기획단/사회자) : ‘곧’으로 표기

지난 1월 31일 공중캠프에서 다큐멘터리 <옥상자국>을 함께 보며 이야기 나누는 알콜토크가 진행됐다. 영화는 감독의 외갓집 옥상에 남아있는 어떤 오래된 자국에 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가족의 과거를 모른다는 감독은, 할머니의 무심한 대답들 속에서 80년 전후 할머니가 경험한 시공간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영화가 끝나고 다시 불이 켜졌을 때, 그날 온 사람들은 영화와 사회적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는 국가적 기념행사가 되어버린 5.18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누구의 기억을 말할 수 있을까. 옥상자국을 바라보는 감독과 자국조차 없는 집에 사는 이들은, 80년 5월 광주와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일까.

※ PDF 파일로 보기 : 옥상자국 알콜토크
http://www.freecamp.kr/wordpress/wp-content/uploads/2016/05/%EC%98%A5%EC%83%81%EC%9E%90%EA%B5%AD-%EC%95%8C%EC%BD%9C%ED%86%A0%ED%81%AC.pdf


# TALK 그때 광주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나

양 옥상자국 연출한 양주연이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하다.

김 김민환이라고 한다. 자캠에서 비슷한 주제로 강의를 한 적 있다(2014 봄 자유인문캠프 공개강연 ‘국가폭력과 인권’). 영화는 오늘로 두 번째 보는 건데, 첫 번째 볼 때보다 훨씬 더 재밌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를 조금 이따가 하겠다.

곧 먼저 두 사람에게 각각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다. (감독에게)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패널에게) 본인의 연구주제가 ‘기념’과 관련한 것인데, 평소 연구 주제와 관련해서 이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양 당시 듣고 있던 학부 수업 중 근현대사 파트를 공부하던 수업이 있었다. 각자가 조사 주제를 하나씩 잡아야 했는데, 그때 내가 잡았던 주제가 ‘명량한 광주’ 프로젝트였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런 거다. 80년 5.18이 벌어진 곳과 똑같은 구도청 자리에서, 정확히 1년 후인 81년 5월에 ‘전국 청소년 체전’이 열렸다. 매스게임이 진행됐고, 광주에 있는 청소년들은 거기에 죄다 동원되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우리 가족만 이상한 것이라 생각했다. 5.18에 대해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모르시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점점 더 그때 광주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가 궁금해졌다. 다큐 중간 중간에 푸티지 영상들이 나오는데, 영상 역사관 자료를 통해 그 영상들을 구해 보며 더 광주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내 전공은 기념, 사회적 기억에 관한 것이다. 사회적 기억이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을 자기 경험처럼 가지게 되는 것, 즉 사회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80년 광주는 내가 초등학생 때 일어났는데,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대부분의 80년대 학번들이 그랬다. 그런데 만약 그때 그 사실을 그저 ‘지식’으로서 알게 된 거였다면, ‘아 이런 일이 있었네’ 하고 넘어갔을 텐데, 이후 80년 광주는 내가 경험하지 않았지만 내 것이 돼버렸다.
석사논문을 ‘한국의 국가 기념일 형성’을 주제로 썼는데, 그때가 마침 5.18이 국가기념일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논쟁이 굉장히 많던 때였다. 나는 당시 80년 광주는 국가가 기념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국가가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국가가 저지른 가해를, 국가가 기념한다. 뭔가 이상하다, 이게 나의 입장이었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지만 80년 광주에 관한 기억은 내 것이었다. 그런데 국가기념일이 되면서부터 나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듯했다. 왜 그럴까. 내가 계속 가져왔던 고민이다.

처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 양주연 씨가 그렇게 말해줬다. “전 제가 광주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큐멘터리 찍으려고 봤더니 너무 모르고 있었어요.”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 사실 그것이 사회적 기억이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이미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5.18이 뭐지?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정확하게 답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공식적으로는 국가기념일로서 ‘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다. 민주화 운동이 한국에서 굉장히 많았는데, 그렇다면 5.18도 여러 민주화운동 중에 단지 하나일까? 혹은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일까. 5.18은 지금 기본적으로 공식 기억화 되고 있다. 공식화 된다는 것은 역사화 됐다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어쨌든 빠져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다큐멘터리의 경우 그 다양한 이야기들을 감독이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풀어냈다. 또 다른 하나는 5.18 끝나고 넝마주이들이 없어졌다는 부분이다. 첫 번째 영화를 보면서는 보지 못했던 부분인데 오늘 발견했다. 이건 사실 굉장히 중요한 발언이다. 공식적으로 5.18을 기록한 역사에서 이 이야기를 한 것은 극히 드물다.

누가 혁명에,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또 누가 피해를 당하고,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끝까지 살아온 사람은 누구인가.

4.19 끝나고 나서, 4.19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4.19 전과 후를 구분할 때 늘 구두닦이 소년들의 죽음을 말한다. 지도교수였던 분이 4.19 세대였는데, 그 선생님은 항상 구두닦이 소년들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광주의 경우 5.18에 관한 신화 혹은 전설 같은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양동시장 할매들, 아줌마들이 만들어준 주먹밥. 그리고 또 하나가 헌혈과 관련된 것이다. 소위 ‘매춘’ 여성들까지도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헌혈에 나섰다라고 하는 일종의 두 가지 신화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민군. 5월 27일까지 버티던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국립5.18민주묘지에 가면, 새로 조성된 국립묘지 말고 그 옆에 구묘역이 있다. 망월동 묘지가 국립묘지가 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가서 묻을 수밖에 없었던 공동묘지다. 그곳에 5. 18 때 죽은 부인의 남편이 산소를 만들었다. 거기에 뭐라고 처음 썼냐면, ‘경주 최씨 예숙지묘’라고 썼다. 여러분이 생각하기론 5.18 때 죽었으면 민주열사라든지 이런 이름을 붙였을 것 같은데, 그 이름을 못 붙인 거다. 왜 못 붙였냐, 이 죽음을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경주 최씨 예숙지묘’라고 쓰긴 했는데, 그렇게만 쓰기에는 너무 억울한 거다. 그래서 그 분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 뭐냐면,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라는 거였다. 최초에 망월동 묘비에 붙여진 희생자의 이름이었다. 천사라는 이름.

84년부터 본격적으로 외부단체의 참배가 가능해진다. 이후 그 사람들이 비석에 띠 같은 것을 두르면서 이름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민주열사 내지는 민주해방열사. 이 이름을 붙이는 행위 자체가 해석의 영역이고 사회적 기억의 영역인 거다. 이 이름을 붙이게 한 노력이 사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한다.

그런데 ‘국립5.18민주묘지’가 만들어질 때, 구묘역이 분리됐다. 당시 나는 구묘역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사람이지만, 결국 분리가 됐다. 분리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80년 광주에서 죽은 사람만, 순수하게 죽은 사람들’만 포함하겠다고 한 거였다. 이 논리가 바로 내 것이었던 5.18이 내 것이 아니게 놓이게 한 그런 과정이었다.

초기 5.18 다큐멘터리의 특징은 일종의 고발이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우리를 지지해주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몰라서 그럴 거야. 이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면 우리가 고립되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해서 고발 다큐멘터리들이 나왔다. 이후 시간이 좀 지나서, ‘진실’이 알려진 다음, 모든 이들이 5.18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이 시점에. 사실은 잘 알고 있니? 이런 질문을 던지는 다큐멘터리가 양주연씨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나에게 5.18은 학교 숙제를 해야 했던 날

양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생각든 것이, 선생님이 5.18 이후 국가가 국가폭력 기념하는 걸 반대하는 세대였다면 난 그 이후 국가가 이미 그것을 기념하고 있는 시대에 광주에 살던 초등학생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있었을 땐데. 아예 역사교육을 그런 식으로 체감했던 세대다.

그때 나에게 5.18은 학교 숙제를 해야 했던 날이었다. 구묘역은 있는 지도 몰랐다.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구묘역은 국가에서 기념하지 않는 영역이었기에 기억되지 않았다. 그걸 알게 된 건 나중에 스무 살이 넘어서다. 초등학교에서의 역사교육은 뭔가 상명하달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좀 거부감이 있었다. 학교에서 너네는 광주 사람이고 그러니까 5.18을 기억해야해. 광주는 이런 역사가 있는 곳이야. 이런 부분들이 왠지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80년 광주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자부심으로 다가오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이 없이 느껴지다 보니까. 많이 알고 있다 생각하지만 그게 내 역사가 아닌 것 같은, 내 언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80년 광주를 내 피부로 느꼈던 게, 외갓집에 있던 옥상자국이었다. 총 자국이 있던 게 나한텐 엄청난 공포로 느껴졌다. 내가 만약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죽었을 수도 있었겠구나. 그냥 집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런 부분들을 이야기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상명하달 식의 역사가 아니라 내가 느낄 수 있는 공포감. 일상에서의 공포감. 길을 걷다가 그냥 죽을 수 있는. 그런 것이 당시 광주의 시간이었다,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연장선상에서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할머니께서 거기에 대해 잘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하고. 주변 양동시장 상인 분들도 왜 굳이 지난 이야기를 꺼내냐,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다. 이제 우리 다 잘 살게 되었지 않았냐, 라며… 이런 부분들이 오히려 정말 슬프게 느껴졌다.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이미 사건은 벌어졌는데. 그러니까 둘 사이 경계에 계속 있었던 것 같다. 민주화운동이라며 신화화되는 것과 폭동이라는 것 사이. 두 가지 간극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 광주의 시간을 기억해야할까. 이런 부분에 대해, 답 없는 고민 속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일단, 해보자란 마음이었다. 처음에 이 이야기 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많이 들었던 소리가, 이미 다 끝난 것 아니냐. 역사적으로 해명했고 청문회도 했고. 국가에서 지상파에서도 다 다뤘고. 더 이상 뭘 더 할 게 있냐… 그런 말들에 흔들리기도 했다. 그럼 나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걸까. 그래도 일단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보자, 했다. 그러면 뭐라도 새로운 증언이 나올 수 있고. 사람들이 또 다른 관심 가질 수도 있고… 그래서 좀 용기를 내어 영화를 만들게 됐다.

김 사실 난 여러분(관객)이 왜 이 자리에 왔는지 굉장히 궁금하다. 예를 들면 과거에는 5.18 관련 다큐멘터리 상영회가 열리면, 기대되는 반응이 모두가 영화가 끝나면 열혈이 되어 화염병이나 쇠파이프를 들고 밖으로 나가자, 이런 분위기가 5.18 다큐멘터리 상영회의 분위기였다. 트는 사람도 그랬고 기대하고 보는 사람도 그렇게 준비해서 왔는데. 지금 시점에서 사람들이 이런 형태의 다큐멘터리를 보러 오는 건 대체 왜일까. 여러분 이야기를 좀 듣고 싶다. 들으면서 내 생각도 좀 이야기할 수 있고 그랬으면 좋겠다.



(이후 관객들과의 토크에서 영화의 형식에 대한 고민, 개인적 질문 등 많은 질문들이 오갔으나, 좀 더 쾌적한(?) 분량을 제공하기 위해 생략된 질문들도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 TALK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기억 방식은 뭘까. 이것은 현재적 질문

곧 영화제들을 돌면서 여러 질문을 받은 것으로 안다. 그 과정에서 다시 정리된 생각 같은 것이 있다면?

양 구도청 자리에 아시아문화전당이 생길 때 문제가 많았다. 시민군들이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곳인데, 그곳을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에 관해 대립이 컸다. 영화 속에서도 나오지만,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건물의 혼합 형태로 지어뒀다. 지금은 거의 리모델링에 가깝게,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뒀고, 총 자국 같은 것들도 다 매워졌다고 들었다. 지역사회에서도 비판이 일고 있는데, 어떻게 기억해야하는 지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김 김대중 정부 시절, 5.18을 숙제해야하는 날이라 생각했다고 했는데, 그런 것들이 내가 문제의식을 가졌던 이유다. 초기에 국가는 인간성에 굉장히 반하는 쪽으로 다가왔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보면 발포 신호가 된 것이 애국기 하향식이었던 것처럼… 5.18에는 크게 국가 폭력에 대한 문제가 하나 있고,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광주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이것을 최정운 선생 같은 경우는 ‘절대공동체’라 표현하기도 한다. 국가 폭력이 들어왔을 때 들어섰던 ‘다른 질서’에 관해서도 우리가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이후 그러한 부분을 충분히 가져가지 못했고, 결국 모든 이야기를 위(국가)에서 가져가게 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기도 하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숙제라는 것은, 아까 양감독이 초등학생 때 경험했다는 ‘부여되는’ 숙제가 아니라, 이 영화를 기획하면서 생각했다는 것과 같이, 잘 모르지만 한 번 해보자는 그런 태도로 (자발적으로) 안고 가는 숙제가 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생각해보면 나 같은 경우도 논문을 쓴 이후 5.18에 관해서는 더 이상 깊이 살펴보지 않았다. 4.3이나 한국전쟁 민간인 학생 등에 관해선 보긴 했지만, 5.18의 경우 ‘이 정도면 됐다’라는 마음이 나한테도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그런 생각들이 역으로 5.18은 폭동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다시 나오게끔 한 일종의 방심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방심의 태도는 아니면서, 또 옛날과 같은 방식은 아닌, 그 사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기억 방식은 뭘까. 이것은 현재적 질문이고, 이 영화는 그런 현재적 질문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광주 안에서도 피로감이 쌓인 상태인 듯하다. 그 피로감은 아까 할머니의 이야기 중간 중간에도 나왔다. 다만 그런 피로감을 피로감으로 끝내지 않고 다른 에너지로 끌고 갈 수 있는 건, 경험하지 않은 이들의 힘일 것이라 생각 든다. 영화 맨 마지막에도 나왔듯 할머니의 기억도 조금 있으면 사라질 것이다. 한 10년 뒤? 20년? 15년?

양 40년…

(관객 웃음)

김 (웃음) 40년이 지나고 나면, 당시를 경험했던 세대들의 증언과 기억이 그만한 힘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이 5.18을 기억하고 그것을 자기화하는 것의 문제가 더 중요해진다. 그 출발점에 양주연 씨가 서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왜 출발점이냐면, 경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듣고, 그럼 어떡해야하지, 그 문제를 제기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작품 하실지 모르겠지만, 5.18을 직접 다루진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주변에 계속 머무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머물면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훨씬 더 중요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 TALK 공적기억, 사적기억, 기억과 망각

관객2 5.18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학교에서 부여되는 지식에 불과하다면, 억압이다. 그렇다면 공적 기억에 대해 사적 기억을 대안으로 제시할 때, 그럼 그 사적인 기억이라는 것은 어떤 관계 속에서 유지될 수 있을까. 사실 기억이란 건 구체적 관계가 있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것인데, 그럼 그런 기억의 범위를 조금씩 더 넓혀가려고 할 때 그 기반이 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한편으론 굳이 기억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욕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공-사 대립이라는 구도에서, 어떻게 보면 기억보다는 망각이 훨씬 더 건전한 것일지도 모른다.)

감독의 경우, 그건 사실 자신의 가족의 이야기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관객인 우리와 전혀 다른 감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평소에 어떤 말을 하고 행동하는지 다 알고 보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 입장에선 생판 모르는 사람이고 스크린에서 처음 본 사람들이다. 그게 기억에 남는다 해도, 구체적 기반이 없으니까 금방 잊힐 것이다. 지난번 4.16 세월호 사건 같은 경우도, 당시만 해도 모두가 잊지 않겠다 말했지만, 이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만 해도 그 피해자 이름 한 명이라도 댈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결국 어떤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기억해야한다 외친다 해도 그것이 큰 의미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오늘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할머니가 직접적으로 항쟁 자체에 참여한 건 아니었지만, “그때 광주 시민은 하나였다” 말씀하셨다. 어쨌든 그걸 여태껏 기억하고 있는 거잖나. 공적인 것도 사적인 것도 아닌 단위, 그야말로 최정운 식으로 봤을 때 ‘절대 공동체.’ 당시엔 분명 그렇게 공사의 이분법으로 기억하지 않을 수 있는 다른 방식 있을 수 있었다, 생각은 드는데. 그런데 그걸 또 어떻게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 든다.

양 관객 분들 중에 혹시 여기에 대해 말하고 싶은 분 있으시다면?

관객3 베를린 광장이 서울광장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한다. 그곳에 유대인들의 돌 비석을 쫙 깔아두었다고 한다. 대략 60년 정도 걸려서 말이다. 유대인 학살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겨우 60년이 지나서야 그것이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광주는 60년이란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세월호는 2년밖에 안됐다. 그래서 지금 이런 자리는 매우 의미 있는 자리라 생각한다.

이 작품의 솔직한 지점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음악을 깔면서 정서적으로 어쨌든 결말을 냈다. 그리고 옥상에 저 총탄은 누가 쏘았을까, 그 질문은 너무 좋았지만 질문을 했으면 끈질긴 추적이 들어가야 한다 생각하고, 일단 그런 골문 정하고 관객을 몰아갔으면 책임을 져야하는데, 사실상 할머니 이야기로 갔다. 홈드라마랑 뚜렷하게 다른 점에 대한 고민이 분명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임철우라는 작가가 쓴 「봄날」 이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이 책은 광주민주항쟁이 그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과 왜 다른가를,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잘 말해주고 있다. 현재 나는 광주나 세월호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다 같이 나눴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그걸 못 찾아서 멈춰 있는 상태다. 감독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자면, 딱 하나 자신을 붙잡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거기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씨앗 같은 것을 찾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하다.

양 씨앗…(웃음) 지금 술을 별로 안마셨는데 긴장돼서 취기가 올라오는지 머리 회전이 안 된다. 사실 원래 할머니의 역사에 크게 관심 있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할머니가 나를 키워줬는데 그래서 나에게 할머니는 늘 보살펴주는 존재였다. 총 자국 아래에서 총을 쐈던 사람 누구였을까. 이런 질문을 처음부터 한 것도 아니다. 그러다 광주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을 때, 나는 총알 오가던 그 상황 속에서, 집 안에 있었던 할머니는 그럼 어떤 생활했을까가 궁금해졌고 이를 담아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에 쫓기다 급히 마무리를 짓기는 했지만 그러면서 할머니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 것도 있다. 어쨌든 스스로 완성본 이전의 것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기존에 있던 광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아수라장이 된 상황 속에서의 일상을 보여주고 싶어 이렇게 영화를 만든 거다.

관객4 영어제목이 마이 그랜드 마더스 홈이다. 할머니의 집을 80년에 봉쇄했지만 이는 군의 강압적 움직임 의해 오픈된다. 아까 말씀하셨듯 할머니는 본인이 어렸을 때 늘 집에 있는 사람인지 알았다고 했다. 사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할머니를 공식적인 기억에서 망각시키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한국사회가 일반 시민, 여성들의 사적 위치성을 지속시킨 기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문 걸어 잠그고 들어간 시민은 폭도로서 규정되지 않았다. 가해자나 피해자로 규정되지 않았고, 그들은 이후 시대의 문제를 의도적 망각하고 살아야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관련해서 조금 더 보고 싶은 것이 80년대 할머니의 ‘집’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과거의 기억을 망각하고서 자녀들을 모두 길러 대학까지 보내기까지, 그러한 휼륭한 가정주부 역할 해내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의도적인 기억의 배제와 필연적 망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것이 이후 한국사회를 만들어낸 동력 아니었나 생각하는데, 만약 영화가 여기서 더 길어진다면 그에 관한 이야기들이 더 나와도 좋을 것 같다.

그들은 이후 시대의 문제를 의도적 망각하고 살아야했던 사람

양 말씀하신 것에 공감한다. 장편으로 끌고 갈지는 고민 중이다. 사실 할머니가 경제적 주체였고 할아버진 군대 안가고 삼대독자라는 가족사적 부분도 있어서 관련해서 이야기를 더 풀 수 있을 것도 같다.

관객2 과연 그게 ‘망각’이었을까. 나는 진짜 ‘망각’은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할머니의 인터뷰에서도 나왔듯이 광주 시민은 하나다, 란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망각이란 건 이 상황을 단순화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말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

관객4 그때의 ‘망각’이란 건 따옴표 친 망각을 말한 것이다. ‘망각’되어야 가정주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공식 기억-국가로부터 ‘폭도’로 규정된 주체도 아니게 되면서, 즉 공식적으로 이 역사에 함께 있었단 건 아니라는 식의 증언으로서 말이다. 그러니까 그 망각이란 건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망각했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들과는 멀리 떨어진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즉 ‘공식 프레임’에서 벗어난 이로서의 자기 기억 망각을 말한다.

김 80년 5월 광주를 맞고난 뒤 돌아간 일상은 이전과는 다른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 다른 일상 속에서 예외성 드러낸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라 생각한다. 제가 90년대 광주를 처음 갔을 때, 사실 광주 시민들은 죄다 시위에 참가할 줄 알았다. 그때의 감정은 실망이랄 수 있겠지만… 어쨌든 광주 시민들은 당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생각한다. 다만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 건 90년 이후라 생각한다. 90년 초반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망각’하지 않았을 텐데, 영화에서도 나왔듯 시기가 변화함에 따라 5.18 둘러싸고서 출현한 여러 인식, 제도들 등에서 아마 피로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상 속에서 계속해서 5.18을 마주했을 것이다. 전 타협주의자라 두 분 다 이야기 다 맞다 생각한다. (웃음) 망각한다 할지라도, ‘광주 시민은 모두 하나였다’ 라는 인터뷰를 한 데에는 일상 안에만 머물지 못했던 계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본다. 가령 제주 4.3의 경우 ‘우린 다 제사가 똑같아’ 이런 이야기를 하듯.

양 할머니의 서사를 정리할 때, 하나의 결로만 정리를 할 수 없었다. 80년대 이후 가정주부화의 모습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지금 할머니 모습 보면 알겠지만, 세월호 이야기 나오면 계속 우신다. 할머니 캐릭터가 불신주의, 정치혐오주의이지만, 흥미로운 건 뉴스나 신문은 엄청 많이 보신다. 혐오주의다면 오히려 관심 안 가지는 데 계속 관심을 두신다. 그러면 할머니는 언제부터 그렇게 ‘무심’하게 되신 건지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소외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속에서 소리를 내고 싶었는데 인정 못 받았던 경험이 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 광주 시민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다 같이 뭉쳐야 한다, 싸워야한다, 광주 시민 하나다, 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경제적 문제가 개입되면서부터 이야기의 귀결이 보상 문제로 가닿았고, 왜 난 보상 안해주냐는 말들이 늘어났다. 무등산의 입장료를 받는 것도 비슷한 문제다. 광주시민 것인데, 왜 입장료를 받느냐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소외감이 계속해서 축적된 듯하다. 피로감도 그렇게 쌓여간 게 아닐까 한다.



# TALK를 마치며

김 현재 광주 5.18과 관련해서 다섯 개의 단체가 있는데 거기서 또 몇 개 단체로 더 갈려있다. ‘대표성’을 둘러싸고서 단체들이 그렇게 자꾸 갈려진다. 국가가 단체의 대표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대표성이란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어느 단체가 선정되어 국가와 협상을 할 것이느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거다. 이것이 결국 분열을 낳게 하고, 또 다른 과거사의 복원을 불가능하게끔 하기도 한다. 사실 수많은 과거사 정리 모델 중 5.18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가장 잘 된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모든 것이 완결되어버린 듯한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완결될 수 없다. 감독이 영화 속에서 진행한 가족들과의 소통은 그러한 지점을 잘 건드린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할머니는 다른 것보다도, 손녀가 내 얘기를 잘 들어주고 영화를 만들어주고 하는 것을 더 좋아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동안 그들의 불만을 어떻게 들어왔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양 와주신 한 분 한 분 감사드린다. 제 작업이 각자 어떤 활동이나 작업하고 계신 부분에서 힌트가 되면 좋겠다. 각자 이 작업 관해,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이 있으실 거라 생각한다. 그런 부분들을 자유롭게 들려주시면, 저도 정리 되지 않은 부분 많아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영화가 끝이 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어쨌든 영화는 끝내야하는 거니까 결말을 지은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다보고 나서 그럼 이제 어쩌란 거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붙잡고 있다. (그러니까 이후 더 이야기 하자.) 와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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