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극장 게시판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

조회 수 1988 추천 수 0 2006.06.01 00:11:33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


  나는 축구에 반대하지 않는다. 반대하고 말고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물론 축구 경기장에는 가지 않지만,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밤에 밀라노의 중앙역  지하 통로에 가서 잠을 자지 않는 이유나 저녁 6시 이후에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배회하지  않는 이유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통해 멋진 경기를 보는 경우는 더러 있다. 그럴 때면 나는 한눈을 팔지 않고 재미있게 본다. 그만큼 나는 그 품위 있는 경기의 모든 장점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는 셈이다. 요컨대 나는 축구를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축구 팬들을 싫어할 뿐이다.

  그 이유를 그릇되게 지레짐작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축구광들에 대해서  품고 있는 감정은 롬바르디아 연맹 지지자들이 제3세계로부터 온 이민자들에 대해서 품고 있는 감정과 비슷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돌아다니지  않고 자기들집에 머물러 있는다면 말이다.> 내가 축구 팬들에 대해서 하려는 얘기도 그런  식이다. 나는 그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기네  집에서만 열광한다면 말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자기네 집>이란 그들이 평일에 모이는 장소(술집, 클럽, 가정 따위)와 일요일마다 모이는 경기장을 뜻한다. 그런 곳에서라면 무슨 일이 벌어지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고, 설령 훌리건들이 몰려와 난동을 부린다  한들 그리 나쁠 것이 없다.  그들이 일으키는 사건 때문에 신문 읽는 재미가 쏠쏠해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차피 싸움판이 벌어질 바에는 피 흘리는 것을 보아야 관객의 직성이 풀리게 마련이다.
  내가 축구광들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이상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지 않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며,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을 자기네들과 똑같은 축구광으로 간주하고 한사코 축구 얘기를 늘어놓는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들의 태도와 비슷한 예를 들어 보고자 한다.
  나는 리코더를 연주할 줄 안다(나의 연주 솜씨는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루치아노 베리오가 공개적으로 천명한 바에 따르자면 그렇다. 어쨌거나 한 대가가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가지고 나의 연주를 계속 들어 주었다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이제 내가 기차를 타고 있다고 가정하고, 맞은편에 앉은 승객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런 물음으로 말문을 연다고 치자.

  "프랑스 브뤼헨이 최근에 CD를 냈는데, 그거 들어 보셨어요?"
  "실례지만, 뭐라고 하셨지요?"
  "<눈물의 파반>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초입 부분이 너무 느린 것 같더군요."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반 아이크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또박또박한 말투로) 블록플뢰테 말이예요."
  "음... 저는 그 방면에는 당최... 그게 활로 켜는 악기인가요?"
  "아하, 이제 알겠네요. 그러니까 그 분야에 대해서는 아시는 게 전혀... "
  "그래요. 문외한입니다."
  "그거 참 재미있군요. 그래도 수제품 쿨스마를 손에  넣으려면 3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아시겠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흑단으로 만든 뫼크가 낫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것 중에서는 최고죠. 가젤로니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그건 그렇고, <데르드레 둔  다프네 도버>의 5번 변주 정도는 들어 보셨겠지요?"
  "금시초문인데요. 사실 저는 파르마에 가는데..."
  "아하, 알겠어요. C보다는 F로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시는군요. 어떻게 보면 그편이 더 듣기가 좋지요.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요, 뢰이예의 소나타 하나를 찾아냈는데, 그게 어떤 곡이냐 하면..."
  "뢰이... 뭐라고요?"
  "그 곡보다는 텔레만의 환상곡들을 한번 연주해 보셨으면  해요. 해내실 수 있겠어요? 설마 독일식 운지법을 사용하시지는 않겠지요?"
  "아시다시피, 저는... 독일에 관해서라면... 독일의  BMW는 대단한 차죠. 그래서 독일인들을 존경하기는 합니다면..."
  "알겠어요 무슨 말씀인지. 바로크 식 운지법을 사용하시는가 보군요. 좋습니다. 다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사람들은..."

  이런 식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독자들은 나와 마주 앉은 그 불운한 승객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열차의 비상 제동  장치를 잡아당긴다 해도 그의 심정을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가  축구광을 만날 때도 바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가장 고약한 경우는 택시 운전사가 축구광일때다.

  "비알리 경기 하는 거 봤어요?"
  "아뇨. 내가 안 볼 때 나왔나 봐요."
  "오늘밤 경기 보실 거죠?"
  "아뇨, '형이상학' 전집 Z권 작업을 해야 돼요. 스타지라 사람 아리스토텔레스 말이에요."
  "좋아요. 그 경기를 보면 내 말이 옳은지 그른지 알게 될 거예요. 내가 보기에  반 바스텐은 90년대의 마라도라가 될 재목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반 바스텐도 그렇지만 하지도 눈여겨봐야 돼요."

  그의 얘기를 중단시키려도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건 벽에 대고 지껄이는 거나 진배없다. 그는 내가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사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거기에 있다. 설령 내가 눈이 세 개  달리고 후두부의 초록색 비늘에 안테나 두 개가 솟아 있는 외계인이라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도대체가 다양성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존재 가능한 세계들>의 상이성과 비교 불가능성에 대한 개념이 없다.

  위에서는 택시 운전사를 예로 들었다. 그러나 대화의 상대방인  축구관이 지배 계층에 속하는 자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런 광기는 궤양과  같은 것이라서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자들도 걸릴 수 있는 병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다는  것을 그토록 확고부동하게 믿고 있는 자들이 다른 지방에서 온 축구광을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고 드니 말이다. 대상을 가리지 않는 이런 보편적인  쇼비니즘을 대하면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마치 극우 연맹의 지지자들이 이렇게  지껄이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아프리카 인들이 우리에게 오도록 내버려둬라. 그래야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수 있을 테니.>


- 움베르토 에코,『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1990년)
(출처 : ㄱㅇㅁ 미니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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