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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김] '모던뽀이' 진중권의 포스트모더니즘

조회 수 3060 추천 수 0 2003.07.25 13:4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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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뽀이' 진중권의 포스트모더니즘, [앙겔루스 노부스] 外

정승훈 reptile27@hanmail.net


논쟁의 화약고인 씨네21 마지막 페이지에 얼마 전 [시간(屍姦)]이라는 글이 실렸다. 미군에 희생된 여성들의 참혹한 사진을 버젓이 전시하는 것은 죽은 이들을 또 죽이는 정치적 윤간이자 선동적 사체선호증이라는 진중권의 비판이었다. 당장 몇몇 게시판에서 찬·반의 폭발음이 터질 만도 했던 것이, 선의로 읽어줄 수 있는 선을 넘나드는 특유의 정치적 선동적 화법이 예외 없이 발휘된 탓이다. 그런데 논쟁의 내용과 별개로, 여기엔 주목받지 못한 시사점 하나가 잠복해있다. 같은 내용이 그전에 출간된 [레퀴엠(휴머니스트, 2003)]에 이미 언급됐지만, 진중권의 정치적 발언에 쏜살같이 달려드는 네티즌들이 그의 미학적 저서에는 무관심한 것 같다는 점이다.

물론 운동권 비꼬기 같은 신랄한 공격은 책에 없으나, 미학 전문가임에도 미학적으로 수용되지 못한 진중권의 불행은 그의 미학에 대한 제대로 된 논쟁을 부재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의 정치 행각은 심층적 미학 기획의 표면일 뿐인데도. 정치적 선동성이 탈색된 진중권의 또 다른 문체는 실상 더 큰 범위의 정치를 설파한다. 그에게 미학은 '다른 수단을 이용한 정치의 연장'과 다름없다.

모더니즘 넘어서기

미학적 태도에서 진중권의 최근 행보는 적어도 정치적 수위에서보다 더 흥미롭다. [시칠리아의 암소(다우, 2000)]까지만 해도 그는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치 냉소와 손잡은 보수주의로 낙인찍었다. 참된 유희는 상상력이 아니라 "꼼꼼한 논리와 치밀한 논증을 통해" "법칙을 완전히 지배하는 자"만이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한국 사회를 박정희와 다른 식으로 근대화시키려는 '모던뽀이'의 선언처럼 들렸다.

물론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적대적 대립의 관계로 파악하는 단순한 도식주의가 모던의 성과도 챙기지 못하고, 포스트모던의 긍정성도 살리지 못하는 실천적 보수주의를 낳았"다고 진단할 때, 비판의 초점은 '문화적 탈주' 쯤으로 왜곡된 한국적 포스트모던 '현상'이었다. 진정한 탈근대는 "이성적 규범의 올바른 사용법에 관한 실천적 지혜"일텐데, 합리성과 계몽, 대의와 조직이 간단히 매도되는 풍토는 사이비라는 지적이다.

반면 [앙겔루스 노부스(아웃사이더, 2003)]는 또 하나의 개론서라는 결정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의 터닝 포인트라 할만하다. 기본적인 포스트모던 관은 이어지지만, 한국적 탈근대성에 쏟던 비판적 화살은 세계적 근대성을 겨냥한다. 여기서 제출된 키워드는 '숭고the sublime'이다. 숭고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적 열광 내지 영감과 연결되는 자연(신성)의 위대함을 뜻했다. 사물이 이데아의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미메시스도 실은 사물이 이데아로 '참여'하는 신비로운 존재론적 연관을 의미했기에 숭고와 닿아있다. 미메시스는 보이지 않는 신을 현시하는 신상처럼 보이는 것을 만드는 일체의 감각적 대상화를 뜻했는데, 여기 내포된 접신의 경지, 디오니소스적 황홀의 위험성을 플라톤의 합리성이 못 견뎠을 뿐이다. 숭고를 부활시킨 포스트모던을 "위험한(?) 니체적 창조의 기쁨"[시칠리아의 암소]이라 경계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시를 비난하는 순간에조차도 그 신적인 힘을 동경했던 플라톤처럼" 진중권도 포스트모던에 대한 곤혹감의 물음표를 근대로 돌릴 때가 됐음을 절감한다.

그럼 근대는 숭고를 어떻게 대접했던가. 스승과 달리 예술적 파토스를 허구적 테크네(예술=기술이었다)로 국한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은 숭고의 미메시스를 모방의 법칙들로 환원시킨 고전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버크는 자연의 압도적 힘에 새로이 눈떴으나, 이는 거리를 두고 안전하게 향유할 수 있는 '즐거운 공포'로 정도로 거세된다. 칸트는 본연의 미메시스에 가까운 초월적 숭고에 천착하지만, 이성적 파악이 불가능한 압도적인 거대함과 무한함은 인간의 하찮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미지를 예감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할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함을 일깨운다고 본다. 고로 "진정한 숭고는... 자연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는 자의 마음속에서 찾아야 한다."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와 맞닿는 이런 근대 인식론은 결국 숭고한 자연을 정복하고 길들이는 인간중심주의로 귀착된다.

문제는 이로부터 합리적 근대의 이중 횡포, 기술에 의한 외적 자연의 파괴와 이성에 의한 내적 자연(육체와 정념)의 말살이 정당성을 얻었다는 데 있다. 전쟁은 단적인 예이다. [레퀴엠]은 파괴적 기술의 쾌감을 고조시킨 이라크전의 파쇼적 변태성에 대한 진노와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진혼을 토로한다. 기술적 합리성을 규제하지 못한 비판적 합리성, "이 두 종류의 합리성 사이에 벌어진 간극, 바로 그만큼 미국은 파시스트적이다." 기술로 통제할 수 없던 자연의 숭고를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기술이 차지했으며, 안전한 거리에서 시뮬레이션된 '충격과 공포'는 미디어화된 호러영화처럼 버크 식의 '즐거운 공포'로 방영된다. 또한 이라크의 자살 테러는 전근대적 방식으로 숭고를 왜곡했다. '차가운 과학적 합리성'과 '뜨거운 종교적 비합리성'은 "가공할 파괴력을 무기로 한 가학의 숭고함과 초인간적 희생을 무기로 한 피학의 숭고함"을 대변한다. "숭고함의 미학과 윤리는 정치적으로 겁탈당하여 전쟁의 원리가 되었다." 그 희생양은 결코 숭고하지 않은 너무나 인간적인 민간인들이었던 반면.

진중권이 본 포스트모던은 비판적 합리성의 회복과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을 동시에 노린다. 근대가 내장한 성찰성으로 근대의 폭력적 비인간성을 치유하면서, 그 비인간성을 낳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려는 시도이다. 이는 살찐 소파에 파묻힌 부르주아의 탈각된 현실 인식과 왜곡된 숭고를 거부하면서, 인간과 자연이 평등하게 교호하고 삶과 예술이 미메시스적으로 상응하는 숭고 본연의 존재미학으로 이어진다.

포스트 모던의 감성과 상상력은 무엇보다도 시대의 고통을 예민하게 느끼는 진보적 감수성, 그리고 그 고통 극복의 실천적 방안을 찾아내는 창조적 상상력이어야 한다. 예술? 아, 그것은 잿빛 이론에 싫증난 게으른 지식인들의 해방구가 아니다. 부르주아적 삶을 치장하는 한 조각의 시도 아니고, 향유라는 이름의 소비의 대상도 아니다. 예술은 우리의 삶 자체를 예술적으로 조직하도록 이끌어 주는 영감의 원천이어야 한다. 미메시스. 예술작품과의 존재론적 닮기. 이것이 포스트 모던의 정신이다. - [앙겔루스 노부스] 149쪽

모더니즘 맴돌기

아쉬운 건 이미 일반화된 명쾌한 요약 외에 진중권만의 포스트론을 맛보려면 좀더 기다려야한다 점이다. [앙겔루스 노부스]는 내용에서 미학 오디세이나 춤추는 죽음의 근대성을 넘어서면서도 수준에서는 이들 교양서의 공력 아래를 맴도는 듯하다. 너무 포괄적인 포스트모던론이 여전히 모더니즘의 메아리를 들려주는 한계도 여기에 겹친다. 물론 부르주아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적 모더니티의 계승은 포스트모던 전도사 리오타르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주목할 건 리오타르의 숭고만 해도 구체적인 탈근대적 급진성을 띤다는 점이다.

리오타르에게 숭고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을 암시하는 어떤 비규정적 발생 자체에 있다. 그것은 증명되거나 재현되지 않고 갑자기 다가와 흔들고 느끼게 하는 경이와 불완정성, 취미 혼란의 충격 효과이다. 바르트의 푼크툼처럼, 무엇이 일어나는가보다 일어나고 있음 자체로 기존의 코드화를 꿰뚫고 찔러오는 이미지의 사건, 들뢰즈식으론 상투구를 비집고 출현하는 물자체, 라캉을 빌면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실재계가 숭고의 영역이다. 현대적 숭고는 고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결여된 내용으로 드러내는 향수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지 앞에 이데아는 없었다는, 항상 의미는 사후적으로 차연된다는 해체론과 만난다. 안정된 쾌락 너머의 전복적 희열을 노리는 아방가르드의 숭고가 여기 속한다.

진중권이 가상을 새로운 현실로 만드는 예술적 시도에 주목하면서도 가상 자체, 이미지의 힘, 시뮬라크르의 전복성보다는 이를 통해 도래할 어떤 신성의 위대함과 인간 영혼의 고양에 방점을 찍는 것은 흥미롭다. 숭고는 이때 영혼을 팔아먹는 천민들의 세상에서 "제 영혼을 위해 제 자존심의 최소한을 지키려 하는 민주주의적 인간귀족들의 존재미학"이 된다. 이런 미적 에토스는 한편으론 너무 당연한 휴머니티로 넘치는 [레퀴엠]의 인간중심주의로 표출되긴 해도, 좀더 탈인간적 관점에서 전쟁 메커니즘을 분석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벤야민의 영향을 추적해볼 수 있다. 이 맑시스트 랍비는 파울 클레의 그림 '앙겔루스 노부스(새로운 천사)'를, 과거(현실)를 바라보지만 천국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날개를 접지 못하고 미래(진보)로 떠밀리는 역사의 천사로 본다. "성급하게 급조된 희망의 그림" 대신 과거의 폐허에서 반짝이는 행복의 이미지들을 이어 별자리를 만드는 이 우울한 천사는 미래로 밀려나면서도 과거의 사건을 역사적 의미로 현전화하는 구원자이다. 진중권은 이 메시아적 현재에서 '죽은 자들을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다시 한데 모으고' 싶어한다. 이것이 기독교적으로 역사적 유물론이 의미의 사후성을 획득하는 진중권식 진보이다. 저항한다고 현실이 바뀌진 않음을 알지만 바람 때문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진보, 잃어버린 천국에서 멀어지면서도 쌓여 가는 파국의 더미에서 역설적으로 천국의 성좌를 그리는 진보.

진중권의 숭고는 그래서 인간 역사와 인간 주체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에서 발현된다. 그건 의미를 미래로 미루는 현재적 기표의 강렬함이 아니라, 기표를 과거에서 구원하는 현재적 의미의 강렬함이다. 그 의미는 기독교에 침윤되어 자란 진중권에게 늘 메시아의 형상을 띠었던 것 같다. 여름의 뭉게구름에서 "하얀 천군 천사를 거느리고 이 땅으로 내려오는 마제스타 도미니"(시칠리아의 암소)를 그리는 그에게 포스트모던은 벤야민의 맥락에서 근대와는 다른 인간주의로 재영토화될 듯하다. 이는 진중권 세대가 소화하는 한국적 포스트모던의 한 양상과도 겹친다. 80년대를 후일담으로 향수하던 퇴행적 열패감을 90년대의 탈근대적 징후에 대한 성찰로 넘어서면서, 과거를 긍정적 의미로 현재화하려는 386의 한 양상.

결국 이는 근대의 완성과 극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한국적 특수성을 재확인시킨다. "근대의 합리적 핵심을 들어 탈근대를 견제하고, 탈근대의 예술적 영감으로 근대의 한계를 반성하고, 그러면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변증법을 추구하는 것이다."(위의 책) 프랑스 철학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뿌리를 댄 진중권의 포스트모던은 아직 모더니즘을 맴돌며 할 일이 많아 보인다.

그 구체적 실천의 전범은 라파엘의 [아카데미 학당]에 숨어있었다. 그 그림의 진정한 대립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보다, 그들 밑에 반누드로 퍼져 앉은 디오게네스와 그들 사이의 대립이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빛 가리지 말라 일갈했던 그 냉소적 독설가는 주류 철학자들이 본질과 영원의 동일성에 매몰될 때 차이의 놀이를 실천한 디오니소스적 광인이자 광대였다. 그런데 진중권은 니체부터 들뢰즈로의 맥락보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 대입된 한국 정치 상황의 맥락 속에 디오게네스를 부활시킨다. 유머와 조롱의 "골계미(희극성)와 결합된 가벼운 숭고"를 보여준 자칭 '개'였던 이 견유주의자는 "개처럼 물어뜯는 '한 줌의 부도덕'을 가지고 이미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은 낡은 권위와 관습과 도덕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진중권의 게릴라적 글쓰기가 그러하듯, 지성계의 따돌림을 감수하면서. 디오게네스에게 "최초의 자유사상가, 최초의 세계시민, 최초의 변증법적 유물론자, 최초의 사회주의자, 최초의 실존주의자, 최초의 행위예술가"라 오마쥬를 바칠 때, 진중권은 자기도 이런 "창조적 개새끼", 그러나 "대왕이 부러워한 개새끼"가 되고싶다고 말하는 셈이다.

여기에 박수를 치든 돌을 던지든, 진중권의 표면적 행보가 접속하는 사상적 바탕은 분명 나름의 주목을 요한다. 이는 한국의 정치-문화사적 장에서 근대적 '이론이성'을 탈근대적 '실천이성'과 일치시키려는 세대적 몸부림과도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방향과 강도의 벡터를 가진다면 심층적 차원에서 미래를 예비할 수도 있다. 단지 그러기 위해서라도 진중권이 선언적으로 희원하는 존재미학이 폭과 깊이를 더해서 탐구되기를 독자로서 바라게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너무 많은 리비도를 게시판에 탕진하는 듯 보이기도 하니까. 물론 날개를 접을 수 없는 통제 불능의 동력이 거기엔 스며있겠지만, 진중권의 진가는 발빠른 시사적 응전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래서 바라건대, 이젠 개론서를 넘어선 진중권을 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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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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