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할 곳 없는 천사(free board)


[김경묵 병역거부 소견서]

“죽음을 부르는 군대를 거부한다”

의사이면서 평론가였던 마쓰다 미치오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으로의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의 증언을 읽은 후, 비전향을 관찰하는 굳은 의지가 고통과 죽음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하는 두려움이 바로 병역 거부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또한 침략전쟁에 가담하게 된 것도 사실은 이 두려움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병역 거부와 전쟁 참가. 두려움은 역사를 구성하는 어떤 쪽의 세력도 될 수 있는데, 많은 일본국민은 전쟁에 가담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도미야마 이치로의 <폭력의 예감> 중)

1. 

지난 여름 병무청에 입영거부 의사를 밝혔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 군대는 온갖 파문과 함께 죽음을 상징하게 되었다. ‘GOP 총기사고로 5명이 사망하고 7명의 부상, 물고문 성고문 등 온갖 가혹행위로 숨진 윤일병, 특전사 2명 포로훈련 받다 사망, 관심병사 2명 휴가 중 동반자살’ 등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사건들로 사회가 들썩였다. 군대에서 벌어진 참사가 하나 둘씩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신성한 국방의 의무로 여겨졌던 군복무가 많은 이들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조작과 은폐로 인하여 100일이 한참이 지나서야 알려진 상황, 기수열외나 가혹행위와 같이 개인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에 의해 벌어진 사건인 만큼 군당국을 향한 비판여론은 거세었다. 국방부에서 자체적으로 개선방안을 추진하는 와중에도 군내 가혹행위 소식은 끊이지 않았고, 남한의 주적이 북한이 아니라 군대 자체라는 성토까지 이어져 나왔다. 

군대를 바라보는 이전과 다른 여론이 반갑기도 했지만 동시에 낯설었다. 이 사건들이 발생하기 이전에도 군내 가혹행위와 의문사는 무수했고, 애초부터 군대는 그러한 악행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철옹성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이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2년 간 강제노역을 해야 하는 곳, 개인이 아닌 집단의 부속품으로 존재하면서 가혹적인 폭력에 노출되어야 하는 곳, 약자 앞에서 무자비하고 강자 앞에서 비겁해져야만 하는 곳, 무수한 구타와 의문사가 자행되지만 군사기밀이라는 방패막이로 쉽사리 은폐될 수 있는 곳, 시민의 기본적인 인권이 휴지조각처럼 버려질 수 있는 곳, 파블로프의 개가 되지 않으면 체제부적응자가 되는 곳, 부당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으면 사회적 기수열외를 받게 되는 곳, 민주주의는 교과서에나 있는 것이지 생존전쟁의 사회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전근대적 규율을 체득하게 되는 곳,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곳이 군대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남성의 통과의례로 받아들여지는 군대는 실상 사회에 진출하기 이전의 청년들이 군사주의적 위계질서를 체득하고 지배계층의 입맛에 맞게 길들여지게 하는 국가 최대의 훈육기관을 자처해왔다. 

소리없는 비명 속에 죽어 갔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군사주의 역사의 이면 역시 부끄럽기 그지없다. 폭압적인 군사주의를 온 몸으로 거부해온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우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 전쟁 이후 병역거부자 1만 7천명 이상이 징역형에 처해졌고, 2014년 현재 병역거부 때문에 수감된 사람이700 여 명이 넘는다. 전 세계 병역거부 수감자 중 90% 이상이 한국인이다. OECD 국가 중 한국이 자살률, 남녀 임금격차, 교육비 지출, 노인빈곤률 등 온갖 영역에서 불명예스러운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OECD 가입국 중 유일하게 대체복무제가 도입되지 않은 국가란 것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때문에 군인되기를 거부한 국제 난민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중국과 대치 중인 대만조차 모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대체복무조차 허용되지 않은 이 땅에서 군인에 대한 처우개선과 뿌리 깊은 적폐로 물든 군내 악습 척결은 요원해 보인다.

복무를 하던, 거부를 하던 군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군대의 악습은 평범한 얼굴을 지닌 악의 체제로써 작동되고 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학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여한 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말했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의 악행이 특별히 사악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에 순응해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된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 재판장에 선 아이히만은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지극히 평범한 국민이었고 성실한 아버지였다. 평범한 사람이 자기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각없이 커다란 악을 저지를 수 있다. 그 악이 그 체제 안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라면 말이다. 

윤일병을 죽음으로 몰고간 이들에게 살인죄가 적용되었지만, 알려진 바와 같이 그들 역시 후임병이었을 때 군폭력을 당한 희생자였다. 무참히 맞다가 나중에 맞은 만큼 실컷 때릴 수 있는 사회가 군대이다. 평범한 개인들이 일상화된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폭력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어느새 죄책감 없이 새로운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대물림은 악한 사람이 아니라 악의 체제에 의해서 발생한다. 사회 전체가 무한경쟁, 적자생존, 우승열패로 지배되는 군국주의 국가에서는 군대 뿐만 아니라, 학교와 직장에서 역시 강자에 대한 자발적 복종과 약자를 향한 폭력은 필연적이다. 이와 같은 시스템에서는 이름만 다른 같은 형태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끊임없이 발생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2.

이 같은 참사를 접할 때마다 가슴을 도려내 듯 밀려오는 고통에 숨이 차고 괴로워 인터넷 창을 열기가 두려웠다. 이들의 비극이 나와 무관한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것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정신과 치료로 세 차례 병역 재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던 내가 입대를 했다면 예정된 A급 관심병사였을 것이며, 군체제의 희생자가 된 이들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는 처지였다.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유무형의 폭력을 보고 겪으며 ‘맞더라도 때리지는 말자’고 다짐한 내게 폭력이 만연한 군대는 유년시절부터 본능적으로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집단주의적 체제가 맞지 않아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에는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왔다. 이런 내가 2년 간 정신을 구속 당한 채 군복을 입고 총대를 올리며 군사훈련을 받는 모습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군대는 병들었고 그 안의 개인들은 아팠지만, 누구도 아프다 말할 수 없었다. 밖의 우리들은 그들의 희생과 고통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였다. 세월호 참사와 같이 시민의 생명을 보호해주기는 커녕 죽음으로 내몰고, 진실을 규명하기는 커녕 수뇌부의 조작과 은폐가 만연하게 통용되는 국가는 그 존재 목적을 스스로 거스를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와 군대 앞에 비판적 사고를 정지당한 채, ‘왜’ 이런 비참한 일들이 일어나야만 하는 지, ‘왜’ 가만히 있어야 하는 지, ‘왜’ 군대를 가야 하는 것인 지 질문할 수 없었다. 그만큼 국가라는 존재가 위협적이고 전지전능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과 같이 국가 권력에 저항한다는 것은 삶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위험을 전제한다.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저항은 작고 힘겹고 초라하기 마련이고, 그 행위에 따른 처벌은 무자비하다. 

군대를 간다고 하면 입영에 대한 입장을 밝힐 이유가 없지만, 군복무를 거부했을 땐 불복종에 따르는 처벌을 감수하면서 ‘왜’라는 질문에 타당한 사유서를 준비해 법정에 서야만 한다. 입영을 거부함으로써 받게 되는 1년 6개월이라는 징역형은 정해져 있었고, 이러한 선택을 지지해줄 주변 사람들도 있겠지만 받아들일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대를 거부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소견서를 쓰기 위해 긴 시간 유예기간을 두었지만, 오래도록 썼다 지웠다를 반복할 뿐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다. 병역거부의 입장을 밝히는 이 글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읽게 될 사람들을 위해 씌여져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군대에 대한 전문가적 지식을 수집해 씌여진 한편의 논문과 같이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

양심과 신념을 이유로 군복무를 거부한 이전의 병역거부자들처럼 나 역시 글을 통해 사회 모순에 저항하는 견고하고 결백한 순교자와 같은 면모를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지만, 실상은 한 글자도 쓸 수 없는 무력과 공포에 압도된 상태였다. 여기에 쓸 어떠한 말로도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고 예정된 징역형 역시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로부터 단절된 폐쇄 공간에서 짧지 않은 기간을 낯선 타인들과 갇혀 지내야 한다는 공포. 군체제에 의해 발생하는 가해자의 역할도 희생자의 자리도 거부했지만, 군복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만큼 징역살이 역시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산책을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심리상담을 받으며 안정을 찾아보려 해도 복합적인 감정이 앞을 다퉈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병역거부에 따르는 처벌이 부당하고 화가 났다. 곧이어 자책과 우울감이 뒤따랐고, 다 운명이라 받아들이니 무력감이 덮쳐왔다. 소견서를 작성하려 책상 앞에 서면 머리는 백지가 되었고 요동치는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불행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따라가는 이 같은 심리 변화의 궤적이 이어졌다. 

문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 앞에서 정신은 투명해질 수 없었고,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감옥에 가기 전에 할 일들과 정리할 것들이 산더미 같았다. 또한 하고 싶은 일들도 넘쳐났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무력한 상태로 허비하고 있는 동안 초조함은 커져만 갔고 불면증에 시달리다 언젠가부터는 이명과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폐쇄 된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이명 소리는 감옥에 가기 전부터 이미 스스로 쌓아올린 감옥에 갇혀버린 병적인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침몰하는 배에 갇혀 도래할 재앙 앞에 무력하게 서서 마치 죽음을 앞둔 시한부의 삶과 같이 미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죽음, 그것이야 말로 병역거부자인 내가 옥살이를 앞두고 몇번이고 되돌이킨 상태이다. 

달리 보자면 지나온 나의 삶 속에서 군복무를 거부할 만한 사유는 꽤 다양하게 기술될 수도 있었다. 유달리 예민하던 어린시절에서부터 학교의 억압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온 유년기를 서술하면서, 성적 위계의 사회에서 성소수자로 살아온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고집이 강한 독립영화감독의 얼굴로 내 삶을 비주류적으로 위치지으면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해왔던 여기 이 사람은 폭력적인 군대에 갈 수 없다’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중퇴자의 신분으로 홀로 가족을 떠나 외롭게 지낸 시절이나 성소수자라는 위치는 권력에서 먼 사회적 약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독립영화감독으로서 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발언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왔다. 제작한 영화들이 국내외의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고, 그 중 영화 2편은 국내개봉을 통해 일반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더구나 해외영화제에 초청을 받아 20대 내내 여러 국가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이 정도면 또래가 가지지 못한 꽤 많은 자원들을 누리며 살아온 셈이다. 내 삶은 가난에 좌절하고 체제 밖에서 지냈던 외로이 시절에서부터 연인과 함께한 행복한 나날들, 그리고 일을 통해 여러 기회와 사회적 관계를 맺기에 이르기까지 역동적 결합체로 존재한다. 어떤 면에서 사회적 약자이기도 했지만, 최선을 다해 한 인간으로서 하고픈 일들을 하며 살아왔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을 지나오며 나름의 다양한 경험과 관계들을 맺고 살아왔고 그 모든 길들 속에 ‘나들’이 존재해왔다. 자퇴생, 동성애자, 영화감독은 사회가 나를 수식하기 위해 붙인 이름표일 뿐, 이런 호칭들을 앞 세워 그 뒤에 숨고 싶지는 않았다. 김경묵이라는 한 개인은 ‘나’라는 역사 안에서 살아온 불균질적인 ‘나들’의 지층으로 구성되는 존재이지, 병역거부 소견서를 통해 절단된 단일한 면으로 드러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3. 

그렇다면 이 병역거부 소견서는 무슨 말로 씌여질 수 있을까? 껍데기를 벗은 ‘나’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죽음, 그것은 물리적 죽음을 지칭할 수도 있겠지만, 정신적인 죽음이야 말로 본능적으로 군체제를 거부하게 된 사유이다. 사회에서는 나름의 삶을 꾸리며 옳고 그름에 대해 자유로이 발언할 수 있지만, 군복무는 그 모든 것이 불가능한 정신적 죽음 상태를 의미한다. 군대에 적응하기 위해 이전처럼 자유롭게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중단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크게 다가오는 두려움이다. 도덕적 신념과 사회적 대의를 내세워야만 병역거부가 정당화될 수 있으리라는 강박에 짓눌려 내 몸에 얽혀있는 감정을 통제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한 채 외면했다. 그러나 실상 내가 군대를 거부하는 것은 다름아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저항에 따른 국가의 처벌은 개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유발시켜 암묵적으로 그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병역거부라는 주체적인 선택에 자긍심을 가지기 보다 우울감에 허둥지둥한 난 국가가 상정한 이탈행동에 대한 처벌 효과를 그대로 경험하고 있었다. 이 같은 감정을 들여다보면 볼 수록 나는 고결한 순교자도 강철의 사회운동가도 아니었다. 나는 한낱 예민하고 소심한 겁쟁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감내해야 했던 몸에 들러붙은 불안을 부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 글은 선언문이 아니라 미약한 한 개인의 소견서일 뿐이다. 그 앞에서 난 솔직해지고 싶었다.

군폭력에 가담했던 이들과 희생당한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기를 반복하는 악의 체제에서 선임병이 후임병에게 행하는 폭력은 평범한 행위로 정당화 된다. 물론 군폭력을 행한 이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없을 것이며 침묵을 택한 자들 역시 옳지 않았다. 그러나 더 불행한 사실은 그들이 자신이 행했거나 받아야 했던 폭력을 성찰하며 그 체제에 ‘왜’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될 때, 그들에게는 더 큰 권력의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명령 앞에 질문하는 행위는 체제부적응자라는 주홍글씨를 얻게 되는 동시에 전과자가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처벌은 두려움과 공포를 동반하고, 때때로 사회적 죽음을 선고하기도 한다. 체제 밖으로 이탈하게 되었을 때 다가오는 삶의 근간을 뿌리 채 상실할 수 있다는 두려움은 우리를 모두 체제순응자로 만들었다. 어쩌면 이들은 이 체제에서 생존하기 위해 적응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또한 국가권력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자 겁쟁이였을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정의한 ‘양심’을 살펴보면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을 뜻한다. 지금까지 병역거부자들의 강고한 신념을 가르켜 우리는 그들을 양심적 병역거부자라 지칭해왔다. 병역거부와 병역기피 사이에는 신념의 유무에 따른 경계가 가르고 있지만, 양쪽 모두 억압적인 체제한테서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하는 생존본능에 근간하고 있다. 군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역시 엄연한 구분이 있지만, 그 둘 사이에는 군체제를 거부할 수 없는 처지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거창한 신념을 내세우기 보다 개인의 삶을 죽음에서 지키고자 군복무를 거부하는 나를 국가에서 보자면 ‘양심없는’ 병역거부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양심의 역설을 통해 우리는 양심의 진정한 가치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사회적 대의명분이 요구하는 고결한 양심과 신념 가득찬 선언을 벗겨낸 뒤 다가오는 두려움은 양심이라는 정당성 이전의 상태를 들여다 보게 한다. 어쩌면 두려움이야 말로 군체제에 강제로 적응해야 한 이들과 거부해온 이들 모두에게 민낯의 얼굴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것은 자신은 물론 타인을 파괴할 수 있는 폭력 앞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하게 되는 두려움일 것이다. 삶 전체를 걸고서라도 지켜내고자 하는 불변적인 신념인 양심은 언어로 씌여지기 이전의 감정, 즉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가치가 허물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산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겁쟁이인가를 확인하는 행위일 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부당한 질서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또 다시 살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겁쟁이가 사는 데에는 질서에 대한 순응과 거부라는 양의적인 잠재성이 있다. 두려움이라는 공포는 곧잘 분노나 우울감과 같이 절망적인 감정에 빠져들게 한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연약한 감정를 통해 부당한 체제를 받아들여야 한 이들과 거부한 이들의 실존적 고통을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한 이들의 두려움이야 말로 개개인의 삶과 더불어 타인의 고통에 경계없이 다가서는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공감과 연대, 그리고 한걸음 나아갈 수 있는 용기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4. 

노예해방, 여성 참정권 운동, 식민지 국가의 독립과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사회 정의의 기틀은 언제나 작은 개인들의 두려움을 넘어선 용기있는 행동에서부터 출발했다. 전쟁과 군대를 거부한 이들 역시 모든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해왔고, 또 그만큼의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는 그들이 다져놓은 땅 위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법의 테두리 밖에 있던 이들은 처벌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제 나 역시 이들과 함께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 않으려 하는 길에 들어서려 한다. 병역거부에 따른 징역살이는 여전히 두렵지만, 도래할 큰 변화를 향한 작은 발걸음으로 겸허히 받아들이려 한다. 미약한 개인들이 심어왔던 한 그루의 나무가 언젠가 생명의 숲으로 변화될 날을 기다리며 군대 내의 인권 보장과 대체복무제의 도입, 나아가 모병제가 실현되는 평화의 시대를 희망한다. 

재판과 징역을 앞두고서 여전히 현재진행 중인 이 혼돈의 시기가 언젠가는 뜻하지 않은 배움으로 다가올 것이고, 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 두려움은 이내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려 한다. 다소 예민하고 모난 성격이 자신을 더 괴롭게 만들었겠지만, 방황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요동친 삶에게, 암흑같던 시절 곁을 지켜준 친구들에게, 이별의 애도로 작별을 고했던 이들에게, 어둠이 빛보다 어둡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준 예술에게, 살아있는 행복을 가르쳐준 사랑의 감각에게, 혼자였다면 버틸 수 없었던 나날들을 함께 해준 나의 모든 뿌리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앞으로 다가올 고난의 시기, 언젠가 있을 도약을 기다리며 산 자와 죽은 자들과 함께 버티며 나가고 싶다.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며

2014. 1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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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캠프

2015.12.08 16:21:38

[징역단상 1] 3분의1

7월13일, 오늘은 제게 나름의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1월14일 수감된 이후 6개월째 되는 날이고, 만기 기준으로 출소일까지 정확히 1년이 남은, 1년6개월 형량의 3분의1이 채워진 하루입니다. 악몽적이었던 초기 수감기 동안 여러 고초를 겪고서 차츰차츰 안정된 시기를 맞이하기까지 예측불허의 다사다난한 6개월이었습니다. 2015년도 반이 지나가 버렸으니 더 늦기 전에 안부를 전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안녕하신가요?
뒤늦게 인사드립니다. 페이스북에 후원회 페이지를 만들며 수감 기간 동안 이곳을 통해 종종 안부를 주고 받으려 했었으나 막상 감옥에 발을 들여 놓으니 예상하지 못한 갖가지 일들이 벌어졌고, 전 휘몰아치는 거센 폭풍에 허우적대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서신으로 안부를 전하려니 걱정을 끼칠 수밖에 없을 듯해 그간 자제를 하게 됐지요.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였기에 안정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두고 보았습니다. 형량의 3분의1을 지나게 되니 한 고비가 넘어가는 것 같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첫 서신을 띄웁니다.
수감 생활의 큰 고비는 <한겨레> 신문에 저의 병역거부 기사가 보도되며 시작됐습니다. 토요판 1면에 보도가 되었기에 구치소에서도 예민하게 받아들였죠. 더 문제가 된 것은 이 기사 보도 이전부터 <한겨레21>과 수감기간 동안 연재할 칼럼에 관해 논의를 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소 측에서 제지하려 든 것입니다. 감옥에 관한 글을 쓸 생각도 없었거니와 재소자라 하여도 언론기고를 할 수 없다는 원칙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정기관에서는 이를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글을 쓰지 못하도록 소 측으로부터 압박을 받으며 이때부터 요주의 체크리스트에 등록되어 서신 및 접견 감시 처우 등을 받게 되었죠. 압박의 스트레스로 인해 불면증에 신경쇠약까지 찾아와 결국 칼럼 연재는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글 쓰기는커녕 옥살이를 버틸 기운조차 없었으니까요.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고립된 공간에 감금된 상태에서는 부당한 일이라 생각되어도 문제제기를 하거나 저항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교정기관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된 상태인 이상 문제제기에 따른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여전히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이기에 당시에 일어난 일들을 이곳에 자세하게 서술하기는 힘듭니다. 그 경험은 제게 과거 유신체제의 간접체험과 같았고 군사주의 체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 주었습니다.
'질서, 규율, 위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감금 사회에서 우리는 권위에 복종하고 충성할 것을 강요받게 됩니다. 여왕개미에게 절대 복종하는 충실한 일개미가 될 것. 개인의 자유의지 따위는 버려두고 집단의 정체성에 자신을 복속시킬 것. 입 닥치고 가만히 있을 것. 그 어떤 경우에도 예외가 되지 말 것. 열외가 되는 순간 당신에게 돌아올 것은 냉혹한 처벌뿐. 초기 수감 3개월 동안 남부구치소에서 배운 것들입니다. 충격 받고, 분노하고, 저항하다 끝내 좌절한 나날들 - 첫 경험이란 무릇 이렇게 가혹하게 찾아오는 법이지요.
유배되다시피 떠밀려 통영으로 오게 되면서부터 전 결심을 하게 됩니다. 국가의 처벌을 받기 위해 '강제적 감금' 상태가 되었으나 이제부터는 '자발적 고립' 상태가 되자. 다시 말해 내가 속한 곳이 강제 수용소가 아니라, 속세를 벗어난 수도원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죠. 받아들이기에 따라 징역의 시간을 사회의 속도전에서 비켜나 자신이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고 내면으로 침잠해볼, 다시 없을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좌절과 우울의 시기를 지나 적응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말 안 듣는 예외자만 되지 않으면 감옥은 먹여주고 재워주는 복지시설이 되기도 합니다(겨울에 갈 곳 없는 노숙인들이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이곳에 들어온다는 말은 근거없는 소문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에게 포획된 야생동물이 철장에 갇혀 가축으로, 동물원의 전시 동물로 길들여지듯 저 역시 초기의 야생적 본능은 억압되고 온순한 양이 되었습니다. 일어나야 할 시간에 기상하며 배식되는 밥을 꼬박꼬박 챙겨먹고 얌전히 책을 읽거나 멍 때리며 있다가 운동시간에 나가 가볍게 조깅하고 밤이 되어 자야할 시간이 되면 취침을 하는 것이죠. 이같은 일상을 지난 3개월 동안 매일 반복해 왔습니다.
징역의 본질적 의미는 시간을 견디는 것입니다. 시간을 가치있게 활용해야 하는 사회의 시간과는 다릅니다. 감옥의 시간에는 삶이라 불리우는 시간의 특징적 요소들이 없습니다. 특히나 저와 같이 독방의 독거자에게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일도, 대화할 상대도 없이 지내다 보니 하루하루가 날짜만 바뀔 뿐 반복되는 순환의 감각으로 다가옵니다. 사방이 똑같은 풍경의 사막을 걷고 있는 기분이지요.
서신과 접견은 사막에 던져진 제게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또한 사라진 삶이 잠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삶이 제게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오는 것이죠! 단 12분의 접견을 위해 서울에서 통영까지 10시간 가량 차를 타고 오가는 고역을 떠올리면 대단한 정성과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직히 이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을까 막막한 심정마저 듭니다. 수인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은 건강히 잘 살며 걱정 끼치지 않고 지내는 것이겠지요. 손가락 통증으로 인해 생각만큼 답신을 신속히 하지 못하고는 있지만 보내주신 서신 역시 감사히 잘 받아보고 있습니다. 서신을 읽는 동안에는 징역을 잊게 만드는, 살아있는 시간을 되찾게 됩니다.
'충격-불안-분노-저항-좌절-우울-적응'의 시기를 지나 앞으로는 안정과 권태를 오가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싶네요. 반면에 사람들과 수다 떨고 어울리기 좋아하는 제가 통제를 중심으로 설계된 감옥의 체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기질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언제든 억압된 감정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잠재적 위험 또한 함께하고 있을 것 같기도 합니디. 그럼에도 이 만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애정으로 관심과 지지를 표해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6개월만의 첫 공개 서신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후원회 페이지에 첫 서신을 띄웠으니 앞으로 종종 소식 전하겠습니다. 수감 생활의 무력감을 느끼는 중인 저에게도 새로운 활력이 될 것 같습니다.
이열치열 황치열짱
더위와 더불어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길 바라며..

2015. 7.13
통영에서 경묵 드림

공중캠프

2016.03.30 13:28:48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나를 맞아들여 후대했고, 벌거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주었다.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와주었다. -마태복음 25:35,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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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입니다. 당신들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했다고 해서 놀라지 마십시오. 바람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붑니다.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만,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릅니다. 영에서 난 자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요한복음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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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8일 저녁. 창 밖에서는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고, 방 안의 저는 오락가락하는 환절기 날씨 탓에 몸살감기를 앓으며 골골대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생일날의 모습입니다. 잿빛 콘크리트의 쓸쓸한 풍경이지만 마음은 담담합니다. 수감된 이후로 명절, 성탄절, 새해를 평일과 같은 날로 맞이하는 감옥의 일상에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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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 페이지에 두 번째 보내는 이 편지가 아마도 감옥에서 보내는 마지막 서신이 될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이변이 없다면 다가오는 3월30일 오전 10시에 통영구치소에서 가석방 출소를 하게 될 듯합니다. 수형된 지 1년2개월16일만에 철창 밖의 공기를 마셔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완연한 봄 내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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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작년 7월에 이곳에 서신을 보낸 뒤로 무소식으로 지냈습니다. 실은 감옥에 있는 동안 이 페이지를 통해 수형 생활에 관한 것이나 사회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병역거부가 비단 제 개인의 선택인 것만이 아니라 군사문화의 잔재가 곳곳에 퍼져있는 이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문제라는 생각을 했었기에, 또한 독거 생활의 고립감을 글을 공유하며 덜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에 말이죠. 하지만 그 기대와는 달리 글을 쓰려할 때마다 감옥에서 느끼는 바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막막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수히 많기는 했지만 그것을 정제된 언어로 풀어낼 자신은 없었습니다. 언어로 환원하기 힘든 경험이기도 했고, 아직은 제가 이 시기에 겪은 일들을 무리 없이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소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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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마지막 서신을 쓰기까지도 오랜 망설임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말머리를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아 기독교인 코스프레를 하며(?) 제 마음을 저보다 잘 표현한 성경을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수감되어있는 동안 먼 곳까지 찾아와 지지의 마음을 전해주신 분들, 서신을 보내주시거나 책과 영치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방황하고 아파하던 와중에도 기운을 잃지 않고 이 시기를 무사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겸둥이 경묵은 그대들의 사랑과 염려 속에 잘 지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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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월이라는 수감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시간의 길이와 무관하게 독방에서 마주한 이 시간의 밀도는 거대했습니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감옥, 그리고 감옥 내에서 재소자들로부터 차단된 독거 생활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감옥마다 사정이 조금씩 다르긴 하나 통영에서 저의 경우는 운동시간에도 야외의 일인용 철창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24시간을 온전히 홀로 있게 되었습니다. 온종일 상대할 사람이라고는 자기 자신뿐이었기 때문에 독방에서 저는 많은 시간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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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표현하자면 독방에서 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좁은 콘크리트 방 안에서 저는 무수한 ‘나-들’의 발견과 함께 했습니다. 완전히 통제된 밀실의 실험용 생쥐를 관찰하듯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었죠. 어느 시인인지 촌장 아저씨인가 말했듯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혼자서도 쉴 틈 없이 부대끼며 갈등하고 좌절했다 또 화해하는 나날이었습니다. 생각하는 나, 분노하는 나, 통제하는 나, 슬퍼하는 나, 저항하는 나, 동시에 이 모든 나-들을 감상하고 관찰하는 나-들과 어울려 특별한 관계 안에서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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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어린 유년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불러들여 과거와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과 해후하고,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을 되짚어보면서 지금의 내가 어떻게 경험되고 구성되어 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묵혀두었던 잠재의식과의 접신 상태가 아니었나 싶어요. 마음 속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지는 듯했지요. 사회에서는 이 같은 시간을 가지기 힘들겠죠. 누구나 그렇듯 바쁜 일상에 치여 사느라 멈춰 서서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삶을 돌아보기가 어려우니까요. 저는 사회에 있을 때 지친 마음을 힐링하러 절에서 하는 윗빠사나 수행(침묵 수행) 프로그램에 일주일 간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부러 시간을 내고 돈을 들여 일주일 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외딴 공간에서 지낸 것인데, 앞으로는 힐링이 필요할 때 감방을 찾아와야겠습니다(농담이니 웃으셔도 됩니다, 깔깔). 실제로 독거방은 그 특성상 승려가 토론에서 면벽 수행하듯이 재소자를 내적이고 명상적인 상태로 이끌어줍니다(간혹 이곳의 적막함에 정신줄을 놓고 늑대인간이 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하고요). 독방의 시간은 제게 의도하지 않은 많은 만남과 배움의 장이 되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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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의 모든 경험이 긍정적인 배움이 된 것은 아닙니다.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 하루가 일 년같이 느껴지던 인고의 과정이 더 길었습니다. 예민하고 모자란 성정 탓으로 더 고통 받고 힘들어했던 것들도 있었고, 군대식 규율에 끝까지 적응하지 못(안)하고 매일을 번뇌하며 지냈던 게 실제 저의 일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한 선택이 징역살이를 해야 할 죄라고 생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요구하는 ‘죗값’을 치러야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괴로웠지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평화를 지키고자 전쟁 활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감옥에 구속되어 그 행동에 교정되어야 할 죄인 것인가, 여전히 의문하게 됩니다. 군대 아니면 감옥이라는 선택지만을 제시하는 이 나라의 사법 체계는 정의롭다 할 수 있을까요? 정말 대안이 없기 때문에 한 해 700명의 남성들이 군대 대신 감옥을 가야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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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제 저는 이 나라가 청구한 ‘죗값’을 청산하고 사회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푸코 선생님이 이르시길, 감옥이 사회밖에 격리되어 존재하는 이유는 이 사회가 감옥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라죠. 제가 돌아가게 될 곳이 창살 없는 감옥 또는 감옥보다 더한 헬조선이라 하더라도 당분간은 이 벅찬 기쁨과 설렘의 아드레날린은 멈추지 않을 듯합니다. 달리 보면 자유가 구속된 상태에서의 시간이 자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고, 관계가 차단된 공간에서 진실한 관계의 소중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자 한다면 그 대상이 부재한 환경 속에 놓였을 때 가장 절박하고 진실한 탐구가 이뤄지지 않나 싶어요. 자유, 사랑, 우정, 나눔의 가치를 남다르게 느껴보고자 한다면 조심스레 감방행 열차를 권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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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18일이 저의 생물학적 탄생일이라면, 2016년 3월30일은 제 마음이 다시 태어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생의 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며 제로 그라운드에서 시작하는 삶. The wind blows as it wishes. 완연한 봄바람과 함께 전과를 단 귀요미가 돌아옵니다. 출소하면 한동안은 근심 걱정 잊고 웃고 떠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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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18
봄비 내리는 통영에서
김경묵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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