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할 곳 없는 천사(free board)


[떠옴] 오늘 읽은 글 가운데서...

조회 수 1034 추천 수 0 2002.09.28 13:49:38
스물한 살의 죽음

2002.09.27 김성욱(영화평론가)

미국의 영화감독 존 카사베츠는 "오늘날 영화는 단지 꿈의 세계만을 보여줄 뿐 사람들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미국에서 사람들은 스물두 살에 죽어버린다. 그들은 정서적으로 스물두 살, 아니 그 이전에 죽어버린다. 예술가로서 나의 책임은 그런 사람들이 스물두 살을 넘기고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이미 죽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스물한 살이 아니라 이미 십대쯤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빅터 누네즈의 <천국의 루비Ruby in Paradise>(1993)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여주인공 루비가 고향 테네시를 떠나 플로리다에 정착해 겪게 되는 성장의 고통을 다룬 이 영화는 여전히 각별해 보였다. 무엇보다 루비 역의 애슐리 저드의 싱그러운 얼굴(미소)과 근사한 목소리가 그랬다. 그녀의 얼굴을 보여주는 클로즈업과 내면의 성찰을 담아낸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영화를 순수한 '피부-이미지'로 만들어내는데, 그 결을 따라 영혼의 내면과 외면이 조응한다. 피부와의 만남, 혹은 부드러운 살결의 유혹. 그것은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 벌거벗은 몸의 만남처럼 진정한 교감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스트립 댄서의 벗은 몸처럼 더이상 남은 게 없는 텅 빈 영혼의 전시와도 같다.

테네시를 떠난 루비는 플로리다에 정착해 기념품을 파는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주인 챔버스 부인의 바람둥이 아들 리키와 관계를 맺고, 꽃집을 운영하는 지적인 마이크와 교감을 나눈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루비는 애인을 뒤로 한 채 테네시의 집을 떠나 자동차를 몰고 클리브랜드 해변으로 향한다. 그녀는 정말이지 '애타게 자기自己를 찾아' 도주한다. 휘어지고 감아도는 도로의 선들과 빠른 템포의 음악은 그녀의 절박한 심정과 그녀가 앞으로 보고, 경험할 풍경과 운명의 선들이 결코 심상치 않음을 짐작케 한다. 플로리다에 도착한 루비는 새로운 세계와 접촉하면서 고향, 어머니, 그리고 옛 애인과의 과거를 떠올린다. 영화는 이 모든 것을 그녀가 담담하게 적고 있는 일기와 일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내면화한다.

관광객들이 이미 떠나버린 철 지난 바닷가 플로리다에 도착한 루비는 마치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의 주인공들처럼 "여기도 특별한 것은 없다. 나는 단지 시간을 두고 내 생각을 가라앉히려 노력중이다. 아마도 이곳으로 도망쳐온 이유를 캐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루비는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공장 노동자 동료는 그녀에게 "걱정하지마. 시간이 지나면 고통에 대한 아무런 느낌도 갖지 않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시간을 두고 문제들을 고민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행위'보다는 행위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루비는 "난 항상 같은 질문을 한다. 예를 들면, 근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린 우리의 진정한 바람을 안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왜 종종 외로워하고 두려워하는가? 아마 그 대답은 무척 간단할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미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루비는 모든 고민을 뒤로 한 채, 미소를 머금고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며 "모두들 좋은 아침이에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텅 빈 가게를 보여준다. 이 이상한 결말은 근심스런 질문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세상과의 단순한 만남과 인사에서 시작한다는 듯한 미묘한 울림을 자아낸다.

우리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의 이면을 보려 하기 때문이거나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은 루비의 그것처럼 정말이지 단순하다. 인간들의 다정한 결속과 화합, 영혼을 다치지 않고 사는 것, 그리고 스물한 살에 결코 정서적으로 죽지 않는 것. 카사베츠의 말처럼 영화가 그런 것들을 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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