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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캠프

2017.09.29 10:31

[칼럼] 김공회, 150살 ‘자본론’이 인공지능 시대를 만났을 때


<자본론> 제1권 출간 150주년
150살 ‘자본론’이 인공지능 시대를 만났을 때

1867년 9월14일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지은이는 카를 마르크스. 정확히 150년 전의 일이다. 지난 150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공황이 이어졌다. <자본론>이 오늘날에도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교본임을 일깨워주는 증거다. <자본론>은 미래 세상의 설계도로 남을까.

1867년 4월10일 아침 8시. 독일 함부르크로 향하는 증기선 한 척이 가무잡잡한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중년 사내를 싣고 런던을 떠났다. 항해 내내 계속된 비바람과 파도로 여기저기서 승객들이 구역질하며 쓰러지는데도, 이 사내는 그들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헤벌쭉댔다. 누구도 그가 열흘 전만 해도 사타구니에 난 종기와 저승사자 같은 빚쟁이에게 시달리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던 비참한 망명객이었음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중년 사내의 이름은 카를 마르크스. 그가 그토록 기분이 좋았던 것은, 20년 넘게 계획했고 적어도 10년 이상 독촉받았던 어떤 원고의 집필을 드디어 끝냈기 때문이다. 그의 여행가방엔 바로 그 원고뭉치가 들어 있었다. 북해의 풍랑을 헤치고 엘베강 하구를 거슬러, 배는 마침내 함부르크항에 닻을 내렸다. 4월12일 정오. 장장 52시간의 항해 뒤 쉬지도 않고 마르크스가 향한 곳은 출판업자 오토 마이스너의 사무실이었다. 원고는 다시 독일의 동부 라이프치히에 있는 인쇄소로 보내졌다.

9월14일. 지난한 교정작업 끝에 드디어 <자본론> 제1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본의 생산과정’이란 부제가 붙었다. 오랜 세월을 준비한 만큼 당연히 기대도 컸다. 걱정하는 건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뿐이었다. 감시와 추방, 도망과 망명, 어린 자식(아들 둘, 딸 하나)의 죽음, 불안정한 수입 등 그동안 그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리라. 예니와 달리, 마르크스의 사상적 동지이자 재정적 조력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남다른 감회에 사로잡혔다. 이 저작의 탁월함과 의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는 <자본론>이 출간 즉시 세상에 큰 충격을 주면서 대성공할 것임을 확신했다.

마르크스 자신도 한껏 고무되었음은 물론이다. 한 편지에서 그는 <자본론>이 “지금까지 부르주아지의 머리에 던져진 가장 가공할 만한 포탄이 될 것”이라 호언하기도 했고, 나오지도 않은 책의 영어판과 불어판 번역자를 일찌감치 물색하기도 했다. 마이스너는 독일 신문들에 사전광고를 냈고, 출간 뒤에는 엥겔스가 유럽과 미국의 신문에 독어와 영어로 최소 일곱 편의 서평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냈다. 마르크스 주변 인물들이 총동원돼 ‘바람잡이’로 나선 셈이다.

그럼 결과는? ‘재앙’까지는 아니었으나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11월이 되자 서평도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조바심이 커지다 보니 종기가 도졌다. 삶이 다시 예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는 듯했다. 마이스너와의 계약에 따르면 1권 출간에 이어 2권과 3권을 연달아 내야 했으나, 마르크스는 이 의무의 이행을 미룬 채 후속 권들에 더욱 완벽을 기하고자 1883년 런던에서 영원히 눈을 감을 때까지 새로운 연구노트만 채워 나갔다.

왜 마르크스는 <자본론>에 그다지도 집착했을까? 1818년 독일 남부 트리어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변호사인 아버지의 바람대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수학하는 동안 급진적으로 해석된 헤겔 철학에 매료되어 박사논문도 철학 분야로 쓰게 된다(1841년). 대학에 자리를 잡으려던 계획이 반동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무산되자, 마르크스는 언론계로 방향을 튼다. 이때 그는 생전 처음으로 의회와 법정에서 보호관세나 재산권을 둘러싼 갈등을 가까이서 목격하고 또 그에 대해 논설할 기회를 얻었는데, 훗날 그의 회고에 따르면 ‘물질적 이해관계’를 다뤄야 하는 ‘곤란’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곤란’은 그저 직업상의 의무가 아니라 그의 생각의 틀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어떤 사변적인 명제나 가치도, 심지어 법조항도 ‘물질적 이해관계’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을 지켜보며, 어떻게 급진적으로 해석하더라도 헤겔 철학은 그 관념성 때문에 한계가 명확하다고 마르크스는 결론지었다. 따라서 그가 헤겔 철학의 ‘유물론적’ 전복을 시도한 포이어바흐에 경도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나아가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현실의 부조리를 타파하려는 노동자들의 운동을 접하면서 ‘실천’의 중요성을 깨닫기에 이르는데, 이쯤 되면 포이어바흐까지 포함한 모든 철학들이 ‘말장난’일 뿐이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는 범유럽적 혁명운동에 투신하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가 최종적으로 실패하면서 마르크스는 1849년 런던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렇게 실천이 봉쇄된 채 유폐된 상황에서 그는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고 훗날 새로운 ‘실천’을 도모하기 위해 자본주의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인 ‘물질적 이해관계’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로 한다. 결국 <자본론>은 그러한 탐구의 불완전하지만 최종적인 결실인 셈이며, 나아가 마르크스의 지적 여정의 ‘종착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물적 이해관계를 단순히 ‘탐구’하지만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런 탐구에 특화된 학문 분야가 경제학인데, 마르크스는 당대 경제학이 근대사회의 물적 이해관계의 작동 메커니즘을 제대로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그의 기획은 기존 경제학과의 ‘대결’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자본론>은 그러한 ‘경제학 비판’ 기획의 일부다.

마르크스가 보았을 때 경제학의 가장 중대한 오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질적인 성격을 규명했으면서도 이를 자본가와 노동자 간 계급관계의 바탕 위에 적절히 배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생산의 본질적 성격이란, 모든 부가가치는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어떤 노동자가 톱과 망치를 사용해 목재에 노동을 가해 개집을 만들었다고 하자. 이 생산물의 가치는 기존에 존재하던 톱·망치·목재로부터의 가치 이전분과 전혀 새로운 부가가치로 나뉠 텐데, 이 후자는 전적으로 노동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이 부가가치 모두를 노동자가 취한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으며, 여기까지는 애덤 스미스 같은 경제학자도 의견이 일치한다.

한편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관계에서, 곧 노동의 도구와 대상을 독점한 자본가가 오직 노동력만을 가진 노동자를 고용함으로써 일어난다. 이때 자본가가 생산의 최종 결과물 중 자신이 애초 투입한 부분만을 분배받는다면, 그는 이 생산에 참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전적으로 노동자가 생산한 부가가치의 일부를 요구할 것인데, 만약 이 요구가 수용되면 근대경제 특유의 등가교환 가정이 깨지게 된다.

이런 모순에 직면해 경제학은 이른바 ‘요소이론’, 곧 생산물의 가치는 그 생산에 참여한 각 계급이 가져가는 이윤·지대·임금의 합이라는 명제를 내놓는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것은 제기된 모순을 해결한 게 아니다. ‘부가가치=노동’ 규정을 버린 것일 뿐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위 모순을 노동과 노동력을 구별함으로써 해소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된다는 것은 일정 시간 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함을 의미하며, 고용된 시간 동안 노동력이 발휘되어 생산된 모든 것은 자본가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가는 그렇게 생산된 부가가치의 일부를 노동력 판매의 반대급부(임금)로 노동자에게 제공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갖는다(이윤).

요컨대 모든 부가가치가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자본주의의 특수한 조건, 즉 생산수단을 자본가가 독점한 조건 아래서는 그 부가가치는 임금과 이윤으로 분할되어 각각 노동자와 자본가에게 분배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에서 생산과 분배는 괴리되며, 그 괴리를 마르크스는 ‘착취’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 착취의 크기를 두고 자본가와 노동자는 항구적인 갈등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반면 ‘요소이론’에서는 각 계급은 ‘주어진 자기 몫’만 챙겨가면 되기 때문에 서로 싸울 일이 없다.

<자본론>은 이렇듯 착취를 본질로 하는 노동-자본 간의 계급관계를 중심으로 경제를 파악하며, 이는 경제에 대한 독특한 분석력을 <자본론>에 부여한다. 이를테면 개별 자본가는 본성적으로 자신의 몫을 늘리고 착취를 강화하기 위하여 기술혁신에 나서고 생산에서 노동을 상대적으로 줄이려 한다. 그런데 모두가 이렇게 경쟁적으로 움직일 때 거기 몸을 던지지 않는 자본은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경쟁적 기술혁신은 개별 자본에겐, 그리하여 경제 전체적으로도 맹목적인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지속되어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이 상대적으로 계속해서 줄어들면 자본의 착취 영역도 줄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제 전체적으로 이윤율이 떨어지고 자본들 간의 경쟁은 더욱 격화되는데, 여차하면 많은 자본이 한꺼번에 도산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공황’이다.

<자본론> 제1권 출간 이후 정확히 15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 150년 동안, 자본의 조직화와 국가의 정책역량 강화가 꾸준했지만, 공황은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발생했다. 물론 그동안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은 1930년대 대공황, 1970년대 석유파동, 1980년대 남미 외채 위기, 1990년대 동아시아 위기 등을 자본주의 자체가 아닌 어떤 외적 요인에 그 원인을 돌려왔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세계자본주의의 핵심부에서 촉발된 공황은 더 이상 그런 변명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어쩌면 <자본론>이 오늘의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게 아닐까?

<자본론>이 경제의 장기적인 발전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파악한다는 점도 곱씹을 만하다. 당장 인공지능 같은 신기술들을 떠올려보자. 이들이 인류의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고된 노동을 줄이면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리라는 장밋빛 전망이, 대규모 실업이나 대다수 자본의 경쟁력 상실에 대한 걱정과 공존하고 있는 현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혹시 그것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근거로 한 현재의 착취적인 생산관계의 철폐 필요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이미 우리의 일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구글이나 페이스북, 또는 포털서비스 같은 이른바 ‘플랫폼’ 기업들이 공적인 통제 아래 두어졌을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이렇게 <자본론>은 출간된 지 150년이 지난 오늘의 미래를 설계할 때에도 유용한 빛을 던져주는 것 같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한겨레, 2017.9.9]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103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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