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단죄가 목적이니 증거는 객관적일 수 없었다. 누군가 인민의 적으로 고발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증거를 따지거나 인민의 적으로 지목된 자를 옹호하는 것 역시 금기였다. 자칫하면 인민의 적을 옹호하는 또 하나의 인민의 적으로 엮일 수 있었다. 공포의 침묵 소리에서 박수의 열기는 커져 갔고 마치 더 잔인할수록 더 정의롭고 더 선명할수록 더 올바른 듯한 착각의 고도는 높아만 갔다.

……

일단 반동분자로 몰린 사람은 인민재판대에 올라 머리 숙이고 아무 말도 못하다가 몽둥이에 머리가 깨지거나 죽창에 찔려야 했던 것처럼, 한 번 여론 재판에 올라간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사과문을 강요당했고, 몇 년 간 활동 금지 등 사회적 매장을 아주 쉽게 얘기하는 진보 완장들의 말(言) 몽둥이와 글(文)로 된 죽창에 찔려야 했다.

……

요즘 우리나라 진보들은 정말 이상하다. 인간에 대한 존중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이상에 위배되는 인간들 잡기를 더 즐기는 것 같고, 누군가를 매장시키고 처단하는 행위로 자신들의 정의감을 확인하는 걸 즐기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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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 일부 진보의 개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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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재판.jpg



해방 공간 이후 전쟁에 이르는 좌우익의 격돌 와중에서 좌익들에 대한 적대감과 문제의식을 극대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극히 혐오스러운 뜻으로 쓰이고 있는 한 단어에 주목해 보자. ‘인민재판’이다. 

인민재판의 형태는 우리가 익히 보았던 3류 반공 드라마 상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민이라는 이름의 군중이 모이고 그 사이에 열렬한 완장들이 점점이 박힌 가운데 인민의 적들이 끌려온다. 그들의 죄상이 공개되고 인민들 사이의 완장들이 유죄를 부르짖고 좌중의 기계적인 박수를 끌어내는 가운데 처형나 징역이 결정되는 것.

물론 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처럼 소작인들을 아낀 인격자처럼 인민재판에서 무죄를 받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극히 희귀했다. 어차피 인민재판은 유죄와 무죄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단죄가 목적인 법정(?)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답정너’ 재판이라고나 할까. 

단죄가 목적이니 증거는 객관적일 수 없었다. 누군가 인민의 적으로 고발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증거를 따지거나 인민의 적으로 지목된 자를 옹호하는 것 역시 금기였다. 자칫하면 인민의 적을 옹호하는 또 하나의 인민의 적으로 엮일 수 있었다. 공포의 침묵 소리에서 박수의 열기는 커져 갔고 마치 더 잔인할수록 더 정의롭고 더 선명할수록 더 올바른 듯한 착각의 고도는 높아만 갔다. 

인민재판을 주도하는 이들은 자신이 역사의 선봉인양, 혁명의 전위인양 착각하며 스스로를 고무했다. 그를 통해 자신의 혁명성을 증거할 수 있다는 듯 설쳤다. 

결과가 정해진 재판은 무의미하고 증거를 무시하는 판단은 무리수를 둘 수 밖에 없으며 그들의 단죄 방식은 필요 이상으로 무자비해지게 마련이다. 인민재판의 특징이다. 누군가 인민의 적이라고 부르면 반동분자와 그 반동 행위의 피해자 프레임이 짜였고, 피해자(?)의 증언은 만고강산에 살기 푸르른 증거가 됐고 “죽여라”보다는 “총알도 아깝다 때려 죽여라.”는 자의 외침이 힘을 얻었다.

요즘 나는 ‘진보의 개버릇’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개인적으로 보수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처지고 진보에 대해 뭘 알아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 타박할 수도 있겠으나 굳이 개버릇이라는 악담을 입에 담게 되는 이유는 요즘 이른바 진보들이 누군가를 단죄하고 응징하는 수법이 거의 인민재판의 판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창과 몽둥이가 없고 육체적 생명과 신체적 자유를 앗아가지 않는 것 뿐, 그 발상과 전개와 결론은 인민재판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반동분자와 그 고발자, 피해 인민의 프레임이 일단 형성된 뒤에는 이른바 반동분자의 어떠한 항변도 무시됐던 것처럼, 일단 사회적 강자와 약자 프레임 (그것이 젠더든 위계든)이 짜여지고 누군가가 ‘고발’한 경우 그 고발은 혐의 아닌 팩트로 수용돼 ‘일단 맞고 시작하는’ 집단 가해로 이어졌다. 

인민재판 당시 ‘반동 행위’에 대하여 ‘완장’들이 언성을 높이는 상황에서 반론을 제기하면 그 역시 인민의 적으로 몰릴 가능성이 컸듯,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누군가 도덕적으로나 젠더적으로나 위계적으로나 ‘한 놈’이 제대로 걸렸다 싶으면 그에 대한 변호는 그 정당성 여부를 떠나 삽시간에 '2차 가해'로 몰렸다. 

일단 반동분자로 몰린 사람은 인민재판대에 올라 머리 숙이고 아무 말도 못하다가 몽둥이에 머리가 깨지거나 죽창에 찔려야 했던 것처럼, 한 번 여론 재판에 올라간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사과문을 강요당했고, 몇 년 간 활동 금지 등 사회적 매장을 아주 쉽게 얘기하는 진보 완장들의 말(言) 몽둥이와 글(文)로 된 죽창에 찔려야 했다.

몇 년 전부터 그 꼬라지들을 가까이에서, 멀리서 볼 기회가 많았다. 웬만한 식자들도 무서워서 말도 못하고, 가해자로 지목된 자나 자신들의 정치적 올바름에 위배돼 21세기 인민재판대에 오른 이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어떻게 변명해 주지도 못하고 애만 태우다가 ‘사람을 잡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다. 

사회적 고발의 긍정성을 부인하는 게 아니다. 고발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소중히 보호받아야 할 존재다. 그러나 고발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는 고발의 내용이 충격적일 때가 아니라 고발의 내용이 진실일 때다. 진실임이 증거와 증언과 정황으로 입증될 때다. 

“증거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어. 이렇게 나쁜 놈이라는데!!!!”를 부르짖기 시작하면 그 순간 우리들의 손에는 죽창이 쥐어지게 되고 고발이 나오자마자 “내 그럴 줄 알았어.”를 되뇌며 저놈 죽여라를 외치는 순간 우리 팔뚝에는 붉은 완장이 빛나게 된다. 여기서 붉음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헌신했던 공산주의자들의 경건한 붉은 색이 아니라, 그저 피를 탐할 뿐이고 튀기 좋아하는 ‘관종’ 원숭이의 엉덩이 색깔일 뿐이다. 

......

거듭 말하거니와 모든 고발은 정당하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단죄받아야 한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정치적이든 법적이든 사회적이든 단죄에 이르려면 인민재판처럼 목청 큰 완장들의 고발과 선동 이상의 증거가 제시돼야 한다. 

누군가에게 사과를 시키려면 옴짝달싹 못할 증거를 제시해 그 행동을 객관화하고 잘못을 인정케 함이 도리이지만, 언제부턴가 자신들의 정치적 입맛에 맞는 사과를 강요하고 그런 사과가 아닐 경우 ‘늬우치지 않았다’는 또 다른 낙인을 찍는 게 버릇처럼 돼 버렸다. ‘공개사과’란 곧 자신들이 원하는 죄상을 자백하라는 인민재판의 양식이다. 

‘3년간 활동 정지’ 정도의 사회적 매장형, 명예형을 내릴 정도면 그 ‘증거’ 또한 명확해야 한다. ‘언어폭력’이 저질러졌다면 가해자에게 또 사태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언어 폭력’의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한다. “언어 폭력이 저질러졌습니다.”는 건 ‘님 생각’일 뿐,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다. 인민재판에서 ‘이 자는 반동이다.’ 라는 명제처럼. 인민재판은 그 명제에 대한 반론을 허용하지 않았다. 단지 명제에 따라 처벌의 수위를 결정했을 뿐이다.

......

결국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하여간 언어폭력이 존재했다는 ‘판결’이다. 그러면서 그에 항의하는 이들에게는 ‘동무도 반동이요’ 식의 비난만 난무한다. 이것은 인민재판이다. 나는 이 인민재판에 항의한다. 

요즘 우리나라 진보들은 정말 이상하다. 인간에 대한 존중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이상에 위배되는 인간들 잡기를 더 즐기는 것 같고, 누군가를 매장시키고 처단하는 행위로 자신들의 정의감을 확인하는 걸 즐기는 느낌이다. 

아닌가? 정말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나라의 진보를 위해서, 그 생명력과 미래를 위하여 ‘아니야!’라고 고개를 세게 흔드는 분들이 없기를 아니 그건 기대하기 어려우니까 그저 그 수가 적기를 바란다. 반성해 본다. 나는 인민재판대의 구경꾼인 적이 없었던가. 행여 완장을 찼던 적은 없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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