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끝


도종환 - 점자 / 백무산 - 하나에 대하여

조회 수 5635 추천 수 0 2010.02.02 19:10:03
창원의 춘택형이 언제나처럼 "내가 사랑한 노래(2005~2009)"를 엮어 정성스레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깜박 잊고 있다가 오늘에야 슬며시 꺼내 읽어 보았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눈물이 흐르는 요즘, 한문장 한문장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 중에 두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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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자

/ 도종환


앞을 못 보시던 할아버지는 소리만으로 세상을 읽으셨다 안방에 오도카니 앉아 계시다가 노을 묻은 발로 가만가만 마루청 밟는 소리만 들으시고도 민환이냐 하고 내 이름을 부르셨다

노안이지만 개안수술에 성공하여 말년에는 희미하게나마 세상을 보시던 외할아버지는 대문 옆에 쪼그려 앉아 얼고 있는 거지를 발견하면 사랑방 당신과 나 사이에 데려다 재우셨다 아무도 못 보는 거지를 외할아버지만 보셨다

냉랭한 골목에 아버지가 방 한 칸을 얻어 구멍가게를 내고 국수틀을 돌리던 강원도집 허기진 몸처럼 축축 늘어지던 국숫발 너머 안채의 주인집 큰딸도 장님이었다 그 여자는 그러나 손끝으로 세상을 다 읽었다 여섯 식구 젓가락을 손으로 일일이 구분하여 식탁의 정해진 자리에 놓았고 손끝으로 나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다

그 시절 내가 처음 만져보았던 오톨도톨한 점자가 오늘 밤은 하늘 위에 떴다 하늘 위에 뜬 점자들은 손 끝으로 만져나가다 어머니, 아버지, 보고 싶은, 그런 글자를 만난다 열몇 살 때부터 편지 앞에 수없이 썼던 글자들 겨울이면 산맥 위로 총총히 돋아나던 외로운 점자 초저녁부터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 와 서늘한 바람의 물줄기를 쏟아붓는 봄밤에 오래 잊은 글자 하나 찾으려고 하늘 여기저기를 더듬거리다 손을 내린다

그러다 가만히 눈을 감고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다 별들의 점자가 손끝으로 내려오는 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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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에 대하여
- 15만 금속노조 출범에 부치다

/ 백무산


이제 우리는
하나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다

돌멩이가 쌓여 산더미를 이룬 것도 하나된 것이다
물방울이 모여 연못을 이룬 것도 하나된 것이다
모래알이 굳어 큰 바위가 된 것도 하나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진정한 하나라고 말 할 수 없다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모여 하나된 것에 대해 생각할 때다
모두 다른 팔 다리와 머리와 오장육부와 눈 코 입 귀가
평등하게 만나 한 생명을 이루는 하나에 대해서 생각할 때다
어깨가 크다고 발가락을 무시할 수 없고
눈이 귀중하다고 똥구멍을 비웃지 않는다
같은 것끼리는 오히려 평등할 수가 없다
같은 것끼리는 오히려 서열과 차별이 일어난다
다르므로 평등하고,
다르므로 차별할 수 없음을 말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다

저기 하나인 산이 있다, 저기 하나인 숲이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같은 나무, 같은 돌멩이 하나 없다
큰 나무가 작은 풀꽃을 비웃지 않는다
큰 바위가 작은 올챙이를 탓하지 않는다
다른 그들이 모여 의연한 산을 이루고
다른 그들이 손에 손을 잡고 넉넉한 숲을 이룬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생각할 때다

팔뚝은 그저 팔뚝이고, 심장은 그저 심장이고,
머리는 그저 머리통이나, 그것들이 어우러져
한 생명을 이루면, 그곳에 가슴이 일어나 뛰고
고귀한 영혼이 깃든다
다름이 모여 진정한 하나로 만나 한 생명을 이루면
너와 나를 넘어선 높고 엄숙한,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고귀한 인간좀엄을 얻는다

길이 흐리거든 동지를 믿어라
유혹이 따르거든 존엄을 택하라
아, 바람이 불거든 가슴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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