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2018)

/ 엄기호


고통을 겪는 이가 고통을 전시하는 것을 통해 겨우 유령을 면하고 그나마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 곁에 선 이는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그저 유령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전시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곁이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곁의 현존을 착취하고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 고통의 곁이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아니라 바로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17-19)


1. 고통의 지층들 - 고통의 곁, 그 황량한 풍경에 대하여

말하고 싶지 않음. 그러나 말하고 싶음. (71)

이충연이 보기에 용산참사는 그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들과 세계, 그들과 권력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렇기에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그들 ‘사이’를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무의미하며 위험하다. ... 여기에 고통을 이미 승인된 법의 언어로 말하는 것의 딜레마가 있다. 이충연은 자신의 고통을 야기한 사회에 도전하려고 하지만 그 사회가 승인한 말로만 그것을 말하려 한다. 그 결과 그는 현 사회의 말과 권위를 승인하고 재생산한다. (79-82)

고통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사회적 측면, 관계의 측면, 그리고 실존적 측면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차원에서 다시 거주할 세계를 구축하는 언어는 다 다르다.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인식하고 동시에 주변과 공감하고 더구나 실존적 측면을 응시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마법의 단어’(‘주문’)는 없다. (97)

* 고통은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말할 것이 남아 있다. / 그게 무엇일까? 내가 겪고 있는 ‘것’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과정, 말할 수 없는 것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고통을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싸울 수 있게 된다. 불가능에 좌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움으로써 우리는 그 둘을 동시에 기록하고 나눌 수 있게 된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 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주문은 이 길을 봉쇄한다. (114)

“나만 외로운 줄 알았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픈 사람들은 다 외롭더라고요. 외로워서 힘들어하더라고요.” ...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어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의 절대성 자체가 ‘공통의 것’이 되는 것이다. /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고통이 무엇인지와 그 의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이 그 고통과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며 넘어서려고 했는지, 그 고군분투에 관한 이야기다. 자기의 겪음에 대한 기록이며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 내가 외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넘어서 비로소 말을 하게 된다. 내 ‘소리’를 말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그’에게 말을 한다. 그가 내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대가 있을 때 말하는 사람은 그가 ‘응답’할 수 있는 말을 하려고 한다. 응답을 요청하기에 응답 가능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응답을 요청하는 것은 응답하려는 상대를 인식하는 것이다. 고통으로 파괴된 세계가 재건되는 시작점이다. 세계는 이처럼 어떻게 해서든 말을 통해서만 재건될 수 있다. (125-127)


2. 고통의 사회학 - 고통을 전시하고 소비하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존재감 : ① 사회적 ‘인정’ - 성과 (위계) 사회, 지표, 대체 가능성, ② 관계/‘곁’/친밀성/사랑과 우정, 환원/대체 불가능, 현존, 선물, 비대칭성, 인격, 존중, 기쁨 - ‘관심’의 상품화, 주목, 유익한 존재, 재미/유머, ‘인플레 인간’, ‘사교’, ‘가면’, (소수자/권력자) 비하와 조롱, 비참의 전시, 관종 ③ 실존적/내적 ‘자존감’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팔 때는 ‘공감’이나 ‘연민’, ‘연대’나 ‘인류애’ 같은 말로 포장하기도 쉬웠다. 상업적으로 포장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어필할 수 있었다. 동의하지 않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쉬웠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고통을 사회에 알리고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면 비난을 피해갈 수 있었다.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 타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자신에 대한 윤리적 면피를 할 수 있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마련할 수 있었다. / 고통을 겪는 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자신이 고통에 차서 절규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던 사람들이 이런 시장에서 원하든 방식대로 이야기했을 때 주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고통을 파는 이야기의 포맷은 피해자의 피해자됨과 비참함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포르노’처럼 보여줬다. ... 그렇지 않으면 인정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끌 수 없었다. ... 관심을 끌기 위한 경쟁이 격화될수록 더욱더 선정주의가 판을 쳤다. 자신의 고통을 ‘쎄게’ 이야기해야 했고, 그럴 때만이 그 피해를 극복하고 있는 ‘쎈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다. ‘피해자’와 ‘영웅’이 선정주의에 결합한 것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이 되었다. (148-150)

믿는 자가 가장 어리석은 자이며 확신하는 자가 가장 바보 같은 자가 된 세상이다. 그렇기에 믿지 않아야 상처를 덜 받는다. 신뢰는 서로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 되었다. (161)

조롱과 폭로를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비참의 전시’를 통해 재미를 유발하려고 한다. 타인의 인격과 존엄을 파괴하고 그 비참을 전시하는 것을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사람, 이들을 우리 사회는 ‘관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183)

관종은 어떻게 해서든 다른 사람의 주목을 끌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 이를 위해서는 자기가 욕먹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 정치 혐오가 만성화된 사회에서는 정의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다른 사람의 주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전략이 된다. 또한 주목은 돈이 된다. ... 사실 관종들이 바라는 것은 온 세상을 동물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184-188)

타인의 고통을 땔감 삼아 자신의 기분을 고양하는 것이다. ... 몰락의 속도가 빠를수록, 추락의 깊이가 깊을수록 그것을 당하는 사람은 더 참혹하게 비참해진다. (189-190)

사회는 민낯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 아니다. 사회라는 공간에 나갈 때 우리 모두는 어빙 고프먼의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 놀이를 한다. 가면을 쓰고 만나는 것이다. 그 가면 뒤의 민얼굴이 어떠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에 충실한가, 아닌가 여부다. 역할에 충실하다면 우리는 그의 민낯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무관심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에서 만나는 시민들이 지켜야 하는 예의다. 이런 점에서 사회 가운데서 상호작용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가면을 쓴 존재, 즉 위선자다. / 관종들은 이런 위선을 비웃고 역겨워한다. 그들은 대중의 주목을 원하지만 동시에 대중을 경멸한다. ... 관종들은 조금이라도 부도덕한 일이 벌어지면 총출동하여 그 대상을 발가벗기고 조리돌린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와 그 일의 전후 사정 등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이며, 그 일로 어떤 사람의 위선이 벗겨지고 추악한 실체가 드러났다는 사실 자체다. 그래서 관종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건의 흐름이라는 ‘맥락’이 아니라 단편 단편에서 사람들의 위선과 추악함이 드러나는 감추어진 ‘팩트’다. 팩트는 ‘사실’보다는 ‘단편’이라는 뜻에 훨씬 가깝다. ... 이들은 위선을 역겨워하고 그것을 발가벗기는 데서 통쾌함을 얻으면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위악적으로 군다. 위악이 위선보다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 즉 민낯에 더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이 파괴하고 싶은 것은 가면 놀이를 하는 무대인 ‘사회’다. (191-193)

중국에서는 ‘신상털이’를 ‘인육 사냥’이라고 부른다. (195)

더 비참하고 엽기적인 것으로 만들어 전시해야 자기의 명망과 등급이 올라간다. 타인의 고통은 곧 관종의 명망이다. (198)

고통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겐 절대적인 것이다. 세계의 붕괴와 그 세계를 다시 지을 수 있는 언어의 박탈로 인한 고통이라는 점에서 각자의 고통은 개별적이고 고립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절대적이다. 고통은 그 수준이나 정도를 가늠하여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선정주의적 언론과 인터넷 게시판과 같은 공론 플랫폼은 각각의 고통의 절대성을 섬세하게 살피지 않는다. 그런 고통은 널리고 널렸다. ... 고통 간에 경쟁하게 되고 소위 말하는 고통의 올림픽이 벌어진다. 고통이 고통을 밀쳐낸다. 자신의 고통이 다른 고통에 비해 절대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더욱더 자신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한다. ... 내 사연에 담긴 글에 ‘좋아요’가 몇 개 달렸는지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206-208)

고통에 대한 언어는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처절한 자각으로부터 나온다. 말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분할하게 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도 말할 수 있게 된다. 언어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표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앞에서 침묵하게 하고 그가 당한 고통의 절대성에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게 한다. 관종 사회는 고통 받는 사람의 존엄이 존중되는 바로 이 길을 봉쇄했다. (209)

망신과 몰락, 비참의 전시, 비참 간의 경쟁. 이 모든 것이 이 시대 공론의 공간에서는 가장 즐거운 구경거리가 되었다. 어디서 진흙 구덩이 싸움이 났다고 하면 팝콘을 들고 먹으며 구경한다. 이른바 ‘팝콘각’이다. ... 공론장은 사실상 싸움을 구경하는 콜로세움이 되었다. 콜로세움의 본질은 검투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검투를 구경하는 극장이다. 가장 안전한 거리에서 가장 비참하고 끔찍한 것을 구경하며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극장이다. 이 시대의 공론 공간 역시 이런 극장이다. ... 그 결과 관심을 끌어 존재감을 구하려고 하는 이 콜로세움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혐오다. ... 이 혐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콜로세움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 그 자리에 있으면서 노예 상인과 옆에 선 다른 관객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밀쳐내고 있는 고통의 당사자들이 펼치는 참혹함을 보면서 인간을 혐오하지 않을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인간에 대한 연민을 보호하기 위해 이들이 택한 것은 ‘사라지는 것’이다.


3. 고통의 윤리학 - 고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곁에 대하여

여기에 또 다른 괴로운 사람들이 있다. 이런 고통의 당사자 옆에 있는 사람들이다. (226)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그 자리는 당사자가 아니라 당사자의 ‘곁’이다. 고통은 고통을 겪는 이가 아니라 그 곁에 있는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고통을 겪는 이가 고통의 절대성으로 인해 응답을 바라지 않는 말, 상호성을 제거한 일방적인 말만 함으로써 말을 파괴한다면, 응답을 기대하는 말, 응답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은, 고통의 당사자가 아닌 그 곁에 서 있는 이다. ... 이 말은 당사자의 ‘위치’에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 당사자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 고통의 당사자가 자신의 곁에 서는 것, 그것이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말은 곁의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233-234)

* 그렇다면 고통의 당사자는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곁에 설 수 있는가? 절규하는 자에서 말하는 자로 바뀔 수 있는가? ... 바로 글이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을 통해 사람은 고통 받는 타인의 곁뿐만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자기의 곁에 설 수 있게 되었다. ... 자기 자신의 곁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세계를 구축하게 했다. /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에 ‘자기의 복수성’을 구축하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에 의해 외부에서 폭파된 세계를 내면에 구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통의 당사자에게 글쓰기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자기에 대해 해명하고 자기를 납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34-235)

말과 글의 자리는 그라운드 제로가 아니라 ‘곁’이었다. 곁에서 말과 글이 나오고, 말과 글을 통해 곁이 생긴다. 말과 글을 만들고 또 그 말과 글을 만들 수 있는 곁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동행’이다. 글을 통해 사람은 자기 자신과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 (238)

걷기가 주는 것과 같은 매개와 완충, 머무름과 벗어남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지는 세계만이 아니라 그 관계가 담겨 있는 바깥이라는 세계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관계 안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이처럼 타자의 매개를 통해 완충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258-259)

* (각자의) 고통은 외로움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 양식임을 알게 한다. 고통에 처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 ... 그렇게 타인과 세계에 가닿게 한다. ... 그 원인도 정체도 알 수 없는 고통을 각자가 어떻게 겪어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 모두는 얼마나 외로운 존재로 고군분투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도 너도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반가웠다. ... 버림받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고통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기쁘게 나눌 수 있었다. 내 이야기가 상대의 이야기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반기고 이어졌다. 상대의 이야기에 내 이야기가 보태지고, 그 이야기와 이야기가 서로를 격려하며 새로운 이야기로 샘솟았다.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공허한 게 아니라 기쁜 일이라는 것을 알게 했다. / 고통 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지만, 고통을 겪으며 홀로 고군분투한 이야기, 그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와 상대의 이야기를 환대했다. 비로소 언어가 세계를 짓는 언어로 귀환한 것이다. (260-263)

사물과 사람, 사태를 보는 입체적인 이야기는 배척받아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는 선악 이분법이 매우 또렷한 글들이 채워갔다. 해상도는 떨어지고 색감만 자극적으로 올라갔다. 공론장에 선 사람들은 이쪽과 저쪽으로 줄을 서야 했다. 줄을 서지 않으면 가차 없이 비난받고 단죄되었다. 동행의 언어는 사라지고 동원의 언어만 남았다. (275)

* 말과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상황을 못 견디고 제일 먼저 사라졌다. ... 논란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글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자기를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사람들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 읽기와 쓰기가 만개하던 시대에 교양을 쌓으며 언어의 해상도를 높이던 사람들이 글쓰기를 두려워한 것은 세간의 평판 때문만이 아니었다. 자기의 글이 혹시라도 사람들의 언어에 대한 해상도를 높이기는커녕 방해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어려웠던 것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세상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 이 글이 정말 세상에 필요한 글인가? 그렇지 않다면 글을 왜 써야 하는가? ... 사람들은 자기 글과 책이 나왔을 때 세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고민하기 전에 이 글이 없더라도 세상은 별 탈이 없는지를 물었다. 자기가 사라지더라도 세상이 별 탈 없다는 것,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 내가 사라지더라도 세상이 별 탈 없다면 사람들은 좀 더 신중해진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굳이 할 필요는 없으며, 굳이 한 그 일이 세상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신중해진다. 그 일이 세상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신중해진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로부터 세상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신중한 사람들은 자신의 말과 글로부터 타자와 세상을 보좌했다. 그러기 위해 자기가 존재해야만 하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가 사라지고 없는 세상을 상상했다. 그 세상이 상상되어야 자신의 말과 글, 그리고 행위에 신중해질 수 있었다. ... 위협적인 우리로부터 타자를, 그리고 세상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금기들이다. / 자신의 위험함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좌하는 길이다. 글쓰기를 두려워한 것도 이처럼 세상을 보좌하기 위함이었다. (276-278)

다른 이와 동행하며 세상을 보좌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신중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글쓰기는 다시 가능할 것인가? 신중함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보좌하기 위함이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관심, 즉 주목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를 해명하는 데 집중한 바로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세상은 보호받으며 동시에 새로 지어질 수 있다. 이 시대에 사라짐의 기술을 대체해야 하는 것은 신중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기술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중한 드러냄이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일 테다.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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